팩트풀니스 - 우리가 세상을 오해하는 10가지 이유와 세상이 생각보다 괜찮은 이유
한스 로슬링.올라 로슬링.안나 로슬링 뢴룬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팩트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진실이 중요하다. 전경련이 이 책을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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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 대한 오해









                                                                                                    누구나 독심술사가 될 수 있다. 궁예의 후예인 " 웅예 페루애 선생님 " 도 꽤나 훌륭한 관심법의 소유자여서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의 성격쯤은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지금부터 당신에 대한 성격을 나열할 테니 이 글이 자신의 성격과 일치한다면 좋아요-버튼을 눌러주시라.


"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좋아하고 존경하기를 바라는 큰 욕구를 갖고 있으며 때론 자신에게 비판적인 경향도 있다. 그리고 다소 성격적 결함을 갖고 있는 반면에 일반적으로 그것들을 상쇄시킬 수 있는 잠재적 능력도 있다. 당신은 성적 조절에 있어서 어느 정도 문제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외면적으로는 그것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인내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내면적으로 불안정한 경향이 있다. 가끔 당신은 당신이 옳은 결정을 내렸는지 또는 옳은 것을 했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심을 품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변화와 다양성을 즐기며 구속과 규제로 갇히게 되면 불만스러운 마음을 갖는다. 자신이 독립적인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사람임을 자랑스러워하는 당신은 납득할 만한 증거가 없는 다른 사람의 말은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다. 때로는 당신은 외향적이고 친절하며 사교적이지만, 때로는 당신은 내향적이고 경계하며 내성적이다. 당신의 염원들 중 일부는 매우 비현실적인 경향이 있고 안전은 당신의 삶에 있어서 주요한 목표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 



윗글을 읽은 당신은 속으로 이렇게 궁시렁거릴 것이다. 맙소사, 웅예 페루애 선생이여 ! 가시는 길에 영광 있으라 ~  보았느냐 ? 나는 지금 당신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 위에 나열한 지적질이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까닭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 성격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본적 욕구인 인정 욕구과 안정 욕구를 두루뭉실하게 풀면 되는 것이다. 불알 없는 남자 없듯이 불안 없는 인간 없고, 인정머리 없는 인간은 있어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 없는 인간 없다. 사주, 타로, 점성술 따위가 바로 이런 방식으로 상대방 성격을 맞춘다. 이러한 현상을 바넘 효과'라고 부른다. ABO 혈액형 성격 테스트도 얼토당토목금토한 엉터리 썰에 속한다. 


혈액형 성격 테스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B형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다. B형은 혈액형 중에서 가장 나쁜 피에 속한다. 한마디로 더러운 피'다. 이 편견의 시작은 히틀러'다. 





그는 유태인이 유럽인보다 열등한 인종이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혈액형을 이용했다.  위 혈액형 분포 도표에서 나타나듯이 유럽인은 대부분 혈액형이 O형과 A형이다.  비율로 따지면 80%가 넘는다.  스위스 같은 경우는 90%에 육박한다.  반면 유대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은 B형의 분포가 유럽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히틀러식 우생학은 B형은 나쁜 피'라는 결론을 내렸다.  B형은 범죄자가 많고, 머리가 나쁘고, 성격이 사납다고 주장한 것이다.  나치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독일 아리아 혈통이 우수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혈액형을 이용한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엉터리이다. 


페루 인디언(원주민)과 브라질 보로로 원주민은 모두 O형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가장 우수한 혈통을 가진 민족은 페루와 브라질 원주민인 셈이다. 또한 페루 인디언과 브라질 보로로 원주민의 성격이 가지각색인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우생학 외에도 아이큐, 골상학, 두개계측학은 과학적 통계를 이용하여 인종, 계급, 성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은 모두 다 알고 있다. 이처럼 과학적 통계를 바탕으로 사회학적 결론에 도달하려는 시도는 매우 무의미하다. 내가 << 팩트풀니스 >> 라는 책을 읽고 두개골이 열려서 오늘도 이 짓을 하는 것을 보면 이 책은 나쁜 책이 아니라 사악한 책이다. 


