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듯한 말 한마디

 

 

 

 

" 알겠어요 ?  당신의 혀가 누나를 임신시켰다니까 ! "

ㅡ 올드보이 中

 



가정집에서 찌개'나 국거리'에 들어갈 파는 대부분 어슷썰기'를 한다. 왜 어슷썰기를 하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래 왔기 때문이다. 한석봉 어머니가 가래떡을 반듯반듯 통썰기 하면 이상하잖아 ! 하여튼, 요리에 취미'가 없는 사내들도 모처럼 피서지'에서 요리'를 할 때면 대부분 어슷하게 썬다. 그런데 곰탕'이나 설렁탕'을 파는 식당'에 가면 영락없이 십원짜리 동전 모양처럼 생긴 파( 통썰기 = 총총썰기 ) 가 나온다. 대파'를 한번이라도 썰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신체구조상 팔은 삐딱한 각도로 어슷썰기'를 해야지 편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일반 가정에서야 대파 한 뿌리를 써는 일은 일도 아니겠지만 하루 종일 대량으로 대파를 썰어야 하는 식당에서는 왜 굳이 힘들게 총총썰기를 할까 ? 궁금증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장고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놀랍게도 맑스와 포드였다. << 생활의 달인 >> 이라는 인기 프로그램이 있다. 오랜 숙련으로 다듬어진 신기에 가까운 기술(자)를 찾아 소개하는 프로그램인데, 방송을 보다 보면 " 숙련 " 보다는 " 수련 " 에 가까운 감각과 몸짓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들은 도를 닦은 것이다. 이 방송에서 대파 썰기 달인이 나온 적 있다. 얼마나 빠른 시간'에 대파'를 써는가'가 그 달인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그가 그날 방송에서 선보인 방식은 대파 서른 뿌리'를 가지런히 모아서 커다란 중국 칼'로 한꺼번에 통썰기를 하는 거'였다. 다, 다.다.다.다.다.다.다 ! 순식간이었다. 칼로 " 썰다 " 라기 보다는 칼로 " 절단 " 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았다. 그렇다 ! 짧은 시간에 생산량을 최대치로 뽑으려는 욕망이 설렁탕 대파'에 투영된 것이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다.


그런데 << 생활의 달인 >> 이라는 프로그램은 겉으로는 평범한 서민의 노동 예찬처럼 보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자본가 욕망을 충실히 반영한 근로 예찬'이라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생활의 달인'이 노동(자)에 접근하는 방식은 속도와 효율성이다. 우리가 감탄하는 순간은 한 사람이 열 사람 몫을 할 때이다. 한 사람이 대파 한 뿌리를 정성스레 써는 것은 가치가 없다. 이 방송은 속도에 대한 예찬과 피와 땀으로 이룩한 근로 정신을 찬양할 뿐이다. " 노동(자) " 과 " 근로(자) " 는 뜻이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꼼꼼하게 살피면 오히려 반대말에 가깝다. 일할 로 勞, 움직일 동 動 으로 이루어진 < 노동 > 이라는 단어는 몸을 움직여서 일을 한다는 뜻이다. 방점은 움직일 動에 있다. 반면 < 근로 > 는 부지런할 근 勤 에 일할 로 勞 로 이루어진 단어'다. 부지런하다'에 방점을 찍는다.


노동량을 산출해서 크기 부호로 표현하자면 " 노동 < 근로 " 다. 국가가 < 노동자의 날 > 을 애써 < 근로자의 날 > 로 호명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와 자본가가 요구하는 것은 평범한 노동자가 아니라 부지런한 근로자'다. 그들은 주부가 대파 한 뿌리를 어슷썰기'하는 것을 단순한 노동으로 폄하하지만, 생활의 달인이 대파 서른 뿌리를 단박에 통썰기하는 근로는 찬양한다. 이처럼 사고 방식이 삐딱하다 보니 머리에 쟁반 열 개를 쌓고 배달 일을 하는 노동자'만을 예찬하고 자전거 짐칸에 산더미 같은 짐을 쌓고 달려야 찬양한다. 자전거 짐칸에 짐을 산더미처럼 쌓고 달리면 과적이기에 불법이지만 자본가에게는 " 또.. 하 ~ 또... 하 ~  아이고 의미 없다. " 가 된다.  자본가 입장에서 보면 과적은 짧은 시간을 투자해서 보다 많은 이익을 낼 수 있는 방식이다.


