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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 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
지금 사귀고 있는 여자와는 나이 차이'가 띠-동갑을 넘어 13살이나 차이가 난다. " 도둑놈 " 이라고 욕해도 할 말은 없다. 내게 그녀는 어린 아가씨가 아니고, 그녀에게 나는 늙은 아저씨'가 아닐 뿐이다.
어제는 그녀가 사는 집에서 하루를 보냈다. 낡은 빌라'였는데 생활 소품에 신경을 써서 그런지 낡은 공간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녀의 과거를 잘 모른다. 몇몇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슬픈 듯 "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 라고 말하는 바람에 당황했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는 그녀에게 과거를 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 또한 내가 살아온 날들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았다. 혼자 살기에는 넓은 집이었다. 네 개의 책장을 이어붙인 서재에서 << 13.67 >> 이란 책을 꺼내들었다. 오늘은 그녀의 침대에서 이 책을 읽어보리라. 어릴 때부터 친구 집에 놀러가면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책장과 앨범 구경이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책장 속에 꽂힌 책을 구경했다. 그녀가 앨범을 들고 나타났다. 매우 낡고 두꺼운 앨범이었다. 내 예상과는 달리 첫 번째 앨범의 첫 장은 칼라 사진으로, 비교적 최근에 찍힌 사진들로 구성되었다. 의외였다. 왜냐하면 가족 앨범은 대부분 연대순으로 사진을 나열하기에 흑백 사진이 앨범의 첫 번째 페이지를 장식하기 때문이다. " 구성이 재미있네 ? " 앨범은 뒤로갈수록 칼라 사진에서 흑백 사진으로 변했고, 그녀는 점점 어린아이로 퇴화하고 있었다. 툭, 눈물 한 방울에 내 눈에서 떨어졌다. 오빠, 울어요 ?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ㅡ
로 시작되는 단편소설이 내 머릿속에서 번개처럼 지나갔다. 사진을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한 앨범. 페이지를 넘길수록 칼라에서 모노톤으로 바뀌는 설정. 사진 속 주인공인 그녀가 앨범을 넘길수록 점점 아이가 되어가는 과정-들. 그 이미지들. 이런 생각들은 순전히 찬호께이 장편소설 << 13.67 >> 을 읽다가 내 머리 속에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갑자기 생겨난 상상'이었다. 소설 << 13.67 >> 은 사진을 시간의 역순으로 배치한 앨범처럼 구성된 소설이다. 6편의 단편을 모은 연작 소설인데, 2013년으로 시작해서 1967년으로 끝나는 소설이다. 색깔로 표현하면 칼라에서 흑백으로 끝나는 독특한 소설인 셈이다.
트릭이 신선하지는 않았다. 첫 번째 단편 << 1장 - 흑과 백 사이의 진실 >> 에 나오는 트릭은 어느 정도 추리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설마하는 의심이 사실로 판명나자 기대보다는 실망이 앞섰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내용이 탄탄하다. 오늘의 사건은 어제의 사건과 연결이 된다. 마지막 장인 << 6장 - 빌려온 시간 >> 은 묵직한 감동을 준다. 인기 시리즈 영화의 프리퀄'을 보는 맛이 있다. 이 소설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 이 책을 읽지 않은 가상의 독자 " 에게는 스포일러'일 터이니 여기서 간략하게 마무리하기로 하고, 내가 구상한 상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하자. 번갯불에 콩 구워먹은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실라우 ?
ㅡ 오빠, 울어요 ? 그녀가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동네 사진관'에서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족 사진'이었다.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갓난아이를 가슴에 앉고 있다. 그 뒤에는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다정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 당신은 엄마를 닮았군... "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진 속 갓난아이는 아마도 그녀이리라. " 저에요. " 그녀가 사진 속 갓난아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젊은 부부 옆에는 앳된 남자가 서 있다. " 누구 ? " 내가 그녀에게 묻자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사진 속 앳된 남자를 다시 본다.
이목구비, 어디서 본 듯한 얼굴. 눈부신 외모. 나를 닮았다. 아니.... 그 남자는 나'다. " 그 남자는 내 오빠예요. 어릴 때 기억은 없어요. 이 사진을 끝으로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해요. 그러고 보니 이 오빠... 오빠를 많이 닮았어요 _ 여기까지 ! 캬. " 막장 오브 막장 " 이라는 헤어진 오누이의 사랑 이야기'라니. 내 상상력은 항상 엉큼하고 시큼하구나. 자극적인 설정으로 싸질러놓긴 했는데 어떻게 수습할 것인가 ? 뭐, 간단하다. ㅡ 눈을 떴다, 악몽을 꾸었다. " 꿈이구나. " 나는 침대 옆에 누운 그녀의 등골을 어루만졌다. 꿈이었구나, 그래... 시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