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 괴물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창비의 죽음에 붙여
봉준호 감독의 영화 << 마더 >> 는 영화 << 괴물 >> 과 닮았다 ( http://blog.aladin.co.kr/749915104/7418303 : 괴물, 어마어마한 암컷 ). 둘 다 탐욕스러운 여성 괴물이 등장한다. 봉준호 감독이 영화 제목을 << 엄마 >> 라고 하지 않고 << 마더 >> 라고 설정한 속내는 “ 마더 ” 가 “ 머더 ” 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제목 속에는 이미 줄거리와 주제가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 << 마더 >> 에서 국민 엄마 김혜자‘는 내 새끼를 위해서 동분서주 뛰어다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밝혀진 진실은 뜻밖이었다. 하는 수 없, 어 ! 김혜자는 금쪽같은 내 새끼의 유죄를 덮기 위하여 살인을 저지른다. 마더는 “ 머더 ” 가 된다. 소설가 김영하가 서정주의 죽음에 붙여 쓴 글 제목은 << 문제적 아버지가 죽었다 >> 였다.
문제적 아버지가 죽었다.
김영하
눈이 펄펄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당 서정주가 세상을 떴다. 영화 잡지에 시인 얘기를 하게 돼서 안됐지만, 그래도 미당 얘기를 하지 않고서는 어쩐지 마음이 편지 않을 것 같아, 연재의 첫 번째를 미당 얘기로 막는다. 문단에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나는 시인 아무개와 미당의 문제를 두고 다투고야 말았는데, 다툼의 전말은 이러했다. 80년대에 미당이 저지른 행적을 알고 있는 이상, 그의 시에서 더 이상의 어떤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없다는 나, 미당의 시에서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하는 너 같은 작자는 문학을 할 자격이 없다는 그. 우리의 다툼은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런 미학적 가치판단의 문제는, 한쪽이 변하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80년대식 용어로 말하자면, 세계관의 문제다. 영악한 우리는 더 이상은 그 문제로 다투지 않았다.
그 뒤로 세월이 흘렀다. 다른 시인이 내게 미당 새 전집을 선물해 주었다. 어느 어둑한 밤, 나는 가만히 앉아 시편들을 읽었다. 오, 빌어먹을. 욕이 나왔다. 그리고 곧 입을 다물었다. 이를테면 나는 이런 시구들의 광채 앞에서 할말을 잃었다. "아름다운 배암/얼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또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토록 살고 싶은가"라든지. "피가 잘 돌아...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혹은 "어찌하야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피가 먹고 싶습니까?" 같은 구절 앞에서, 내 자신이 이다도시나 로버트 할리 같은, 그저 한국말 조금 할 줄 아는 외국인처럼 느껴질 때, 나는 고만 글 쓰는 일을 콱 때려치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나와 다툼을 벌일 뻔했던, 그 선배 시인의 심사를 조금은 가늠하게 되었다. 미당의 시 앞에서 우리는 그저 비재에 몸부림치는 아둔한 습작생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증오스럽다. 그 증오에는 질투의 피냄새가 섞여 있다. 파블로 피카소의 부고를 받은 뉴욕의 한 화가가 "오늘 내 아버지가 죽었다"고 외친 그 심정을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미당이 20세기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한 시간 앞두고 세상을 떴다. 젊어서는 친일파였으며 늙어서는 전두환에게 축시를 바친, 정치적으로는 옳지 못했으나 너무도 아름다운 시를 남긴, 문제적 인물 미당은 20세기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가 남긴 문제들은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우리에게는 이런 의문이 남아 있다. 예술가에 대한 정치적 치죄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입장에 서 있었던 시인, 작가, 화가, 무용가, 가수들에 대해, 또 그들의 창작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친일하거나 전두환에게 협력할 기회도 없었던 이들에게도 그들에게 돌을 던질 자격은 있는 것일까. 내가 그였다면 과연 친일과 독재협력의 멍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인가. 일본이 영속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일본에 협력했던 친일파 지식인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그늘 아래 미국적 가치의 한국화에 힘쓰는 친미 지식인과 얼마나 다른가. 월남전이 자유를 위한 성전이니 어서 젊은이들을 보내야 한다고 외쳐댔던, 그러나 사실은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에 호응했던 나팔수들과 서정주는 어떻게 다른가. 가난과 장애 속에서 친일이 죄인지도 모른 채, 관공서에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인데도 친일파가 되어버린 운보 김기창과 같은 사람의 예술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죄가 되는 일일까. 민족이라는 가치는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에 항상 우선하는가. "나는 아일랜드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했던 <율리시즈>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은, 그가 자신의 고향과 민족을 배신했다는 이유 때문에 평가절하되어야 하는가.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과 사회의 일반적 통념이 배치될 때,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가, 따위.
미당은 민족반역자이며 독재협력자라고, 그러니 그에 대한 어떤 추모도 역겹다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쉬운 일이다. 미당의 시를 읽은 적이 없다면 더더욱 쉽다. 게다가 신나는 일이다. 아주 적은 에너지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의 모든 정치적 실수와 인간적 결함을 알면서도 그를 껴안고 가는 자들, 나는 그런 이들을 몇몇 알고 있는데, 그런 결정은 쉽지 않다. 죄 많은 이의 시신에 발길질을 하는 자는 많아도 그를 거두어 장사를 치르는 이는 드물다. 그러니까 어쩌자는 거냐, 고 내게 물으면 할 말은 많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 20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지금, 미당을 읽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불길한 일이라는 것. 그를 어떻게 매장할 것인가에 우리의 20세기가, 누더기 근대문학이, 오욕으로 점철된 현대사가 매달려 있다. 이런 얘기를, 영화잡지의 지면을 빌려 하고 있으니 송구스럽다. 독자들도, 그리고 망자께서도 빈소에도 못 찾아간 어느 심약한 자식의 부조금이려니 여겨주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다.
