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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동사서독 리덕스 - Wong Kar Wai Collection Vol.6
왕가위 감독, 장만옥 외 출연 / 이오스엔터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동사서독 : 사막이 비록 죽은 짐승 귀
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 뿐이라 해도
복사꽃을 본 지 오래되어서 다음해 맹무살수의 고향에 갔다. 하지만 그곳엔 복사꽃은 없었다. 복사꽃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 떠날 때에야 깨달았다. 복사꽃은 그 여자의 이름이었다. 그녀의 눈물을 보고 나서야 황약사가 날 찾아왔던 이유를 알았다.
- 동사서독, 구양봉(장국영)의 독백 中
주요 등장인물
▶ 구양봉(장국영) : 일명 서독. 백타산의 고수였으나 지금은 사막의 살인청부 알선자이자 은둔자로 산다. 실연의 아픔을 지니고 있다.
▶ 황약사(양가휘) : 일명 동사. 매해 봄이 되면 동쪽에서 말을 타고 찾아오는 구양봉의 친구. 기억을 지워주는 술 취생몽사를 들고 와서는 저 혼자 마시고 떠나버린다.
▶ 모룡연/모룡언(임청하) : 황약사를 사랑했던 여인. 하지만 버림받은 뒤로는 두개의 분열된 인물, 오빠 모룡연, 여동생 모룡언으로 살고 있다. 두 인격체가 번갈아 구양봉을 찾게 된다.
▶ 맹무살수(양조위) : 한때는 무림 고수였으나 지금은 눈이 멀어져가고 있는 맹인 무사. 마적 떼와 상대하다 결국 죽는다.
▶ 완사녀(양채니) : 동생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자 구양봉을 찾아와 원수를 갚아달라고 청하는 가난한 여인.
▶ 홍칠공(장학우) : 완사녀의 청을 받아 복수를 해주고 홀연히 떠나가는 협객. 훗날 구양봉과 맞서게 된다
왕가위 영화 가운데 제일 많이 본 영화는 << 아비정전 >> 이었다. 40번 넘게 보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질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연애 기간이 4년 차에 접어든 연인들이 느끼게 되는 권태와 닮았다. 40번 넘게 보다 보니 단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자 결정은 신속했다.
히틀러가 자주 사용했다는 입말을 빌리자면 : 얼음처럼 차갑게, 그리고 번개처럼 재빨리 << 아비정전 >> 과 결별하였다. " 안녕, 아비정전 ! 개똥에 쌈 싸 드셔 ~ " 내가 보기에는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영화 가운데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작품은 << 화양연화 >> 였고, 완성도가 가장 떨어진 작품은 << 동사서독 >> 이었다. << 열혈남아 >> 와 << 아비정전 >> 으로 승승장구해서 자신만만했던 왕가위 감독이 사막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 재앙에 가까우리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왕가위 감독은....... 많이 당황하셨어요. 사막 한가운데 세트를 세운 지 어언 2년, 랭보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었으리라. 시나리오는 즉흥적으로 바뀌기 일쑤였고, 배우들은 영화를 찍으면서도 줄거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구양봉을 연기했던 양가휘가 황약사가 되고, 황약사를 연기했던 장국영이 구양봉으로 배역이 바뀌는 극단적 상황에 이르렀다. 이처럼 선장이 길을 잃으니 불만 섞인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누군가 말했다. " 왕가위 씨, 개똥에 쌈 싸 드셔 ~ " 출처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미루어 짐작컨대 배우 왕조현이 아닐까 싶다. 주연인 줄 알고 촬영에 참여했으나 알고 보니 엑스트라에 불과했으니까. 이 영화가 불균질적인 텍스트인 것은 감독이 의도했다기보다는 실패에 따른 결과'처럼 보인다. 배우들은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바뀌는 쪽대본으로 인하여 영화에 대한 몰입이 불가능했고, 배역이 바뀌는 바람에 그동안 찍었던 엄청난 분량의 필름은 쓸모가 없어졌다. 감독은 고민에 빠졌다. 그가 선택한 것은 편집의 묘미'였다.
