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더더기 없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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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물 생선 요리를 먹을 때에는 꼼꼼하게 뜯어보며 살을 뜯어먹어야 한다. 방심하면 날카롭운 잔가시'가 목에 걸리기 때문이다. 현대 소비 문화'를 생선 살 바르듯이 꼼꼼하게 뜯어보면 현대 사회는 군더더기 없는 형태에 높은 점수를 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에둘러 말하지 말고 바로 가자. 좋은 예가 루이비통 로고'다. 남성에게 있어서 빳빳한 명함이 자동차라면, 여성에게 있어서 빳빳한 명함은 루이비통'이다. 루이비통 가방은 동창회에 모인 동창들에게 자질구레한 설명'을 할 필요가 없다. 루이비통이라는 기표가 " 사랑받는 여자 " 라는 기의'를 내포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 대우받고 사는 여자 " 라는 사실을 전달하는 역할은 한다. 기혼 여성에게 중요한 것은 < 사랑받는 > 이 아니라 < 대우받는 > 이다. 루 ! 이 ! 비 ! 통 ! 을 가진 여자는 축 쳐진 젓가슴을 대신하는 유사 b컵 실리콘'이다.
문제는 " 명품의 대중화 " 에 있다. 이제 더 이상 루이비통은 부잣집 유한 마담이 가지고 다니는 명품 가방이 아니다. 귀족이나 서민이나 루이비통 가방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차별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때 등장하는 루이비통은 루이비통 로고를 밖에 드러내 놓지 않고 안으로 감춘다. 가방을 열어야지만 그 안에 로고를 확인할 수 있다. 속뜻은 명확하다. 천박하게 과시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다. 대중적 루이비통이 멀리서도 로고를 확인할 수 있도록 크기를 키웠다면 귀족적 루이비통은 가까이에서만 확인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중적 과시에서 은밀한 과시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고 이러한 태도가 겸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략일 뿐이다. 나이키 로고가 박힌 라운드티'를 보면 그 나라 GDP를 엿볼 수 있다. GDP가 낮은 나라일수록 티셔츠에 박힌 나이키 로고'가 큰 옷이 잘 팔리는 반면
부유한 나라일수록 나이키 로고는 작은 옷이 잘 팔린다. 가짜일수록 로고는 크다. 저렴할수록 로고가 큰 경향은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사기꾼일수록 호탕하며 예의바르고 친절하다. 그런 놈은 백 프로다. 저렴한 놈이다. 현대 디자인은 점점 군더더기가 없는 형태로 변했다. 스마트폰'은 버튼이 없다 ! 스마트폰은 겉으로 보기에 凸 처럼 생긴 누름단추가 없다. 이 누름단추들은 모두 안으로 들어가 있다. 마치 밖으로 튀어나온 대문짝만한 루이비통 로고가 쪽팔려서 안으로 감추듯이 말이다. 디자인 미학의 기준이 바뀐 것이다. 凹 와 凸 은 이제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한다. 그것은 군더더기요, 흉터'가 된다. 이건희 또한 스티븐 잡스처럼 이음매 없이 매끄럽게 감추는 기술을 원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은 디자인 분야에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한국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凹와 凸이 보이지 않도록 요구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건물 청소노동자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그들은 투명인간'이다. 홍길동이 울면서 요구한 호부호형은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지 말라는 요구였는데 여전히 변하는 것은 없는 모양이다. 건물 내에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사람들은 청소노동자'다. 건물주가 요구하기 때문이다. 외벽 전체를 통유리가 마감한 건물은 하나의 거대한 스마트폰'이다. 태양에 반사되어 반짝반짝거리면 그렇게 보고 좋을 수가 없다. 건물주는 바우하우스적이며 미니멀한 디자인을 외빈에게 자랑하고 싶다. 그래서 푹 파이거나 튀어나온 흉터( 凹凸 ) 를 감추려는 경향이 있다. 사실 손님맞이를 위해서 유리창을 반짝반짝 닦은 이들은 모두 흉터'였는데 말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는 파이거나 튀어나온 요철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자본가들이야 그렇다고 치자. 문제는 대학 문화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홍대 청소노동자 파업 때 보여준 몇몇 대학생의 태도는 건물주나 입주자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입주자 몇몇은 청소노동자가 외치는 소리에 대해 관심이 없다. 화장실 비품 창고에서 쭈그려앉아서 점심을 먹는 게 서러워서 의자 몇 개를 요구하는, 그 소박한 주장은 시끄러운 소음에 불과하다. 그들이 보기에도 대학 내 청소노동자는 푹 파이거나 튀어나온 누름단추'다. 그런데 과연 몇몇 특정 집단에만 적용되는 문제일까 ? 그렇지 않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회도 가만히 보면 스마트폰처럼 요철 없는 외형에 열광한다. 주름은 적이다. 보톡스는 일종의 다리미'가 되어서 주름 잡힌 피부를 매끄럽게 펴준다. 가만 보면 주름은 凹와 凸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
보톡스는 이 凹와 凸 을 一 로 펴주는 것이다. 이처럼 주름과 흉터를 군더더기라고 생각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주름과 흉터를 흉물스러운 기표로 받아들인다면 한국 사회에 미래는 없다. 인문학은 인간의 주름과 흉터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답은 결국 흉물스러운 것에 대한 이해가 아닐까 싶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주름과 흉터를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영역이다. 한국 사회가 빙판처럼 미끄러지는 직선에 열광한다는 사실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탓이다.
1. 갑질 사회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366382
2, 벼락 사회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368210
3. 낙지 사회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370810
4.10분 사회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395891
5. 행복 사회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491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