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아픈 통증에 대하여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 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이 시는 시거 로스 음악과 함께
이 詩에서 시인은 독자에게 < 알이 꽉 찬 꽃게 > 가 어떤 의미인지를 최대한 늦춘다. 초반에 " 뱃속의 알 " 이라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기는 하지만 거지반은 단순히 알이 꽉 찬, 먹음직스러운 꽃게'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일종의 감정 유예'다. < 카타르시스 > 란 응집된 감정이 한순간에 터지는 경험. 그렇기에 진실은 항상 끝에 가서 밝혀져야 감정적 동요가 크다. 영화 << 올드 보이 >> 가 좋은 예'이다. 최민식은 모든 진실이 밝혀졌다며 의기양양할 때 전혀 다른 진실과 마주친다. 메이저리그 전설적 타자'였던 요기 베라의 명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이 시'가 주는 감동은 예상치 못한 반전에 있다. 시인의 눈에 의해 관찰되던 꽃게가 느닷없이 인간의 말을 빌려 엄마처럼 말한다. 시점이 바뀌는 지점이다. " 저녁이야 /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이 표현은 이 시의 카운터펀치'다. "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 어찌할 수 없 " 는 몸부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뱃속에 있는 알을 위한 몸부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응집된 감정이 한순간에 터지게 된다. 독자는 비로소 꽃게의 몸부림을 이해한다. 시를 다시 읽으면서 시인이 곳곳에 뿌려놓은 단서를 되짚어간다. " 벌컥벌컥 " 이라는 표현 대신 " 울컥울컥 " 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오고, " 꿈틀거린다 " 는 표현이 아린 생강의 맛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간장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아보려고 물질을 멈춘 채 손발로 아픈 배를 감쌌을, 바닥 쪽으로 웅크렸던 어미 앞에서 먹먹해진다. 불길이 휩쓴 집 안에서 내 새끼를 살리기 위해서 웅크린, 불 타 죽은 어느 모성'이 생각난다. 시인은 " 저녁이야 / 불 끄고 잘 시간이야 " 라는 꽃게의 의인법을 통해 비극을 더욱 강조한다. 독자는 어미의 위로 앞에서 무너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