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도박 중독자의 가족
이하진 지음 / 열린책들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박중독자의 가족(이하진 지음)

뜨거운 만화를 순식간에 읽었다. 이하진 작가님에 대한 인터뷰 글이 <그리, 터지다> 라는 박희정님의 책에 실려 있어서 그 인터뷰부분을 따로 읽고 만화를 읽었다.

도박중독자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도박이 요즘은 주식과 코인으로 옮겨 갔고, 그것또한 도박중독과 같은 형태를 띄고 있다. 작가님의 세째 시동생이 주식,코인 중독에 빠지고 그 가족들은 공동 의존 상태에 빠지게 된다. 공동 의존이란 해당 중독자와 자신을 분리하지 못한체, 그를 돕겠다는 마음이 그와 그 가족들을 더 힘든 구렁텅이로 내몰리게 하는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한국사회에서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의 행포에 독립적으로 행동하기가 쉽지 않다. 여성이 도박중독이 되는 경우보다 남성이 도박중독이 되는경우가 훨씬 많은데, 여성이 도박중독이 되면 남편은 떠나버리지만, 남성이 도박중독이 되면 아내가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은 여전히 한국사회가 가부장 사회라는 반증일 것이다.

작가님은 어른들의 싸움속에서 자랐고, 부모들의 자녀들에 대한 기대가 심한 환경속에서 자라다보니 자신이 하고 싶은 만화를 제대로 할수없어 일반 대학에 진학을 하시게 된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좋겠다, 팔자 좋네 라는 말을 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힘든 환경속에서도 그것을 버티기 위해 예술작업을 하는경우가 종종 있다. 작가님 또한 그런 경우다. 가족의 공동의존 상태때문에 일상이 망가지게 되면서 자신이 바로 서기 위해서 무언가에 몰두하는게 필요했고, 그것이 만화작업이었다.(만화 그리는 일은 장시간의 중노동이기에 만화 그리는 일이 마냥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카산드라> 라는 웹툰을 2부까지 열심히 연재를 하신다. 역사속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주체적인 여성들의 존재는 없었다. 여성은 존재했지만, 역사가 그들의 존재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화속의 카산드라와 헬레네를 주체적인 여성으로 해석하며 그린 만화가 <카산드라>이다. 다시 제 연재를 시작하셨다고 하시긴 하는데, 아직 종이 출판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아쉽다. 어쨓든 만화 작업에 매진하다가 연재를 잠정 중단하게 된 것은 자녀가 유치원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면서부터다. 그 아이가 제대로된 돌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데 집중하시게 된다.

<도박중독자의 가족>에서 작가님은 도박중독 상담도 받으신다. 도박중독은 쉽게 근절되지 않는다고 한다. 우울증또한 마찬가지이다. 가정환경이나 어릴적 상처나 트라우마로 형성된 우울증은 학습된 무기력처럼 우울증으로 감정반응회로가 새로 형성되어버린 상태이다. 그것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고, 그렇다면 새로운 반응 회로를 만들어야 하는데, 새롭게 반응 시스템을 만들기까지는 우울증에 형성된 그 곱절의 시간이 필요로 한다. 그래서, 종종 우울증을 겪는 분들이 잘 지내다가 다시 심하게 우울해지고 죽고 싶고 그런생각이 든다는 말씀에 나는 종종, 자연스런 일입니다. 괜찮습니다. 일단은 지금의 상태에서 벗어나고 버티는 것에만 집중하세요. 라고 말한다. 나또한 안정적으로 지내기까지 29년의 우울증의 시간을 거쳐서 알기 때문이다. 도박중독또한 마찬가지라고 한다. 자신이 의지가 약하고 도박중독에서 회복되는 것이 쉽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때론 도움도 받고 주변에 알리는 것이 기본이라고 말한다. 우울증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노력만으로 괜찮아지는 질병이 아니다. 때론 타인의 도움도 받고 약도 먹고 상담도 받고 지난한 시간을 여러사람들과 함께 버티고 생존해야 괜찮아지는 질병이다. 그래서, 우울증 자조모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울증을 겪는 누군가가 고립되지 않는 마음으로.

