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자 '책읽는 경향'에 소개되는 책이 오래전에 읽은 톰 울프의 <현대미술의 상실>(열화당, 1977; 아트북스, 2003)이어서 스크랩해놓는다. 미술관련서를 가끔씩 챙겨놓지만, 책을 손에 든 지는 좀 된 듯하다. 그림책을 보면서 휴일을 보낼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까?.. 

경향신문(09. 09. 21) [책읽는 경향]현대미술의 상실  

<현대미술의 상실>(톰 왈프·열화당)은 학창시절 교내 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졸업 후 진로에 대해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던 터라 ‘상실’이라는 제목에 유독 마음이 닿았다. 문고판의 이 얇은 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술이론에 끌려가는 현대미술에 대한 야유와 독설이 가득 차 있었다. 책을 볼 때마다 속이 후련해지는 저자의 쉽고도 정확한 비판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이 책은 원제 'The Painted Word'가 시사하는 바와 같이 ‘이론’을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현대미술의 현실에 대한 신랄한 공격이다. 또한 미술과 작가들의 창작활동이 미술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작동되고 견인되는 것에 대한 지적과 개탄이기도 하다.   

이따금 다시 책을 펼칠 때면 깔끔한 정장에 묘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저자의 사진을 접한다. 그 사진은 1997년 작고한 미술평론가 고(故) 이일 선생을 생각나게 한다. 장안의 멋쟁이로 통했던 이일 선생은 어렵지 않으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이른바 잘 읽히는 비평문으로 유명했다. 나는 그분을 통해 미술비평과 이론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결국 그분이 학과장이었던 학과에 늦깎이로 입학했다. 졸업 후 미술관 큐레이터로 일하며 선생께 청탁한 전시도록 서문이 그분 생전의 마지막 원고가 되었다.

다양한 비평문과 평론집을 매일처럼 접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글들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오래 살아계셨으면 하는 분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선생의 쉬운 글쓰기와 고운 웃음이 마냥 그립다.(박천남 성곡미술관 학예실장)   

09. 09. 20. 

P.S. 미술 작품 자체보다 미술 이론이나 비평이 더 득세하게 된 시대가 말하자면, 톰 울프가 진단하는 '상실의 시대'인데, 대략 그린버그의 모더니즘과 액션 페인팅 이후이다. 아서 단토의 표현을 빌면 그 '상실의 시대'는 '예술의 종말 이후' 시대이면서 '철학하는 예술'의 시대이기도 하다. 

    

소위 '이론 이후' 미술사에 대한 관심 때문에 구해놓은 책이 몇 권 있는데, 조나단 해리스의 <신미술사? 비판적 미술사!>(경성대출판부, 2004)와 마크 치담 등의 <미술사의 현대적 시각들>(경성대출판부, 2007) 등이 그것이다. 다시 검색해보니  겐 도이의 <미술사의 유물론적 이해>(경성대출판부, 2007)도 흥미롭겠다.  

 

덧붙이자면 키스 먹시의 책 두 권 <이론의 실천>(현실문화연구, 2008)과 <설득의 실천>(경성대출판부, 2008)도 챙겨놓기만 하고 아직 손에 들지 못한 책들이다. 너무 무거워서 들고다닐 수 없는, 할 포스터 등의 <1900년 이후의 미술사>(세미콜론, 2007)는 내 집 마련 이후에나 소장하려고 하는 나의 '로망'이다...


댓글(7)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동 2009-09-21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론'이라 하면 내포한 '의미'로 체계적인 해석과 주장일테고, 반대로 '무의미 하다'는 것은 단순하다는 것과 통할 것 같습니다. 미술이 미술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그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은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아니면 서로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모호성이나(위장성) 희귀성 때문이겠지요. 현대미술에 대해 편히 읽을 수 있는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조영남/한길사'에 대해 들은 적이 있습니다.
또한 미술로부터 위안(순수한)을 얻어 개인의 위기를 극복한 사람도 있습니다.

로쟈 2009-09-21 18:5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 한데, 그게 과정을 보면 어느 정도 필연적이기도 한 듯해요...

목동 2009-09-22 21:09   좋아요 0 | URL
로쟈님 빈틈이 없으세요...

