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전깃불이 얼마나
큰 어둠을 감추고 있는지
소설이 무엇일까. 여전히 모르겠다. 확실한 건 좋은 소설을 만나면 내가 쓰는 게 소설이 되려면 멀었구나, 하는 자괴감이 인다는 것. 좋은 소설이란 이야기 안에 서늘한 진실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나쁜 소설이란 ? 이야기 안에 작가의 자기합리화가 들어간다. 그래서일까. 나는 일인칭 시점 소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삼인칭 소설을 표방하지만 작가의 자의식을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무늬만 삼인칭인 소설 역시 그다지 믿지 않는다. 그렇다. 그것들은 자기연민이며 자기방어의 소산물이다. 중립을 가장한 채 자기연민에는 당위성을 끌어다 붙이고, 타자를 향한 시선에는 근거 없이 객관적인 척하는...... 1).
김살로메 소설집 << 라요하네의 우산 >> 에 실린 단편 < 누가 빈지를 잠갔나 > 의 첫 문단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웃들은 윗 문장을 내가 쓴 것으로 오해할 만하다. 왜냐하면 내가 술잔을 기울이며 부어라, 마셔라 _ 할 때 십팔 번처럼 내뱉는 레퍼토리이기 때문이다. 순문학 중심으로 돌아가는 문단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자기방어를 위한 " 과잉의 자기연민 " 이다. 나는 그들이 자신의 형이하학을 감추기 위해서 마치 형이상학인 것처럼 꾸미는 태도를 엿볼 때마다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문학적 수사를 사용했을 뿐이지 저잣거리에서 흔히 유통되는 뾰족한 말풍선으로 다시 번역하자면 " 씨발것들, 좆도 징징거리네...... " 였다.
혈통에 대한 가부장적 집착은 순혈주의로 나타나는데, 순문학은 그것이 문학적으로 변형된 예이다. 순문학이냐 아니냐는 이분법은 문학의 형식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 태도의 문제여서 그리 좋은 태도는 아니다. 아(我)에 대한 집착이 결국에는 타(他)에 대한 배제라는 사실은 이미 파시즘이 증명한다. 작가가 서사의 결핍을 보완하기 위해 내세우는 흔한 수작이 미문이다. 그것은 화장이 진할수록 가면이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서정주가 대표적이다. 소설가는 거짓말에 능할수록 좋은 소설을 쓸 수 있지만 시인은 거짓말을 하는 순간 형편없는 시로 추락하게 된다. 서정주의 화장이 너무 화려하다. 가라타니 고진이 " 순문학의 죽음 " 을 선언했을 때,
지나치게 명료해서 선정적이기기도 한 이 정언 명령은 이제는 순문학으로 먹고사는 시대는 끝났다 _ 는 행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 몇몇 대형 작가(예를 들어 신경숙 같은)의 성공 사례를 들어 반론을 제기한다면 이런 반론은 어떨까 ? 신경숙 문학은 순문학이 아니라 통속 대중 소설2)입니다요. 김살로메의 소설집 << 라요하네의 우산 >> 은 곳곳에서 장르문학을 읽을 때 느끼게 되는 쾌락을 선사한다. 섬세하지 못한 면은 있으나 오히려 굵은 선으로 일필휘지할 때 느끼는 쾌감은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작가의 장르적 취향은 단편 < 아빠는 시인이다 > 에서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문학인들이 술판에서 보여주는 별 추잡한 짓거리3)는 3류에 지나지 않는다. 삼류가 일류를 지향하니 뱁새 가랑이가 찢어질 판이다. 속담으로 시작했으나 잡담으로 끝낼까 ? 지난해 문단 _ 내 _ 성폭력 해시테그로 밝혀졌던 시단 풍경을 보니 지랄이 풍년이더라. 그런가 하면, 단편 < 누가 빈지를 잠갔나 > 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 에서 제기한 문제를 연상케 한다. < 누가 빈지를 잠갔나 > 에서 극중 화자인 나는 일인칭 시점 소설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공교롭게도 소설은 일인칭 시점 소설'이다. 그렇다면 화자인 ' 나' 가 재현하는 기억은 믿을 만한 것인가 ?
< 누가 빈지를 잠갔나 > 가 아가사 크리스티'를 떠올리게 만든다면, < 피의 일요일 > 은 기리노 나쓰오를 떠올리게 만든다. 임산부인 나는 시아버지가 욕실 바닥에 쓰러져 죽어 있는 모습을 목격한다. 덜컹 ! 나는 " 당신이 내 손에 죽지 않았음은 명백하다 " 고 독자에게 고백하지만 쉽게 경찰에 신고하지 못한다. 현장 부재 증명(알리바이)를 위해서는 타소 존재 증명을 해야 하는데 이 사실이 불분명하다. 억울하게 누명을 쓸 수도 있다는 두려움. 이 두려움의 근원은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느끼는 공포다. 그러니까 시아버지에 대한 마음 속 증오가 실현되었을 때 느끼는 공포'다.
나는 딜레마에 빠진다. 죄와 벌, 지은 죄는 없으나 벌에 대한 공포 때문에 함정에 빠진 듯한 느낌.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 이 딜레마는 기리노 나쓰오의 << 아웃 >> 을 떠올리게 만든다. 흥미진진한 단편이다. 흥미롭기는 < 암흑식당 > 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암흑식당에서 손님들이 음식을 먹는 모습에서 진실을 알려면 어둠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대체로 진실했다. 음식을 빨리 먹는 사람, 특정 음식을 탐하는 사람, 아예 식사에는 관심이 없고 동행인의 몸에만 관심 있는 사람도 있었다. 동행인의 허벅지를 더듬다말고 바투 허겁지겁 섹스에 몰입하는 치들도 있었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너무 빨리 허위의 가면을 벗어던졌다. 바꾸어 말하면 빛의 세계는 인간에게 다양한 가면을 쓰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 암흑식당, 39
어둠에서 진실을 읽는 방식은 이연주 시인이 밝은 빛을 통해서 거짓을 읽는 자세와 일맥상통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 제발 잊지 말아, 저 전깃불이 얼마나 큰 어둠을 감추고 있는지(이연주, 「신생아실 노트」, 부분 ) " 이처럼 김살로메가 다가가는 지점은 느와르와 다크 쪽이다. 겨울에는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짜인 옷보다는 종종 굵은 실로 듬성듬성 얽힌 스웨터가 제격이듯이 이 소설집은 미문에 집착하는, 뻔한 수작 없이 일필휘지한다는 점에서 높은 주고 싶다. 다크한 맛이 일품이다. 가시는 길에 영광 있으라 !
1) << 라요하네의 우산 >> 누가 빈지를 잠갔나, 186
2) 신경숙 문학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신경숙 소설은 통속일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순문학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형편없는 소설이 된다.
3) 아빠는 시인이다, 2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