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은 미학에 앞선다
봉준호 감독은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 위에 올라 감독상 수상 소감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내가 영화 공부할 때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 있었는데, "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 _ 그것은 우리의 위대한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때 봉 감독이 사용했던 문장은 When I was young and studying cinema..... 이다. 그는 영화를 지시하는 단어 무비 movie, 시네마cinema, 필름film 중에서 cinema라는 낱말을 선택했다. 세 용어는 모두 다 영화를 지시하는 단어이지만 낱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 무비 > 는 영화의 상업성을 강조하고, < 필름 > 은 예술성에 방점을 찍고, < 시네마 > 는 무비와 필름의 속성을 모두 포괄한다. 봉준호 영화의 성격은 분명하다. 강우석이 무비를 생산하고 홍상수가 필름을 전시한다면 봉준호는 시네마를 만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윤리적 태도'다.
김기덕 영화(film)의 메시지가 전복적 정치성을 띠고 미학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추악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김기덕의 윤리적 태도에 있다. 정희진 에세이집 <<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 >> 에서 밝혔듯 정치학(입장), 윤리학(방법), 미학(영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적 태도'다. 그렇기에 영화의 메시지가 아무리 뛰어난 정치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고 훌륭한 장면을 연출했다 해도 결국에는 영화 속에서 재현된 타자에 대한 윤리적 태도가 제일 중요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 사태에서 우리가 정작 놓치고 있는 것은 정치성도 아니고 미학도 아니다. 윤리학이다.
모두가 환호할 만한 훌륭한 장면을 만들지 못했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나는 한국 질병관리본부가 질병이라는 이 무시무시한 대타자 앞에서 보인 윤리적 태도에 감동했다. 질병과 싸우되 결코 타자를 혐오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은폐하며 배제와 혐오의 방식으로 타자를 추방할 때 한국 정부는 포옹하되 물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의 놀랄 만한 품격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공포도, 이 싸움도 언젠가는 추억이 될 것이다. 타자의 체온이 여름에는 지옥이겠지만 겨울이 오면 그 체온을 그리워할 날이 올 것1)이다. 윤리학는 미학에 앞선다.
1) 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왜냐하면 여름 징역의 열 가지 스무 가지 장점을 일시를 무색케 해버리는 결정적인 사실,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37℃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 ......
아버님 서한에 육년래(六年來)의 혹한(酷寒)이라고 하였습니다만 그런 추위를 실감치 않았음은 웬일일까. 심동(深冬)의 빙한(氷寒), 온기 한 점 없는 냉방(冷房)에서 우리를 덮어준 것은 동료들의 체온(體溫)이었습니다. 추운 사람들끼리 서로의 체온을 모으는 동안 우리는 냉방이 가르치는 ‘벗’의 의미를, 겨울이 가르치는 ‘이웃의 체온’을 조금씩 조금씩 이해해가는 것입니다.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