2009-09-21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8: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nousee 2009-09-24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안녕하세요, 미술하면서 이 블로그에 가끔씩 접속해 제게 밀린 소개글들 읽는 것이 소중한 시간인데 저 기사를 보면 도무지 미술은 없으면서 있는 척한다라고만 싸잡아 얘기하고 싶은 분위기로 얘기되는 거 같아 조금은 실망스럽네요.. 쿤데라가 말했듯이 '설명할 수 없는 것' 앞에서의 놀라움이 창작의 이유라고 한다면 그걸 설명하는 비평가들의 헛다리와 창작을 혼동하는게 반복되는 느낌이 들때도 있구요.. 한국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미술가가 조영남이라는 사실이 조영남의 화투그림이 좋은거라는 건 딴 얘기아닌가요? 그리고 이일 선생은 '쉬운 글쓰기와 고운 웃음'답게 주례사비평의 원조님이시기도 하지요...쉬운게 좋은 거고 좋은게 좋다는게 전 싫네요...

로쟈 2009-09-25 20:50   좋아요 0 | URL
이일 선생이 그러셨군요.^^ 사실 저는 톰 울프의 책이 인상적이지 않았어요.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걸 보면. 대신에 단토의 책들을 좋아합니니다. 아무래도 '그림'보다는 '말'이 전공이다 보니...
 

얼마전 박원순 변호사가 시민단체에 대한 국정원의 사찰 의혹을 폭로했고, 이에 대해 국정원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아니 고소 주체가 '대한민국'이란다!). 사건 관련기사와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요즈음 이런 페이퍼조차도 다 정보 수집대상이자 감시대상이라고 하니 여차하면 비공개로 돌려야겠다...   

경향신문(09. 09. 19) 박원순 변호사가 밝힌 ‘국정원 사찰’ 의혹 

박원순 변호사는 17일 기자회견장에서 A4용지 14장 분량의 ‘진실은 이렇습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공개했다. 그러면서 “며칠 동안 쓴 글이며, 내가 살아왔던 모든 것을 걸고 증언하건대 글의 내용 모두가 진실”이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자신을 비롯해 시민사회 전반에 행해진 국정원의 사찰 실상을 구체적으로 폭로한 것이다. 문서에는 사찰의 시점·정황·결과가 상세히 기술돼 있다. 국정원의 민간인 사찰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정치·사회적 파장은 심상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문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박 변호사에 대한 사찰과 압력
2007년 7월 하나은행과 희망제작소는 기자회견을 열고 ‘하나희망재단’ 설립을 발표했다. 하나은행이 300억원을 출연했다. 재단은 지난해 가을 설립 등기를 완료했다. 그러나 며칠 뒤 재단 이사회는 희망제작소와의 사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한두 달 후 하나은행의 한 임원으로부터 “국정원 직원들이 이 사업에 개입을 하여 희망제작소와의 협력관계가 중단됐다”는 얘기를 들었다.

나는 모 그룹이 세운 재단의 이사로 등재돼 있다. 재단 관계자들은 “국정원에서 연락이 와서 월급을 얼마나 받는지,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자세히 물어보았다”고 했다. 나는 한 기업의 사외이사로 수년째 활동해 왔는데, 나중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국정원 직원이 내 활동내역에 대해 물어보았다고 한다. 강연차 들른 한 재단의 이사장으로부터 “국정원에서 찾아와서 박 변호사에 대해 자세히 탐문했다. 너무 이상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지난 4월 ‘아름다운가게’의 모대학 카페 오픈식이 끝난 이틀 뒤 국정원 직원이 그 대학 총무과를 찾아와 ‘아름다운가게’를 왜 지원했는지 문의했다. 국정원 직원은 “좌파단체들의 자금줄이며 운동권 출신 직원들이 대다수인 ‘아름다운가게’를 후원한 사유가 무엇인지” 문의했다고 한다.

지난 6월 국정원 직원이라고 밝힌 사람이 모은행 담당자에게 전화해 “ ‘아름다운가게’와 무슨 관계가 있기에 오랜 시간 많은 돈을 지원했느냐”고 문의했다. 그 은행은 ‘아름다운가게’가 벌이고 있는 특정 프로젝트를 몇 년째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지난 5월 자선바자회 행사 관계로 만난 경기도 한 시의 관계자도 “국정원에서 전화를 받았다. ‘아름다운가게’의 행사를 하지 말라고 하더라”고 했다.