만화의 결말은 그래도 각자가 괜찮아지고 있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지만, 그 짧은 몇장의 후기만화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을지 나는 가늠이 된다. 세째 시동생도 어디에선가 일용직 노동을 하며 재활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것처럼 그리고 있지만, 그 또한 다시 주식이나 코인을 하게될지도 모를 이야기이다.(물론 잘 버티고 회복의 방향으로 잘 살아가시길 응원하는 마음은 있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작가님또한 자신의 만화체가 요즘 트렌드와는 맞지 않고 만화시장또한 대량물량으로 공세하는걸 알기에 호다라는 팀을 꾸려 만화작업을 하신다. 이게 호다의 첫번째 작품이다. 호다의 다음 작품도 나는 크게 기대가 된다. 작가님은 말한다. 이렇게 호다를 만들어 단체 작업을 하고 있지만, 이 작업이 잘될지는 모른다고. 다만, 워낙 인생의 바닥을 수없이 찍어본 경험을 하신 분이기에 더 이상 잃을게 없다는 생각에 안되더라도 아쉬울게 없다고 생각하신다. 나는 그 태도가 좋다. 안되면 말고 정신. 그래서,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를 계속 해보시면 되고, 호다를 운영하는게 또 어려워져서 호다 활동을 못하실수도 있지만, 여성의 삶과 이야기에 집중하는 작가님의 만화 세계관에 관심이 많고 응원을 하고 싶어졌다. <카산드라> 또한 연재가 이어지고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꼭 읽어보고 싶다.

쉽지 않은 이야기를, 그 지난하고 힘겨웠던 시간들을 상기하며 정리하는 작업이 어디 녹녹했겠는가. 2023년에는 <도박중독자의 가족>이라는 작품으로 만화상도 받으셨다는데, 정말 그럴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다. 우울증 자조모임 시즌2에서도 선정책으로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고픈 책이기도 하다. 너무 멋진 책이고 감사한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거진 병:맛 2 - 청록, 얼얼하고 질긴
스튜디오 어중간 편집부 지음 / 스튜디오어중간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병맛 2호

병맛 잡지를 인스타에서 우연히 보고 20,30대의 투병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컨셉이라는 걸 알고 반갑게 이벤트 신청을 했다. 2호가 오기전에 온라인으로 창간호를 중고로 사서 미리 읽었다.

29년동안 우울증 경험을 투병경험이라 해야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쨓든 일반적인 주류나 보통의 삶에서 멀어져버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어서 많은 부분 공감하며 읽을수 있었다. 2호 처음부터 여러다양한 투병경험을 하신분들의 대담 코너는 처음부터 묵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어주셔서 반갑게 읽었다.(개인 취향이 이야기를 깊게 밀어부쳐 쓰는 글들을 좋아한다.) 그분들의 말씀처럼 이런 몸의 힘듬과 한계를 경험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이런 삶을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열심히 공부하고 좋은 대학가고 경쟁력있는 사회 구성원이 되어 사회가 원하는 직장인이 되어 잔업을 하고 자신을 갈아넣어가며 성취감을 얻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그게 자기 성취라고 착각하며. 그런데,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많이 아프다는 것은 그런 일상생활이 자신의 의도대로 컨트롤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려면 자신을 직시해야 한다. 아픈것의 장점은 이런것이지 않을까.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몸이고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인지 관찰하고 들여다보며 알게 되는 것(그 과정이 쉽지는 않지만). 그리고 내가 심하게 아프다 보니 타인의 아픔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늘어나고 타인의 상처에 대해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가지고 배려하고 존중하게 된다는 것. 혼자만 잘나서 열심히 노력하면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픈 내 몸을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의지도 하게 되고, 그래서 서로 도움울 주고 받으며 서로 위로와 위안을 주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 아프지 않는 삶과 아픈 삶의 장단점의 대차대조표가 어떤게 더 좋은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우울증 29년의 시간이 그때는 많은 시간을 우울증과 무기력으로 낭비했고 주류에서 상당히 뒤쳐져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했지만, 그 시간을 잘 버티며 생존해내고 나니 내 삶의 어머어마한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된다.

