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디와 캐디
지금 돌이켜보면 : 만화 속 주인공 캔디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감정 노동자 乙 이 확실'하다. 진상 고객이 욕을 하고 따귀를 때려도 캔디는 웃어야 한다. 언제부터 고객이 < 왕 > 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도 코딱지만한 < 완장 > 이랍시고 " 고객 " 완장 차고 매장을 호령하는 것을 보면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다. 코베인 커트'도 혀를 끌끌 찰 정도다. 그래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감정 노동자 乙를 대표하는 캔디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괴로워도 슬퍼도 울기 왜 울어. 외로워도 슬퍼도 웃어야 한다 /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 들을.... ( 중략 )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 그럴 땐 얘기를 나누죠. 거울 속의 나하고 / 웃어라, 웃어라, 웃어라 캔디'야 ! 울면......
짤린다 !
노래 가사를 듣고 있자니, 시대가 시대이고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음과 같이 개사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 괴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 참고 참고 또 참지 울긴 왜 울어 / 웃으면서 달려보자 푸른 홀을 / 푸른 하늘 바라보며 노래하자 / 나 혼자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지만 / 그럴 땐 얘기를 나누죠 / 화장실 거울 앞에서 /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내 이름은 캐디 " 희태에게 몹쓸 짓을 당한 캐디 이야기'다. 그런데 캐디'라는 직업은 서비스업 종사자가 아니다. 당연히 감정노동자도 아니다. 캐디는 " 골프에서, 경기자가 수월하게 경기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사람. 경기자의 클립을 운반하면서 경기에 관련된 조언을 하는 등 경기자가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한다. ( 네이버 국어 사전에서 내용 인용 ) "
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야구에 빗대서 설명하자면 캐디는 주루 코치와 비슷한 위치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타자가 안타를 치고 출루를 하면 1루 주루 코치는 선수가 착용한 타격 용품을 받아 챙긴다. 그리고 주루할 때 사용하는 장비를 건낸다. 공격 선수가 뛸 때 부상을 방지하고자 준비하는 과정이다. 3루 주루 코치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한다. 2루 주자는 앞만 보고 달리기 때문에 외야로 빠진 공을 수비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볼 수 없다. 그래서 3루를 돌아 홈으로 돌진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를 3루 주루 코치의 수신호로 결정한다. 물론 최종 결정은 선수 몫이지만 하지만 그 어느 선수도 주루 코치'를 자기 몸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시다바리 " 라고 생각하기는커녕 깍듯이 존중해야 할 선배이자 스승 대우를 한다. 설령 그런 막돼먹은 선수가 있다면 그놈은 후레자식이 된다. 캐디도 마찬가지'다.
골퍼는 바람의 열두 방향, 잔디가 누운 방향과 결 그리고 홀 코스 기울기 등을 캐디와 상의한 후 최종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골퍼에게 캐디는 함께 경기를 뛰는 동료이다. 하지만 배울 만큼 배웠지만 배운 만큼 배웠다 할 수 없는 희태'는 그 사실을 잘 모르는 모양이다. 골프 치는 희태를 야구 하는 희태로 달리 생각하면 2루에서 3루로 돌던 희태가 홈으로 돌진할 생각은 않고 3루에 머물며 주루 코치 젖가슴이나 만지는 것과 똑같다. 보도에 따르면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 정도로 잦은 스킨십이 있었고 캐디 가슴을 만진 모양이다. 희태 본인이 해명하는 과정에서 " 딸 같고, 손녀 같아서 가슴을 쿡 찔렀다 ! " 는 변명을 한 것을 보면 사실'로 보인다. 스킨십도 경기 내내 지속적으로 반복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도 희태 본인이 해명하는 과정에서 " 싫은 표정을 지었으면 내게 그랬겠나 ? " 라고 말한 것으로 보아 그것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검사로 시작해서 국회의장까지 탄탄대로, 유식하게 표현하자면 아우토반 라이프'를 살아온 그가 아랫것들을 이해할 턱이 없다. 자신은 항상 높은 의자에 앉아 있다 보니 화가 날 땐 화를 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서류가 미비하면 부하 직원 얼굴을 향해 서류를 내던지고, 취조실에서 피의자를 윽박지르는 게 일상이었지만 싫어도 싫은 내색을 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의 표정 관리'에 대한 이해력이 딸릴 수밖에 없다. " 싫은 표정을 지었다면 내가 그랬겠나 ? " 라는 변명인 듯 변명 아닌 변명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떠올린 인물은 한나 아렌트였다.