 

그 결과가 세월호 침몰이라는 비극을 양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가는 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아이고, 의미 없다. " 과잉 노동을 찬양하다 보니 정상적으로 머리에 쟁반 하나를 올려놓고 배달하는 아줌마는 게으른 베짱이가 되기 일쑤다. 그런 것은 노동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 꼰대의 욕망 " 이 투영된다. 내가 말하는 꼰대는 쉽게 말해서 " 칼자루를 쥔 놈 " 이다. 여성보다는 남성, 동성애자보다는 이성애자, 맨발보다는 군화, 국민보다는 국가, 노동자보다는 자본가,  젊은이보다는 4,50대 늙은이가 칼자루를 쥔 자'다. 꼰대는 주류이기에 언어 또한 꼰대가 욕망하는 것을 반영한다. 男子 는 사내 남, 아들 자'로 이루어져 있다. 남자아이에서 성인 남성이 되어 가는 성장 코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반면 < 女子 > 는 이상한 구조다. 이 단어만 놓고 본다면 여성 신체 절반은 남성 소유다.

 

한국 여성이 백인 남자의 애인이 되면 한국 남자는 가자미 눈깔이 되어 국산 장려 운동을 강조한다. 한국 여자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은 한국 남자라는 인식이다. 그들은 신토불이를 주장한다. 한국 여성이여, 신나는 토요일 불타는 이 밤은 한국 남자와 함께 ! 에라이, 이 뻔뻔한 욕망. 영화 << 건축학 개론 >> 에서도 증명하였듯이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면 그 여자는 한순간에 " 쌍년 " 이 된다. 이 모든 것은 여성 신체를 독립적 주체로 보지 못하고 남성 소유물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오만'이다. < 착하다 > 는 말도 꼰대의 발상이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착하다고 말하면 자연스럽지만 아들이 아버지에게 착하다고 말하면 어법 상 어색한 표현이다.  이때는 선하다는 표현을 써야 한다. 착하다는 웃어른이 아랫사람에게 사용하는 말이다. 이처럼 착하다는 어른 말을 잘 듣는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반영된 단어다.


 반면 선하다는 낱말은 착하다는 뜻과 함께 도덕적 기준에 부합되어야 하는 조건을 가진 단어다. 종합하면 착하다는 말은 윤리적 판단 능력이 없어도 된다. 동네 바보는 착한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반드시 선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 선하다 > 에는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 기준에 부합될 때 사용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부모 말이라면 무조건 복종하는 아들은 착한 아들일 수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적용되는 기준이다. 착한 사람은 yes만을 말하고, 선한 사람은 윤리적 판단 기준에 의해 no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방송 드라마나 리퀘스트 방송이 모두 착한 사람을 호명하는 자세는 꼰대의 욕망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꼰대는 착한 사람을 좋아하지 선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얼마 전, 강남 아파트 경비 노동자가 입주민의 지속적인 막말에 분개하여 분신을 시도한 사건이 발생한 적 있었다. 전언에 의하면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 입주민이 보기에 경비원은 하는 일 없이 아파트 관리비만 챙기는 베짱이라고 생각한 모양.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근로자가 아니라 단순히 밥을 축내는 노동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의학 상식으로는 화상에 의한 통증이 가장 고통이 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분신 후 한 달 동안 병원 침대에서 사투를 벌인 경비원은 태어나서 가장 고통스러운 한 달을 보낸 것이다. 분신은 다른 자살 행위와는 달리 사회에 던지는 강력한 항의'를 담고 있다. 그가 분신이라는 극단적 행위를 하면서까지 이 세상에 내뱉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 그는 자신에게 인간적 모멸을 준 입주자에게 진정어린 사과를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 당신이 내뱉은 뾰족한 말 때문에 헛배 불렀다고, 사과하라고.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지목된 가해자는 끝끝내 사과를 거부하다가 경비 노동자가 죽고 나서야 여론에 떠밀려 장례식장을 찾았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데, 그깟 무릎 꿇고 눈물 흘리며 진정성이 담긴 사과 한마디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  노동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말자. 노동은 노동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다. 우리가 << 생활의 달인 >> 을 보면서 과적과 과잉 노동 서사를 찬양했던 태도가 어쩌면 한 경비 노동자의 분신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언제부터인가 노동자에게 보다 능숙한 숙련과 보다 과잉 친절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요구했던 것과 똑같은 잣대로 같은 처지에 놓인 노동자를 대한다. 고객은 왕인가 ? 천만에 ! 고객은 자본가의 호갱일 뿐이다. 