시인의 재주와 타락 앞에서 흔들리던 김영하는 서정주를 " 아버지 “ 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문제적 아버지 ”라고 명명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김혜자 또한 “ 문제적 어머니 ” 다. 그녀는 motherthood/모성애와 murder/살인‘이 혼합된 인물이다. 그러니까 murder라는 기표에는 “ 죄의 유무 판단을 상실한 채 무조건 내 식구를 감싸려는 극단적 이기주의 ”라는 기의와 연결된다는 점이다.
여기 또 한 명의 문제적 어머니가 있다. 바로 신경숙’이다. 하지만 그녀를 서정주와 연결할 수는 없다. 작가의 도덕적 타락이라는 공통분모는 있지만 그녀는 서정주와는 달리 글 쓰는 재주는 부족 보통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 글 보쌈 > 을 한 것'일까 ? 내가 신경숙을 거론하면서 영화 << 마더 >> 를 호명한 이유는 “ 문제적 어머니 ” 인 김혜자와 신경숙을 동일화하려는 속셈이 아니다. 오히려 김혜자는 출판사 창비와 닮은 꼴이다. 창비는 죄의 유무 판단을 상실한 채 내 식구를 감싸려는 극단적 이기주의를 닮았다. 남성 가부장 혈맹주의 ( brotherhood ) 는 눈먼 모성애 혈맹( motherthood )과 연결된다. 내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 HOOD 사회 >> 다. 남자는 불알후드 brotherhood 로 뭉치고, 여자는 모유후드 motherthood 로 뭉친다.
또한 아파트 주거 형태가 형편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산다는 측면에서 아파트 문화는 house hood 인 셈이다. 그뿐인가 ? 경상도후드와 전라도후드가 각자 뭉치고 노동자는 정규직후드와 비정규직후드로 편을 갈랐으며, 성골(聖骨)은 체제에 편입하기 위해 우파'가 되고 잔뼈가 굵어서 어른이 된 성골(成骨)은 일베 사상에 기대어 체제를 옹호하면서 극우'가 된다. 뼈다구 앞에 聖이 붙느냐, 아니면 成이 붙느냐에 따라 계급이 결정된다. 피(혈통)의 우생학에 덧대어 뼈(뼈대)의 우생학까지 거론하니 부끄러운 뿐이다. 이승만은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고 했으나, 이 애국적 술책은 지나쳐서 요즘은 뭉치면 부패한다. 한국 문단 또한 " - hood " 다. 한국 문단과 문인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 시국선언 " 이라는 근사한 퍼포먼스로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지만 하는 짓은 똑같다. 집단 지성을 대표했던 창비가 세월호 사태를 질타하면서 돈에 눈먼 사회를 격정적으로 비판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창비는 돈 앞에서 양심을 판다.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창비에 소속된 편집위원들은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 brotherhood " 를 비판했지만 정작 집단 내 " motherthood " 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침묵의 다른 이름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 ! 라는 정언 명령이다. 그들은 정치 권력을 비판할지언정 문학 권력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왜 ? 그들 스스로가 문학 권력이기에 비판은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신경숙은 “ 문제적 어머니 ”다. 그래서 한국 문학은 비극이다. 나는 그녀의 말 : 우국이란 단편은 읽어본 적도 없어요 을 믿는다. 하지만 서로 모르는 두 작가'가 동일한 문장을 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신경숙이 표절을 한 게 아니라 미시마 유키오가 표절을 한 것이라고 믿는다. 신경숙이 표절을 안 했다고 하면 미시마 유키오가 표절을 한 것이다. 둘 중 하나는 범인이니까 말이다. 미시마.... 나쁜 새끼.
창비는 보다 거대한 “ 문제적 어머니 ” 다. 그래서 한국 문단은 지옥‘이다. 예상 가능한 동선은 이렇다. 신경숙의 침묵에 대해 출판사는 작가의 오랜 고행 끝에 내린 묵언수행 따위로 포장할 것이 분명하다. 심장은 썩어도 입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등단 제도와 문예지를 끼고 도는 편집위원들은 그들만의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 꼴이 보기 싫어서 손창섭은 죄인처럼 한국을 떠난 것이 아닐까 ? 한국 문단이 썩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보인다. 이응준은 내부고발자'라는 딱지가 붙고, 신경숙과 창비에 비판적인 논조는 익명을 요구하는 문학평론가의 요구에 따라 " 익명 " 으로 언론에 등장한다. 어디서 많이 본 상황극이다. 신경숙 사태를 보며 황우석 사태를 떠올리는 것은 과대 망상일까 ? 이응준은 왜 내부고발자가 되었으며, 쓴소리를 직업으로 해야 하는 문학평론가는 왜 익명 뒤에 숨어서 쓴소리를 할까 ?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필명으로 쓴소리를 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늑대가 없으면 토끼가 왕이 되는 법. 토끼가 말한다. “ 어화둥둥, 금쪽같은 내 새끼. 울타리 밖은 칼바람 부는 시베리아 벌판이란다. 안(內)의 항온성을 믿으렴 ! ”
울타리 안에서는 울타리 밖에서 떠도는 뒷말이 들릴 리 없다. 똥 묻은 토끼가 겨 묻은 늑대를 나무란다. 토끼가 완장을 차면 늑대가 되는 법. 꼰대란 그런 것이다. 내 허물은 보지 못하고 네 허물만 본다. 헛물켜지 마세요. 너나.... 잘하세요 ■
* 이방인, 알베르 카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