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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  듯  한    타  자  들  :




 



터널은 끝에 가야 환해진다1)

 

 

 


 

 

        
 

                                                                                                       로빈슨 크루소는 28년 동안 무인도에서 살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그가 독수리도 아니면서 독수리인 척 독수공방한 세월은 24년이다. 

그가 섬에 사는 식인종에게 잡혀 먹힐 위기에 빠진 토인을 구한 때가 그 즈음이었다. 그가 섬에서 보낸 마지막 4년은 금요일과 함께 한 세월이었다. 그는 토인에게 " 프라이데이(금요일) " 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금요일에 토인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24년 동안 생존과는 아무 쓸모도 없는 날짜 계산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작에서도 프라이데이는 주변부'다. 주인은 로빈슨 크루소이고 노예는 프라이데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선은 디포의 제국주의적 태도에 기인한다. 미셸 투르니에는 이 작품에서 대니얼 디포의 제국주의 혹은 문명의 기만을 읽어낸다.

" 내가 볼 때 1719년에 나온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우선 그 소설에는 방드르디(프라이데이)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 취급되고 있어요. 그는 단순히 빈 그릇일 뿐이지요. 진리는 오로지 로빈슨의 입에서만 나옵니다. 그가 백인이고 서양인이고 영국인이고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디포의 소설에서 발견되는 두 번째 문제점은 모든 것이 회고적인 시각에서 처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섬에 혼자 던져진 로빈슨이 골똘하게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는 당장 구할 수 있는 것들만을 가지고 과거의 영국을 재현하고자 합니다. 즉 그는 난파한 배의 표류물을 주워 모아 섬 안에 작은 영국 식민지를 또 하나 만들어놓으려는 것입니다."

미셸 트루니에의 <<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 에서는 로빈슨에게 문명을 배우는 프라이데이가 아니라 방드르니(프랑스어로 금요일이란 뜻이다)에게서 로빈슨은 야생을 배운다. 그는 원주민인 방드르디에게 삶의 지혜를 배운다. 중요한 것은 " 타자 " 다. 독거남인 로빈슨 앞에 프라이데이 혹은 방드르디가 나타났다는 것은 곧 " 타자의 개입 " 을 의미한다. 금요일은 증인이다. 로빈슨이라는 백인 남성이 실존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유일한 증인인 것이다. 그렇기에 금요일은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인 존재'다. 금요일의 가치는 영화 << 캐스트 어웨이 >> 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프라이데이와 방드르디를 연기하는 배우는 놀랍게도 배구공 윌슨'이다. 주인공은 배구공을 의인화해서 윌슨이라는 이름을 부여한다. 그에게 그는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데 아무 쓸모도 없는 공이지만, 역설적으로 총이나 칼 같은 도구보다 중요한 존재다.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망망대해에서 윌슨을 떠나보내야 했던 주인공이 목놓아 울 때, 나는 대니얼 디포가 하찮게 여겼던 프라이데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영화 << 다이하드 >> 도 곰곰 생각하면 << 로빈슨 크루소 >> 의 변형이다. 나카토미 빌딩은 섬이고 악당들은 식인종'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프라이데이, 방드르디, 윌슨을 연기하는 대역은 누구일까 ? 흑인 경찰이다. 존 맥클레인 형사가 " 다이하드 " 하지만 " 다이하지 " 않은 데에는 위로와 공감 그리고 수다라는 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화력은 무전기'다. 주파수의 힘이라고나 할까 ? 입말이 길었다. 영화 << 터널, 2016 >> 를 보는 내내 떠오른 단상은 타자의 힘'이었다. 이 영화가 나를 슬프게 하는 것은 세월호에 대한 기시감이 아니었다. 터널에 갇힌 미나( 남지현 분)를 정수(하정우)에게 민폐를 끼치는 캐릭터라고 관객들이 인식할 때였다. 그녀는 정말 민폐녀'였을까 ?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영화 << 캐스트 어웨이 >> 에서 바람 빠진 배구공은 짐승을 사냥하거나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은 아니지만 주인공에게는 가장 필요한 존재였듯이, 또한 영화 << 다이 하드 >> 에서 무전기는 악당과 싸울 때 아무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었듯이, 터널 안에 갇힌 정우'에게는 따듯한 타자'가 중요한 것이다. 미나 때문에 물과 배터리 그리고 케이크의 양이 줄어들지만, 함께 있다는 것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된다. 그에게 그녀는 민폐가 아니라 큰 힘으로 작동한다. 탱이라는 개도 마찬가지'다. 탱이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는 따듯한 타자'다.

경제적 효율성이란 잣대로 보자면 프라이데이, 배구공, 무전기, 미나, 미나의 반려견 탱이는 하찮은 존재이지만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그것들은 경제학 범위에서 벗어난 상징적 가치'다. 이 영화는 여러모로 영리한 작품이다. 미나를 민폐녀라고 생각했던 관객은 미나의 사정'을 통해서 그녀를 이해하게 된다. 관객은 비로소 깨닫게 된다. 관객이 미나를 민폐녀라고 인식한 부분과 경제적 효율성을 이유로 터널 제 2공사 작업 재개에 찬성하는 여론이 68%라는 부분이 서로 같은 인식 (죽어가는 자에게 물을 주는 행위와 죽은 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공사를 중단해서 시민의 불편을 초래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논리) 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사실을 말이다. 재난 영화에서 " 재난 " 이라는 괴물을 만드는 주범은 항상 " 경제적 효율성 " 이다.

