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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지연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남편의 외도로 인해 이혼을 하며 받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어쩌지를 못하는 지연은 외할머니를 이따금씩 만나 같이 먹는 음식의 식감을 느끼고, 생강차의 온기를 느끼며 조금씩 몸의 긴장을 풀게 되었고,곧 외할머니의 엄마 이야기,즉 증조외할머니의 옛 시간들을 귀로 들으면서 마음의 긴장도 동시에 풀어짐으로 지연은 서서히 곪아터진 상처를 치유해 나간다.
할머니와 손녀 관계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자 대 여자의 입장에서 들리게 되는 이야기들이다.일본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여인(증조모),전쟁을 겪어낸 여인(증조 할머니,새비 아줌마)전쟁이 끝났지만 가난 속에서 홀로 자식을 키워낸 여인(새비아줌마,할머니)..그리고 결혼이라는 굴레속에서 가족들과의 갈등을 속으로 삼키고 살아가는 여인(지연 엄마)...이혼녀가 당당하게 세상에 맞서 살아가려는 지연이까지 여자들의 이야기들은 모두 하나의 역사의 기록이다.
나라를 구한 위대한 일들로 기록된 역사들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역사 특히 힘 없는 자들의 기구한 삶 또한 이 모든 것들도 역사가 되겠기에 기억해야지 않을까 싶다.그래서 이 소설이 좀 더 특별하게 생각된다.
할머니란 단어가 개인적으로는 그리 애틋하진 않다.왜냐하면 내겐 친할머니도 안계셨었고,외할머니도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있어 돌아가셔서 두 분 다 사진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다.할머니의 정을 느껴보지 못한셈이다.그래도 어렴풋이나마 할머니..란 소리를 듣게 되면 뼈밖에 안남았지만 업혀 있으면 단단하고 따뜻했었던 그 등 냄새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어릴적 시골 외갓집에 가면 뒷집 오르막길에 이웃집 할머니가 계셨었다.그 할머니는 실명을 하셨는지 앞을 보지 못하셨었다.엄마가 연년생 동생과 네 살 터울의 막내 동생을 출산한 후 두 동생들 키우신다고 첫째인 나는 국민학교를 입학하기 전 한 번씩 외갓집에 맡겨진 적이 있었다.엄마는 잠깐 일주일 정도씩 맡겼다고 하셨지만 어린 나의 기억으로는 한 달,두 달쯤 되는 시간들로 기억되곤 했었던 집에 대한 그리움으로 외갓집 동네를 배회를 많이 했었던 것 같다.배회하던 중 뒷집 오르막길까지 발길이 닿았었던 것 같고 몰래 이웃집 할머니의 거동을 훔쳐 봤었던 것 같다.낮에는 늘 할머니 혼자 계셨었고 앞을 못보시니 손으로 더듬더듬 마루며 문이며 살림도구를 만지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귀가 밝으셨던 분이셨던 걸로 기억에 남는다.내가 늘 왔다 갔다 하는 소릴 들으셨던겐지 곁을 내어주신 듯 하다.친해진 계기는 정확히 잘 기억나질 않지만 그렇게 어영부영 할머니와 친구가 되었던 것 같다.해가 뜨면 할머님 집으로 달려가 할머니랑 놀다가 해가 지면 할머님 가족들이 돌아오면 외갓집으로 내려갔었던 것 같다.할머니는 빈집에 앞도 못보시고 말동무가 없어 적적하셨을텐데 아마도 꼬마인 내가 할머니를 잘 따르니 동네 이웃집 손녀지만 손녀처럼 대해주신 듯 했고 나 또한 외갓집 안방문 바깥 윗쪽에 걸어둔 흑백사진 속 외할머님의 모습을 한참 쳐다보다 뒷집 할머님의 쪽진 머리 모습이나 얼굴형이나 너무 닮아 보여 죽음이란걸 인식 못해 좀 덜떨어진 어린 나는 그 할머님이 우리 외할머님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왜 나의 할머니가 할아버지랑 떨어져 살면서 이렇게 황량한 초가집 지붕에 앞을 못보시고 고생하시며 점심은 늘 흰쌀밥 한 그릇에 간장 종지 하나에 반찬 없이 물을 말아서 밥을 드시는 건가??나는 그게 너무 애가 타서 할머니한테 맨날 외갓집으로 가서 같이 살자고 거기 가면 고기 반찬 먹고 살 수 있다고 늘상 졸랐었던 기억이 떠오른다.아마도 내가 물 만 밥에 간장만 찍어 먹는 게 고역이어서 할머니한테 떼를 썼는지도 모르겠다.지금도 한 번씩 물에 밥을 말아 간장에 찍어 먹어보면 앞을 못보시던 쪽진 할머님의 모습이 눈에 선해 그립다.