민간단체에 개입하는 국가권력
어느 날 사회투자지원재단의 모 상임이사가 만나자고 했다. 그는 재단이 정부부처로부터 투자를 받는 데 나라는 존재가 도움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 얼마 후 다시 상임이사를 만났더니 “이사장과 나마저 별로 마땅치 않은지 정부가 완전히 지원을 끊었다”고 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전 사무총장이 내게 전화를 해왔다.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자꾸 물러나라고 한다는 것이다. 보건복지가족부의 실무자들이 노골적으로 요청해올 뿐 아니라 이사장을 시켜서도 압박을 가해온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모임에서 사회연대은행 상임이사를 만났다. 그는 지난번 정부 지원 대상에서 사회연대은행도 완전히 배제됐는데, 이사진 가운데 참여정부와 친했던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더 심각한 일도 벌어졌다. 어느 시민단체의 평생회원 중 한 사람은 기업의 임직원이다. 그 사람이 국정원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어떻게 시민단체의 회원이 될 수 있느냐”는 얘기를 듣고 평생회원의 신분을 정리한 사례가 그것이다.

또 한 여성단체가 후원회를 열었는데 어느 중소기업에서 전화가 와서 “여성민우회는 불법시위단체라고 하는 명단이 와서 지원을 못하게 돼 정말 미안하다”고 했다고 한다. 공공기관에는 민변에 소속된 변호사들에게는 사건을 수임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법률고문직에서 해촉된 사람도 여럿 있다고 들었다.

국정원장과 대통령이 사찰 지휘
대선이 끝나고, 촛불시위가 일어나고, 그리고 언젠가부터 세상이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날 일어나 보니까 완전히 20~30년 전 세상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지방에서 기업을 하는 한 분의 말에 따르면 지금 지방의 국정원 지부도 과거와 완전히 다른 위상을 갖게 됐다고 한다. 국정원 지부장을 찾는 경우가 늘었고, 가끔이라도 이 사람들과 식사를 해야 안심이 된다는 얘기였다.

국정원의 최고 책임자인 국정원장과 나아가 대통령이 이런 일을 모를 리 없다. 이렇게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사찰과 감시가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국정원을 운영하고 집행하는 책임자의 철학과 원칙, 기능과 활동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국 국정원장과 대통령의 지휘에 의해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내년 지방선거가 끝나고 정권의 후반기로 들어서면 진실은 한순간에 터져 나올 것이다. 국정원의 비열한 사찰행위와 그 은폐는 이 정권이 끝나면 반드시 심판받을 것이다. 그것이 인과응보이고 역사의 필연의 법칙이다. 나는 이런 자리에 서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 자신이 당하고 내 주변이 당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정확히 정리하고, 그 대안을 위해 싸우겠다는 다짐과 결의를 하게 됐다. 이 보고서는 바로 그런 다짐의 시작에 불과하다.(정제혁기자) 


 
한겨레(09. 09. 19) '살인의 추억', '사찰의 추억' 
 
2003년 봄, 영화 <살인의 추억>이 개봉되었을 때 나는 외국에 있었다. 인터넷으로 한국 소식은 자주 접했지만 인간의 미세한 감정·감각과 관련된 내용은 그저 궁금해하며 넘어가기도 했다. 이 영화 제목도 그런 것이었다. 추억이라는 말은 어떤 대상을 정 깊게 기억함을 의미한다고 대충 이해하고 있던 나에게, ‘살인’과 ‘추억’의 조합은 이색적으로 다가왔다.  