노동자여,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피땀 흘리며 일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모두 자본가의 욕망일 뿐이니까.



 



 

 

 

 

 

 

 

 

 

 

 

 


 

 

어수선 통신 시리즈는 http://myperu.blog.me/220183406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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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14-11-17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줄 한줄이 다 저를 부끄럽게 하네요. 저 또한 숙련된 노동자의 일당백 노동에 감탄하기도 했고, 또 손님이라는 알량한 권리로 서비스업종 노동자들을 힘들게 한 적도 있어요 (솔직히 많진 않습니다..ㅠㅠ) 암튼 많이 배우고 갑니다. 여자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한국남자들에 대해선, 전적으로 공감!

곰곰생각하는발 2014-11-17 14:35   좋아요 0 | URL
저도 이렇게 썼지만 사실은 자기 반성문입니다.
이제는 과잉 친절에 대한 요구를 거두기로 했습니다. 무례만 아니면, 불친절이 아닌 무친절을 옹호하기로 했습니다. 친절 과잉 시대입니다. 그들도 고객으로부터 과잉 친절 요구를 받으니 스트레스를 받고
또 다른 곳에서 진상이 되어 같은 일을 반복하고...

무친절 진행이라고 해야 할 판입니다.

사무아 2014-11-17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생활의 발견>을 바라보는 곰곰발님의 시각에 동의합니다.
자본가의 호갱으로 살아가면서,
오히려 `손님`이라는 지위로 으스대며 `같은` 노동자를 힘들게 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4-11-17 21:22   좋아요 0 | URL
생활의 달인입니다요..ㅎㅎㅎㅎ

[그장소] 2015-01-03 0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설렁탕이나 곰탕이나 없는 사람들이 따듯하게 영양을 보충하려던 한끼 아니었나요!? 그래서 살을 삶아내는 육수가
아닌 다 발라낸 후 남은 뼈가 주 종목..거기서 더 진화와 진격을 이뤄 이왕 이면 잡내없는 걸로 선별이 되갔을거라....같은 맥락..어슷썰기..찌개나 타 음식에서 파는 금방 물러 향을 잃으면 안되니 가능하면 오래 향을 품고 모양을 유지할수 있게 어슷썰기..곰탕과 설렁탕에 대파는
첨가 즉시 그 향이 발휘되게 통썰기된거라
또..없는 살림에 처음엔 파를 아끼는 차원
였을지도 모르죠..더많이 제공키 위한.그런데 그게 음식 궁합에도 맞았던것.. 뭐. 혼자 생각 해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5-01-03 14:59   좋아요 0 | URL
하긴 다른 나라는 뼈를 삶지는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하도 못 먹는 나라이다 보니...

그나저나 음식 궁합에 따른 파 모양 일리가 있네요...

[그장소] 2015-01-03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리만?..^^ 이리는요??(-_ど) ;
뼛국..기막혀 하죠..개고기논리까진 아녀도.. 이젠 코리안푸드ㅡ로 자리 잡았지만요.그러:하다..니까요!^_^
 
[블루레이] 아바타
제임스 카메론 감독, 시고니 위버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어수선 38호

 

꼬리 치는 당신

 

 

The Devil is in the details :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짐승을 좋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 꼬리" 가 달렸기 때문이다. 머리 꼭대기'에서 자라는 게 뿔이라면 엉덩이 끄트머리에서 자라는 것은 꼬리'다. 인간은 꼬리를 버리고 사람이 되었다.  문득 이런 의문이 든다. 많고 많은 기관 가운데 인간은 왜 하필 꼬리를 버렸을까 ? 꼬리는 감정에 충실한 신체 기관'이다. 화가 날 땐 꼬리를 세우고, 반가우면 꼬리를 흔들고, 무서우면 가랑이 사이로 숨긴다. 꼬리를 제2의 표정이다. 속마음을 그대로 전하는 꼬리는 의도적으로 조작을 가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짐승은 꼬리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짐승들이 평생 동안 서열 싸움'을 하는 이유는 바로 꼬리 때문이다. 우두머리'를 넘볼 놈은 꼬리를 내리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선전포고 !  그날이 오기 전까지 우두머리와 도전자는 서로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리고는 말한다. " 하와이 가라 ! " 만약에 이 말에 기가 죽는다면 꼬리를 내리고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 하와이 내가 간다잉. 잇힝 잇힝 ~ " 이라며 뒤로 물러날 것이다. 하지만 모두 다 하와이를 가고 싶지는 않을 터, " 네가 가라, 하와이 ! " 라고 말하는 순간 대결은 시작된다. 짐승 세계에서는 몰래 등에 칼을 꽂는 행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 간혹 연대'에 의해서 우두머리를 쫒아내는 경우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인간의 조상인 원숭이나 하는 짓이다. ) 깨끗하다, 그들은 지저분하게 칼질하지 않는다. 이게 다 < 꼬리의 정치학 > 이 낳은 룰'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꼬리'가 사라졌다. 솔직히 말하면 퇴화한 게 아니라 인간 스스로 잘라버린 것이다. 인간이란 지구상에서 가장 간사한 새끼들 !  오로지 있는 그대로만을 표현해야 하는 이 지긋지긋한  꼬리를 잘라버림으로써,  