박정희가 독재는 했어도 경제를 살린 것은 높이 평가해야 된다는 말도 경제적 효율성이 낳은 착시이고, 시체 하나 건지자고 사람이 죽어나가게 생겼다고 말하는 것도 경제적 효율성이 낳은 악마성이며, 광화문 천막을 보며 세월호 사건이 일어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천막 농성이냐며 쉰소리를 하는 것도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드라이하며 쿨한 표현 속에 숨겨진 악마성의 발현이다. 이 영화는 계속 관객에게 그 질문을 던진다. 감독은 사람 목숨과 경제적 효율성의 교환 가능성을 묻는다, 가능한가 ?  뼈아픈 질문이다. 터널은 끝에 가야 환해진다. 영화는 정우의 생환으로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그리 행복한 결말로 보이지는 않는다. 또 다른 터널이 붕괴될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아나운서는 앞으로도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멘트로 재난의 시작을 알린다.  

" 대한민국의 안전이 또 한 번 무너졌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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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은 작은 터널 같은 것 / 가는 길은 나중에 환해진다 ( 최승자, 물 위에 씌어진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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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8-26 1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터널 공사에 지지대 볼트 빼멋었다는 기사 봤습니다....(경제적 효율도 좋습니다만, 설계상에 들어 있는 볼트 빼먹는 짓은 좀 말았으면 ㅠㅠ한개 6만원짜리...3500개를 빼먹었다고 하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6 10:13   좋아요 1 | URL
영화에서도 볼트 빼먹고 설계도대로 설계하지 않았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samadhi(眞我) 2016-08-26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작이 우리 선배가 하는 출판사에서 나온거라 들었어요. 예전에 선배가 페이스북에 이 책 얘기를 올려놨을 때 무관심하다가 영화가 나온다니 이제야 궁금해지네요^^;
그 선배가 보내준 몇몇 책들이 정말정말 별로였거든요. 저더러 한번 고쳐보라고 보냈던 것들인데...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6 10:43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소설 원작은 굉장히 비극적이라고 하더군요..
얼핏 들었는데 진짜 비극으로 끝나더군요. 개인적으로 원작의 결말이 더 마음에 들지만..

samadhi(眞我) 2016-08-26 10:46   좋아요 0 | URL
저도 아직 안 읽어봐서... 곧 사야겠어요. 반디앤루니스는 생일쿠폰도 주던데 알라딘은 그런 것 따위 없고... 해서 반디앤루니스에서 사야겠어요 ㅋㄷ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6 11:13   좋아요 0 | URL
잠깐 소재원 어디서 많이 들었다 했는데 아이유 제제논란 때 불매운동 어쩌구저쩌구 했던 작가죠 ?
그때 골때리는 사람이네, 했는데.... 그 사람이 이 소설 원작이네요. 몰랐네요.. ㅎㅎ.

samadhi(眞我) 2016-08-26 11:44   좋아요 0 | URL
그런 사실은 몰랐네요. 저는 우리 선배를 응원하는 거라 ㅋㅋㅋ

stella.K 2016-08-26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영화였군요.
매스컴에선 하도 하정우만 띄워서 뭐 무슨 재난 오락 영화? 이런 인식이 많은 것 같아요.
하정우의 필모를 보면 나름 진지한 연기를 해왔 는데 왜 웃긴 사람으로만 인식시키는지...
실재의 하정우와 연기하는 하정우는 좀 분리시킬 필요가 있는데...

제가 요즘 옛날 고전 영화에 꽂혀서 개봉 영화 잘 안 보는데
하룻밤 사이에 공기가 많이 달라졌어요. 이제 슬슬 영화관 나들이도 해야겠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7 12:41   좋아요 0 | URL
아. 여기에도 댓글이 달렸네요. 미안합니다.
댓글에 답글 안 달면 저는 미안하더라고요..
고의는 아니니 그려려니 하십시오.



영진공 가면 고전 영화 많이 상영합니다.
무료이니 맘껏 감상하셔도 됩니다..

yamoo 2016-08-27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루니에의 해석이 신선하네요..ㅎ
곰발 님의 <캐스트 어웨이> 해석도 재밌구요!
아무리 생각해도, 곰발 님은 영화 평론 마을에서 활동하셔야 할 듯...사람들이 이동진 이동진 하는데, 그걸 이해할 수 없어 하는 1인..전 박평식과 더불어 곰발 님 영화평이 짱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기에^^

근데, 곰발 님 기고하는 곳이 영화 잡지 일거라는 추정을 해봅니다요~ㅎ

곰곰생각하는발 2016-08-28 11:14   좋아요 0 | URL
거봉 박평식과 저를 동급으로 취급해 주시다니 감개무량합니다.
저도 이동진에 대해서는 공감이 잘 안 갑니다. 영상을 지나치게 활자화해서
해석한다고나 할까요.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