후에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도 제목에서 두 단어를 조합한 사람의 깊은 뜻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어쨌거나 화제작답게 영화는 탁월했고, 영화에서 그려진 상황은 오금이 저릴 정도의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 누군가는 연쇄살인에 대해, 혹은 그것이 일어나던 시절과 상황에 대해, 애착 어린 추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영화 제목이 머릿속을 휘젓게 된 것은 최근 이와 마찬가지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의 새로운 조합이 떠오르면서였다. 이름하여 ‘사찰의 추억.’ 민주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재야 정치인 사찰, 학원 사찰 같은, 정치적 목적의 민간인 사찰이 일상적 삶의 일부였다. 사찰하는 이와 사찰당하는 이가 매일 접촉하다 보니 모종의 친분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던가. 어쨌든 내가 아는 어느 유명한 분은 사기꾼 비슷한 인간이 괴롭히자 자기를 사찰하던 형사에게 도움을 받아 그 상황을 넘겼다니까. 그럴망정 그분이 일거수일투족을 사찰당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기억할 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가 누군가의 사유물로 여겨지던 그 시절을 애틋하게 동경하며 추억하는 사람들도 실제로 있는 것 같다. 사찰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찰하고자 하는 사람들 말이다. 작년 올해 언제부터인가 주변 사람 몇몇이 “사찰성 전화를 받은 것 같다”며 불쾌해하곤 했다.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배반한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이 제기한 기무사 소속 군인의 민간인 사찰 의혹을 필두로 해서 불법 사찰의 혐의가 짙은 사건들이 잇따라 보도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박원순 변호사처럼 한국 사회에서 가장 신망 높은 인물의 하나이면서도 온건하고 합리적인 분이 자신에 대한 국정원의 사찰 의혹을 언론에 직접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가로 그는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국정원의 고발을 당한 상태에 있다. 옛날 국가원수 모독죄 명목의 재판이 남발되는 것을 볼 때도 막막했지만, 민주주의의 갑작스러운 후퇴를 보는 심정은 그때와도 다르다. 그가 눈물 흘리며 기자회견 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욱 고통스럽다.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의 하나는, 기무사(옛 보안사)나 국정원이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그들이 자행했던 각종 국가폭력적 행위와 불법적 사찰 행위에 대해 규명하고 공식적으로 사과하는 과거사 규명작업을 거쳤음에도 최근 다시 민간인에 대한 사찰 의혹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수많은 예산과 인력을 들여 진행한 자체조사와 사과·반성이 헛일·헛소리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사찰 의혹은 아직 의혹으로 머무르고 있지만, 실제로 사찰이 행해졌더라도 이것이 기무사나 국정원이란 조직 전체의 방침을 따른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자신이 소속된 부서의 조직 이해나 출세의지에 집착하는 개인들의 실수일 것이다. 군 정보기관이나 국가 정보기관이 일반 시민이나 시민운동가를 사찰했다는 의혹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기관의 입장에서는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국정원은 엄정한 자체조사를 통해 이런 일이 실제로 자행되었는지 규명할 것이지 국가의 명예를 들먹이면서 존경받는 사회지도자를 괴롭힐 일이 아니다.(한정숙 서울대 교수·서양사)  

09. 09. 19.  

 

P.S. '인권변호사 박원순'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되는 책은 <야만시대의 기록>(역사비평사, 2006)이다. "일제시대부터 노무현 정권까지 각종 신문자료와 잡지, 단행본, 논문, 단체 자료집, 법원 판결문, 외국 정책자료 및 인권단체 보고서 등을 총망라하여 자료들을 모았고, 그를 토대로 국내외의 다양한 고문 사례들을 통사적으로 정리해낸 최초의 기록". 민간인 불법 사찰도 사실로 판명된다면, 이제 '야만시대'로의 완벽한 회귀에 '고문' 하나만 남은 듯싶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동 2009-09-20 11:01   좋아요 0 | URL
'사찰'의 반대말은 '해찰'이다(ㅋ).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자주 집에서 본다. 이유는 간단하다. 감독의 유머감각에 매료 되었기 때문이다.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하려는 캘릭터간의 언쟁이나 수사 기법과 지방 경찰관의 열등감 그리고 취조실에서 시대적인 습관들을 볼 수 있어 재미있다. 사찰이 강화되었다면 정보수집 행태속에서도 봉 감독은 유머들을 줍게 될 것이다(선하다). 정보 전달은 사람의 신경 신호 전달과 비슷하다. 여론조사보다는 더 극밀한 내면을 전방위차원에서 알고 싶어 하고 또한 제공하게 될 것이다.