 

거짓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속마음을 숨기고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세상은 온통 비열한 놈들이 대우를 받기 시작했다. 뻐꾸기를 날리면 사람들은 와와, 했다. 반면 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우우, 했다. 사람들은 거짓말 앞에서는 하하, 하고 진실을 말할 때는 화, 화화'를 냈다. 이 세상은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영웅이 되는 사회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이 꼬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발생한 불행. 꼬리가 사라지고나서부터 진정한 마초'도 사라졌다. 추잡과 주접이 난무하는 세계가 되었다. 붓으로 가족을 먹여살리기에는 터무니없이 가난한 칠쟁이였던 아버지가 유일하게 본 티븨 프로그램은 민병철 생활 영어와 동물의 왕국이었다. 나는 동물의 왕국을 다시 본다. 꼬리를 바짝 세운 늑대 두 마리가 죽을 각오로 싸운다.

 

하와이, 네가 가라잉 ? 컹컹. 내가 와 하와이 가노 ? 네가 가라, 하와이. 컹컹. 싸우다가 진 놈은 꼬리를 내린다. 아름다운 순간은 지금부터다. 죽일 듯이 싸웠던 승자도 상대방이 꼬리를 내리면 더 이상 물지 않는다. 그게 늑대의 처절한 룰이다. 싸움에서 이긴 놈은 상대방이 꼬리를 내리는 순간 절대 물지 않는다. 비록 그 놈이 힘을 길러서 다시 도전한다고 해도 말이다. 얼마나 멋진가 !  그동안 나는 " 하와이 " 가 어떤 곳인가에 대해 늘 의문을 품고는 했다. 하와이'는 어디에 있는 곳일까 ? 이 의문은 곧 풀렸다. 하와이는 " HOW WHY " 였다. 박근혜에게 잃어버린 7시간을 묻는 순간 하와이 가야 한다. 하와이는 유배지'이다. 흑산의 영문 표기법이 바로 하와이'다.

 

영화 << 아바타 >> 에는 인간 형상을 한 꼬리 달린 나비( Navy ) 족이 나온다. 내용은 간단하다. 지구인은 나비 족이 살고 있는 행성 판도라'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하고, 아름다운 나비 족 여성 네이티리'와 사랑에 빠진 지구인이 그들을 위해 싸운다는 내용이다. 제국주의에 대한 자기 반성을 담았다는 측면에서 영화 << 미션 >> 과 비슷한 구조'다. 내가 놀랐던 부분은 이 영화에 쏟아진 성찬이었다. 평론가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새로움과 미래 영화의 모범이라는 답안을 내놓았다. " 영화사의 기원을 바꿀 영화 ! " 라는 설레발 앞에서는 할 말을 잊게 만든다. 심지어 소금왕, 모두까기, 츤데라'라는 별명을 가진 박평식 평론가마저 별점 8점을 준 것을 보면 무엇에 홀린 모양이다. 내가 보기엔 이 영화 서사는 지극히 진부한 제국주의자의 반성을 답습하는 수준에 그칠 뿐더라

 