이것저것 넣다 보니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국물 맛이 되자, 최후의 수단으로 라면 스프'로 맛을 잡은 꼴이다. 나에게 영화 << 동사서독 >> 은 실패한 영화'였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실패가 주는 " 아우라 " 로 인하여 걸작이 되었다. 실패가 반드시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한 발명품이 나중에는 위대한 발명품이 되듯이 영화도 종종 그런 경우가 있다. 좋은 예가 바로 << 사냥꾼의 밤, 1955 >> 이다. 배우였다가 처음으로 영화를 연출한 찰스 로튼'은 욕심으로 인하여 이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영화를 만들었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영화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단정적으로 말해서 << 동사서독 >> 은 실패한 영화이면서 동시에 위대한 영화'다. 이 영화에서 나를 사로잡는 인물은 양조위가 연기한 < 맹무살수 > 였다.
맹인 무사인 그는 복사골'이라는 장소에 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마적 떼와 싸운다. 하지만 하늘은 그를 돕지 않는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자 한치 앞이 어둠이다. 사실, 시력을 잃어 가는 그가 마적 떼와 싸우기로 한 결의는 무모했다기보다는 차라리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 싸움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무사는 싸우다가 죽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칼이 빠른 왼손잡이 도적에게 목이 베인다. 칼 솜씨가 좋은 무사는 적의 목을 벨 때 경쾌한 바람소리를 내는 법. 맹무살수도 한때는 무림 고수여서 적의 목을 벨 때 바람소리를 듣고는 했다. 하지만 그는 도적 떼에게 목이 베이면서 그 소리를 듣는다. 솜씨 좋은 칼잡이가 자신의 목을 벤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아, 했다. 그는 왜 복사꽃 흐드러진 복사골을 가려고 했을까 ?
다음해, 구양봉(장국영)이 복사골'에 갔을 때, 그는 그곳이 복사꽃이 피는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맹무살수가 그리워했던 곳은 장소'가 아니라 여자'였다. 도화桃花(복사꽃)'라는 이름의 아내. 내가 이 장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 處의 애상 " 에 있다. 사랑할 때는 보이지 않으나 헤어지고 나면 보이는 것이 바로 < 장소 > 다. 이별 전과 이별 후의 장소는 같지만 동시에 같지 않다. 다시 찾은 장소는 텅 빈 기표로 작용한다. 그 장소는 그(혹은 그녀)와 함께 있을 때에만 의미를 갖는다. 아무리 쾌적한 환경이라 해도 그(혹은 그녀) 없이 홀로 있는 그 장소는, 아이고.... 의미 없다. 그러므로 < 사랑 > 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단어는 < 장소 > 다. 맹무살수가 도화(桃花 : 복사꽃) 라는 이름 대신 복사골이라는 장소를 언급한 것은 그가 그녀를 떠났기 때문이다
이 장소는 맹무살수에게는 상처'다. 상처(傷處)라는 단어에서 처가 한자로 處인 이유이다. 그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실내장식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채울 수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가장 좋은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이다. 영화 << 동사서독 >> 에서 사막은 텅 빈 장소'에 대한 은유다. 이들은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정처 없이 떠돈다. 사막의 반대말은 정처'다. 이처럼 정처(定處 : 일정한 장소)가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의미이니까. 나는 이 폐허'가 좋다. 사막이 비록 "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 뿐 " 이라 해도 말이다.
- '얼음처럼 차갑게'와 ' 번개처럼 재빨리'는 히틀러가 좋아하는 표현들이었다(히틀러에 붙이는 주석, 제바스티안 하프너
- < 타락천사 > 와 < 중경삼림 > 은 작품이라기보다는 소품에 가까우니 제외하도록 하겠다
- 맹인 검객이라기보다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무사다
- 處 : 곳 처
- 도화'라는 여인은 바람둥이 황약사(양가휘)와 바람을 피운다. 맹무살수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 정처 없이 사막을 떠돈다. 맹무살수가 도착하기 전 도적 떼'를 소탕한 이'가 바로 황약사'였다. 그러니까 도적 떼의 2차 공습은 복수를 위해서였다.
- 뼈아픈 통증, 황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