저자는 팩트에 충실하라 : FACTFULNESS 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곧 진실이라고 믿는 맹목'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다1).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제목은 FACTFOLLESES 가 더 잘 어울린다. 다윈은 << 비글호 항해기 >> 에서 노예제도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 " 





​                          

1)   윤봉길은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시라카와 대장과 노무라 중장을 향해 도시락 폭탄을 던진다. 이 일로 인해 시라카와 대장은 죽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하며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한다. 여기서 팩트는 폭탄 테러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테러인가 ? 진실보다 사실에 충실하게 될 때 벌어지게 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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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7-17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인들이 혈액형을 인종, 성격을 분류하는 것을 좋아했어요. 제국주의와 우생학이 만나서생긴 최악의 유사이론이죠. 우리나라에 한때 인기를 끈 혈액형 궁합이라든가 혈핵형 성격설도 일제 식민지 문화의 잔재라고 볼 수 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07-17 13:56   좋아요 0 | URL
혈액형 테스트가 한국과 일본만 있는 썰이라고 하죠 ? 과학적 상식에 조금이라도 이해 가능하다면 이게 정말 황당하다는 걸 아실 겁니다. b형 나쁜 피는 유럽이 아시아를 식민지하기 위한 썰이었는데, 참 공교롭게도 일본 사람이 이것을 그대로 받아서 대중화시켰으니....
 
















                              


F A C T F O O L E S S E S  :










사실과 진실



                                                                                                       내가 아는 사람(A씨)은 음식을 싱겁게 먹는다. 그는 라면 1개를  끓일 때 2인분 분량의 물을 붓고는 라면 스프를 1/2만 넣는다. 다른 사람은 그가 끓인 라면은 싱거워서 한두 번 젓가락질하다가 이내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사람들은 그를 싱거운 사람이라 부른다. 허어, 이 싱거운 사람 보게나 ! 그런데 그는 한 끼를 먹을 때 라면 10봉지를 먹는 대식가'다. 그는 싱겁게 먹는 사람일까, 아니면 나트륨을 과다 섭취하는 사람일까 ?  라면 스프 1개가 나트륨 1일 섭취 제한 권고량2000mg을 웃돈다는 점에서 그는 한 끼 식사만으로도 1일 섭취 권고량보다 5배 많은 나트륨을 섭취하는 사람이다. 


여기서, < 팩트 = 진실 > 이라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각론으로 보자면 A씨는 라면 1개를 끓일 때 라면 스프를 1/2만 넣기( = 팩트)에 A씨는 음식을 싱겁게 먹는다(=진실). 하지만 총론으로 보자면 A씨는 한 끼에 라면 10봉지를 먹기에 나트륨을 과다 섭취한다( = 진실). 즉, 팩트와 진실은 반드시 동일한 것이 아니다(팩트 ≠ 진실). 그렇다면 과거에 비해 현대는 풍부한 곡물 생산으로 인해 굶주림이 감소했다는 수치를 통해 세계는 더 좋은 쪽으로 진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  반대로 세계는 더 나쁜 방향으로 흐른다고 경고하는 것은 가짜 뉴스일까 ?


현재, 세계 인구는 77억 명이지만 식량 생산량은 120억 명이 먹고도 남을 식량을 과잉 생산하고 있다. 수치만 놓고 보면 굶어서 죽는 인구는 없어야 하지만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9명 중 1명은 극심한 기아에 허덕이고 있고, 10살도 안된 아이들은 5초에 한 명씩 죽어가고 있다. 지금 당신이 내 문장을 읽느라 소비한 그 시간에도 어디에선가 한 아이가 굶어서 죽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놀라서 깊은 한숨을 쉬며 정말 ? _ 이라며 스스로 되묻는 사이에 또 한 아이가 굶어서 죽었다. 그렇다면 과잉 생산된 식량은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 과잉 생산된 식량에서 상당수는 글로벌 식량 기업이 곡물 가격 하락을 우려하여 밤에 몰래 바다에 버린다. 


그리고 전세계 음식물의 1/3도 버려지고 있다. 유통 기한은 지났으나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식품은 노숙자나 저소득층 가정에 분배되지 않고 전량 소각된다. 식품 회사는 회사 이미지를 고려하여 재고 사실을 은폐한다. 과거에는 먹을 식량이 없어서 1000명이 굶어죽었다면 지금은 인구 대비 2배에 가까운 식량을 생산하고는 있지만, 특정 계급의 부를 축적하기 위해 식량은 고의적으로 버려진 끝에, 100명이 굶어죽는다.  당신이 보기에는 어느 쪽이 더 잔인한 결과인가 ?  다윈은 << 비글호 항해기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 " 이 책의 저자가 새겨들어야 할 다윈의 말이다. 이 책은 현대인이여, 옛날에 비하면 굶어죽는 일은 없으니 불만 따윈 가지지 말고 매사에 감사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하루 수입 2달러 벌이는 중간 소득 계급이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입장을 보고 있노라면,  최저임금 시급 만 원'을 놓고 줄다리기 하는 한국 노동자의 어마어마한 탐욕이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이다. 전경련이 좋아할 내용이어서 누가 내게 이 책에 대한 20자 감상평을 작성하라면 이렇게 적겠다. " 전경련이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 "  아닌 게 아니라 현대 정몽규 회장이 이 책을 읽고 크게 감읍하여 신입 사원 전원에게 무료로 책을 배포했다고 한다. 그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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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기 좋은 이름
김애란 지음 / 열림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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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사를 위한 변명