3D 는 미래 영화의 모범이 될 수 없다. 3D가 미래 영화의 모범이라는 말은 마치 입체BOOK이 앞으로 나아갈 책의 미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 영화가 형편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이 영화에 쏟아진 성찬이 작품성에 비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소리'다. << 아바타 >> 는 그저 그렇고 그런 영화였다. 재미있게 잘 만든 영화이지 걸작은 아니다. 내가 이 영화에서 주목한 점은 " 꼬리 " 였다. 내 눈에는 눈부신 입체 영상과 기술 발전 따위는 보이지도 않고 오로지 나비 족 꼬리'만 보였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꼬리에 대해 그닥 신경을 쓴 것 같지는 않다. 디즈니 애니메이션'보다 꼬리에 대한 상식이 부족해 보였다. 영화 속 지구인이 판도라 행성에 사는 나비 족을 미개한 종족으로 보는 이유는 꼬리가 달렸기 때문이다. 지구인에게 있어서 꼬리는 원시적 형태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하긴 대한민국만 해도 저잣거리 입말은 온통 " 꼬리 " 에 대해 부정적이다. 꼬리가 길다, 꼬리를 감추다, 꼬리를 내리다, 꼬리를 밟히다, 꼬리를 사리다, 꼬리를 숨기다, 꼬리를 자르다, 꼬리를 치다, 꼬리가 드러나다. 그 外 기타 등등. 똥 묻은 개가 겨 묻은개 나무라는 식이다. 인간이 타락한 이유는 꼬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꼬리는 정직한 기관이다. 대가리는 방향을 설정하지만 추동의 힘은 꼬리에 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다. " 착한 자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 얼핏 수긍하기 힘든 대목이다. 하지만 < 착한 자 > 을 < 착해 빠진 놈 > 으로 바꾼 후 다시 읽으면 이해가 간다. " 착해 빠진 놈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 니체는 정확히 보았다. 착해 빠진 놈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추악한 진실‘을 폭로하는 것은 언제나 악마였다.

 

영화 << 올드보이 >> 에서 최민식’에게 진실을 폭로한 자’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복수에 눈이 먼 유지태'였다. 천사는 아름다운 진실’을 고백할 뿐 더러운 진실‘에는 침묵한다. 반면 악당은 추악한 진실’을 폭로한다. 스타워즈에서 악의 구현체인 다스베이더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아들에게 충격적인 고백을 한다 : “ 내가 네 애비다 ! ” 이처럼 폭로는 메두사의 얼굴‘처럼 강력하다. 악당 입장에서 보면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고도, 폭로 한 마디‘에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으니 꽤 훌륭한 창이요, 활이다. 이보다 더 좋은 무기가 어디에 있겠는가 !  천사는 악마를 파멸시킬 수는 있으나 인간을 파멸시킬 수는 없다. 천사는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하거나 위로할 수는 있어도 인간을 파멸시켜서 지옥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그 일은 악마가 한다. ( 꼬리 달린 인간을 무조건 악마라고 규정한다면 나는 악마를 지지하겠다 ) 그게 바로 천사가 가진 한계이다. 한편 악마는 주로 거짓말로 상대방의 영혼을 파괴하지만 종종 진실’을 폭로함으로써 영혼을 파괴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악마란 거짓말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역설적인 결론이지만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서는 비열하고 악랄한 인간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는 천사보다는, 그런 놈들을 파멸시켜서 지옥으로 데리고 갈 악마‘가 더 필요하다는 점이다. "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 는 말이 있다. 꼬리 달린 존재를, 꼬리 치는 팜 파탈을 우습게 보지 말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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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밀밀 - [초특가판]
진가신 감독, 여명 외 출연 / 리스비젼 엔터테인먼트 / 2004년 1월
평점 :
품절


 

 

 

 

어수선 34호

 



가장 가까이에서 본 당신

 

 

 

 月亮代表我的心 저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오

- 영화 ' 첨밀밀 ' 삽입곡 中

 

 

 

 

 

 

http://youtu.be/Db1LEQiy6qs : 영화 전편 감상은 이곳에서

 

 

 

 

전에 다니던 직장은 SK 텔레콤'이었다.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3년 계약직이었으니까. 나는 이곳에서 우주 항공 업무를 담당했다. 무인 위성은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기 때문에 SK 텔레콤은 유인 위성을 달나라에 띄웠고, 나는 유인 인공 위성에서 잡다한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우주 항공 기술은 곧 " gram " 과의 싸움이었다. 무게는 곧 돈이었다. 그렇기에 우주 항공 기술은 인공 위성 무게를 최대한 줄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나 또한 인공 위성 탑승 테스트에 통과하기 위해서 몸무게를 15kg 감량해야 했다. 무게가 곧 돈이다 보니 유인 위성에 탑승할 승무원은 단 한 명'이 전부였다. 우주 업무는 곧 고독을 의미했다. 캄캄한 우주 공간 속에 홀로 3년을 보내야 했다. 내가 하는 일은 GPS(위성 항법 장치) 업무가 대부분이었다. 당신에게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GPS라는 단어는 모두 익숙할 것이다.