로쟈 2009-09-20 14:59   좋아요 0 | URL
정말로 영구집권을 꿈꾸는 게 아니라면, 뒷감당도 못할 일을 왜 자꾸 벌리는지 궁금합니다...

2009-09-21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1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델러웨이부인 2009-09-23 17:19   좋아요 0 | URL
개그콘서트를 보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왕따놀이를 하자는 것일까요?

로쟈 2009-09-23 18:40   좋아요 0 | URL
여러 칼럼에서 지적된 것이지만, 일종의 '겁박'이죠. 알아서들 기라는...
 

아이와 와우북페스티벌에 가려던 계획이 취소되었다. 굳이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좋을 게 있겠느냐는 게 아이 엄마의 생각이고, 학교에 갔다온 아이도 친구와 노는 게 더 낫겠다고 했다. 나도 할일이 많은지라 토요일 외출 계획은 접고 책상맡에 앉았다. 이런저런 책들이 널려 있는데, 며칠전 들었던 의문이 꼬투리가 돼 자꾸 머릿속을 맴돌기에 몇마디 적는다. 소설의 시작에 대해서이다.    

거창한 이야기는 아니다. 최근에 나온 김연수의 <세계의 끝 여자친구>(문학동네, 2009)를 잠깐 보다가('읽다가'가 아니다) 몇몇 단편의 '시작하는 문장'이 좀 특이하게 여겨졌다. 가령, "그후로 십삼 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여러 번 어린 케이케이가 수영을 했다던 그 냇물을 상상했다."('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라고 1인칭 '나'로 시작하는 건 전혀 문제가 안되지만, "여름, 바다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늙어가고 있었다."('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처럼 '그(녀)'라는 3인칭 대명사로 시작하게 되면, 마치 문법에 맞지 않는 비문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이다.  

1인칭 대명사로 시작하거나 다른 고유명사가 먼저 제시된 이후에 그걸 받는 것이 아니라, 다짜고짜 '그(녀)'라고 말할 경우에 '그(녀)'의 지시대상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이건 '그(녀)'를 마치 고유명사처럼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러한 시작은 몇 차례 더 등장한다.  

"그가 왜 예정에 없이 이즈미로 가게 됐는지 알 수는 없으나, 거기서 찍은 흑두루미 사진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독특한 것들로 여겨진다."('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그러니까, 그해 여름, 그는 그 아름다운 유럽풍의 해변도시에서 지냈는데, 단 하루도 술에 취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웃는 듯 우는 듯, 알렉스, 알렉스')  

모두 '그'의 이름이 끝까지 밝혀져 있지 않지만 가령, 토마스라고 하면  "토마스가 왜 예정에 없이 이즈미로 가게 됐는지 알 수는 없으나..."나  "그해 여름, 토마스는 그 아름다운 유럽풍의 해변도시에서 지냈는데..."라는 식으로 시작할 수도 있었다(덧붙여 '그해 여름'은 '어느해 여름'이라고, '그 아름다운 유럽풍의 해변도시'는 '한 아름다운 유럽풍의 해변도시'라고 하는 게 낫겠다). 소위 그런 것이 자연스러운, 곧 '무표적인' 시작이다. 한데, 직접화법도 아니면서 '그러니까'란 접속사가 문두에 들어가고, 다시 '그'라는 대명사가 고유명사 대신에 들어감으로써 이 시작은 특이해진다. '유표적'이게 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이유(미학적 고려)가 있는 게 아니라면, 단지 '기분'을 좀 내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면, 독자로선 좀 난감하다.   

얼핏 몇 권의 소설을 들춰보니 다른 한국 작가들의 소설에서도 이런 시작이 아주 드물진 않다. 이것도 '유행'인데 내가 미처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최신 '소설작법'에서 권장하는 것인지 바로 알기 어렵다. 김연수가 좋아하는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나 찾아보려고 했으나 소설집이 눈에 띄지 않아 대조도 불가능하고. 대신에 집어든 건 카버가 좋아하는 작가 체호프의 단편집이다.  

