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과 지게꾼
환상통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
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베어 나오는 그 환상통,
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듯 아픈데도, 갑자기 없어져 버린 듯한 날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木質(목질)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치고 뒤돌아섰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이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상실감일까 ? 새가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허리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 끝으로 사라진다
발자국은 없고, 바퀴 자국만 선명한 골목길이 흔들린다
사는 일이, 저렇게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라면 얼마나 가벼울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창 밖,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분명 팔과 다리이고, 또 그것은 분명 몸에 붙어 있는데
사라져 버린 듯한 그 상처에서, 끝없는 통증이 스며 나오는 것 같은 바람이 지나고
김신용, 시집 < 환상통 >
<< 환상통 >> 을 관통하는 중심은 부재'다. 시인은 " 새가 앉은 자리 " 를 보는 게 아니라 "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 를 본다. 전자가 < 존재 - 인식 > 이라면 후자는 < 부재 - 인식 > 이다. 김신용 시인은 < 없음 > 에서 < 있음 > 을 인식하는데 가지(枝)는 새(鳥)와 교환된다. 그러다 보니 " 가늘게 흔들리는 " 가지는 새의 심상'이다. 존재는 곧 무게'다. 환상통'도 마찬가지'다. 환상통 Phantom Pain 이란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환자가 절단된 부위에서 감각'을 느끼는 헛 통증'이다. 이 또한 < 없음 > 에서 < 있음 > 을 자각하는 현상이다. 김신용은 원래 지게꾼이었다. 서울역에서 지게를 지고 무거운 짐을 날랐다. 하루 품값으로는 기껏해야 오늘 하루를 연장할 수밖에 없는 빈곤,
그래도 살기 위해서는 지게를 져야 하는 고된 삶. 어느덧, 지게는 등뼈가 되어 신체 일부가 되었다. 이러한 " 지게 " 는 " 허리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 " 와 연결된다. 리어카는 허리굽은 할머니의 등뼈가 된다. 시인은 < 새 > 를 인식하는 방식으로 < 리어카 > 를 통해 " 발자국은 없고 바퀴 자국만 선명한 골목길 " 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발자국은 없고 바퀴 자국만 선명한 골목길을 통해 리어카를 인식한다. 존재는 < 무게 > 라는 흔적을 남긴다. 이들(시적 화자, 허리굽은 노인)에게 지게와 리어카는 생에 대한 형벌 기계'이지만 이 도구 없이는 밥벌이를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그래서 " 저렇게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라면 얼마나 가벼울까 ? " 라며 찬탄하지만
동시에 " 몸에 붙어 있는데 사라져 버린 " 것에 대한 " 상처 " 를 걱정하기도 한다. 이러한 인식은 카프카와도 연결된다. << 변신 >> 에서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과 지게꾼(혹은 수레꾼)의 " 접골 " 은 유사하다. 그들은 모두 등에 딱딱한, 변형된 등뼈로 접골된 존재였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자기 무게'에 덧대어 또 다른 무게를 얹는 것은 슬픈 일. 거대한 벌레로 변한 잠자가 오늘의 출근을 걱정하듯이 시인은 오늘의 벌이'를 걱정한다. 그들은 모두 시시포스 신화 속 인물이다. 내가 보기에는 2000년대 현대 시인 가운데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시인은 김신용이다.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 문학동네 소속 문학비평가(출판사와 문학평론가의 관계는 마치 연예기획사와 소속 연예인의 관계와 비슷해 보인다. 신경숙 표절 사건에서 핵심은 신경숙이 아니라 출판자본과 그 밑에서 기생하는 기형적 문단 구조'다. 문학평론가의 매문은 표절보다 심각한 도덕적 해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동네가 자사에 비판적인 5인의 문학평론가에게 결투를 신청한 점은 그들이 이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모르고 있다는 반증이 된다)는 자사 문인'을 홍보하느라 정작 중요한 작품은 놓쳤다. 홍보 부장으로 전락한 평론가의 영혼 없는 성찬이 만든 부작용은 아닐까 ? 신경숙을 잃었다고 문학의 위기를 걱정하지 말고, 김신용을 얻었으니 한국 문학은 아직 희망이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모든 문학은 폐허에서 꽃을 피운다. 온실 속에서 자란 꽃(신경숙)은 시들게 마련이다. 문학의 위기'는 문학이 건강하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