 

일상적인 업무를 진행하던 중 본사로부터 특별 지시가 내려졌다. 특정 인물을 집중 감시하고 자료를 모아 통보하라는 명령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개인 정보를 국가정보원으로 보내기 위한 지령인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 모든 일은 불법이었다. 내가 감시해야 될 대상은 한국에 입국한 중국 여성이었다. 아마도 그녀를 간첩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개인의 사생활 감시가 가능한 이유는 기술이 위험할 정도로 발전했다는 데 있다. 위성사진은 약 1m의 작은 물체도 파악이 가능하기 때문에 안방에 앉아서 남의 집 동태를 살필 수 있다. 처음에는 본사에서 내린 지령에 따라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일상은 평범했다. 그녀가 웃으면 나도 웃고, 그녀가 울면 나도 울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평범함은 격랑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녀를 감시하다가 그만.......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사소한 습관, 둥근 어깨, 부드러운 손짓, 바람에 흔들리는 귀밑머리.  윤리적 딜레마와 함께 사랑이 찾아왔다. 어떻게 해야 할까 ? 오랜 고민 끝에 회사 내에서 가장 믿을 만한 동료에게 내 메시지를 그녀에게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동료는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내가 보낸 메시지를 그녀에게 전달했다.

 

 

" 안녕하십니까 ? 이 메일은 달나라에서 전송된 메시지'입니다. 장난 편지가 아니란 말씀을 드리고 싶군요. 저는 SK텔레콤 인공 위성에 탑승한 우주인입니다. 컴퓨터가 놓은 방 창문에서 보면 11시 방향에 떠 있는 별빛이 바로 내가 일하는 일터입니다. 아아, 놀라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별이라 생각하는데 사실은 인공위성 불빛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제가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7월 7일 새벽 1시 정각에 11시 방향에 위치한 별을 자세히 보십시오. 제가 위성 전원을 껐다 켰다, 껐다 켰다, 껐다 켰다 3번 반복하겠습니다. 그리하면 당신은 캄캄한 밤하늘에 뜬 별이 사라졌다 나타나고, 사라졌다 나타나고, 사라졌다 나타나는 기이한 일을 목격하실 수 있을 겁니다. 내 말을 믿으십시오.

 

지금 당신은 국정원으로부터 감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촬영해서 본사로 전송하는 업무를 배당받았습니다. 물론 불법입니다. 이 모든 것은 불법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신에 대한 자료는 모두 폐기처분했으니까요. 저는 불복종을 선택했습니다. 이곳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돌아가게 되면 복잡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당신을 돕기로 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띄웁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이곳에서 가장 힘든 업무는 고독과의 싸움입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캄캄한 우주밖에 없으니까요. 누구와 대화를 할 수도 없습니다. 이 공간 안에는 나밖에 없습니다. 대화를 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메시지는 통화가 아닌 문자 전송으로 이루어지니까 말이죠. 이 정지 궤도 위성에 오르기 전에 본사에서 1kg 미만으로 개인 소지품을 소지할 수 있다고 해서 영화 시디 몇 개 가지고 갔습니다. 그 중 하나가 영화 << 첨밀밀 >> 입니다. 보고 보고 또 보아서 이제는 100번도 넘게 본 영화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볼 때마다 항상 당신을 생각했습니다. 장만옥이 연기한 대륙인은 당신 고향과 같더군요. ●●● 님도 중국 광주 출신이시죠 ? 장만옥도 광주 출신입니다. 안 보셨다면 꼭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인연이라면 아무리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언젠가는 만나게 되고, 인연이 없으면 아무리 가까운 곳에 있어도 만나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우리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 건투를 빕니다.

 

- 2008. 6. 26 별에서 온 남자

 

 

 

