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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사이바라 리에코 지음, 김문광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양동은 내가 지킨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현재 영화화가 진행 중인 시나리오 작가'도 있었고, 인디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뮤지션도 있었으며, 취업 준비생과 창업 준비 중인 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분당에서 나를 만나기 위해 먼길 온 주부'도 있었다. 모인 이유는 송별을 가장한 음주 모임'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알라딘'에 둥지를 튼 것에 대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 곰곰생각하는발 씨'가 네이버에서 글 재주를 뽐내기에는 아깝지. 글 깨나 쓴다는 알라딘'에 가서 솜씨 한 번 발휘하겠다. 이 뜻 아니겠어 ? 그동안 네이버에서는 허세와 뻥이 팔 할이었잖아. 안 먹히니 부랴부랴 이사를 했겠지. " A가 말했다.
B도 맞장구를 쳤다. 맞는 말이다. 허세와 뻥이 먹히지 않아서 이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사실, 내가 알라딘에 둥지를 튼 이유는 명확하다. 여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엉덩이 크고 심장도 큰 여자'를 만나서, 달도 아니면서 달달한 연애'를 할 목적으로 이곳에 둥지를 튼 것이다. 우린 그날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고, 떡이 될 때까지 술을 마셨다. 술 마시는 틈틈이 코가 비뚤어지는 것은 아닌가 걱정을 했으나 기우였다. 떡도 안 됐다. 야호 ! A는 내게 이별 선물로 미용 가위 세트'를 선물했다. 숱 치는 가위'도 선물했다. 헤어샵'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어서 3년 넘게 미용실을 가지 못했는데, 그 대안으로 직접 머리를 깎으란다. 그리고는 혼자서 머리를 깎는 다양한 방법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B 는 예쁜 손수건 두 장을 내게 선물했다. 그리고 C는 자신이 착용했던 팔찌'를 선물로 내놓았다. 마지막으로 D는 책을 선물했는데 오늘 소개할 책'이기도 하다. 스무 살 앳된 청년에 늙은 내게 선물한 책은 < 우리집 / 사이바라 리에코 > 라는 만화책'이었다. " 이 책은 꼭 선물하고 싶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님 !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책입니다. " 예의상 건성건성으로 대충 살펴보니 그림체'가 내 취향은 아니어서 살짝 실망했으나 내색은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타인의 취향은 다양한 법이다. 오늘은 하루 종일 뒹굴며 잠을 자다가 심심해서 < 우리집 > 을 읽기 시작했다.
문득 내 친구'가 생각났다. 일본에서 만화가로 활동하는 친구'다. 실력을 인정받아 만화 잡지'에 실리곤 하는 순정 만화 작가'인데 그 과정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노력이 들어간다. 컷 하나 그리는데 몇 시간'이 소요되기도 한다. 나중에는 연필을 쥘 힘조차 없을 때도 많다고 넋두리를 늘어놓고는 했다. 그 생각을 하니 리에코의 < 우리집 > 은 선화'가 무척 단순하다. 그리다가 손에 마비가 올 정도는커녕 초등학생도 그릴 수 있는 그림체'처럼 보였다. 이 정도면 날로 먹는 것 아닐까 ? 하지만 이러한 불신은 10페이지 정도를 넘기면 싹 사라진다. 이 만화는 엎드려서 읽다가 나중에는 정자세로 읽게 된다. 그리고 지금 나처럼 오랫동안 여운을 간직하다가 이렇게 글을 쓸 것이다.
무대는 작은 어촌 섬 마을'이 배경이다. 배 다른 형제와 가출했다가 창녀가 되어 돌아온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누나'가 있다. 엄마는 남자가 좋아서 집을 나가고 남자 빚 때문에 집도 저당잡힌다. 하지만 이 가난은 이들 남매만의 불행은 아니다. 섬 마을 전체가 가난하다. 술에 중독되거나 약물에 중독되거나 폭력에 중독될 뿐이다. 이 섬을 지배하는 것은 폭력과 매춘이 팔 할이다. 하지만 리에코'는 이 불행한 서사'를 단순하게 끌고 가지 않는다. 가여운 불행에 대한 가벼운 신파'는 존재하지 않는다. 섣불리 진단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는다. 그녀는 야금야금 독자의 심중을 파고들다가 어느 순간 잭팟을 터트린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서사이지만 촌스럽지 않다. 신파가 촌스럽게 생각되지 않을 때는 그 이유는 단 하나'다. 깊이, 눈물에 깊이가 있으면 그것은 촌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 19금 만화는 눈물에 깊이가, 아... 있다.
만화는 <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 와 < 자기 앞의 생 > 을 닮았다. 동정 없는 세상'에 내버려진 가난한 아이들은 거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법을 배울 터'이다. 만화책을 읽는 내내 내가 살았던 " 양동 " 이 생각났다. 늙고 병든 창녀들이 마지막으로 몸을 팔기 위해 모이는 곳이 바로 서울역 창녀촌'이었다. 포주와 돼지엄마 그리고 앵벌이'들이 모여 살았다. 밤이 되면 아무도 이 거리를 지나가는 이는 없었다. 오로지 삐끼 손에 이끌려서 매춘을 하려고 오는 술 취한 취객이 전부였다. 앵벌이를 하던 아이들은 약 때문에 뼈가 썩었다. 내가 만난 아이 중에는 두개골이 녹아서 얼굴이 내려앉은 아이도 있었다. 누군가는 적십자에 끌려가서 썩은 다리를 잘라야 했고, 누군가는 칼에 찔려 죽었다. 그들이 벌어오는 돈은 모두 포주와 돼지엄마가 강탈했다.
< 우리집 > 에서 배경이 된 섬'은 양동'에서 내가 겪었던 악몽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이 지역에 재개발이 진행되었고 날마나 낡은 일본식 건물이 허물어져 갔다. 공교롭게도 집은 무너졌으나 담을 허물지 않은 곳이 많았다. 창녀의 아이들과 유아 인신매매로 앵벌이가 된 아이들은 밤 늦게까지 본드나 부탄 가스'를 불었다. 그리고 러미널이라는 감기약을 먹었다. 그들은 순한 양이었으나 밤이 되면 아리랑치기'가 되어서 벽돌로 취객의 뒤통수를 내리찍고는 지갑을 훔쳤다. 아침이면 담벼락엔 종종 락카로 쓴 낙서가 발견되고는 했다. " 양동은 내가 지킨다 ! " 스스로에 대한 자기 경멸과 조롱이 섞인 이 낙서'가 쓰여진 담벼락도 이내 무너졌다. 무너진 자리에 새로운 빌딩이 들어섰다. 이 만화를 보는 내내 그때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이 만화 참, 좋다 ! 책을 선물한 스무 살 청년의 선택과 내가 다 읽고 난 다음에 내린 결론은 동일했다. 탁월하다 ! 읽지 않으면 후회할지도 모른다. 내 선택은 틀린 적이 없다. 책을 덮고 나서 다시 읽기 시작했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409094 : 김신용, 환상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