틱장애를 가진 분의 인터뷰도 좋았고, 남편이 암투병을 하다가 결국 하늘나라로 가시고 사별자가 된 분의 이야기도 많이 공감하며 읽었다. 나는 한달에 한번씩 우울증 자조모임을 운영하고 있는데(시즌제로 운영되며 아홉달 모임하고 세달 쉬는 방식으로 다음시즌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책을 한권 정해서 읽어와서 이야기 나누는 방식을 취한다. 나아중에 시즌2쯤에 자살사별자나 사별자분들의 에세이 책을 도서로 선정해 이야기 나눠볼 생각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아픔과 상처를 읽어내고 해석하고 치유하는 과정이 우울증이 있는 분들에게도 의미있는 작업으로 배울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텍스트 위주로 내용을 담는 작업에만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보니 창간호도 그렇고 2호도 그렇고 퍼포먼스를 다룬다던가 사진을 많이 담고 있는 잡지 형식은 별로 흥미롭진 않았다. 그래서, 20대 30대 투병이야기라고 했지만, 많은 20, 30대 분들의 이야기와 만나지는 못해 기대보다는 많이 아쉬웠다. 20, 30대 투병경험이 있는 분들을 섭외하기가 쉽지 않아서 그런걸까요? 좀더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었기에 그런부분이 아쉬웠다. 잡지 편집장님께서 예술적 감각이 있는 잡지가 되길 바랬다면 성공하신것 같지만, 나는 사진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사진에세이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텍스트만 집중하는 사람이라 그런 부분만 아쉬웠다.

그래도 아프다고 하면 보통 40대이상의 환자들을 상상하는 한국사회에서 젊어도 아플수 있다는 담론을 만들어 내는 잡지라는 부분에서의 기획은 너무 응원드리고 싶다. 20대 30대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기대가 그들을 오히려 침묵하게 만들기에 이런 담론 잡지와 에세이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인터뷰이로 참여하시기도 하고 대담자로 참여하셨던 희우님의 책도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아래는 잡지중에 제일 마음이 갔던 부분이다.

p78 - 겪을 것은 겪어야 한다는 거요. 많은 분들이 어떻게 하면 고통과 슬픔을 견딜 수 있냐고 물어보세요. 그런데 겪어야 할 일은 그냥 겪는 수밖에 없어요. 아픔과 고통, 후회, 배신, 기억에 대한 미화, 혼자 남았다는 외로움과 상실감, 살아야 한다는 공포와 두려움, 모든 걸 겪어야만 이겨낼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누구나 예비 사별자에요. 지금이 아니더라도 분명 한번은 겪을 일을 저는 조금 더 빨리 겪은 선배라고 생각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럼 애는 누가 봐요? - 오늘도 이 질문을 들었다
잼마 지음 / 보랏빛소 / 2018년 5월
평점 :
품절


책 강추!!! <그럼 애는 누가 봐요?> 잼마 지음

제목부터 맘에 들지 않는가? 아마 저녁 시간에 밖에서 활동하는 기혼여성은 다들 한번 이상 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럼 애는 누가 봐요?” 가사와 육아는 맞살림을 해야하는 건데, 늘 여성의 몫으로 부담지어 진다.

부산의 북그러움 책방에서 구입한 독립출판물인데, 너무나 리얼한 경험담들이 담겨 있다. 출판사를 통해 다시 출판되어 많은 독자들과 만났으면 하는 책이다. 시중에 나오는 페미니즘 책 중에 시류에 편승해서 나온 어설픈 페미니즘 책도 많은데, 그 책들보다는 훨씬 좋다. 독립책방에 갈일이 있다면 이 책을 꼭 사보길 강추하고 싶다. 저자는 교사인데, 교직사회의 보수성과 가부장성도 잘 담고 있는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쥐 - Thirs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나는 욕망을 이야기하는 영화를 좋아한다. 욕망의 금기, 욕망의 절제, 타락한 욕망, 욕망의 발현........등등. 사람들안에는 누구나 악한 본성도 있고, 성적욕망, 폭력적인 욕망이 살아숨쉬고 있다. 상현은 신앙심에서 참가한 실험으로 뱀파이어가 된다. 몸안에서는 피의 욕망이 꿈틀거린다. 그러나 함부로 사람을 죽일수 없다. 그래서, 코마 상태에 빠진 환자의 몸에서 피를 빨아 마신다. 이제 친구 강우의 아내 태주에게 성적욕망까지 느낀다. 그는 그런 자신의 몸을 스스로 벌한다. 다리를 피리로 때리고 성기를 피리로 때린다. 나는 예전부터 가져온 궁금증이지만, 스님과 신부님들의 성적 욕구는 어떻게 다스리는걸까 궁금증이 인다. 상현처럼 금욕적인 태도로 자신의 욕망을 벌하는 사람들도 있을것이고, 자신안의 욕망을 수용함으로써 그 욕구가 점점 약해지는 경우도 있을것 같다. 여전히 그들의 성적 욕망을 다스리는법이 궁금해진다.

