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D] 김씨표류기
이해준 감독, 정려원 외 출연 / 대경DVD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빨리 늙는 여자


 

 


                                                                                                  영화 << 변호인 >> 을 보면서 우럭도 아니면서,        나는......  가거도 우럭처럼 싱싱하게 울컥했(었더랬)다. 펄럭펄럭. 하지만 내 " 눈물의 동의 " 는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 때문이었지 영화 자체에 대한 지지는 아니었다.

<< 변호인 >> 은 실망스러운 영화였다. < 눈물 > 이라는 감정은 전염성이 강한 9월 감기와 같아서 소시오패스가 아니라면 타인의 통곡에 울컥할 수밖에 없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먹방을 이용하는 장치'만큼 촌스러운 것도 없을 뿐더러 눈물 젖은 빵을 먹는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다가가는 카메라는 재능 없고 게으른 감독이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기교'이다. 더군다나 슬픈 BGM를 깔면. 감독은 이런 계산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드루와, 드루와 !  울지 않고는 못 배길 걸.                           이 정도면 협박이다. 그래서 나는 우는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는 감독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예외가 하나 있다. 영화 << 김씨 표류기 >> 에서 밤섬에 표류한 김씨가 우여곡절 끝에 짜장면을 먹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밤섬이라는 무인도에서 원시인처럼 생활하는 김씨는 강물에 떠밀려 도착한 짜파게티 라면 봉지를 보면서 죽기 전에 짜장면을 먹어보는 희망을 꿈꾼다. 목표가 생기자 그동안 무기력했던 김씨는 무인도 생활에 활력을 찾는다. 그는 황무지인 돌밭을 고르고, 전분을 얻기 위해 새똥을 흙에 묻어 옥수수를 기르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드디어 짜장면을 먹게 되는데 !   하, 누가 이 맛을 알까. 이토록 간절한 욕망을. 박연폭포처럼 고이는 침샘을. 이 장면에서 나는 가거도 우럭처럼 싱싱하게 울었다.

눈물에서 물비린내가 났다. 내가 울컥한 데에는 밤섬에 표류한 김씨가 흘리는 닭똥 같은 눈물 때문이 아니라 울 때 만들어지는 주름 때문이었다. 우리가 과연 타인의 (울 때 만들어지는) 주름을 볼 기회가 얼마나 될까 ?   내가 이 영화를 떠올리게 된 계기는 이웃이 블로그에 올린 시 한 편 때문이었다.






모과 썩다/ 정진규

올해는 모과가 빨리 썩었다 채 한 달도 못갔다 가장 모과다운 걸, 가장 못생긴 걸 고르고 골라

올해도 제기 접시에 올렸는데 천신하였는데 그 꼴이 되었다 확인한 바로는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는 모과였기 때문이라는 판명이 났다 썩는 것이 저리 즐거울까 모과는 신이 나 있는 눈치였다

속도가 빨랐다 나도 그렇게 판명될 수 있을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을가 글렀다 일생一生 내가

먹은 약만해도 세 가마니는 될 것이다 순수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 나는 아예 글렀다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이 그토록 일찍 끝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을까 첫 사랑은 늘 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연고다 순수한 것은 향기롭게 빨리 썩는다 절정에서는 금방인 저 쪽이 화안하다 비알 내리막은

속도가 빠르다 너와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네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

싱싱한 저승내가 났다 저승내는 시고 달다 그런 연고다

 

시안 」2007년 가을호





순수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고 믿는 시인은 그런 연고로 " 순수한 것은 향기롭게 빨리 썩는다 " 고  말한다. 잘 썩는 모과가 좋은 향기를 품고 있듯이 좋은 배우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라 좋은 주름을 가진 배우'다. 늙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좋은 주름을 가지게 된다. 실패한 사랑으로 끝난 그 여자도 빨리 썩는 여자'였다. 사람들은 그 여자가 나이에 비해 늙지 않는다고 부러워했지만 나는 그 여자가 빨리 늙어간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나한테만 보여주는 그 주름-들이 좋았다. 당신과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당신에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 그 여자를 오래 사랑했다. 진짜루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다맨 2017-10-02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진규 시인이 며칠 전에 향년 79세로 돌아가셨더군요. 물론 적은 나이는 아닙니다만 평균 수명 80세인 시대에 조금은 일찍 떠나셨다는 생각도 듭니다.
개인적으로는 저 연배(30년대생)의 시인들 중에서는 최근까지도 가장 월등한 필력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고은, 신경림, 황동규 같은 사람들 최근 시들을 보면 솔직히 긴장이 풀리고, 변변한 게 없는 수필같은 느낌만 준다는 인상이 있어서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0-02 22:37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수다맨 님은 문화계 살롱의 마담 같으십니다.. 허허.
정진규 시인이 돌아가셨군요. 몰랐네요. 사실.. 오늘 처음 정진규라는 이름을 보았습니다.
좀 찾아서 봐야겠네요...

시집은 워낙에 집중하고 읽어야 해서 에너지 소모가 큰데, 다시 시에 대한 애정을 가져야 겠습니다..
즐거운 한가위 보내십시오.. 수다맨 님.

겨울호랑이 2017-10-02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곰곰발님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0-02 22:36   좋아요 1 | URL
겨울 호랑이 님도, 애교쟁이 꼬마에게는 안부 전해주십시오. 즐거운 한가위 되세요..

syo 2017-10-02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나는 시 좀 읽는다 하고 돌아다녔는데, 정진규 시인은 처음 알았습니다. 한참 멀었네요...

곰발님 명절은 아무래도 먹고 마시고 또 먹고 또 마시면서 보내야 되지 않을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0-02 22:35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오늘 처음 듣는 시인이었습니다.
명절에는 혁띠 풀고 흥청망성 마시는 편인데.. 엇그제는 너무 과하게 마신 상태라 후유증이 이틀은 가는군요.
신나는 명절 보내십시오. 쇼 님 책 리뷰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즐거웠습니다..

표맥(漂麥) 2017-10-02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보면 젊으나 늙으나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탱글탱글... 좋은 주름... 이거 공감*100! 여유로운 명절연휴 되시길...^^

곰곰생각하는발 2017-10-03 00:06   좋아요 0 | URL
연기 잘하는 배우들은 보면 멋진 주름을 가지고 있는 배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주름이 참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메소드 연기의 정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