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의 두께
친구는 달동네에서 살았다. 그곳은 강남 타워팰리스 뒷편에 있는 빈민촌 구룡마을 같은 곳. 부촌(까지는 아니었지만, 중산층 거주 지역이라고 해 두자) 을 지나야 달동네 초입에 진입할 수 있는 구조였다.
계급 갈등 느끼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는 주거비를 최대한 아끼다 보니 달동네에서도 우듬지에 속하는 곳에 방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에는 내리막길에서 넘어지기 일쑤였고, 여름에는 오르막길을 오르다 지치기 일쑤였다. 또한 밤에 날아다니는 날벌레들은 어찌나 많던지. 하지만 친구의 아지트는 고통을 감내할 만한 아우라가 있었다. 늦은 밤, 불륨을 낮춰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숲에서 우는 풀벌레 소리와 어우러져서 밤의 묘한 정서를 내품고는 했다. 어느 날이었다. 손질이 잘 된 정원이 있는, 꽤 근사한 집 대문 앞에 대형 스피커 두 개가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 얼터너티브 롹이나 재즈 뮤지션을 들먹이며 나를 주눅들게 했던 친구는 버려진 스피커를 보더니 낮게 외쳤다. " 시바...... 마린츠 스피커다 ! " 그 친구 왈, 그럭저럭 좋은 스피커'란다. 컴퓨터용 스피커로 음악을 듣던 친구는 욕심이 난 모양이다. 문제는 대형 스피커의 무게가 아니라 고장 유무였다. 저 무거운 것을 들고 자취방까지 가자니 얼추 30분. 더군다나 30도를 웃도는 한여름의 더위. 더더더더군다나 가파른 오르막길, 달동네의 끝 ! 만약에 땀 뻘뻘 흘리며 가져간 스피커가 고장난 것이라면 ?! 우리는 갈등했다. 아니, 그 친구는 갈등했다.
나는 좋은 추론 한 개와 나쁜 추론 한 개'를 생각했다. 좋은 추론은 정원 손질이 잘 된 정원으로 보아 스피커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고가(高價)일 수 있다는 점, 나쁜 추론은 물건을 버렸다는 것은 고장난 확률이 팔 할이라는 점. 나는 고장나지 않을 확률인 이 할'에 판돈을 걸기로 했다. 버려진 마린츠 스피커가 고장이 나지 않았다고 생각한 데에는 < 먼지의 두께 > 때문이었다. 스피커는 비교적 깨끗했는데 유독 옆면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였다. 그 사실은 스피커를 옆으로 누인 채 오랫동안 방치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두께로 보아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도 다락방이나 창고에 오랫동안 보관되었던 듯싶었다.
" 유레카 ! " 만약에 당신이 주인이라면 고장나서 쓸모없는 스피커를 오랫동안 창고에 보관할까 ? 스피커 한쪽 면에 쌓인 먼지의 두께가 말하고 있는 것은 " 버리기엔 아까운 물건 " 이라는 사실이었다. 쓰자니 싫증은 나고 버리자니 아까운 물건. 즉, 고장은 나지 않았지만 싫증이 난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스피커는 훌륭했다. 무엇보다도 높은 출력에서 터지는 고음의 박력과 섬세한 중저음은 메이드 인 차이나에서 만든 컴퓨터용 스피커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 아아아아아. 영화 << 쇼생크 탈출 >> 에 나오는 그 유명한 장면처럼 우리는 감동에 겨워 음악을 " 느끼고 "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 야, 시바 ! 이 동네, 너희들이 전세 냈니 !!! " 이 경험은 나를 탐정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 정도 추리에도 희열을 느끼는데 추리로 사건을 해결한 탐정은 얼마나 짜릿할까. 탐정은 타인(범죄자)의 마음을 읽는 직업이다. 좋은 탐정은 증거를 찾는 것보다 동기를 찾는 것을 우선한다. 수많은 추리소설이 증명했듯이, " 눈에 띠는 증거물 " 은 조작될 가능성이 높은 증거물이다. 살인 현장에서 발견된 < 오후 3시 26분에 멈춰진 시계 > 는 범인이 알리바이를 증명하기 위해 조작한 미끼라는 사실을 독자는 알고 있다. 그따위 트릭에 속지 않아 !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는 탐정이다.
프로이트는 마음을 읽는 탐정이다. 그래서 나는 프로이트 논문을 추리소설처럼 읽는다. 논문이 소설보다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프로이트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hot 해서 언터쳐블(言touchable)인 김연아와 박근혜를 건드렸다가 한방 먹은, 심리학계의 셜록 홈즈인 황상민 교수가 쓴 << 마음 읽기 >> 는 제목 그대로 한국인의 다섯 가지 심리 유형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분류에 의하면 나는 아이디얼리스트에 속한다. 좋게 표현하면 개성 있고 독립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독고다이에, 사교성 부족에, 중2병'이다. " 뭣이 중2인도 모름서 " 혼자 잘난 맛에 살았던 인간.
그래서 뭣이 중헌지도 모르냐고 욕을 먹던 시절. 캬,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세계인이 나를 왕따시키는 것이 두려워 내가 먼저 세계인을 상대로 왕따시켰던 세월들이 판타스틱한 총천연색 환등상'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헤어진 옛 애인은 나에게 자주 " 나 없이도 잘살 것 같아.... " 라는 소리를 했는데, 이 책에서도 똑같은 지적을 한다.
(아이디얼리스트 유형은) 연애가 관계의 모드가 발전하면 할수록 연인에게 " 나 없이도 잘살 것 같아 " 라는 말을 듣기 쉽다- 269쪽
(아이디얼리스트 유형은) 연애가 관계의 모드가 발전하면 할수록 연인에게 " 나 없이도 잘살 것 같아 " 라는 말을 듣기 쉽다
- 269쪽
잘살기는...... 개뿔 ! 황상민이 지적한 다섯 가지 심리 유형(리얼리스트,로맨티스트,휴머니스트,아이디얼리스트,에이전트) 가운데 내 유형이 가장 찌질한 유형 같다. 이 책을 덮고 나자마자 그 옛날 마린츠 스피커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알듯 말듯 싶다. 그 더운 여름날에 친구 자취방에서 마린츠 스피커를 엠프에 연결했을 때의 환희를 기억한다. 첫 소리가 마린츠 스피커를 타고 웅웅 울렸을 때의 환희. 그때 비로소 스피커 옆면의 먼지를 닦았던 기억이 난다. 고장난 스피커를 닦는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테니깐 말이다. 이 책을 읽다가 우울해졌다. 에라이, 오늘도 한잔 하련다. 문득, 심리학자란 심장 위에 쌓인 먼지를 닦아주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러니깐 말이죠. 흠흠. 심장 위에 먼지가 잔뜩 쌓였다는 것은 말이죠. 흠흠. 오래 쓰다 보니 실증은 났는데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까운 것입니다. 나랑 사귀자니 싫고 남 주자니 아까운 것과 같은 심리라고나 할까요. 집에 가서 연결해 보세요. 고장나지는 않았으니 우심방과 좌심실을 연결하면 심장 박동 소리 우렁차게 울릴 겁니다. 울지 마시고요. 아, 울지 마시라니까요. 네, 네네. 그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