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는 온가족이 모여서 강원도 일주를 했다. 봉평을 시작으로 평창, 속초, 대관령 산양 목장'으로 마무리하는 일정이었다. 계획 마니아'인 큰누님은 빡빡한 일정을 채우기 위해서 새벽 6시부터 자동차 엔진을 달궜다. 각종 축제는 물론이고 명승지, 맛집'을 두루 돌아다녔다. 그러다 보니 여행 중 팔 할은 달리는 자동자 안'에서 보내야 했다. 어른에게는 익숙한 여행법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짜증나는 법. 조카들은 동생 차 안에서 투덜대기 시작했고, 이 소리를 전해 들은 큰누님은 대관령 휴게실에서 군소리를 늘어놓았다. " 자꾸 징징대면 놓고 간다 ! " 안개 낀 대관령 꼭대기에서 길 잃은 두 마리 양'이라니 ! 동생이 운전을 했기에 나는 낮부터 취했었다. 차 바닥에는 항상 찌그러진 캔맥주가 널부러져 뒹굴었다.
이 여행길에서 휴양림을 세 군데 들렸는데 휴양림에서 마련한 캠핑촌에는 캠핑족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주로 가족 단위였다. 3년 전만 해도 전혀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그들은 각종 취사 장비를 구비했다. 바비큐 장비를 갖춘 캠핑족도 많았다. 그들은 정글의 법칙을 흉내 내고 있었다. 쫌, 우스웠다. 텐트촌은 계단식으로 구성되었는데 고밀도 고효율을 중시하는 대한민국 특성상 텐트와 텐트 간격은 무척 좁았다. 밤에 코고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조카들은 캠핑촌을 둘러보며 부러워했다. 특히 바베큐 장비를 갖춘 캠핑족 앞에서는 신기한 듯 바라보다가 말했다. " 부럽다, 부러워 ! " 낮부터 취한 나는 조카들에게 군소리를 늘어놓았다.
" 개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캠핑이라고 하니깐 근사해 보이지 다른 말로 하면 노숙 체험 아니냐. 텐트에서 하루만 지내봐라 ! 모기가 네 놈 귀두 물어뜯어서 오줌 눌 때 따끔거릴 거다. " 조카가 귀를 쫑긋거리더니 질문을 던졌다. " 모기가 귀도 물면 오줌 눌 때 아파 ? " 나는 정직하게 말했다. " 응, 아프지. 그리고 저런 산속에는 지네도 많아. 똥은 어디서 쌀 거냐 ? 넌 욕실 들어가면 한두 시간 동안 씻잖아. 오늘 아침에도 욕실에서 오래 씻는다고 네 엄마에게 혼나더구만. " 조카는 내 말을 다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그르네.... 그럼 뭐가 좋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바글바글 모여서 캠핑을 해 ? " 내가 말했다. " 유행 때문이지, 앞집이 캠핑 떠나고, 옆집도 캥핑 떠나니, 우리집도 캠핑 가자,
뭐... 이런 거 아니겠냐. 아마, 앞집이 캠핑 안 떠나고, 옆집도 캠핑 안 떠나면, 이 문화도 순식간에 사라질 거다. 캠핑촌 만들어놓고 한 공간에 떼거지로 우겨넣는 게 무슨 캠핑이냐. 니네들이 노스페이스 입고 다니는 꼬라지와 비슷해. 개나 소나 다 입고 다니니 꿀리지 않으려고 너도 입고 다니잖아. " 내 말에 조카가 발끈했다. " 쳇 ! 삼촌, 말을 곱게 쓰시지. 우리가 개나 소야 ? " 나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 조까 ! " 조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삼촌이 조카라고 말했는지 조까라고 말했는지 헷갈렸기 때문이다. 호칭이냐 욕이냐, 그것이 문제였지만 조카는 내 인덕을 믿었다. 하여튼 결론은 대한민국은 유행에 민감한 문화 취향을 가졌다. 훅 들어왔다 훅 나간다. 쉽게 타고 금세 꺼진다.
문화라는 영역에서 보면 대한민국은 뚝배기'보다는 냄비'에 가깝다. 캠핑 문화도 몇 년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사라질 것이다. 연탄 조개구이집이 순식간에 사라졌듯이 말이다. 이제는 노스페이스 교복 유행도 지난 듯하다. 영원할 것 같던 노스페이스 사랑도 넓게 보면 훅 들어왔다 훅 나간 꼴이 되었다. 요즘은 " 보틀 " 이 대세'다. 작년까지만 해도 " 텀블러 " 가 대세였는데, 이제는 " 보틀 " 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텀블러와 보틀'이라는 알파벳을 사용하니까 근사한 거 같지만 그냥 < 잔 > 이고 < 병 > 이며 < 통 > 이다. 한글이 위대한 것은 오감'을 재현하는 데 탁월한 언어'라는 점이고, 알파벳이 위대한 지점은 꾀죄죄죄죄한 것을 영어로 말하면 꽤 근사한 것으로 변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만 !
그냥 < 병 > 이라거나 < 물병 > 이라고 하면 될 것을 사람들은 굳이 < 보틀 > 이라고 말한다. 이참에 나도 " 곰곰발 " 이란 닉네임을 버리고 " 베어베어풋 " 이라고 개명할 생각이다. 근사해 보이겠지 ? 아침에 로스팅한 커피를 보틀에 담아 오후의 스카이를 바라보며 스멜을 음미하면서 드링킹하고 싶다. 그냥 병이라고 하자. 병이라고 하기 심심하면 물통'이라고 하자. " 보틀 " 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당신의 품격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언제부터 한국 주방장이 셰프가 되고, 김탁구는 파티쉐'가 되었나. 오렌지를 어뤤지'라고 해야 된다며 설레발을 쳤던 교육부 장관 후보자'에 대해 영어사대주의라며 비판했던 당신은 어느새 텀블러, 보틀이라는 단어를 생각 없이 쓴다.
당신이 보틀'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김희애의 물광처럼 빛나지는 않는다. 김희애니깐 물광이 되지 당신은 그냥 물바가지를 뒤집어쓴 꼴이 된다. 형광등 백 개를 켜 놓은 듯한 아우라는 당신에게는 없, 어요. 당신은 그저 나와 똑같은, 삽십 촉 알전구 한 개'에 지나지 않는다. 유행을 받아들이는 감각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언어만큼은 우리말을 사용하자. 한국어로 대체가 불가능한 외국어'라면 모를까, 병을 굳이 " bottle " 이라고 말하는 꼴이 솔직하게 말해서 꼴사납다. 장사꾼들이 물병'을 " 보틀 " 이라는 이름으로 유통시키는 이유는 뻔하다. 상술 때문이다. 어쩌면 당신은 다용도 병이 필요해서 " 보틀 " 을 구매하는 게 아니라, " 보틀 "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서 다용도 병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 보틀 " 이라는 용어도 내년이 되면 훅 들어왔다 훅 나갈 것이다. 내 글이 탄산음료처럼 너무 톡 쏜다고 눈 흘기지 마라. 이건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특. 급. 지. 적이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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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판매업자'라면 " 보틀 " 이라는 이름 대신 " 요리조리 " 라고 짓겠다. 사전적 의미로는 " 일정한 방향이 없이 요쪽 조쪽으로 " 라는 뜻이니, 이것저것 담을 수 있는 다용도 물병과 잘 어울린다. 또한 요리 재료나 조리한 음식을 담을 수도 있으니 " 요리조리 " 라는 이름이 딱 좋다. 앞으로 나는 요리조리에 물을 담아 도서실에 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