누구는 부사(副詞)를 이해하고 누구는 부사를 오해한다. 혹은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해하고 있는 이도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스티븐 킹은 "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뒤덮여 있다 " 고 강조한다. 부사를 많이 사용하면 문장이 촌스러워진다는 경고'이다.  그는 << 유혹하는 글쓰기 >> 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수많은 부사들로 뒤덮여 있다고 나는 믿는다. 지붕 위에서 목청껏 외치라고 해도 기꺼이 하겠다. 달리 표현하면 부사는 민들레와 같다. 잔디밭에 한 포기가 돋아나면 제법 예쁘고 독특해 보인다. 그러나 이때 곧바로 뽑아버리지 않으면 이튼날엔 다섯 포기가 돋아나고...... 그 다음날엔 50포기가 돋아나고...... 그러다 보면 여러분의 잔디밭은 철저하게, 완벽하게, 어지럽게 민들레로 뒤덮이고 만다. 그때쯤이면 그 모두가 실제 그대로 흔해빠진 잡초로 보일 뿐이지만 그때는 이미ㅡ으헉!!ㅡ 늦어버린 것이다1).


- 유혹하는 글쓰기 중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 (민들레가) 잔디밭에 한 포기가 돋아나면 제법 예쁘고 독특해 보인다 " 는 고백이다. 그러니까 스티븐 킹은 무조건 부사를 뜯어버려 _ 라고 으르렁거리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는 투덜대다가 끝에 가서는 이렇게 마무리한다. " 뭐..... 나도 대개는 부사를 너그럽게 보아줄 수 있는 사람이다 ! "  반면에 철학자 김영민은 부사를 매우 좋아한다. 그는 << 보행 >> 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부사는, 우선, 나머지 문장 전체와 독립해 있으면서도, 이를테면 원격 조종으로써 일거에 그 문장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부사는 일종의 메타어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 것이다. 


이 같은 모습은, 내가 지식인의 입지로서 늘 강조해온 ‘ 독립하되 고립되지 않는다 ’는 형국과 너무나 유사해서 사뭇 유쾌하다.  부사는 기존의 문장과 독립해 있으면서도, 그 문장 전체의 기반을 흔들 수 있는 메타적 연계를 유지한다. " 나는 부사라는 녀석에 대해 양가적 입장이다.  계륵 같다고나 할까 ?  내가 내린 결론은, 김영민 특유의 문장 스타일을 훔쳐서 말하자면,  부사를 사용하되 남용하지는 말자. 대체로 부사가 문장을 촌스럽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 ㅡ 좋다 " 앞에 강조와 허세가 가미된 부사가 투입되면 문장은 확실히 촌스러운 모양이 된다. 


너무 좋다, 정말로 좋다, 참 좋다, 가장 좋다, 굉장히 좋다, 엄청 좋다, 졸라 / 조낸 / 조또 / 좆나 좋다 따위의 문장은 요리로 치자면  화학조미료 미원, 쇠고기 다시다, 라면 스프, 향신료 따위로 감칠맛을 뽐낸 요리다. 맹물에 과립형 알갱이 한 숟가락 넣었을 뿐인데...... 그래, 이 맛이야 ~             만약에 당신이 쓴 문장이 싱싱하다고 자부한다면 굳이 화학 조미료나 마늘, 생강, 파 따위로 맛을 더할 필요는 없다. 싱싱한 꽃등심은 양념 없이 불에 구워 먹는 것이 최상이다. 반대로 품질이 떨어지는 부위는 주로 간장, 고추장 따위의 강한 양념으로 요리한다. 주재료 본연의 맛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다. 


