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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가 X에게 - 편지로 씌어진 소설
존 버거 지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09년 8월
평점 :
가시는 장미의 결심이다 :
X가 A에게
그러니까, 이 글은 6년 전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촛불의 열망은 꺼졌고 용산 망루는 전소되었다. 나는 한낮의 더위를 피해 지하철을 탔다. 딱히 목적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더위를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뿐이었다. 자리에 앉으면 책부터 꺼내는 습관을 가지고 있던 터, 자리에 앉자마자 소설 책을 꺼내 읽었다.
읽다가 재미가 없으면 종로 어디 즈음에 내려서 광장시장에서 소주 한 잔 하리라 _ 그런 마음으로. 내 예상은 보기 좋기 빗나갔다. 종로를 지나쳤다, 전철은 어느새 녹천을 향하고 있었다. 처음 본 지명이었다. 소설은 내가 손편지를 즐겨 쓰던 시절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소설 속 그는 나에게 안부를 묻고 있었다. 한겨울 얼었던 수도가 낮 볕에 녹아 녹물을 쏟아내듯, 눈물이 신앙심 깊은 신도의 방언처런 갑자기 터졌다. 당황스러웠다. 얼른 눈물을 훔치고 책을 덮었다. 지난 일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책을 펼쳤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가볍게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드니 한 여자를 서 있었다. 맞은 편 좌석에 앉아 있던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서 잠시 판단을 유보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건 그녀였다. 그녀가 내게 말했다. " 책 제목을 좀..... 알 수 있을까요 ? " 한낮에, 그것도 지하철 안에서 우는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책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녀의 순수한 호기심이 마음에 들어 책의 앞면을 보여주었다. 뒷면을 보여주는 것은 조롱을 의미하니까. 존 버거, A가 X에게.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제자리로 가려고 할 때 내가 서둘러 말했다. " 저.... 여기요 ! " 이번에는 침묵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건 나였다. " 이 책 가지세요. 전 다 읽었습니다. " 그녀 또한 내 순수한 호의를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사실...... 나는 그 책을 다 읽지 못했다. 내가 내린 역은 녹사평이었다. 이 책을 다시 읽기로 마음 먹은 때는 지금으로부터 2년 전이었다.
다시 읽으니 그때만큼 감정이 북받쳐 오르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슬픈 소설이었다. 구글링을 통해 이 소설에 대한 리뷰를 찾아 읽던 중 흥미로운 글을 읽게 되었다. 글쓴이에게 동의를 구하고 여기에 남긴다.
"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책을 읽고 있었다. 요즘은 다들 스마트폰 보느라 책을 읽는 모습을 보기 힘든데 그 모습이 보기 좋아서 노트를 꺼내 그 남자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눈치 채지 못하게 흘깃 보며 그림을 그리다가 그 남자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무슨 책이길래 저렇게 슬플까 ? 용기를 내 그에게 책 제목을 알고 싶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이 읽던 책을 나에게 주었다. 존 버거의 A가 X에게 라는 제목의 서간체 소설이었다. 책을 얻게 된 경우만큼 독특하고 슬픈 소설이었다. 그 남자를 생각하며 나도 울었다. 한낮의 울음이라...... "
이 리뷰는 5년 전에 작성된 글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안양교도소 접견실에서 만났다. 그녀는 한국은행 5인조 엽총 떼강도 사건의 주범으로 2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그녀와 내가 마주보았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내가 존 버거의 << A가 X에게 >> 라는 책을 당신에게 주었다고 하자, 그녀는 토끼 눈이 되어서 나를 또렷이 바라보았다. " 아, 그때 그 지하철에서 펑펑 울던 남자 맞지요 ? " 인연이란 참.... 나는 오늘도 안양 교도소에 수감 중인 그녀에게 손편지를 쓴다. 보내는 편지 속 내 이름은 샤비에르(Xavier)다.
그녀 이름은 아이다(A ida)이다. 소설 속 두 연인의 이름을 빌렸다. << A가 X에게 >> 로 연인이 된 우리는 소설에서처럼 옥중 서신을 왕래하는 처지가 되었다. 오늘도 나는 편지를 썼다. X가 A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를 말이다. 지난번에는 A가 X에게로 시작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녀가 나에게 보낸 편지였다.
A가 X에게
안녕, 나의 사랑 샤비에르 ! 나는 당신을 만질 수 없음에 늘 슬퍼해요. 당신과의 뜨거운 밤을 늘 상상하고는 하다가 어느새 슬픔이 몰려오고는 해요. 나의 사랑, 나의 목숨 샤비에르. 당신을 접견실에서 처음 만난 후 결심을 했죠. 그때부터 숟가락으로 벽을 파기 시작했어요. 놀라지 마요. 어느새 안양천까지 동굴을 팠답니다. 8월 3일을 D데이로 잡고 있어요. 나와 주실 거죠 ? 단 하룻밤이라도 당신과 뒹굴고 싶어요. 내 촉촉한 동굴을 당신에게 활짝 보여주고 싶답니다. 얼마나 촉촉한지, 얼마나 깊은지에 대해서. 아, 아아. 샤비에르. 나의 사랑, 나의 목숨, 나의 운명. 부르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from 당신의 사랑 아이다
추신 ㅣ 이 리뷰는 이 책을 읽지 않고 작성한 글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그동안 존 버거가 나에게 선물한, 그 주옥같은 문장들을. 별 다섯은 그 신뢰에 대한 보답이다. 8월 3일 이후로 이 서재에 글이 올라오지 않는다면, 나는 아이다와 함께 모히또 가서 몰디브 한 잔 하고 있을 것이다. 쇼생크 탈출에서 앤디와 레드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을 위한, 이 위대한 엑소더스에 당신의 응원을 바란다. 그녀와 나는 현재 이건희 생가의 금고를 털 계획을 설계 중이다. 쉿,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