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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평점 :
지나친 애정은 균형을 잃는다
첫만남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진행된다 : 먼저 손을 씻는다. 아이보리 비누로 깨끗이 씻는다. 청결은 상대에 대한 기본 예의. 그렇다고 장갑을 낄 필요는없다. 다음은 상대 옷을 벗긴다. 벗기고 나서 흐뭇한 마음으로 위아래 구석구석 훑어본다. 지금까지는 서론이다. 중요한 것은 본론이다. 겉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속'이다. 가수 남진이 말하지 않았던가. "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 " 손으로 더듬더듬하며 속을 만져본다. 아, 한다. 좋다. 때론 우, 하기도 한다. 겉과 속이 전혀 다른 경우도 있으니까. 이상한 상상은 하지 마셔셔. 책을 읽기 전에 손을 씻는 행위는 내 오랜 버릇이다. 여기서 < 옷 > 이란 책을 감싼 종이 덮개를 말한다. 종이 덮개와 하드커버 디자인'이 다른 경우가 있는데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옷을 벗긴다.
좋으면 아, 하고 나쁘면 우, 한다. 애, 매한 경우에는 소리 없이 지나간다. 책 만듦새를 확인하는 깐깐한 과정이 끝나면 이제 속을 펼쳐서 종이 재질, 제본 방식, 레이아웃 따위를 살핀다. 이 모든 과정이 끝나야지 비로소 책을 읽기 시작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 오랜 습관이다. 다산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이 쓴 < 다산 정약용 평전 / 민음사 > 은 우선 만듦새'가 매우 만족스럽다. 책을 사철 제본 방식으로 튼튼하게 만든 부분이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무선 제본(떡제본)에 비하면 사철 제본은 얼마나 든든하고 " 클래식 " 한가 ! 나는 읽던 책을 잠시 뒤로 하고 첫인상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 다산 정약용 평전 >> 을 먼저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첫인상에 대한 좋은 호감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서 정약용에 대한 약전(略傳) 을 갈무리해서 옮길 생각은 없다. 이 책에 대해 아쉬운 점을 지적하는 것으로 매조지하겠다. 방대한 책 내용을 압축한 결과가 < 제목 > 이다. 책이 몸이라면 제목은 얼굴이다. 관상은 얼굴(겉)을 통해서 속을 꿰뚫는 방식이다. 제목도 마찬가지다. 독자는 제목(겉)을 통해서 내용(속)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제목과 내용이 전혀 다르면 내용이 아무리 알차다고 해도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 다산 정약용 평전 >> 은 제목이 잘못되었다. 사전적 의미로 평전은 "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 " 다. < 리영희 평전 > 을 쓴 김삼식이 말을 인용하자면 평전은 시비(是非)를 치우침 없이 다루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 책은 평전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다. 정약용에 대한 (저자의) 지나친 애정이 균형을 잃었다. 평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전기(傳記)에 가깝다. 저자는 그러한 사실을 의식했는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산에 대한 당대의 평가이건 먼 뒷날의 평가이건, 대체로 다산의 사람됨과 학문에 대해서는 훌륭하다는 칭찬의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잘못되었다거나 좋지 않다는 평가는 평가는 많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평에 따른 이 책 또한 찬양 위주의 평전이 된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여겨 또다시 부끄러움을 면할 길이 없다. 조선 선비들의 공통적인 자세이기도 하지만, 학자들이 다른 학자를 평가할 때는 대체로 후한 점수를 주지 야박한 점수를 주는 경우는 많지 않았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다산의 경우도 어쩔 수 없이, 잘했다는 평가가 많았고 잘못했다는 평가는 많지 않았다. ( 17쪽)
결국 저자는 자기 글이 평전이라고 하기에는 뒷맛이 개운치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평전은 시비(是非), 입장, 논쟁을 골고루 다루어야 하는데, 시(是)는 있으나 비(非)가 생략되어 각각의 입장과 논쟁이 없는 글이 되었다. 그런데도 밀어붙인 꼴이다. 좋은 평전은 열정보다는 냉정이 필요한 분야'이고, 휴머니스트'보다는 소시오패스 성향을 가진 사람이 더 좋은 평전을 쓸 수 있다. 칭송과 편애는 평전의 적'이다. 박석무는 정약용을 지나치게 흠모한 나머지 정약용에게 적대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 몇몇 악인 악당들 ( 70쪽 ) " 이라는 표현을 쓰며 흥분한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면 죽도 밥도 아닌 뒤죽박죽이 된다. 슬픈 노래를 부를 때 가수가 관객보다 먼저 울면, 그 가수는 실력 있는 가수가 아니다. 관객을 울리고 나서 우는 가수가 훌륭한 가객이다.
설령 저자가 보기에 그들이 악당이라고 해도 평전을 쓰는 입장에서는 인물에 대한 감정적 수사를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인물 평가는 작가가 내리는 게 아니라 독자가 판단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뜬금없는 부분도 나온다. 다산은 무등산에 올라 시도 짓고 기행문도 썼다. 아름다운 강산을 본 느낌을 적은 글이다. 당시 17세 소년이 작성한 문장이라고 하기에는 탁월한 글솜씨'다. 박석무는 이 사실을 상기시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등산은 얼마나 훌륭한 역사를 태동시켰던가. 지역 이름보다도 사회 과학적 의미를 지닌 광주, 민중 주체의 역사 발전을 위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으며 수난과 고난의 아픔을 안아야 했던가. 동학 혁명이 그랬고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그랬고 5.18 민주화 운동이 그랬지 않은가. 무등산이 낳은 역사의 큰 아들 때문에 민주주의의 가치가 살아나지 않았는가. 무등산의 공화로 역사는 바른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는 뛰어난 다산의 관찰력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해 준다. (110쪽)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위대하다는 사실에는 120% 동의하지만 다산을 언급하며 위대한 광주를 엮는 방식에는 의문이 든다. 억지로 짜 맞춘 흔적이 역력하다. 정작 뜨거운 감자 가운데 하나였던 정약용의 " 배교 행위 " 에 대해서는 언급이 별로 없다. 다산 정약용이 신유옥사 때 국청 국문에서 천주교를 사교(邪敎)라고 말하며 황사영을 원수라고 고백한 부분에 대해서는 " 죄지은 사람을 숨겨 줄 수 없다는 정의감의 발로(318쪽) " 라고 해석한다. 정약용의 배교 행위'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저자가 그것을 단순하게 " 정의감의 발로 " 라고 말하는 태도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우스개로 " 누가 정약용의 배교에 대해 물으면, 당황하지 말고, 쿨하게 정의감의 발로'라고 말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던진 후, 박수를 짝, 짝, 짝. 끗 !! " 이라고 말하는 뉘앙스'다.
평전에서 중요한 것은 칭찬이 아닌 논쟁인 데도 말이다. 이 책은 처음 기대와는 달리 실망이 컸다. 책 제목에서 " 평전 " 이라는 낱말을 삭제했다면(이 책이 평전이 아니라면) 좋은 내용이 될 수도 있지만 평전'이라는 형식 틀 안에서 보면 실망스러운 내용이다. 차의 종류에 따라서 차를 담는 용기(容器)도 달라야 한다. 홍차를 커피잔에 따를 수는 없지 않은가 ? 아, 하려다가 우, 하게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