문장도 마찬가지 아닐까 ?  강도와 빈도를 강조하는 부사를 남용하는 문장은 문장의 빈곤한 내용을 감추기 위한 수단'이다. 하지만 부사가 모두 마늘이나 생강처럼 강한 것은 아니다. 부드러운 부사'도 많다. 예를 들어 " 넌지시 - " , " 살포시 - " , " 사뿐 - " 따위는 문장 전체를 부드럽게 만든다. 억양이 부드러운, 소극적이며 정적인 부사는 향기로운 허브 같다. " 즈려밟다 " 는 문장과 " 사뿐이 즈려밟다 " 라는 문장은 서로 다른 문장'이다. 한국인에게 " 사뿐이 " 가 빠진 " 즈려밟다 " 라는 문장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스티븐 킹의 말에 대하여 나는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할 수 없다. 


김애란도 부사의 쓰임에 대하여 고민을 한 모양이다. 일품 요리사는 화학 조미료로 맛을 내는 것을 부끄러워하듯이 일품 문장가는 부사의 사용을 부끄러워한다. 문장 강화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면 동의할 것이다. 부사는 저잣거리 입말에서나 쓰는 품사라고 말이다. 산문집 << 잊기 좋은 여름 >> 에서 김애란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실로 오래 전부터 훌륭한 문장가들은 우리에게 부사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해 왔다. 나는 부사가 걸린다. 부사가 낭비된 걸 보면, 나도 모르게 그 문장을 고쳐 읽게 된다. 한 번은 문장 그대로, 또 한 번은 부사를 없애고. 그러고는 언제나 나중 것이 더 좋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 문장 안에 부사가 있었다는 걸, 부사가 없는 자리를 보며 기억한다. 부사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 모른다. 나는 부사- 하고 발음해본다. 그 이름, 어감 한 번 지루하다. 부사는 가볍다. 부사는 크다. 부사는 단순하다. 부사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좀, 이상한 품사 같다.  나는 부사를 쓴다. 나는 부사를 지운다. 나는 부사가 걸리고, 부사가 창피하다. 나는 부사에 주의한다. 나는 부사가 불편하다. …아무래도 나는, 부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손가락을 모으며 이 말을 아주 조그맣게 한다. 글 짓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부사를 '꽤'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매우' 좋아하며, 절대, 제일, 가장, 과연, 진짜, 왠지, 퍽, 무척, 좋아한다. 등단 이후로, 한 문장 안에 이렇게 많은 부사를 마음껏 써보기는 처음이다. 기분이 '참' 좋다.

- 산문집 << 잊기 좋은 여름 >> , 부사와 인사 中

 


김애란은 부사에 대하여 오만가지 감정을 나열한다. 부사는 동사처럼 활기차지도 않고 명사처럼 명료하지도 않지만, 그는 부사라는 품사에서 무능하고 과장이 심한 성품을 읽지만 안간힘이 있어서 미워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이런 고백은 그의 첫 번째 소설집 << 달려라 아비 >> 를 관통하는 정서'이다. 그런 점에서 << 달려라 아비 >> 에 등장하는 아비는 부사를 닮았다.



부사는 그게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저것! 저것!' 한다. 그것은 설명보다 충동에 가깝고, 힘이 세지만 섬세하지 못하다. 부사는 동사처럼 활기차지도, 명사처럼 명료하지도 않다. 그것은 실천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만날 큰소리만 치고, 툭하면 집을 나가는 막내 삼촌을 닮았다. 부사는 과장한다. 부사는 무능하다. 부사는 명사나 동사처럼 제 이름에 받침이 없다. 그래서 가볍게 날아오르고, 큰 선을 그린 뒤 '그게 뭔지 알 수 없지만 바로 그거'라며 시치미를 뗀다. 부사 안에는 쉽게 설명해버리는 안이함과 함께,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안간힘이 들어 있다. '참', '퍽', '아주' 최선을 다하지만 답답하고 어쩔 수 없다는 느낌. 말(言)이 말(言)을 바라보는 느낌. 부사는 마음을 닮은 품사이다. 나는 부사의 다급함이 좋다. 그것은 무언가를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에서부터 출발한다. 계속 지울 부사를, 자꾸 쓰게 되는 건 모두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김애란이 부사를 자주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아마도 그녀는 헤밍웨이의 말을 경청했을 것이다. 헤밍웨이는 이렇게 말했다. " 사랑하는 것들을 죽여야 한다. " 옳은 말이다. 나도 부사를 참, 정말, 퍽, 아주, 꽤나, 많이, 너무 좋아한다. 얼씨구 ~           옛날에는 국광이나 아오리를 최고로 쳤으나 이제는 무조건 부사'다. 부사는 쓰지 않고 달며 상큼하다. 사과 하면 역시 부사'다.

