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애는 정당하다
이런 글을 쓴 적 있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고달픈 일이다. 하물며 여성이면서 동시에 乙이며 못생긴 여자'는 더 고달프다. 그렇다고 대한민국이 예쁜 여자'가 살기에 편한 사회는 아니다. 예쁜 여자는 뭇 사내들에게 표적이 되기 일쑤다. 좆대가리'는 염치를 모르고 눈치도 없다. 이래저래 여성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은 " 개미지옥 " 같은 곳'이다. 세탁기와 전기 밥솥이 여성을 가사 노동에서 해방시켰다며 여자가 살기 좋은 시대로 정의'를 내린다면, 도시 가스 난방이 남성을 바깥일에서 해방시켰다며 남자가 살기 좋은 시대로 정의를 내려도 할 말은 없지 않을까 ? 그 옛날, 장작을 구하는 일은 고된 일과'였으니 말이다. 장작을 구하려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지게꾼에게 심심한 애도를.
< 계집 > 이란 말이 여자를 낮추어 부르는 소리'란 사실을 모두 알고 있지만,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한자 女의 으뜸 의미가 여전히 " 계집 " 이라는 사실은 씁쓸하다. 교육 현장에서조차 양성평등은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지 오래이다. 교육은 기회 평등의 장'이 아니라 차별을 낳는 도구'다. 서울대는 이제 계급 사회를 양성하는 기관이 되었다. 당신 딸을 두고 " 둘째가 올해 스무 살이었던가 ? 그 계집 보니 잘 컸어, 잘 컸어 ! " 라고 말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언어 구조는 사회 구조의 축소판'이다. 나아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자크 라캉이 한 말'이다. 요즘 곽정은 씨가 남긴 트윗이 논란이 되는 모양이다. 사소한 트윗-질'을 주요 기사로 작성하는 것을 보면 의아한 대목이다. 으, 아 ~
그녀가 대중으로부터 대표 밉상이 된 원인은 " 섹스 칼럼리스트 " 란 직업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솔직하게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것은 금기'다. 주류 남성 입장에서 보면 여자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지, 사랑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주류 남성 사회는 한국 여자가 성적 욕망을 표현하는 순간, 그녀를 값싼 년으로 취급한다. 곽정은 씨에 대한 공격은 양가적'이다. 그녀는 성적으로는 < 값싼 년 > 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지위로는 < 잘난 년 > 이다. 그 이유 때문에 그녀는 표적'이 된다. 곽정은 씨'가 지적하는 것은 택시 기사라는 직업에 대한 경멸이 아니라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려는 잘못된 언어 습속'에 대한 불쾌'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 예쁜 공주 " 라는 표현이 귀에 거슬릴 수 있다.
신분 사회'가 아닌 데도 불구하고 굳이 공주를 들먹이는 태도에서 춘부장의 쓸데없는 오지랖이 엿보인다. 물론 그가 그런 생각으로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말이란 것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 듣는 이에 따라서는 달리 해석될 수 있는 지점이다. " 예쁜 공주 " 라는 표현이 주로 나이 어린 여자아이'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마흔을 눈앞에 둔 여성이 듣기에는 매우 거북스러운 표현일 수 있다. 더군다나 < 공주 > 가 주로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여자'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제는 한국 사회가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여성의 욕망을 긍정해야 되지 않을까 ?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악다구니를 볼 때마다 느끼게 되는 생각'이다. 괴테가 이런 말을 했다. “ 여성성이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 ”
대한민국은 편견을 옹호하고 편애를 금지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이 방향 설정은 잘못되었다. 반대로 편견은 금지하고 편애는 옹호되어야 한다. 하워드 진은 달리는 기차에 중립은 없다고 말했고, 프란체스코 교황은 고통받는 자 앞에서 중립은 없다고 말했다. 이들이 말하는 편애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조건 없는 지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 둘 중 하나 " 를 선택해야 하는 사회적 압력의 연속체'이다. 자유 의지'로 무엇인가를 선택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사회주의 사회'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구조인 이유는 무한한 선택의 자유'에 있다. 편애는 만족스러운 선택을 하기 위한 방법으로 잘못된 선택을 최소화한다.
그렇기에 취향이 탄생하는 것이다. 내가 여성을 지지하는 데에는 이유가 없다. 일단 싸움을 말리는 게 최선이다. 그녀에게 돌 던지지 마라. 이 오오츠크해 시밤바 새끼들아. 시작은 부뚜막에 오른 교양인처럼 얌전했으나 끝은 하이에나처럼 천박하구나. 어쩔 수 없다. 이게 내 취향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