 

 

 

 

   상현은 태주와 육체적 욕망을 풀면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김옥빈은 <박쥐>에서 엉뚱하면서도 귀여우면서 섹시하며 피해자이기도 한 태주를 리얼하게 연기한다. 김옥빈의 재발견이다. 마치 상현과 대치되는 욕망덩어리 같았다. 태주에게 속아서 남편이 태주를 학대하는줄 알고 상현은 강우를 태주와 함께 죽여버린다. 그를 죽인 죄책감은 영화속에 강우가 등장하는 환상으로 등장하며 괴롭힌다. 웃기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한 기이한 장면들을 박찬욱감독은 좋아하는것 같다. 강우 엄마인 라여사가 사지마비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려둔것은 그들에게 남아있는 양심을 상징한게 아닐까? 그러던 중에 강우가 태주를 육체적으로 학대한 사실이 없다는걸 알고 그는 죄책감으로 그녀를 죽여버린다. 그러나 상현은 태주를 사랑해서였을까? 그녀를 살리기위해 자신의 피를 그녀에게 먹인다. 드디어 두마리의 뱀파이어가 탄생한것이다. 상현은 뱀파이어가 되어서도 최소한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으면서 피를 구해 먹으려는 반면, 그녀는 배가 고프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생피를 마셨다. 어마어마한 힘에 불사의 힘, 상현은 태주가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 태주는 상현안에 있는 이성으로 억지로 누르고 있는 튀어나가고 싶은 욕망같았다. 강우를 죽인 범인이 누구인지 강우의 엄마에 의해 들통이 나자 상현또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동참한다. 이제 그는 더이상 이런식으로 살수 없다고 생각하고 사지마비인 강우의 어머니를 차뒤에 태우고 어디론가 떠난다. 여기서 말도 많은 성기노출이 잠깐 등장한다.

 

 

 

 

 

