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기 가 뭐 라 고 :
말해 뭐해, 손아섭처럼

중국에서 문익점이 목화 솜을 밀반입했다면 파리에서 택시를 운전하던 홍세화는 똘레랑스를 수입했다. 저자와의 협의도 없이, 저작권료를 지불하지도 않았지만 똘레랑스는 홍세화의 라이선스가 되었다.
밑져야 본전은커녕 남는 장사인 셈이다. 지식인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물 건너에서 넘어온 '신문물'이라면 일단 열광부터 하는지라 똘레랑스는 메르스보다 빠른 속도로 지식인 사회를 점령했다. 홍세화는 똘레랑스란 무엇입니까 _ 라는 질문에 항상 소수자(약자)에 대한 배려와 차이에 대한 용인 그리고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라고 대답하고는 했다. 나는 " 홍세화의 똘레랑스 " 가 참...... 같잖다고 느껴졌다. 그의 말대로라면 소수자나 약자에게 배려를 베풀기 위해서는 먼저 다수자나 강자가 되어야 된다는 전제를 깔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기가 뭐라고 ?!
홍세화의 똘레랑스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위계적 관계가 성립되어야지만 똘레랑스가 발생하는 것이다. 자크 데리다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것은 권력을 쥔 자의 시혜적 느낌이어서 불편한 것이다. 좋은 예가 진보랍시고 한다는 말이 다수가 이성애자인 우리는 소수인 동성애자에게 똘레랑스를 베풀어야 한다거나 나는 이성애자이지만 동성애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존중한다는 흔한 주장이다. 이 흔한 애티튜드에 대한 내 답변은 항상 동일하다. 자기가 뭐라고 ?! 우리는 동성애에 대하여 똘레랑스를 베풀거나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며 도덕적 우위를 점할 수 없다. 시혜적 느낌, 바로 그 점이 같잖다는 것이다.
문빠가 조중동은 물론이고 한경오마저 물어뜯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자들은 항상 시민을 가르쳐야 할 교화 대상으로 설정하고는 모든 일에 대하여 시시콜콜 한수 가르치려고 한다. 간장 종지 없다고 불매 운동을 선언하는 기자가 있는가 하면, 가녀린 여자의 짐 가방을 들어주지 않는다며 그들을 싸잡아서 한국 사회를 후지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말하다가 화가 화를 불러서 더욱 화가 난 기자는 아예 대한민국 국민성으로 매도하는 기자도 있다. 그것은 조중동 기자이든 한경오 기자이든 매한가지'다. 자신은 똑똑이요, 민중은 띨띨이 ! 홍세화가 문빠를 광신자'라고 규정했을 때 나는 비로소 홍세화의 똘레랑스가 불쾌했던 원인을 찾아서 반가웠다.
그에게 민중은 띨띨해서 교화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똘레랑스를 그토록 강조하던 이가 어느 순간 표독스럽게 변해서 광신도 운운하다니 어불성설이다. 나는 너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근자감이 홍세화식 똘레랑스'이다. 문제는 띨띨이의 지적 수준이 똑똑이와 비교해서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단군 이래 가방끈이 가장 긴 시대'가 그것을 증명한다. 문빠로서는 같잖은 것이다. 그들이 고급 정보랍시고 내놓는 것 중 상당수는 인터넷 바다에 뛰어들어서 필요한 자료를 찾으면 웬만한 것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들이다. 홍세화의 충고에 대하여 내 대답은 항상 같다. 자기가 뭐라고 ?
덧대기 ㅣ 개인적으로 손아섭이라는 롯데 프로야구 야구 선수를 좋아한다. 그에게는 다른 선수와는 다른 간절함이 있다. 그는 타석에 들어설 때마다 항상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무조건 전력질주이다. 김연자는 트로트 << 아모르 파티 >> 에서 말해 뭐해 손아섭처럼 만 하라고 충고한다. 내가 홍세화에게 보내는 충고이기도 하다. 도덕적 우월감에 쩔지 마시고 손아섭처럼 겸손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