어느 날, 그녀는 놀이터 공원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늘을 보기 시작했다. 내가 있는 곳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소리쳤다. 그 뜻을 알 수는 없었으나 알 것도 같았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3년 우주 업무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하자 내게 날아온 것은 해고 통지서와 법원 출두 명령서'였다. 나는 국가 안보 누설 혐의로 6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내 사건을 담당한 민변 변호사에 따르면 다행히도 그녀는 국정원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하나 더 덧붙였다. 한국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는 소식도 함께 ! 아, 먼곳에 있는 당신. 눈물이 핑 돌았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구나. 나는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했으나 앞날이 막막했다. 그녀는 잘 살고 있을까 ? 어느 날, 우연히 동대문 황학동 벼룩 시장 거리 장터에서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등려군 앨범이 보였다. 영화 첨밀밀에서 두 사람을 이어주던 곡 " 월량대표아적심 " 을 부른 가수가 바로 등려군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걸음을 멈추고 그 앨범을 집으려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먼저 그 앨범을 낚아챘다. 내가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본 순간...... 나는 심장이 멎었다. 그녀였다. 그녀도 나를 흘깃 보았으나 이내 눈길을 돌렸다. 그녀가 나를 알 리는 없다. 나는 그저 달나라 먼 곳에 있던 사내였으니까. 그녀가 앨범을 살피다가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 ..... 거기, 당신 ? " 나는 벅찬 마음을 추스리고 대답 대신 웃어보였다. 아주 오랜 침묵. 내가 말했다. " 항상 당신을 보아왔는데 오늘처럼 이렇게 가까이서 보기는 처음이군요. " 그녀 또한 대답 대신 웃어보였다.

 

아주 오랜,  침묵.  그녀가 수줍게 말했다. " 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을 비추었어요.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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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첫눈과 달빛
    from 새빨간 활 2016-11-28 12:05 
    첫눈과 달빛​ 첫눈이 내린다는 일기 예보에 창문을 열었다. 첫눈을 반기지 않는 이, 뉘 있을까만은 그날은 반갑지 않은 눈이었다. 제법 많은 눈이 내렸고 눈은 내리자마자 녹았다. 칼바람은 불고 진눈깨비는 내리고 땅바닥은 흥건히 젖었다. 질퍽질퍽한 바닥을 보자 아차 _ 싶었다.
 
 
은가비 2014-11-13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S.F장르까지 넘으셨군요..재밌게 읽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11-13 13:52   좋아요 0 | URL
새로오신 손님이시로군요. 은가비 님.
이토록 화려하고 궁전 같은 곳에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블루레이] 친구
곽경택 감독, 유오성 외 출연 / 컨텐트존 / 2014년 8월
평점 :
품절


 

 

 


 

 

 


​어수선 32호


 

그라믄, 여가 북(北)이가 ?

 

 

 

" 놔라 !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좋단말이냐 ? "

- 이수일과 심순애 中

 

 

 

 

 

 

 

 

 

나중에 그녀가 고백한 바에 따르자면 : 나를 보자마자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녀는 대학 진학에 실패해서 입시 학원에 다녔고, 나는 그 근처 영화감상실'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을 했다. 당시, 나는 거친 야생마 같았다. 머리는 허리까지 길러서 묶고 다녔고, 니콘 카메라 가방은 온통 뜻을 알 수 없는 낙서들로 채웠다. 그리고 무명 T 에는 유성 매직펜으로 < 그해 가을 > 이라는 이성복 詩를 필사해서 써넣었다. "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입이 열 개라고 할 말 없어. " 내가 나타나면 동네 사람 중 열에 아홉은 수근덕거렸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롹커'라는 소문도 있었고, 전위예술가라는 소리도 흘러다녔다. 또 누군가는 글을 쓰는 작가라고 지레짐작하는 이도 있었다. 우우, 하지 마라. 지금 생각하면 개폼'이었지만 그때는 나름 진지했다. 세상이 너무 네모반듯해서 " 아방가르드 " 하며 " 아스트랄的 "  삶을 살고 싶었다고나 할까 ? 

 

나는 자주 입방아에 올랐다. 헤어커커 미용실 주인도, 후암동 철물점 아저씨도, 순희네 식당 아줌마도, 대성 헌책방 김씨도 내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나에 대한 소문은 학원으로도 흘러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 내가 일하는 곳을 찾아왔다. 방긋 !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웃었다. 이제 갓 스무살이 지난 앳된 아가씨이니 꽃보다 예뻐 보였다. 그녀는 대뜸 영화 한 편을 추천해 달라고 말했다. 내가 그녀에게 골라준 영화는 낸시 사보카 감독이 만든 <<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 >> 이었다. 주연은 리버 피닉스'였다. 모든 사항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여자들은 모두 다 리버 피릭스를 사랑하니까, 리버 피닉스는 진리이니까. 여자는 영화가 끝나고 한참 있다 나왔다. 한쪽 뺨이 발그레해진 것을 보면 영화를 보다가 잠을 잔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말했다. " 영화 정말 재미있어요 ! "

 

