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와 비빔밥
마이클 잭슨이 " 비빔밥 좋아요 ! " 라고 말했을 때, 한국인이 몽정에 다다른 표정을 지었던 것을 기억한다. 비빔밥은 정치적 목적을 띠기 시작했다. 마이클 잭슨이라는 월드 스타'가 이름 없는 변방의 음식인 비빔밥을 찬양하며 엄지 척을 내놓으니 감개가 무량한 것이리라.
농번기 때 밥 먹는 시간이 아까워서 바가지에 밥과 반찬을 섞어 대충 비벼 먹기 시작했다는 비빔밥을 월드스타가 소비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한국인에게 비빔밥은 진흙 속에 파묻혔던 진주였다. 몰, 라뵈서 죄송합니다아 ~ 이처럼 한국인의 문화적 자긍심은 주로 타자의 인정에 기대는 경향이 있다. 마이클 잭슨이 비빔밥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이명박의 아내 김윤옥 씨가 서민 세금으로 < 한식 세계화 > 사업을 펼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식에 대한 욕심이 과했던 것일까. 급기야는 김치 칵테일'을 선보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 좋아요. 김치 칵테일 !
김치가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고 해서 국격이 올라갈까 ? 김치가 < 글로벌 > 이라는 한계를 넘어 < 아스트랄 > 한 범위로 확장되었다고 해도 김치 때문에 국격이 올라가겠느냔 말이다. 그런 식이라면 인도는 카레 때문에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어떤 인도인은 카레를 영국과도 바꾸지 않겠다고 외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까 ? 나는 단 한 번도 카레를 먹으면서 인도가 위대한 국가'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카레는 카레이고 인도는 인도'이니까. 한강의 << 채식주의자 >> 를 번역한 데보라 스미스'에 대한 한국인의 황홀한 표정을 보면, 마이클 잭슨이 비빔밥이 좋다고 말했을 때가 떠오른다.
그러니까 한국인에게 데보라 스미스는 제2의 마이클 잭슨이다. 진흙 속에서 보물을 발굴해 주시고 세계 만방에 소개하야 안으로는 자주 독립을, 밖으로는 세계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셔서 감개무량하다는 표정이 읽힌다.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대목은 << 채식주의자 >> 의 문학성이 과대포장되었다는 소리는 아니다. 번역가인 데보라 스미스를 소비하는 언론 행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벌써부터 한국 문학을 한국인이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보다 한국 문학을 외국인이 자국 언어로 번역하는 것에 대한 국가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외국인 번역가를 발굴 육성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번역의 질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만약에 한국 문학을 한국인이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에 양질의 투자가 이루어진다면 ?
언론은 마치 데보라 스미스를 한국 문학을 구원해 줄 잔다르크'인 양 소개한다. 데보라 스미스여 ! 위기에 빠진 한국 문학을 구하셔 ~ 볼 때마다 불편한 지점이다. 서구 사회에 대한 과도한 선망과 인정 욕구가 만들어낸 열병이다, 병신같이, 참...... 배알도 없이.
덧대기
이웃의 전언에 의하면 : 데보라 스미스는 << 소년이온다 >> 에서 ˝ 좋은 사람 만나 잘 살고... ˝ 라는 문장을 " meet nice people... and live " 로 번역했다고 한다. < 빨래집게 > 보고 < A > 를 떠올릴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한강이 말한 < 좋은 사람 > 라는 문장이 < nice people(나이스 가이) > 이 아니라 < a suitable marriage partner(배우자감으로 적당한 사람) > 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좋은 사람 만나 잘 살라는 당부는 배우자감으로 적당한 사람 만나서 결혼하라는 당부이다. 그런데 번역자는 단순하게 근사한 사람을 만나보기도 하고 독신 생활도 즐기라고 해석한다. 이게 번역의 바이블'인가 ? 만약에 한국 번역가가 << 소년이 온다 >> 를 영어로 번역했다면 < 좋은 사람 만나 잘 살고 > 라는 문장을 < meet nice people... and live > 라고 번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많이 양보한다 해도 marry의 의미를 live로 해석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 소설을 한국 사람이 영어로 번역하는 것과 한국 소설을 외국인이 자국어로 번역하는 것은 모두 장단점을 내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