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를 위한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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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살아난 시체들의 밤
좀비 영화 장르는 기본적으로 신체 훼손을 다루는 고어'에 속한다. 팔 다리는 뜯겨 나가고 내장은 밖으로 노출된다는 측면에서 막장 드라마'다. 어디 그뿐이랴 ? 좀비는 훼손된 장기를 물고 뜯고 빨고 씹고 맛본다. " 그랴, 이 맛이제 ! " < 좀비 > 야말로 갈 데까지 간 극한(極限) 캐릭터'다. 하지만 관객은 좀비를 보며 악, 소리를 지를망정 극악(極惡)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좀비는 극한(極限)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극악(極惡) 캐릭터는 아니라는 말이다. 이미 죽은 자'에게 윤리적 비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이러한 참극은 살아 있는 자만이 겪어야 할 비극은 아니다. 좀비들도 살아 있는 자'가 저지른 폭력 앞에 사지가 뜯겨 나가고 머리통은 산산조각 난다. 살아 있는 자가 죽은 시체에 칼질과 총질을 한다는 측면에서 부관참시(剖棺斬屍) 장르'라 할 만하다.
산 놈은 살기 위해서 폭력을 휘두르고 죽은 놈은 먹기 위해서 폭력을 휘두르니 결국 서로 먹고살기위해 싸우는 꼴이다. 그저 영혼 없는 존재의 남루한 허기 앞에서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다. 좀비 영화의 시작을 알린 조지 로메로 감독이 연출한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Night of the Living Dead, 1968 >> 은 역설적이지만 고어 영화'라고 하기에는 표현 강도가 부드럽다. 이 영화에서는 팔 다리가 뜯겨 나가고 내장을 뜯어먹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럴 것으로 추정되는 좀비 무리의 남루한 뒷모습만 보일 뿐이다. 또한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 에서 사람들은 " 몽유병 환자처럼 어슬렁거리는 무리 " 를 좀비 Zonbie라고 하지 않고 구울 Ghoul 이라고 불렀다.
좀비와 구울은 비슷하지만 동시에 다르다. 좀비는 부두교에서 주인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맹목적 광신도를 지시하는 명칭이고 구울은 영혼(Soul)없는 식인귀'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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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엄격하게 말하자면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은 zombie 영화가 아니라 soul 없는 ghoul 영화다. 이 영화'가 처음부터 숭배받았던 것은 아니다. 영화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대해 쌍욕을 퍼부었고, 로저 에버트 또한 웃으면서 코 팠다. 하지만 자동차 극장과 심야상영관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부활에 성공했고 아류작이 쏟아지면서 이들 영화를 뭉끄러트려서 좀비 영화'라고 불렀다. 다음은 조지 로메로가 만든 좀비 영화 시리즈 목록이다. 출처는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발췌했다.
영화명 | 원제 | 감독 | 출연 | 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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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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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 Night of the Living Dead | 조지 로메로 | 듀안 존스 주디스 오디 | 1968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자동차 극장과 변두리 개봉관을 중심으로 초라하게 개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영화를 본 소수의 관객의 입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영화가 탄생했다”는 소문이 문어발처럼 퍼져나갔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자동차 극장의 최고 인기 상영작이 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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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2 -시체들의 새벽 | Dawn of the Dead | 조지 로메로 | 데이비드 엠지 켄 포리 게일른 로스 | 1978 |
<시체들의 새벽〉은 많은 부분에서 의도적인 사회적/정치적 함의를 담고 있었다. 〈시체들의 새벽〉은 위기에 봉착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풍자극일 뿐만 아니라 전편, 나아가 호러 장르 자체에 대한 거대한 풍자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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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3 -시체들의 날 | Day of the Dead | 조지 로메로 | 로리 카딜 테리 알렉산더 조셉 필라토 | 1985 |
<시체들의 새벽〉이 나온 지 7년 만에 로메로는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시체들의 날〉을 발표했다. 영화의 대한 기대감은 당연히 하늘을 찌를 듯했고 이것은 개봉 당시 극도의 실망감으로 이어졌지만, 비디오문화를 중심으로 재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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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 오브 데드 | Land of the Dead | 조지 로메로 | 사이먼 베이커 데니스 호퍼 아시아 아르젠토 | 2005 |
〈랜드 오브 데드〉에서 독자적인 사회를 서서히 구축해나가는 좀비 무리와 애써 구축해놓은 문명사회를 해체해가는 인간들의 모습은 묘한 대조를 이룬다. 전편들이 모두 ‘새벽’ 장면을 배경으로 끝난 반면, 〈랜드 오브 데드〉는 ‘밤’ 장면을 배경으로 막을 내린다. 현대 사회에서 휴머니즘의 위치를 알려준 이 작품을 끝으로 로메로의 좀비 시리즈의 1막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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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리 오브 데드 | Diary of the Dead | 조지 로메로 | 미셸 모건 조슈아 클로즈 | 2007 |