그날 이후, 그녀는 매일 와서 영화 한 편을 보았고 나는 매일 영화 한 편을 추천했다. 내가 추천한 목록은 점점 심각한 영화 쪽으로 기울어졌고, 그럴수록 그녀는 비디오방을 나올 때마다 한쪽 뺨은 항상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영화가 끝나자 여자는 평소와는 달리 인사도 없이 황급히 떠났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객실 정리를 하기 위해 그녀가 머물렀던 객실에 들어갔다. 의자 위에는 작은 선물 상자와 함께 쪽지 편지가 있었다. 달달한 사랑 고백 편지였다. 그날 우리는 술을 마셨다.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아, 아카시아 향기. 한동안 그녀는 나를 찾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겨울이 왔고, 대입 수능일이 다가왔고, 학원 수강생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잠시 그녀가 그리워지기 시작했지만 거기까지였다. 나는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몇 년이 흘렀을까 ?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물어, 물어, 물어서 용케 내 전화번호를 알아냈다고 했다. 전화를 타고 전해진 목소리는 힘이 없어 보였다. 아픈 목소리였다.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그럴수록 간절한 마음. 보고 싶어요. 나를 위해 오실 수 있나요 ? 그녀가 말했다. 이유를 묻자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 ! 다음날, 그녀가 알려준 주소를 찾아 가기 시작했다. 버스 안에서 내내 초조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내가 오기를 기다리리라. 내가 도착한 곳은 외진 건물이었다. 건물 앞에서 그녀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짧은 인사와 눈짓. 그녀가 나를 안내했다. 내가 간 곳은 다단계 회사 사무실이었다 ! 작은 사무실 안에는 나와 같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백여 명 정도 모여 있었다. 그곳은 정글 자본주의의 성소'였다. 다단계 최상위 임원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장장 4시간에 걸친 연설을 시작했다.

 

그들은 계급을 다이아몬드로 나눴다. 화이트, 레드, 블루. 최상위 계급은 블루 다이아몬드였다. 그 옆에는 그녀가 있었다. 진행 요원이었다. 그는 자기 통장을 보여주며 매달 천만 원이 입금이 된다고 했다. 평생, 앞으로 평생, 지구가 멸망하는 그날까지 평생 ! 와, 와와 !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말했다. " 건달은 양심은 팔이도 쪽은 안 판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성공을 위해서라면 양심도 팔고 쪽도 팝니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으니까요 !! " 연설이 끝나자 심화 학습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저녁 식사 타임이 왔다. 나는 냅다 그녀에게 싫은 소리를 했다. 그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어느새 뛰어와 내 팔을 붙잡았다. 옥신각신 다투다가 화가 난 그녀가 말했다. " 우리 사이에 그럴 수 있어 ? " 이 말은 마치 우리가 남이가, 라는 말처럼 들렸다.

 

그녀는 성공을 위해 양심도 팔고, 쪽도 팔고, 사랑도 팔았다. 정나미가 떨어졌다. 결과적으로 그날 그녀는 나를 포섭하지 못했다.  몇 달 후, 다단계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대학생을 집중 조명하는 시사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좁은 방에 갇혀서 남녀가 숙식을 해결하며 사람을 포섭하기 위해 모든 연락망을 돌리는 그들을 보게 되었다. 그녀, 생각이 났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룻밤, 늘 한쪽 뺨만 붉어진 얼굴, 달달한 편지, 한 번의 키스. 영화 << 친구 >> 를 볼 때에도 그녀 생각이 났다. 우리 사이에 그럴 수 있어 ? 영화 << 친구 >> 를 10자평으로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ㅣ 우리가 남이가 ?  다. 우리가 남이냐, 라는 질문은 비단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만 오가는 상투어는 아니다. 대한민국 전체는 국민을 상대로 " 우리가 남이냐 ? " 고 묻는다. 파시즘의 시작은 언제나 " 우리가 남이냐 ? "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되묻고 싶다. " 시발... 그라믄 여가 北이가 ? " 속지 말자. 누군가가 당신에게 " 우리가 남이냐? "  며 의리와 정분을 강조하면,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명심하자. 우리는 남이다.

 

 

 

http://myperu.blog.me/220175096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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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 우리말 지킴이 최종규와 어린이가 함께 읽는 철수와영희 우리말 시리즈 1
최종규 지음, 강우근 그림 / 철수와영희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애정을 갖는다는 것은 할 말이 많다는 소리'다. 이 책에 대해 ( 나는 완벽하게 ) 할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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