   그는 영화초반에 실험에서 기적으로 살아온 자신을 구원의 존재로 믿는 텐트촌에 가서 한 여성을 강간한다. 마을사람들에게 들통이 나서 뒤돌아 서며 바지를 추스리는데 성기가 잠깐 보인다. 같이 본 여성관객은 그런다. 왜 궂이 그걸 보여줘야 하냐? 그냥 강간을 한것을 들킨 상황으로 보여주면 되지 않느냐? 고 이야기 한다. 물론 그래도 된다. 그의 강간은 자신을 신격화해서 믿는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행한일이다. 자신은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라는것을 알고 더이상 자신을 신격화하지말라는 의사전달이었다. 그러나 왜 송강호의 성기를 노출시켰을까?  나는 관객들에게까지 충격적으로 그의 타락과 위선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주 잠깐 노출시켰다고 생각을 한다. 나는 그장면이 통쾌했다. 일단 한국영화에서 성기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반가웠고, 그의 위선과 밑바닥을 충격적으로 전달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서 완행버스를 타면서 걸어오면서 관객이 여자라면 내가 여자였다면 그 장면이 어땠을까 생각했다. 불편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바바리코트맨의 성기노출도 아니고 영화상에서 성기노출이 여성에게 폭력일까? 박찬욱감독은 여성관객에게 성적 충격(폭력)을 가한것일까? 그런데, 얼마전에 특별전에서 봤던 장률의 영화에는 섹스장면이 아닌데도 성기 음모 노출장면이 많았다. 총을 잃어버린 경찰관(총기분실은 엄청난 실책)은 그 충격으로 넋을 놓고 길거리를 발가벗고 걸어가는 장면이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 영화속에서도 섹스장면중에 자연스럽게 성기나 음모가 노출되기도 한다. 영화와 뮤지컬 헤드윅으로 유명한 존 카메론 미첼의 <숏버스>는 얼마전에 상영되었는데, 영화 초반부터 남자의 자위하는 장면이 그대로 등장한다. 게이 감독의 이 작품은 남자친구를 위해 거짓오르가즘을 느낀척 했던 주인공이 다양한 섹스를 경험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결국 자신의 오르가즘을 찾게 되는 자기성장의 이야기였다. 그게 물론 우리가 터부시하는 몸들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외국은 문화가 달라서 그렇다고? 나는 우리나라영화에서도 성의 자유로운 표현이 더 자주 나왔으면 좋겠다. 여성에게 천사와 창녀를 기대하는 우리나라의 보수적인 성윤리가 밖으로 나와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그런면에서도 나는 <박쥐>에서의 성기노출이 아주 반가웠다. 그러나 내가 여자관객이 아닌 이상, 내가 더 이상 접근할 부분은 아닌것 같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최악을 보여주고나서 그는 차로 돌아와 바다로 향한다. 주위가 아무것도 없어서 햇빛을 숨을 공간이 없는 바닷가 절벽으로 차를 몰았다. 멋모르고 자고 일어난 태주는 어둠이 사라져가는 상황에 당황해 차트렁크에 숨기도 하고 그들의 괴력에 멀리 날아가버린 트렁크를 다시 가져와서 덮기도 하고 차밑에도 숨는다. 그러나 상현은 태주의 시도를 계속 무마시킨다. 그런데 그장면이 좀 귀엽게 묘사가 된다. 태주에겐 양심이나 도덕이나 죄책감이 없다. 그냥 살고 싶다. 사람들 죽여서 먹고 싶을때 마시고 뱀파이어로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죄책감많은 상현은 자기가 뿌린 씨앗을 거두려고 함께 데려가려한다. 자신이 화가 나서 죽였다가 다시 살려놓고는 그녀의 존재까지 데려가려한다. 자신이 다시 살렸으니 그녀를 데려갈 권리가 있는 것일까? 그리고 B급 뱀파이어 무비에서 자주 봤던 엔딩처럼 해가뜨고 그들은 타서 재로 변한다. 나는 솔직히 상현은 죽더라도 태주는 살았으면 생각했다. 왜냐면 그는 끝까지 도덕과 죄책감과 양심을 내려놓지 못했고 욕망을 긍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태주가 살아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것을 떠나서 그녀의 존재가 욕망의 긍정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내안의 어떤 욕망이든지 다 긍정하고 싶으니까. 그게 밖으로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다면 그 욕망은 긍정해주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게 자신을 존중하는것이니까. 상현처럼 끊임없이 부정하고 억누르면 자신이 병이 든다.

 

 

 

 

 