  

19세기의 사례이긴 하나 보통 단편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어느 멋진 저녁, 이에 못지 않게 멋진 회계원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뱌코프는 객석 두번째 줄에 앉아서..."('관리의 죽음')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실린은 대학과정을 마치고 페테르부르크에 근무하다가..."('공포') 

"올가 이바노브나의 결혼식에는 친구들과 점잖은 지인들이 모두 참석했다."('베짱이') 

"이반 알렉세예비치 아그뇨프는 팔월의 그날 저녁..."('베로치카') 

"내가 아직 김나지야의 5학년이나 6학년에 다니던 때의 일로 기억된다."(미녀') 

예외 없이 모든 단편에서 인물은 1인칭 대명사나 고유명사로 먼저 지칭된다. 내가 아는 한 이것이 정석이고 소설의 문법이다. 그걸 비튼다면 하나의 '일탈의 미학'을 구성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끝내 불완전한 이방인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가족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라는 걸 알려주는 세련된 소설들이다."라고 김연수가 평한 줌파 라히리의 소설집 <그저 좋은 사람>(마음산책, 2009)의 서두는 어떤지 들춰봤다(나는 영어본의 표제작 '길들지 않은 땅'을 읽던 중이다).  

"루마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루마의 아버지는 평생 다니던 제약회사에서 퇴직하고..."('길들지 않은 땅') 

"프라납 챠크라보티는 우리 아빠의 친동생은 아니었다."('지옥-천국') 

"겉보기에 호텔을 괜찮아 보였다. 고풍스러운 스키 산장처럼 가파르게 경사진 지붕에, 초콜릿 색 벽에 빨간 창틀을 댄 건물이었다. 하지만 채드윅 인의 로비에 들어갔을 때 아밋은 실망하고 말았다."('머물지 않은 방') 

"애초에 라훌에게 술을 가르친 건 수드하였다."('그저 좋은 사람') 

"이따금씩 남자들이 전화를 걸어 생Sang을 찾았다."('아무도 모르는 일') 

체호프나 줌파 라히리의 사례만 놓고 보자면, 억지스럽게 3인칭 대명사로 소설을 시작하지 않더라도 세련된 작품을 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인다. 게다가 두서없이 서두에서 '그(녀)'를 남용하게 되면, 그것이 '위반'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추가적 의미도 전달하기 어렵게 된다. 파격은 규범이 존중될 때 파격으로서의 의미와 의의를 갖기 때문이다... 

09. 09. 19.  

P.S. 필요 때문에 책을 한권 찾다가 발견한 책은 관내도서관에서 대출한 샐린저의 단편집 <아홉가지 이야기>(문학동네, 2004)이다. 사실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손에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책이 내겐 이 <아홉가지 이야기>였다. 비슷한 시기에  집어들기도 했고,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모두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돼 있다는 점이 샐린저의 경우와 같았기 때문에 우연의 일치만은 아닌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샐린저에 대한 김연수 작가의 생각은 어떠한지 모르겠지만, 마침 눈에 띈 김에 각 단편의 서두 부분을 읽어본다.  

"뉴욕에서 온 아홉일곱 명의 광고인들이 장거리 전화를 독점하는 바람에, 507호 여자는 정오부터 두시 반까지 기다려야 했다."('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메리 제인이 마침내 엘로이즈의 집을 찾아냈을 때는 거의 세시였다."('코네티컷의 비칠비칠 아저씨') 

"연이은 다섯 번의 토요일 오전, 지니 매녹스는 베이스호아 선생네 반 친구인 셀레나 그래프와 함께..."('에스키모와의 전쟁 직전') 

"1928년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최대한의 단체정신으로 무장한 나는..."('웃는 남자') 

"그것은 어느 인디언 서머 오후 네시가 조금 지났을 때의 일이었다. 하녀 산드라는..."('작은 보트에서') 

"최근에 나는 항공 우편으로 4월 18일 영국에서 치러질 한 결혼식의 청첩장을 받았다."('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 

"전화벨이 울렸을 때, 머리가 희끗한 남자는 별다른 존중의 기미 없이 여자에게..."('예쁜 입과 초록빛 나의 눈동자')  

"이 이야기에 정말 무슨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라면, (...) 나는 이 이야기를 작고한 나의 의붓아버지의..."('드 도미에 스미스의 청색 시대') 

""야, 당장 그 가방에서 내려서지 않으면 죽여버릴 테다. 정말이야." 매카들 씨가 말했다."('테디')


