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 혈 식 물 이 되 고 싶 은 여 자 :
채식주의자와 내 여자의 열매
생각 없이 책장을 훑다가 낯선 제목이 눈에 띤다. 내 여자의 열매 ?! 내 남자의 열애'가 아니고 ? 이 책을 구매한 기억이 없는데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을 보면 책을 잔뜩 사서 구석에 쌓아두고는 이내 잊었던 모양이다.
나에게 신간 혹은 새 책은 아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사 놓고는 2,3년 후에나 읽으니 말이다. 그것은 마치 갓 잡은 생태를 비싸게 사서 냉동실에 넣어 두고는 몇 달 후에 꺼내 값 싼 동태로 소비하는 방식을 닮았다. 죽은 척하는 생태를 얼어죽을 동태로 소비하는 방식이 효율적이지는 않지만 어쩌랴, 그게 내 한계인 것을. 사는 속도에 비해 읽는 소비가 현저하게 더디다 보니 발생하게 되는 저장 방식이다. 그래도 아예 읽지 않고 방치하여 결국에는 굶어죽는 북어의 운명보다는 낫지 않은가. 문득 한강의 << 채식주의자 >> 를 언급한 신문 기사에서 채식주의자가 단편 << 내 여자의 열매 >> 에서 서사를 확장한 것이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
<< 채식주의자 >> 를 읽지는 않았지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 채식주의자 > 란 영화를 본 적이 있고 팟캐스트 방송에서 여러 번 << 채식주의자 >> 를 다루었기에 줄거리는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흥미롭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여태 읽지 못했지만 이 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남성성을 육식성(폭력성)으로, 여성성을 식물성(비폭력성)으로 분류하는 이분법적 도식이 식상했을 뿐만 아니라 형부가 처제의 몸에 꽃을 그린다는 설정도 억지로 짜맞춘 느낌이 들어서 거부감이 들었다. 꽃이 되고 싶은 여자와 꽃을 그리고 싶은 남자라...... 이 얼마나 유치원한 수작인가.
또한 딸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사위가 보는 앞에서 딸을 때리는 아버지에 대한 묘사는 그로테스크하기보다는 짜증을 유발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꿈 장면이다. 시나리오 작법 중에 꿈 장면은 가급적이면 쓰지 말라는 경고가 있다. 실력이 모자란 사람은 이야기가 막힌다 싶으면 꿈 장면을 삽입하는 버릇이 있다고 하던데,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습작으로 썼던 시나리오를 보면 꿈 장면이 많았다. 꿈이 시간과 공간에서 자유롭고 장면 전환에 유리하기에 " 인써트 " 효과로 자주 사용했던 것이다. << 채식주의자 >> 에서도 아버지가 개를 오토바이에 매달고 달리는 꿈 장면이 묘사되는데 그 장면을 꿈이라는 형식으로 풀어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일단, 단편 << 내 여자의 열매 >> 가 << 채식주의자 >> 의 원형이라는 데 호기심이 생겨서 읽어 보았다. 내용은 서로 도긴개긴이다. 남편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도 똑같다. << 내 여자의 열매 >> 에서 아내는 몸에 푸른 멍이 들기 시작하면서 이상 증세를 보인다. 말수가 줄어들면서 음식 섭취를 거부하고 급기야는 알몸으로 베란다에 나가 하루 종일 광합성(해바라기)을 한다는 내용이다. 나머지는 아내가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빌어 판타지로 처리하는데, 결국 아내는 나무처럼 화분에 심어지고 그 나무에서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 나는 두 단편 모두 서사와 서술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차이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말은 결국 << 내 여자의 열매 >> 를 확장한 << 채식주의자 >> 가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차이가 없다는 것은 서사의 외연을 확장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을 의미이니까. 반면에 재미있는 사실도 발견했다. 두 단편은 묘하게도 흡혈귀 - 서사'와 닮은 구석이 있다. 흡혈귀와 채식주의자는 정반대의 거울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반대로 동일한 상(象)이다. 그것은 뫼비우스의 띠이며 동전의 양면이다. 흡혈귀에게 물린 사람은 식물성을 멀리하고 동물성(피)만 찾게 된다. 반면에 한강의 << 채식주의자 >> 에서 채식주의자인 아내는 동물성(고기) 음식을 보면 구토를 일으킨다. 그들은 모두 특정 음식을 기피하다가 결국에는 거식증의 단계에 들어선다.
극우와 극좌는 결국 하나의 얼굴로 조우하듯이 결국 두 부류는 전혀 다른 이미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동일한 이미지인 것이다. 뱀파이어가 붉은 피를 원한다면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푸른 피를 원한다. 색이 다를 뿐이다. 그녀가 알몸으로 베란다에 나가 해바라기를 하는 행동은 광합성을 통해서 자신의 붉은 피를 푸른 피로 교체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즉, 광합성이란 푸른 피를 흡혈하는 과정이다. 단편 << 내 여자의 열매 >> 에서 아내는 붉은 피 대신 푸른 피를 갈망(갈증)하는데 " 낭종처럼 뭉쳐 있는 나쁜 피를 갈아내고 싶다(224쪽, 내 여자의열매) " 고 고백한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아내의 몸 전체가 점점 거대한 푸른 멍으로 퍼져간다는 설정은 그녀의 몸에 붉은 피에서 푸른 피로 교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욕망은 자주 언급된다. " 이 지긋지긋한 피를 갈지 못했을까요(237쪽) " 그러니까, 아내는 식물이긴 하나 흡혈 식물인 셈이다. 바로 그 지점이 << 채식주의자 >> 와 << 내 여자의 열매 >> 가 완벽하게 실패하는 지점이다. 두 단편에 등장하는 아내들이 열망하는 것은 식물성이지만 공교롭게도 그 이미지는 흡혈 식물'이다. 한강은 여성의 순수한 식물적 욕망을 그리고 싶었으나 실패했다. 채식을 선언한 뱀파이어 이미지는 어색한 조합이 아닐까 ? 책을 펼친 김에 첫 번째 단편인 << 어느 날 그는 >> 도 읽었다. 범죄자처럼 생긴 남자 1)와 보통의 여자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동거를 한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설마...... 살다 보니 권태가 찾아오고 여자는 바람을 피우고, 눈이 뒤집힌 남자가 여자를 죽이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 너무 뻔하잖아. "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소설은 권태를 느낀 나머지 여자는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고 그 광경을 목격한 남자는 여자를 칼로 찌르는 것으로 끝난다. 이토록 뻔한 진행 앞에서 한숨이 나왔다. 더 이상 읽을 의욕이 생기지 않아 책을 덮었다 ■
1) 소설은 시작하자마자 남자의 불길한 외모를 강조한다. " 넌 눈이 무섭게 생겼어 " 라거나 " 태식이 그 자식, 아무래도 무서운 놈이야. 언젠가 큰 사고를 저지를 거야. 그 눈깔 봤어 ? 못 봤으면 좀 자세히 봐. " 라거나. 언젠가 큰 사고를 칠 거란 말은 소설 속 현실이 된다. 이것은 독자를 무시하는 처사'다. 유령은 브루스 윌리스야, 바보야 ! 라고 극장 로비에서 스포일러를 흘리고 다니는 수작처럼. 잡히면 죽는다잉 ~ 설령, 이 단편이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강조하기 위한 이야기라면 더욱 부실한 구조'이다. 이래저래 형편없는 단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