   영화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133분이라는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것 같다. 영화의 평가는 아마 극과 극이리라. 대중적인 송강호씨가 나와서 서민적이지 않은 캐릭터로 엉뚱한 웃음이나 가끔 주고 나중에가선 성기노출이나 하니 비호감으로 느낄분도 많을 것같다. 영화의 느낌은 <친절한 금자씨>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일단 <올드보이>와 <친절한>에서의 비장미 넘치는 고급스러운 느낌의 음악. 그리고 B급요소적이고 키치적인 요소(강우 엄마역을 맡은 김해숙씨의 진한 화장과 그녀가 듣는 음악들)가 묘한 웃음을 자아낸다. 그리고 송강호도 <복수는 나의 것>과는 달리 중간중간 그 특유의 애드립 같은 대사로 웃음을 안겨준다. 뱀파이어라는 소재로 단순히 액션영화가 아니라 욕망과 도덕의 딜레마를 재미있게 잘 보여준 영화같다. 나는 박찬욱감독은 JSA를 만들긴 했지만, 대중적인 감독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는 네임밸류를 쌓은 이상 자기가 만들고 싶은 취향의 영화들만 만든다. 그래서, 스타일이 독특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후반의 구원에 대한 메세지는 나스스로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지만 <친절한>과 <JSA>가 재미있었다. 그다음이 <올드보이>이다. <복수는 나의 것>은 영화가 너무 메마르고 삭막해서 보고 나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는 영화다.(지금 다시 보면 또 어떨지 모르겠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가 젤 재미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밥바라기별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부산 센텀시티 롯데에서 황석영 개밥바라기별 독자와의 만남이 있다고 해서 무심결에 선택한 책이 <개밥바라기별>이다. 60이 넘은 작가와 내가 통할만한 연결고리 있을까 싶어서 별 기대없이 읽었다. 그런데, 시대는 달라도 젊음이 갖는 특성은 비슷하기때문일까?  마지막 작가의 말중에 "너의 모든것을 긍정하라"라는 대목에선 눈물마저 흘러내린다. 여전히 고전에 대해서 지루함이라는 거리감을 가지고 있긴하지만, 고전이 고전일수밖에 없는건 인간의 속성혹은 본질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표현방법에 있어서 현재의 표현과 방식이 다르기에 젊은이들이 읽을때 지루함을 느끼기도 한다고 생각하고 삶을 많이 산 사람일수록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많이 고민한 사람일수록 고전에 대한 이해력의 깊이가 커진다는 생각에는 동의하지만 아직은 고전을 거의 읽지 않는편이고 그다지 읽고 싶은 생각도 없다. 언젠가 고전이 나를 부를때 그때 만나련다.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일용직 노동자 "장씨"와의 만남은 자신이 책으로 접하는 지식과 현실의 괴리를 풀수있는 해답으로 주인공 준에게 다가온다. 전국의 공사판과 오징어잡이배, 빵공장, 행자생활등의 자신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있기에 나는 오히려 그 경험이 직접적으로 와닿는다. 누구는 작가의 개인경험담을 끊임없이 재탕 삼탕하는것을 보고 비판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문학적 감수성 보다는 체험의 직접성을 더 좋아하는지라 이 책이 참 마음에 들었다. 체험의 소설화는 이야기를 추상적으로 만들지 않고 우리곁의 이야기로 머물게 한다. 나는 작가의 사소설을 좋아한다. 어쩌면 소설이라는 문학자체가 대부분 작가의 사소설이 아닐까? 처음에는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기전의 준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구성된다. 그런데, 읽어가다보니, 자꾸 화자가 누구인지 헤깔렸었다. 오른쪽밑에 보니, 준, 인호, 영길, 미아, 선이, 상진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고, 그 이름이 그 단락에서 화자가 되어서 이야길 한다는걸 알아차리고 금방 이야기를 따라잡을수 있었다. 화자가 자꾸 바뀌면서 이야기를 연결시켜가는 모습은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콜럼바인 총기난사 사건을 배경으로한 영화-와 <라스트데이즈>-커트 코베인의 자살의 순간을 담은 영화-와 닮아 있었다. 같은 사건이라도 이야기하는 화자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기때문에 그러한 이야기 전개방식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각자의 감정속으로 직접적으로 들어갈수있어서 소설의 주인공은 "준"이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소설속의 여러 젊은이들이 모두 주인공인듯한 느낌이 들었다.

  준은 기존의 학교교육과 평균적인 삶의 진행방식에 회의를 느끼는데, 나는 왜 그 나이때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생각이 든다. 왜 자율학습이란 이름으로 강제로 학생을 잡아두는것에 대하여 반항한번 제대로 못했는지, 왜 학생들의 두발권과 옷을 자유롭게 입을 권리조차 선생님에게 의해 제재를 받아야 하는건지, 왜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자체가 오로지 대학을 가기위한 공부여야 되고, 점수로 인간의 등급이 결정되는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반항하지 않았을까....나이 서른즈음이 되어서야 사회인문학학 책들을 접하며 내가 12년넘게 대학까지 합하면 16년이라는 긴 시간을 바보같은 교육을 받아왔다는걸 깨닫는다. 바보같이 살도록 무의식적으로 세뇌를 당하며 살아온거같다. 사회에 속았다는 느낌이 든다. 나를 나로 살게 하지 못하고, 사회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도록 교육을 받아왔던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스스로 나의 답을 하나하나씩 찾아 가는중이다. 아직도 나는 소설속 준의 과정을 지나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그당시 주인공 "준"처럼 반항을 하거나 학교를 떠나서 사회를 경험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모범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문제아도 아닌 아주 평범한 아이였다. 아니 친구들과의 추억거리도 없는 암흑시대로 기억을 하고 있다. 그래서, 준과 같은 그런 행복(?)한 추억혹은 방황의 기억은 없다. 다만, 준이 베트남에 가기전에 겪었던 많은 경험을 오히려 20대때 동안 오랜시간에 걸쳐서 방황으로 경험했다. 나도 배낭여행이랍시고 떠나보았지만(나는 결국 3일만에 돌아왔었다.),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의 의미를 제대로 즐기는 스타일이 아님을 깨달았고 소설속에 나오는 말처럼 ‘어디에서나 기억은 거기 있는 사람과 함께 남는다’는 말에 동의를 표하고 싶다.

