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기 위해서 도망가자는 말 :
갔다가 오겠다는 흔한 다짐
내가 제일 징그럽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미취학 아동이 짙은 화장을 하고 섹시 댄스를 추는 장면이다. 가끔 티븨 오락 방송에서 댄스 신동이라며 롤리타 코스튬플레이어를 소개할 때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채널을 돌리게 된다. 아이에게는 죄가 없다. 이 모든 것은 어른의 몫. 아이가 탁성으로 트로트를 부르는 장면도 볼썽사납기는 마찬가지.
노래방 가면 트로트나 부르는 늙다리 아저씨 주제에 트로트를 폄훼하는 것은 이중잣대라고 비난할지라도, 트로트는 음악적 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가장 후진 장르이다. 트로트는 라시도미파의 단조 5음계와 도레미솔라의 장조 5음계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음폭이 제한적인 장르라는 점에서 확장성이 없다. 트로트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들리는 이유이다. 대한민국에서 때 아닌 트로트 열풍이 부는 것은 대한민국 문화가 퇴행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다. 트로트의 대책 없는 낙관과 긍정은 치가 떨릴 정도로 후졌다. 박상천의 << 무조건 >> 이란 노래는 무한 긍정의 화신'이다.
당신을 향한 나으 사랑은 무조건 무조건이여 ~ 참, 할 말을 잊게 만드는 무한 긍정 마인드'다. " 내가 필요할 땐 나를 불러줘 / 언제든지 달려갈게 / 낮에도 좋아 밤에도 좋아 / 언제든지 달려갈게 " 라는 대목에서는 대리운전 회사 주제곡처럼 들린다. 시바, 아무리 사랑의 노예라도 해도 근로기준법은 지킵시다. 트로트에서 제일 한심한 부문은 가사'다. 너무 상투적이고 천박해서 멜로디가 훌륭해도 감흥은 절반으로 줄어들기 일쑤다. 정말 좋은 가사는 긍정을 강조하기 위해 부정을 섞는 기술이다( 혹은 부정(성)을 강조하기 위해 긍정(성)을 강조하는 기술).
조용필이 << 그 겨울의 찻집 >> 에서 "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 고 했을 때 이 감정의 모순은 지극히 아름답다. 그리고 이문세가 << 옛사랑 >> 에서 "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지 " 라고 느닷없이 딴지를 놓을 때 우리는 그 사랑의 순도를 읽을 수 있다. 지겹다는 고백에는 절절하게 그립다는 속내를 품는다. 이런 문장의 가사야말로 품격을 한 단계 높인다. 선우정아의 노래 << 도망가자 >> 는 이 기술이 매우 탁월하다. 노래하는 여자는 번아웃된 애인에게 도망가자 _ 라고 제안한다. " 도망가자 " 라는 말이 책임을 회피하기에 좋은 현실 도피성 넋두리에 불과하지만
" 도망가자 " 라는 말은 후술되는 " 돌아오자 " 라는 상반된 말 때문에 빛이 난다. 지금은 도망가되 " 실컷 웃고 돌아오자 " 고, 그렇게 " 씩씩하게 " 돌아오자고 말한다. 이 노래에서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 도망가자 " 가 아니라 " 돌아오자 " 이다. 이 노래를 듣다가 늦가을 겨울 초입에 내리는 소설(小雪)처럼 눈물이 찔끔 났다. 집을 나설 때마다 현관문 앞에서 나는 혼자 빈집을 지킬 늙은 개에게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 갔다 올게 ! " 평소에 아무 생각없이 버릇처럼 내뱉은 인사말이었으나 키우던 개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그 인사마저 건넬 수가 없다.
갔다가 때가 되면 돌아오겠다는 흔한 다짐. 그 어떤 희망의 온기......

▶ 오겠다는 다짐도 없이 갑자기 먼길 갔던, 4000번의 산책을 나와 함께 동행한 내가 사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