  






​                              



1) 나는 가끔 스티븐 킹 할베가 저런 비유를 사용하면 미치는 경향이 있다. 찰지다, 찰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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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07-14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잊기 좋은 이름, 짱 좋다 ! 올 여름은 잊기 좋은 이름으로 !

수다맨 2019-07-15 14: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부사가 많이 들어간 문장을 쓰는 작가들을 좋아하지 않는데 예외가 있다면 이문구와 필립 로스 같은 문인들입니다. 이런 작가들은 간결체를 거부하면서 문장 단위에 토속어를 전격 배치(이문구)하거나 복문과 중문을 장황하게 구사(필립 로스)하는데 단순한 정보 전달에 주력하기보다는 말 자체가 가지고 있는 운율과 정서를 최대치로 끌어올리면서, 인물과 풍경의 내/외면을 치밀하고 섬세하게 형상화하는 데 목적을 두는 것 같더군요.
다만 이런 사람들이야 대문장가들이고, 문장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다면 스티븐 킹의 조언을 우선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07-15 15:45   좋아요 0 | URL
그들의 특징은 구어체 특유의 맛깔을 잘 담는 작가들이잖아요. 고수이기에 문장이 빛이 나는 것이지 그냥 적당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부사 남발하면 죽음이죠.. ㅎㅎ
 



불매운동은 감정적 대응인가 ? 









 


- 저널리즘 토크쇼 J  예고편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사회'다. 돈(資)이 바탕(本)이 되는 사회에서 소비자는 주권으로서 주체'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국민(民)이 주인(主)이 되는 민주주의보다는 자본주의에 가깝다. 그렇기에 경제 유형, 산업 구조, 생산 유형 따위를 결정하는 최종적 권한은 소비자에게 있다. 정치(가)는 소비자의 욕망(needs)을 읽고 그에 맞는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소비 행위와 정치 행위'는 불가분의 관계인 셈이다. 일본의 경제 보복이 정치 보복인 이유'이고 이에 대응하는 한국의 불매 운동도 정치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소비 행위에서 정치성을 표면 위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바로 불매 운동'이다. 


한국의 언론-들이 이 사건을 다루면서 쏟아냈던 기사와 보도 자료를 접하면서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은 황국신민-서사'이다.  조중동은 불매 운동을 " 감정적 대응 " 으로 통일한다.  이럴 때일수록 이성적 사고와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잠자는 사자 코털을 건드려서 좋을 게 없다는 태도다.  이 태도는 일본을 사자의 위치에 고정하고 나서 한국을 고양이나 쥐 따위로 보는 시각'이다. 조중동의 포지셔닝이 굴종에 가깝다 보니 애티튜드도 비굴할 수밖에 없다. 내가 보기엔 그런 태도야말로 감정적 접근이다. 소비자가 소비자 주권의 일환으로 일본 제품을 불매하는 것이 과연 감정적 태도라고 볼 수 있을까(오히려 분수에 맞지 않는 과소비가 감정적 소비 형태'가 아닐까)?  


한국 언론은 지금 대단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착각이 황국 신민 서사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감정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쪽은 일본'이다. 한국이 일본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는 현상을 반일 감정 (反日感情, 영어: Anti-Japan sentiment ) 이라고 한다면 일본이 한국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는 현상은 반한 감정'이다. 그런데 일본은 반한(反韓 ㅡ)이라는 표현 대신 혐한(嫌韓ㅡ)이라고 부른다. 어떤 대상을 " 반대하는 것 " 과 " 혐오하는 것 " 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전자는 판단에 기초한 것이고 후자는 정서에 기초한 것이다.  혐오라는 정서는 주로 대상을 열등한 존재로 인식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면, 고위 공무원이 국민을 개 돼지로 폄하할 때의 감정이 바로 혐오'이다. 일본이 반한(Anti-Japan sentiment)이라는 표현 대신 혐한(hate speech)'이라고 부르는 것은 한국인을 열등한 인종으로 인식하는 인종차별적 언어 표현인 셈이다. 싸구리 센티멘탈을 비판하기에 앞서 헤이트 스피치를 먼저 비난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  묻고 싶다. 혐한에 반대하는 반일이 감정적 대응인가 ?  국민을 계몽해야 될 대상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개몽(ㅡ夢)이다. 나랏 말쌈이 듕국과 달라 서로 사맛디 아니한 이래로 한국인의 가방 끈은 가장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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