유일한 기쁨은 할머니가 벽장속 선반에 아껴둔 커다란 눈깔 사탕을 하나씩 주실 때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외갓집에서 외할아버지랑 외숙모랑 외삼촌이랑 이종사촌 언니들이 시내 나갔다가 사다 주시는 간식거리보다 할머니가 딱 한 개씩 주셨던 알록달록한 그 한 개의 눈깔 사탕이 너무 맛있었다.할머니의 손주들도 있었는데 할머니는 차별없이? 딱 한 개씩 골고루 나눠 주셨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가난한 집에 할머니의 무람 없는 애정을 받겠다고 끼워 앉아 할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던 어린 나는 어쩌면 눈치 없었던 아이 였었고,어쩌면 욕심 많고 심술궂은 아이였던 것도 같다.
그래도 늘 잠이 올라치면 또는 엄마가 보고 싶다고 칭얼대면 할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하얀 면 옷감을 다림돌 위에 올려 놓고 발로 밟으며 자장가를 불러 나를 재워 주셨다.그때 그 등이 기운이 없으셔 넘어질까봐 위태위태한데도 정말 따스해서 그리움이 절로 사그라들 정도로 큰 위안이 되었던 것 같다.등에 업혀 경사로 아래 외갓집 지붕이랑 마당을 내려다 보면서 잠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국민학교를 입학하고, 동생들도 많이 자랐고, 외갓집에 찾아가는 것도 드문드문 해졌던 어느 해, 뒷집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안계셨다.
그댁의 며느님이 훌쩍 자란 나를 보시더니 반가워 하시면서 담장밖에 아이들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소리만 들리면 늘 문을 열어 내이름을 불러보곤 하셨다고 하셨었다.아쉬우면 지나가던 아이들에게 눈깔 사탕을 한 개씩 쥐어주곤 하셨었다는 소리는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다.
내게 외할머니의 사랑을 대신해 주신 이웃집 할머니를 계속 떠올리며 내내 책을 읽었다.옛시절 고단한 시절을 살아 온 여인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는 늘 그 할머니가 떠오른다.물론 나의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힘든 삶을 살아내셨을 거란 생각이 크지만 실제로 내 눈으로 확인하며 귀로 듣질 못했으니 크게 체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하지만 이웃집 할머님네는 어린 내가 봤을 때도 가난한 살림이란 게 느껴졌었고 할머니의 소박하고 단정한 삶이었지만 젊은 시절 일을 많이 한 탓에 주름지고 손 마디 뼈가 툭툭 불거진 손으로 앞을 못보셔도 희한하게 집안일이며 쉴틈 없이 움직이셨던 걸로 기억한다.그리고 그집 며느리는 돈 번다고 늘 밖에 나가서 일 하시느라 얼굴을 제대로 본 기억이 없었으며 해질무렵 잠깐 본 며느님의 얼굴은 늘 피로로 누적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외갓집으로 돌아오면 바닷일 나갔다 돌아 온 외숙모님의 얼굴도 늘 피곤에 짙게 배어 있으셨었다.눈치 없었던 나는 평소엔 늘 다정한 얼굴인데 때때로 외숙모님의 표정이 왜 어두웠던 건지,집에선 엄마의 얼굴도 저녁만 되면 왜그리 어두웠던 건지...혹시 나 때문인가? 의아해 했었다.
잊고 살아오다 ‘밝은 밤‘을 읽으면서 모조리 불타 올라 솟아 오르는 연기처럼 기억들이 한 편, 한 편씩 좋았던 것 하나,아련했었던 것 하나,애처로워 슬펐던 것 하나,그리고 나의 할머니가 아님에도 그리운 뒷집 할머니의 눈을 감고 내 얼굴을 만지시던 모습 하나 하나 그 모든 게 중첩되어 공중으로 떠올랐다.
지연은 할머니의 존재 자체로 그리고 할머니와 함께 밥을 먹었던 시간으로 상처가 아물어 간 것이다.할머니란 존재는 그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내게도 친할머니가 아녔음에도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이 엄마를 무한정 기다렸던 그립고 공포스러웠던 그 어린 시간들을 따스하게 치유해준 할머니의 사랑이 내 속에 따뜻하게 잘 남아 있어 늘 조모의 사랑이란 개념을 어렴풋하게나마 형상화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그래서 이 책을 더 애틋하고 특별하게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질곡의 삶을 살아낸 여인이었어도 사랑은 늘 간직하고 있었던 게 아녔을까 싶다.책속 등장인물들의 가슴속에도 다들 사랑을 담고 있어 눈이 부신다.결국 사랑이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 같다.
‘넌 사랑받기 위해 충분한 사람이야.‘ 어느 날 말을 이을 수 없어 눈물만 흘리던 내게 지우가 그렇게 말했다. ‘앞으로는 내가 널 더 많이 사랑할게. 이제 사랑받는 기분이 뭔지도 느끼며 살아.‘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듯이, 어떤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나는 지우를 보며 알았다.
(1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