그녀가 교도소에 갇힌 아이히만을 직접 인터뷰하면서 얻은 통찰은 " 악의 평범함 " 이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악행'이란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그저 자기가 맡은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무지가 악행을 만든다. 희태도 마찬가지 아닐까 ? 딸 같아서 한번 젖가슴 만진 걸 가지고 왜 그리 호들갑이냐는 순진무구한 태도는 한나 아렌트가 지적한 " 악의 평범함 " 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싫은 표정을 지었으면 내가 그랬겠나, 라는 반문에는 지독한 에고에 사로잡힌, 공감 인식 제로' 를 보여준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한 짓이 악행이란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 듯하다. 악행인 듯 악행 아닌 악행인가 ? 팔순을 바라보는 희태는 회춘을 꿈꿨을까 ? " 나이야, 가라 " 를 외치기 전에 먼저 " 하와이, 가라 ! "
서구 사회는 신체 접촉이 발생하면 일단 잘잘못을 떠나서 서로 사과부터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신체 접촉에 대해 지나치게 무례하다. 콩나물 시루 같은 대중 교통에 시달려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한국인은 신체 접촉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젖가슴 한번 찔러본 것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 라는 태도로 일관하는 것이다. 여성을 못 먹는 감으로 생각하지 마시라 ! 귀엽다고 손녀 딸 가슴 찌르다가는 아들 딸에게 따귀 맞는다 신체 접촉에 의한 불쾌감'은 비단 이성 관계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동성 관계에서도 자주 발생한다. 멀리 볼 것 없다. 내 최근 경험만 봐도 그렇다. 동성 사회에서도 서로 거리낌없이 신체 접촉을 한다. 화를 내면 오히려 나보고 과민 반응이라고 한다. 어쩔 ?
다시 캔디 이야기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말머리 풍선에 등장했던 캔디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캔디인 듯 캔디 아닌 캔디에 대해 짧게 말하련다. 캐디 같은 경우는 지나친 스킨십 때문에 폭발한 사례라면 고 캔디'는 스킨십이 전혀 없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성인이 되어 폭발한 경우'였다. 캔디가 보기에 고승덕은 생물학적 아버지일 뿐, 아버지가 아니었다. << 오즈의 마법사 >> 에 나오는 깡통로봇이었다, 심장이 없는 ! 지나친 스킨십도 문제지만 스킨십이 전무한 경우도 문제가 된다. 내가 힘들 때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 바로 " 여러분 " 이 아니라 아버지'다. 캔디가 아버지에게 원했던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따스한 말 한마디, 어깨를 토닥이는 손, 진심이 담긴 포옹 따위다.
하지만 고승덕은 단 한번도 울고 있는 딸을 안아 준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마음 속에 불화살 품고 우는, 스무세 살 캐디를 생각하다가 문득 지난 선거에서 당당했던 캔디가 생각났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그들은 전혀 다른 문제로 폭발했다. 그리고 전혀 다른 계급에 속했다. 아이러니'다. 만화 속 캔디는 괴로워도 슬퍼도 울면 안되지만 현실 속 (고) 캔디'는 자기 감정에 솔직했다. 그것은 천성이라기보다는 재벌이라는 특권 계층이 만든 당당함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 乙인 노동자는 甲 앞에서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다. 비겁한 짓이 아니다. 밥줄이 걸린 문제'다. 표정 없이 살아야 하는 것은 비겁이 아니라 생존에 대한 문제이니깐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참 힘들 거란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여자이면서 비정규직 乙이라면 더욱 힘들 것이다.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여성이 " 걸레 " 가 되는 사회'다. 종종 웃음을 파는 프로그램에서 담배 피는 여성을 희화화하는 것을 보면 남자지만 주먹 불끈 쥐게 된다. 여성이 담배를 피우는 게 결격 사유라도 되나 ? 웃긴 짓이다. 그래도 힘내시라. 꾀죄죄한 뒷방 늙은이가 당신을 응원하겠다. 끝으로 라임 살려서 이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 희태 뒤태 추태 / 인생 끄태( 끝에) 조태 ( 좆돼 ) 십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