댓글(28) 먼댓글(1) 좋아요(2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말해질 수 없는 삶을 위하여
    from 아흐퉁! 미잔트롭 2009-09-23 19:59 
    말해질 수 없는 삶을 위하여 -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김병익  나도 김연수가 즐겨 사용하는 수법을 따라, 그의 소설들의 첫 문장이 드러내는 글쓰기에 대한 자의식을 짚는 것으로부터 나의 김연수 작품론 쓰기를 시작해보자. 그는 소설 첫머리에서 자신은 이제 무엇에 대해 쓰기 시작하겠다는 말을 먼저 밝히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곤 한다. 가령, 제목이 시의 한 행일 법한 <그건 새였을까, 네즈미>의 첫 문장
 
 
2009-09-19 16: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9 16: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9 1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9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냐 2009-09-19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당히 재미난 문제 제기. 거기다 로쟈님스럽게 찾아놓은 풍부한 사례들. 더 흥미로운 건..여기 붙어있는 비밀댓글들요 ㅎㅎ

로쟈 2009-09-19 18:23   좋아요 0 | URL
분명 '반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딱히 이유가 있어 보이지 않아서요. 그리고 비밀댓글이라고 별스런 내용이 오고가진 않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Sati 2009-09-1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시작은 아니지만,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에서 '그녀'가 전 참 거시기했어요.

로쟈 2009-09-19 22:05   좋아요 0 | URL
이번 작품집에는 빠졌네요...

perturbation 2009-09-19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언급하신 소설들에서 주인공을 '그' 혹은 '그녀'로 지칭한 것은 작품 내에서 그 인물들의 이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케이케이>에서 미국인 여성작가인 '나'의 이름은 끝까지 나오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필연적인 데가 있다는 것이지요. 일일이 확인해 보지 않아서 전부 다 그런 경우인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뭐, 멋스럽게 보이려고 한 의도도 있긴 했겠지요.

(그리고, <알렉스>에서 처음에 '그'로 지칭된 인물은 알렉스가 아니라 다른 인물입니다. '그'가 나중에 해변에서 알렉스를 만나 '리 선생'을 소개받게 되지요. 제 기억이 맞다면, 이 '그'의 이름 역시 끝까지 나오질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한국어의 '그/그녀'라는 대명사를 매우 사랑스러워하는 편입니다. 이름을 직접 지칭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어떤 '거리감+분위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것은 그저 선택(취향)의 문제일 뿐, '정석'과 '일탈'을 거론할 만한 사례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

로쟈 2009-09-19 22:08   좋아요 0 | URL
네, 다시 보니 알렉스는 사칭한 이름이군요. 제 생각은 일인칭 화자가 등장하지 않는 한 시작부터 그/그녀가 나올 수는 없다고 봐요. 1-2칭이 사전에 세팅된 상황이거나, 앞에 나온 누군가를 다시 받을 때만 가능하지 않나요? 이름을 안 갖고 있다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 같아요. '한 남자/여자'로 처리하면 되니까요. 혹은 '가방을 든 남자' '머리가 희끗한 남자' '눈이 퀭한 남자' 등등. 해서 소설문법이라는 게 있다면 '그(녀)'가 다짜고짜 나오는 건 반칙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튀는' 것이고, 일부러 튀게 쓰려는 게 아니라면(이것도 가끔 써야 효과가 있겠고요. 어떤 효과인지는 사례를 찾아봐야겠어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세련돼 보이지 않아서요...

로쟈 2009-09-19 22:16   좋아요 0 | URL
덧붙이자면 한때는 K, P, R 등의 이니셜이 많이 쓰이다가 요즘은 '그' '그녀'가 유행을 타는 건가 싶기도 합니다(그런가요?). '거리감+분위기'라고 하신 것과 연관되는데, 저는 그런 게 구체적인 인물을 '장악'하지 못하거나 '묘사'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책략이 아닌가 의혹도 갖습니다. 그(그녀)로 일관하게 되면 자연스레 이야기 추상적으로 흐르지요. 작가들이 되려 기피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perturbation 2009-09-19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것을 가능/불가능의 문제로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어요. "반칙"이라는 표현이 제게는 좀 완고해 보입니다. 국어학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실수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설사 그렇다 해도, 문학이 문법을 반드시 존중해야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요. 그냥 효과의 문제로 보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런 식의 서두가 어떤 효과를 발생시키는지를 따져보는 게 제겐 더 흥미로워 보여요. 김연수 소설의 어떤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고, 더 생각을 해봐야겠지만, 김연수가 인물을 창조하고 다루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지 않겠는가 넘겨짚어 봅니다.