〈랜드 오브 데드〉 제작 당시 메이저 영화사의 압박에 지친 로메로는 다시 독립영화 형태로 돌아온다. 그 결과 〈다이어리 오브 데드〉는 스튜디오의 구속을 받지 않는 독립영화 형태로 제작됐고, 저예산으로 만들어졌지만 로메로는 창작상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모큐멘터리(가짜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만들어졌는데, 시리즈의 전작들에서 은유됐던 주제가 좀더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등 시리즈의 팬이라면 곱씹어볼 만한 요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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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바이벌 오브 데드 | Survival of the Dead | 조지 로메로 | 데본 보스틱 캐슬린 먼로 | 2009 |
〈서바이벌 오브 데드〉에서 좀비는 더이상 인간을 위협하는 ‘악당’으로만 보기 힘들며, 인간은 좀비보다 훨씬 역겨운 악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좀비는 탐욕에 의해 휴머니즘을 잃어가는 인간을 응징하는 존재인 셈이다. 로메로는 〈서바이벌 오브 데드〉 이후에도 시체 시리즈는 계속된다고 공언했다. 시체 시리즈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
ㅡ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Night of the Living Dead] (세계영화작품사전 : 감동이 이어지는 시리즈 영화, 씨네21)
이 필모그래피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점은 인간 대 좀비'가 진화하는 방식이다.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말한 " 진화가 반드시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라는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조지 로메로의 좀비 시리즈 영화에서 < 인간 > 은 퇴화되고 < 좀비 > 는 진화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인간은 인성人性을 잃고 점점 수성獸性을 드러낸다. < 인간 > 은 자비 대신 좀비'처럼 폭력적으로 행동하고 반대로 < 좀비 > 는 수성 대신 인성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명칭이다. <<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 에서 어슬렁거리는 존재는 " 영혼(soul)이 없는 ghoul : 식인귀 " 이었으나, 2편인 << 시체들의 새벽 >> 에서 ghoul은 " creature : 창조물 " 로 승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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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클래식 좀비 시리즈 마지막에 해당되는 3편 << 시체들의 날 >> 에서 창조물은 드디어 " beings : 존재자 " 로 완성된다. 인간이 좀비로 타락하는 반면 좀비는 being로 신분이 상승된 것이다. 사고 범위를 조지 로메로 영화에 국한하지 말고 좀비 영화 장르 전체로 확장하면 좀비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좀비는 상황에 따라서 전염인자를 가진 병자, 절뚝거리는 불구, 굶주린 거지, 마스터master에게 맹목적 복종을 하는 광신도, 마약에 취한 아편꾼 이미지를 취한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병자, 불구, 거지, 광신도, 아편꾼의 공통점'은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는 부류'이다. 2차 대전 당시 히틀러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의 최대 피해자는 유대인이 아니라 집시와 장애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히틀러는 지독하게 자본주의적 인간'이라 할 수 있다. 히틀러가 보기에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는 집단은 제거되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좀비 영화 장르'도 마찬가지다. 좀비 영화는 노동 생산성이 떨어지는 계급 집단을 " 비인간 " 으로 묘사한다. 이들에게 덧씌우는 것은 온갖 오물 범벅과 안색을 잃고 검게 물드는, 거무퉤퉤한 더러운 육체다. 더러운 육체'라는 것은 곧 사회화 과정이 단절된 육체를 의미하는데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육체를 " 아브젝시옹 " 이란 개념으로 설명하고 조르주 아감벤은 " 호모 사케르 " 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더러운 육체는 법의 수호를 받을 수 없다. 그들은 예외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인간이 좀비 머리통을 박살낸다고 해서 벌을 받지는 않기 때문이다.
좀비, 다시 말해서 더러운 몰골로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불가촉천민은 노동 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국외로 추방된 디아스포라적 인간'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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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시체들의 새벽 : 주요 배경은 거대한 쇼핑몰이다
이처럼 좀비와 자본주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맹렬히 물어뜯었던 인문학자 강신주 씨'가 서울역 노숙자를 좀비'로 비유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보기에는 노동 생산성과 상품 구매 능력이 없는 노숙자가 좀비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문학자가 오히려 자본주의 계산기'로 노숙자를 좀비 취급한 것이다. 그야말로 비판받아야 할 대상'이다. 조지 로메로의 클래식 좀비 3부작 가운데 2부에 해당되는 << 시체들의 새벽 >> 은 벤야민이 경외와 경탄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본 " 파노라마 的 그랑빌 " 이라 할 수 있는 대형 쇼핑 센터에서 벌어지는 고어 잔혹극'이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이 영화에서 좀비'들은 쇼핑 센터'로 몰려드는데 이러한 경향은 소비자'였던 옛 생활 습관 때문이다. 한때는 상품 구매 능력이 있는 소비자 고객이었지만 이제는 상품 구매 능력이 사라지자 왜 아니 그러겠는가 ! 죽은 자는 상품 구매 능력이 없는 자'다 하층민 좀비로 강등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구매 능력이 없는 계급은 좀비'나 다름없다. 조지 로메로'은 1편과는 달리 이 영화를 정치적 풍자를 곁들인 블랙코미디 장르로 만들었다. 폴 발레리는 " 예술은 어수선한 것과는 맞지 않는다 " 고 말했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 시체의 새벽, 1978년 >> 은 피와 내장 그리고 온갖 상품에 박살나는 어수선한 영화이지만 바로 이 어수선한 엔트로피'가 예술적 아우라'를 선사한다. 예술은 종종 어수선하다.
지옥의 공간이 가득 차서 더 이상 들어갈 곳이 없으면 시체들은 땅 위를 걷는다. 영화 속 대사'다. 자본주의 사회가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