  준이 사랑(?)했던 미아와의 관계. 그당시 준은 오직 자신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어있었다. 미아는 여자가 대학을 가겠다해서 아빠에게 뺨을 맞은 것처럼 현실이 싫었고 가족이 싫어서 현실을 벋어 나고자 했다. 그래서, 준이를 만나면 현실의 이야기는 하지않고, 읽었던 책이야기나 영화이야기만 했다. 그러자, 준이는 화를 내며, "왜 니 이야기는 하지않고, 책속의 이야기만 하니? " "나는 이 현실이 싫단 말이야" 그 지점에서 둘간의 벽이 보였다. 준은 책속에서 읽는 진실이 자신이 체험한 것이 아니기에 자신이 발을 딛고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 끊임없이 질문하고 회의했다. 그래서, 그는 우연히 경찰서 유치장에서 만난 "장씨"를 따라 전국을 유랑하며 힘든 노동을 잠깐(?)이나마 경험하게된다. 그는 몸으로 직접 겪는 삶을 체험하고 싶었던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된다고 하지만, 육체적 노동을 통한 삶은 참 힘들다는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장씨와의 자유로운 삶을 이별하고 자신만의 여행을 하다가 행자노릇도 잠시 하게된다.

  작가의 말은 소설과 달리 작가가 인문학서적을 많이 읽고 철학과 출신이라 그런지 참 딱딱하였다. 하지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본질은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너의 모든 것을 긍정하라"라는 이말이 나에게 눈물을 떨구게 만들었다. 별볼일 없었던거 같고, 초라했던 나의 삶, 그 삶 하나하나가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과정이었다. 다만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기위해 끊임없이 방황했던것이다. 그러니, 그방황의 모든것을 긍정하라는 그말. 그말이 나를 위로해 주었다. 모든 사람이 준이와 같은 방황은 하지 않는다. 현실과 자신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하며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 과정하나하나가 각자의 방황이며 각자의 삶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준에게 많은 감정이입이 되었지만, 그림을 그리던 정수, 부잣집 도련님 상진, 돼지라고 불리던 인호,  장씨아찌에게 그림을 배우던 선이, 집을 벋어나 독립하고 공부를 하기위해 직장생활하며 밤에는 공부를 하던 미아의 각각의 삶을 모두 긍정하고 싶다. 누가 누구보다 더 멋진 방황을 하고, 더 멋진 성장을 하고 그런것은 없는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삶의 기준에 따라 자신이 추구하는것을 찾으려고 노력하는것뿐이다. 어떤이는 기존의 사회에 잘 적응하고 진입하는것이 가치있다고 여길것이고 어떤이는 준처럼 자신과 제대로 만나길 원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도 어떤 삶도 자신의 삶을 긍정하라는 주인공의 메세지가 나에게 큰 울림을 준다. 그래서, 이젠 나의 짧았던 3일의 배낭여행도 긍정하고 싶다. 지금 내가 서있는곳에서 발을 딛고 내가 할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 그렇게 조금씩 천천히 나아가고 싶다. 황석영작가와 <개밥바라기별>로 처음 만났지만, 요근래 나왔던 <바리데기>보다는 임상수 감독의 영화로 먼저 만났던 <오래된 정원 상,하>, <모랫말 아이들>, <객지>, <삼포가는길><무기의 그늘 상,하>-베트남전 이야기, <심청, 연꽃의 길>등이 더 읽고 싶어졌다. 준의 베트남의 경험이 <무기의 그늘>을 만드러내지 않았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