뽕끼와 카페인 우울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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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지만 곰곰 생각하면 이상한 말 가운데 하나가 : < 정 > , < 한 > , < 덤 > 따위를 대한민국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 정서'라고 말하는 대목이다. 어디서 유래된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으나 국뽕이 스며든 " 정신 승리 " 의 냄새가 짙다. 이러한 자세는 타락한 재벌가 형제들이 벌이는 일일 드라마를 보며 가진 것은 없지만 마음만은 편한 가난한 내가 행복하제, 라고 외치는 재개발 달동네 주민의 정신적 딸딸이'와 유사하다. 패로디하자면 " 저개발의 추억 " 이다. < 정 > 이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서정'이라는 주장은 곧 다른 나라는 정'이 없다는 소리인데 다른 말로 하면 대한민국을 제외한 국가는 정나미가 없는 세계'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어쩌나 ? 정'이라는 단어 자체는 이미 情이라는 한자'가 아니던가 ? < 한(恨) > 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중국 한자로부터 빌려온 언어'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지구촌 사람들은 모두 정과 한 그리고 손해 보면서도 나누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만 있는 특별한 서정이 아니라는 소리'다. 내가 보기엔 한국에만 있는 서정은 " 뽕끼 " 다. 뽕끼'란 과잉과 결핍이 이상항 방식으로 섞인 정서'다. 과잉이면서 결핍이고, 결핍이면서 동시에 과잉 서정'이다. 브레히트의 억척 아범 스토리를 한국식으로 번한한 포데기 신파극 << 국제 시장 >> 은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 파노라마的 뽕끼 진열장 " 이다. < 가난한 삶 > 이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 "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 가난한 삶 > 이라고 표현해야 직성이 풀린다. 겸손이 지나치면 불손이 되듯이, 고난과 역경'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꼰대의 고집과 불경'으로 변질된다.
내가 이 영화를 비판하는 이유는 진영 논리 때문이 아니라 " 뽕끼 " 때문에 그렇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식 신파'를 " 눈물의 허세 " 라고 부르고 싶다. 언어 습관에서도 과잉과 결핍은 습관처럼 남아 있다. " 사랑한다 " 라는 표현은 밋밋해서 성에 차지 않는다. " 죽도록 사랑한다 " 라고 해야 되고, 배 터져 죽겠다고 말해야 되고, 미워 죽겠다고 해야 되고, 그냥 보고 싶어도 보고 싶어 죽겠어, 라고 해야 걸걸한 입말이 된다. 이러한 서정이 바로 " 뽕끼 " 다. 트로트는 대부분 이런 정서'들로 채워진다. 심수봉은 뽕끼의 여왕이다. 슬픔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과잉과 결핍은 보인다. 일본인은 재난이나 재앙 앞에서 조용히 애도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한국인은 바닥에 누워 통곡한다. 그뿐인가 ?
운동선수가 대회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면 기뻐서 울고, 은메달을 목에 걸며 억울해서 울고, 동메달을 목에 걸면 서러워서 울고, 노메달은 막막해서 운다. 눈물, 눈물, 눈물, 흘러라 눈물이여 ! 곡비(哭婢)라는 단어가 있다. 장례 때 곡성(哭聲)이 끊어지지 않도록 장례 기간 내내 곡을 하는 노비를 말한다. 양반들은 돈을 주고 곡비를 사고 곡비는 생전 본 적도 없는 사람 앞에서 목놓아 운다. 가장 슬프게 우는 노비'가 품삯도 당연히 높다. 양반 입장에서 보면 그래야 가문에 체면이 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장례 내내 온동네 떠내려갈 듯 곡소리가 끊이지 않아야 나중에 동네사람들로부터 신소리 듣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곡(哭)에도 데시벨이 있다 ? 전국 노래 자랑'이 아니라 전국 곡소리 자랑 대회'가 생겨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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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노애락을 전시'한다는 측면에서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따위도 뽕끼 문화에 속한다.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행복한 한 컷'은 돈으로 곡비를 사서 슬픔을 전시하는 형태와 유사하다. 전자는 행복을 과시하는 것이고 후자는 슬픔을 과시하는 것이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당신이 생각 없이 올린 행복한 " 한 컷 " 은 누군가에게는 불행을 준다. 정신과 상담을 받는 환자 가운데 절반은 페이스북 따위에서 전시되는 행복한 한 컷 때문에 우울에 빠진다고 고백한다고 한다. 한국인이 눈물이 많은 민족이기는 하나 이 정도면 과잉'이라 할 수 있다. 딱 보니깐, 눈물이 많아서 정 많고 한 많다고 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엔 감정이 지나치면 무례'가 된다. 적절한 자기 절제'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처럼 눈물을 미덕으로 삼으니 조폭 코미디 영화조차 1시간 내내 온갖 쌍욕과 칼질'이 난무하다가도
마지막 20분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서사'를 준비한다. 코미디 장르 영화도 웃기다가 울리는 서사'가 한국 영화판에는 먹히는 것이다. << 7번 방의 선물 >> 도 그렇고 << 수상한 그녀 >> 도 그렇다. 이런 " 뽕끼 " 에 질려버렸다. 뽕끼'가 다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다. << 파이란 >> 에 나오는 최민식처럼 가슴을 도려내는, 좀비 영화'처럼 내장을 뒤집어놓는 통증 앞에 흐르지 않을 눈물, 누가 있겠느냐마는 무조건 마무리는 뽕끼로 매조지하려는 경향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적당히 울자. 자기 연민 때문에 우는 뽕끼는 의미없는 뽕끼'다. 눈물은 나를 향할 때가 아니라 타자의 고통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어야만 의미가 있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짐승은 죽어갈 때 자기 연민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의 불행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고 한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었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