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음과 소리
볕에 바짝 마른 무명 라운드T를 입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청바지를 입고 밖을 나가면 몸가짐이 자유롭게 된다. 아무 바닥이나 풀썩 앉아서 잭 케루악 소설 << 길 위에서 >> 를 읽거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 상실의 시대 >> 를 읽는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청바지는 행동을 자유롭게 만드는 < 힘 > 을 가지고 있다. 먼지와 흙과 청바지는 친구요, 잭 케루악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훌륭한 소품이다.
반면, 양복을 입게 되면 행동에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다. 정장 차림으로 길바닥에 풀썩 앉아서 잭 케루악과 무라카미 하루키 - 책을 읽다가는 행인들에게 미친놈이라는 소릴 듣기 딱이다. 그 장면은 마치 양복 입고 가야금을 타는 연주자 꼴이다(혹시 국정교과서라면 모르겠다. 양복 입고 길바닥에 앉아서 국정교과서를 읽는 모습은 왠지 근사해 보인다. 아저씨, 잘 어울리셔요). 어쩌면 인간의 행동을 조율하는 것은 < 마음 > 이 아니라 < 의복 > 인지도 모른다. 글씨체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시를 가르쳤던 시인은 신춘문예에 응모할 때 가장 명심할 사항은 " 글씨체의 종류 " 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세상 모든 시는 < 명조체 > 로 쓰여져 있다고. 곰곰 생각하면 그 시인의 지적은 맞다. 현대시를 굴림체나 궁서체로 인쇄한 시집을 본 적이 없다.
고딕체가 박힌 기형도 시집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 시는 모두 명조체로 쓰여져 있었다. 하지만 명조체가 미학적으로 가장 뛰어나다는 소리는 아닐 것이다. 법정 출두 명령서가 명조체로 인쇄되어 있다면 끔찍할 것이다. 이처럼 때와 장소에 따라 서체도 다양한 법이다. 서체가 단 하나뿐인 국가는 불행한 국가'다. 글의 종류에 따라 서체가 다르듯이 날씨와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어울리는 서체'도 따로 있다. 개인적으로 오늘 같은 날은 맑은 고딕체'가 어울린다. 나는 얼굴보다는 목소리에 끌리는 유형이었다. 소리 중에서도 " 긁히거나 부딪치는 소리 " 를 유독 좋아했다. 내가 기계식 언더우드 타자기'에 끌리는 데'에는 팔 할이 < 소리 > 때문이었다. 월리엄 포크너, 스콧 피츠제랄드, 잭 케루악이 모두 이 타자기로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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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물랑루즈 오프닝
그리고 << 앵무새 죽이기 >> 에서 하루 종일 타자를 치는 캐릭터인 등장인물 이름이 언더우드 씨'였다. 하나 더 덧대자면 영화 << 물랑루즈 >> 에서 이완 맥그리거가 타자기 앞에서 타이핑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소품이 바로 언더우드 타자기다. 타자기 글쇠'가 잇달아 종이를 두들길 때 내는 소리는 한겨울에 마른 장작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 같기도 하고 한여름에 씨알 굵은 빗방울이 바닥을 두들길 때 나는 투두두둑, 하는 소리 같기도 해서 볕 좋은 대낮에 타자를 쳐도 " 우중(雨中), 깊은 밤에 타자를 치는 기분 " 이 들어 좋았다. 하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닥 듣기 좋은 청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취향이 다르다 보니 남들이 옥구슬 굴러가는 CD판'을 좋아할 때, 나는 독한 위스키와 담배로 숙성된 탐 웨이츠나 밥 딜런 노래와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리고 모건 프리먼이 만들어내는 목소리(들)을 좋아했다.
맑고 고운 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 후줄근한 늙다리 마초들의 목소리는 디지털이 만들어낸 소리'보다는 아날로그가 만들어낸 소음'에 가까웠을 것이다. 낡은 기계에서 쏟아내는 " 삐걱거리는 소리 " 말이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시장에서 축출할 때 내세웠던 전략은 " 소비자들이 아날로그적 소리'를 공해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전략 " 이었다. 기계 부속이 서로 맞물리면서 내는 소리는 어느 순간 < 소음 > 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디지털은 빠르게 소리를 제거하거나(무음) 소음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시장을 점령했다. 디지털은 이렇게 외쳤다. " 사물의 소리는 포스트모던의 적이다 ! " 그들은 시계 초침 소리'마저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사물은 점점 소리를 잃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를 쫒아내자마자 그들은 자신들이 공격했던 아날로그적 소음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디지털 카메라가 만들어낸 < 찰칵 > 이라는 소리와 키보드를 칠 때 디지털 회로가 기계식 타자기 소리를 재현하는 기능을 선보일 때마다 조지 오웰의 << 동물농장 >> 에 나오는 일곱 계명'이 떠올랐다. < 두 발로 걷는 것은 모두 적이다 > 라는 계명은 어느새 <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욱 좋다 > 로 바뀌어져 있었다. 디지털이 처음에 아날로그를 공격할 때도 이와 같았다. < 소음은 나쁘다 > 라는 계명은 어느새 < 소음은 나쁘지 않다 > 로 전략을 바꿨다. 소비자는 처음에는 CD에 열광했지만 이제는 LP가 주는 따듯한 청감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빛으로 소리를 읽는 방식보다 날카로운 바늘로 긁어 소리를 재생하는 방식이 더 인간적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 디지털 ㅡ 소음 > 에 의해 사라진 < 기계식 ㅡ 소리 > 를 재현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재능있는 감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몇 안 남은 기계식 타자기-몸'이다. 영화 << 용서받지 못한 자 >> 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독백으로 시작해서 독백으로 끝난다. 그는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대사는 간결하다. 그의 영화가 무엇보다도 좋은 이유는 장황한 대사로 상황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영화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최고작이었다(물론 이 결정은 << 밀리언달러 베이비 >> 를 보면서 후회했지만 말이다). 21세기 소비-자본주의 사회는 " 긁히는 소리 " 를 촌스럽거나 나쁜 것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불협화음은 나쁘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가 그렇다. 부속과 부속이 맞물리면 소리가 난다.
아날로그 시계는 초침 소리가 들려야 정상이고, 아날로그 카메라는 셔터가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나기 마련이며, 기계식 타자기는 글쇠가 종이를 세게 두들겨야 글자가 새겨진다. 하물며 다양한 입장과 이해 관계로 뭉친 인간 사회'는 오죽할까. 민주주의는 불협화음을 화음으로 만드는 과정을 존중하는 사회'다. 다시 말해서 화음은 불협화음으로 만들어졌다. 불협화음은 소음이 아니다. 박근혜는 이 사실을 모른다. 정말 무서운 사회는 시끄러운 사회가 아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사회가 비극적인 사회'다. 맞물리면 소리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