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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3년 6월
평점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조금새끼
가난한 선원들이 모여사는 목포 온금동에는 조금새끼라는 말이 있지요. 조금 물때에 밴 새끼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 말이 어떻게 생겨났냐고요? 조금은 바닷물이 조금밖에 나지 않아 선원들이 출어를 포기하고 쉬는 때랍니다. 모처럼 집에 돌아와 쉬면서 할 일이 무엇이겠는지요? 그래서 조금 물때는 집집마다 애를 갖는 물때이기도 하지요. 그렇게 해서 뱃속에 들어선 녀석들이 열 달 후 밖으로 나오니 다들 조금새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을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우다 다시 한꺼번에 바다에 묻힙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함께인 셈이지요. 하여, 지금도 이 언덕배기 달동네에는 생일도 함께 쇠고 제사도 함께 지내는 집이 많습니다. 그런데 조금새끼 조금새끼 하고 발음하면 웃음이 나오다가도 금세 눈물이 나는 건 왜일까요? 도대체 이 꾀죄죄하고 소금기 묻은 말이 자꾸만 서럽도록 아름다워지는 건 왜일까요? 아무래도 그건 예나 지금이나 이 한마디 속에 온금동 사람들의 삶과 운명이 죄다 들어 있기 때문 아니겠는지요.
- 김선태, 시집 [ 살구꽃이 돌아왔다 ]
조금'은 물이 가장 낮을 때를 말한다. 바닷물이 다 빠져나갔으니 배를 띄울 수 없어 집에서 쉬다 보면....... 한꺼번에 태어난 녀석들은 훗날 아비의 업을 이어 풍랑과 싸운다. 그뿐이랴. 바다가 사납게 울면 물 위에 뜬 배들을 삼키는 법이니 한 마을에 생일도 같고 제삿날도 같은 경우가 많으리. < 조금새끼 > 라는 시는 목포 온금동의 공동체적 운명'에 대해 말한다. 물고기를 잡는 어부(조금새끼)는 가만 보면 물고기떼를 닮았다. 멸치떼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다 거대한 그물망에 잡혀 생을 마감하는, 희노애락을 함께 하는. 그런 의미에서, 목포와 가까운 신안 비금도가 고향인 황현산 선생도 (민망한 표현이지만) 조금새끼'에 속한다. 산문집 [ 밤이 산문이다 ] 에 수록된 < 찌푸린 얼굴들 > 에서 그는 자신을 " 조금에 태어난 아이 " 라고 소개한다. 조금이 매월 음력 7,8일을 의미하니 음력으로 초여드레날에 태어난 그 또한 조금새끼'다.
하지만 고기를 낚는 데 소질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어부 대신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물고기와 선생이라. 문득 흑산에 유배되었던 정약전 선생이 생각났다. 어부의 아이들에게 語를 가르치고 아이의 아비'에게 魚를 얻어 생활했던, 선생 말이다. ( 흑산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437052 ) 황현산은 < 魚 > 를 잡는 대신 뭍으로 올라가 < 語 > 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다. < 스승 > 보다는 < 선생 > 이라는 말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래서 책 제목도 " 스승 " 대신 " 선생 " 이라고 한 모양이다. 신안 비금도에서 나고 자랐으니 바다를 추억하는 글이 많을 것이라 지레짐작했지만, 예상 밖으로 한두 꼭지를 제외하고는 비금도에 대해 추억하지 않는다. 그 흔한 < 옛날엔 그랬지...... > 따위의 신파적 에세이를 경계한 탓이다.
그는 에세이가 아니라 산문'이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넓게 보면 수필(에세이)도 산문에 포함되니 수필'이라고 주장하면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책을 읽다 보면 어른'이 갖춰야 할 품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그는 자기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깎아내리지 않는다. < 이수열 선생 > 이란 글은 황현산의 품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수열 선생은 47년 동안 국어 교사로 근무하고 정년퇴임한 어른이다. 그는 신문 칼럼에서 우리말 어법에 어긋난다고 생각되는 구절을 체크한 후 칼럼을 쓴 저자에게 우편으로 붙이는 일을 한다. " 일본식 어투인 ' 있으시기 바랍니다 ' 나 ' 에 다름 아니다 ' 같은 서술에 붉은 줄을 긋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바탕 선물 위치처럼 자체에 움직임이 없는 명사에 '하다'를 붙여서 말하는 것도 용납하지 (247) " 않으니,
본디의 결에 거슬리더라도 관용으로 굳어졌다면 그 말이 살아 있는 언어라고 생각하는 황현산과는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가 보기에 이수영 선생의 지적은 야박하고 짠 소금 같다. 하지만 황현산은 그 사실을 고마워한다. " 소금이 짜지 않으면 어찌 소금이라 하겠는가. " 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온화한 성품을 마냥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문학 비평가'라면 좀 독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칭찬만 하는 문학 비평가보다는 차라리 독설만 하는 문학 비평가가 더 낫다. 뭐, 개인적인 생각이다. (됐고!) 이 책이 가지고 있는 깊이는 2부에 집약되어 있다. 구본창과 강운구 사진을 보고 느낀 감상을 적었는데 사물과 현상 너머를 보는 눈이 매우 매섭다. < 겨울의 개 > 라는 글은 강운구가 1973년 전라북도 작은 마을을 지나다가 찍은 흑백사진 하나를 분석하는데, 분석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시적'인 운치가 있다.
시처럼 읽힌다. 물론 타자의 눈으로 어떤 풍경에 개입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구경거리로써) 폭력이 존재하지만 그는 아슬아슬한 경계를 잘 타고 넘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한국 사회는 정의로운 청년이 드물기 때문이 아니라 현명한 노인이 없어서 슬픈 사회'다. 불끈 쥔 주먹보다 지팡이를 잡은, 부드럽고 현명한 손이 가지는 미덕이 필요한 사회다. 깊이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