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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친구
곽경택 감독, 유오성 외 출연 / 컨텐트존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어수선 32호
그라믄, 여가 북(北)이가 ?
" 놔라 !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단말이냐 ? "
- 이수일과 심순애 中


나중에 그녀가 고백한 바에 따르자면 : 나를 보자마자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녀는 대학 진학에 실패해서 입시 학원에 다녔고, 나는 그 근처 영화감상실'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을 했다. 당시, 나는 거친 야생마 같았다. 머리는 허리까지 길러서 묶고 다녔고, 니콘 카메라 가방은 온통 뜻을 알 수 없는 낙서들로 채웠다. 그리고 무명 T 에는 유성 매직펜으로 < 그해 가을 > 이라는 이성복 詩를 필사해서 써넣었다. "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입이 열 개라고 할 말 없어. " 내가 나타나면 동네 사람 중 열에 아홉은 수근덕거렸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롹커'라는 소문도 있었고, 전위예술가라는 소리도 흘러다녔다. 또 누군가는 글을 쓰는 작가라고 지레짐작하는 이도 있었다. 우우, 하지 마라. 지금 생각하면 개폼'이었지만 그때는 나름 진지했다. 세상이 너무 네모반듯해서 " 아방가르드 " 하며 " 아스트랄的 " 삶을 살고 싶었다고나 할까 ?
나는 자주 입방아에 올랐다. 헤어커커 미용실 주인도, 후암동 철물점 아저씨도, 순희네 식당 아줌마도, 대성 헌책방 김씨도 내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나에 대한 소문은 학원으로도 흘러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일하는 곳을 찾아왔다. 방긋 !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웃었다. 이제 갓 스무살이 지난 앳된 아가씨이니 꽃보다 예뻐 보였다. 그녀는 대뜸 영화 한 편을 추천해 달라고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골라준 영화는 낸시 사보카 감독이 만든 <<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 >> 이었다. 주연은 리버 피닉스'였다. 모든 사항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여자들은 모두 다 리버 피릭스를 사랑하니까, 리버 피닉스는 진리이니까. 여자는 영화가 끝나고 한참 있다 나왔다. 한쪽 뺨이 발그레해진 것을 보면 영화를 보다가 잠을 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말했다. " 영화 정말 재미있어요 ! "
그날 이후, 그녀는 매일 와서 영화 한 편을 보았고 나는 매일 영화 한 편을 추천했다. 내가 추천한 목록은 점점 심각한 영화 쪽으로 기울어졌고, 그럴수록 그녀는 비디오방을 나올 때마다 한쪽 뺨은 항상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영화가 끝나자 여자는 평소와는 달리 인사도 없이 황급히 떠났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객실 정리를 하기 위해 그녀가 머물렀던 객실에 들어갔다. 의자 위에는 작은 선물 상자와 함께 쪽지 편지가 있었다. 달달한 사랑 고백 편지였다. 그날 우리는 술을 마셨다.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아, 아카시아 향기. 한동안 그녀는 나를 찾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겨울이 왔고, 대입 수능일이 다가왔고, 학원 수강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잠시 그녀가 그리워지기 시작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몇 년이 흘렀을까 ?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물어, 물어, 물어서 용케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했다. 전화를 타고 전해진 목소리는 힘이 없어 보였다. 아픈 목소리였다.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그럴수록 간절한 마음. 보고 싶어요. 나를 위해 오실 수 있나요 ? 그녀가 말했다. 이유를 묻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 ! 다음날, 그녀가 알려준 주소를 찾아 가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내내 초조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내가 오기를 기다리리라. 내가 도착한 곳은 외진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서 그녀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짧은 인사와 눈짓. 그녀가 나를 안내했다. 내가 간 곳은 다단계 회사 사무실이었다 ! 작은 사무실 안에는 나와 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백여 명 정도 모여 있었다. 그곳은 정글 자본주의의 성소'였다. 다단계 최상위 임원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장장 4시간에 걸친 연설을 시작했다.
그들은 계급을 다이아몬드로 나눴다. 화이트, 레드, 블루. 최상위 계급은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그 옆에는 그녀가 있었다. 진행 요원이었다. 그는 자기 통장을 보여주며 매달 천만 원이 입금이 된다고 했다. 평생, 앞으로 평생, 지구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평생 ! 와, 와와 !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 건달은 양심은 팔이도 쪽은 안 판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양심도 팔고 쪽도 팝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 " 연설이 끝나자 심화 학습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저녁 식사 타임이 왔다. 나는 냅다 그녀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어느새 뛰어와 내 팔을 붙잡았다. 옥신각신 다투다가 화가 난 그녀가 말했다. " 우리 사이에 그럴 수 있어 ? " 이 말은 마치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녀는 성공을 위해 양심도 팔고, 쪽도 팔고, 사랑도 팔았다. 정나미가 떨어졌다. 결과적으로 그날 그녀는 나를 포섭하지 못했다. 몇 달 후, 다단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학생을 집중 조명하는 시사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좁은 방에 갇혀서 남녀가 숙식을 해결하며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모든 연락망을 돌리는 그들을 보게 되었다. 그녀, 생각이 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 늘 한쪽 뺨만 붉어진 얼굴, 달달한 편지, 한 번의 키스. 영화 << 친구 >> 를 볼 때에도 그녀 생각이 났다. 우리 사이에 그럴 수 있어 ? 영화 << 친구 >> 를 10자평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ㅣ 우리가 남이가 ? 다. 우리가 남이냐, 라는 질문은 비단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만 오가는 상투어는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는 국민을 상대로 " 우리가 남이냐 ? " 고 묻는다. 파시즘의 시작은 언제나 " 우리가 남이냐 ? "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되묻고 싶다. " 시발... 그라믄 여가 北이가 ? " 속지 말자. 누군가가 당신에게 " 우리가 남이냐? " 며 의리와 정분을 강조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명심하자. 우리는 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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