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와 독서
학습 효과'는 생각보다 놀라운 결과를 초래한다. 어떤 원인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을 때, 숨탄것은 그것을 기억 속에 각인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떤 행위가 나쁜 결과로 이어졌을 때, 숨탄것은 그것을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종의 성공적 번식에 기여한다. 그러니까 현-존재'란 학습과 각인 그리고 회피의 합작인 셈이다. 19대 대통령 보궐 선거 국면에서 정치 평론가들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여소야대 정국이기 때문에 (대통령 당선자의) 힘이 빠진 형국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다는 가정 아래'에서 말하자면, 그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든든한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실패를 학습한 시민은 이 실패가 다시 반복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이 실패가 주는 교훈은 < 대통령이 국민을 지킨다 > 는 명제가 아니라 사실은 < 국민이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 > 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는 점이다. 그때 우리는 승리에 도취되어 " 국민이 외면하는 순간에 대통령이 국민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잃는다 " 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면전 앞에서 사납게 짖는 개보다 조심해야 될 놈은 앞에서는 꼬리를 흔들다가도 뒤돌아서는 순간 발뒤꿈치를 물어뜯는 개'다. 그것이 수구의 민낯이다. 노무현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 그렇게 뒤꿈치부터 뜯어먹혔다. 선거 전야, 오늘 같은 밤. 숨을 쉬면서 절망에 숨을 거두어들인, 발뒤꿈치를 물어뜯긴 한 남자에 대해 생각한다. 머리맡이 소란스럽다. 그는 알고 있었을까, 오늘 같은 날을.
노무현의 죽음은 그를 지지했던 유권자에게 트라우마에 가까운 죄책감을 안겼다. 그렇기에 이번에 문재인을 지지하는 유권자는 대통령 당선에 그치지 않고 대통령 당선 그 후'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대통령 후보를 결정할 때 " 정책 공약 " 은 부차적 요소로 치부한다. 정책 공약은 앞으로 나아갈 국정 운영의 청사진이기는 하나, 그것만을 놓고 후보를 결정하는 것은 위험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박근혜의 정책 공약집을 살펴보면 이해가 빠르다. 구구절절 옳은 소리여서 밑줄 그을 문장이 많다. 오죽했으면 자유한국당으로부터 친북좌파라는 소리를 듣던 노회찬 의원이 박근혜 정책 공약집을 가리켜 " 가장 훌륭한 정치학 서적 " 이라고 했을까.
대통령 선거에서 유권자는 미래 가치에 투자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지지'이다. 투표 행위는 책에 그은 밑줄과 같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긋듯이(그 행위는 저자의 문장에 동의한다는 독자의 의사 표시이며 지지 선언이듯이) 투표 행위도 그렇다. 아직 읽지 않은 페이지의 문장으로 채워진 정책 공약집에 밑줄을 그을 수는 없다. 유권자이자 독자인 내가 그 사람이 살아온 날-들을 기록한 자서전에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살아온 날들에 동의한다는 의사 표시이며 지지 선언이다. 나는 문재인과 심상정이 남긴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다섯 권의 책 가운데 밑줄을 가장 많이 그은 책은 두 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