그리고 알렉스는 '사칭한 이름'(?)이 아니라, 그냥 '그'와는 다른, 실제 인물입니다. 1장에서는 청도 해변에서 뒹구는 '그'가 등장하고, 2장에서는 알렉스와 재클린 커플이 등장하지요. 그리고 '그'가 '알렉스'로부터 일을 넘겨받아 '리 선생'과 대면하게 됩니다. 소설의 결말부분에서는 '그'와 '알렉스'가 언쟁을 벌이지요. 자꾸 꼬투리를 잡는 식이 되어서 좀 죄송하네요. 김연수를 좋아하다보니 뭔가 변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예요. 이해해 주셨으면. . .

로쟈 2009-09-19 22:23   좋아요 0 | URL
네, 알렉스 건은 읽어봐야겠군요.^^; '문법'이란 말 대신에 '관행'이라고 해도 좋겠어요. 소설을 그렇게들 써왔다는 의미로. 저도 공들인 작품에 흠을 잡으려는 생각은 없는데, "그러니까, 그해 여름, 그는..." 이렇게 나가는 서두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편집자라면 단호하게 수정을 요구하고 싶은.^^; 고유명사를 기피하는 건 익명화된 사회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편승'한다는 느낌도 들고요...

노이에자이트 2009-09-19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문을 읽다 보면 그녀를 쓰지 않고 그'만 쓰는 사람도 있더군요.저는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선 3인칭 대명사가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긴 합니다만....

좀 특이한 예인데 요 몇년전부터 동물다큐멘타리에서 동물을 대명사로 '녀석'이라고 하던데 이것도 좀 어색하고 거슬리더군요.대명사 용법이 익숙치 못한 언어다 보니 기껏 생각해 낸 게 '녀석'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09-09-19 23:27   좋아요 0 | URL
그게 수입된 거라서 그런 듯합니다. 인칭 대명사 문제를 통시적으로 잘 정리해놓은 책도 어디 있을 듯싶은데요...

노이에자이트 2009-09-20 14:51   좋아요 0 | URL
동물을 대명사로 뭘로 하는 게 좋을까요? 권할 만한 게 있으면 일러주세요.

로쟈 2009-09-20 14:57   좋아요 0 | URL
사람도 보통 '놈'이라고 부르는데, '녀석'은 그래도 정감 있지 않나요?^^;

노이에자이트 2009-09-20 15:00   좋아요 0 | URL
그런데 어린 것들은 아직도 새끼라고 번역하더군요.

로쟈 2009-09-20 15:29   좋아요 0 | URL
'새끼'란 말 자체에 비하의 느낌이 있는 건 아닌 듯해요. 사람에게도 쓰니까요. '아이고, 내 새끼'처럼. '자식'이라고 해야 할까요? 다른 대안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목동 2009-09-20 16:59   좋아요 0 | URL
'새끼'를 뜻하는 표준어휘들을 봤습니다.
결국 언어 사용은 자신의 의지가 아닐까요.

목동 2009-09-20 0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일요일인데도, 그는 죽으러 나가려고 구두끈을 매고 있었다.(매일 죽는 사람/조해일), - 개니? 그가 물었다. 아뇨, 낙타예요?(낙타는 무릎이 약하다/이순원), - 눈을 뜨자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어두운 기억의 저편/이균영), - 그는 쇠사슬로 목을 졸리는 듯한 갈증에 퍼뜩 눈을 떴다.(침식/서영은), 작품의 첫 문장들입니다.

로쟈님은 번역 부분에서도 '독자'와 '효과'쪽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우리 일부 작품에도 지적한 면이 있습니다(위에). 작품의 첫 대명사 혼용은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해야 할 명확성이 떨어질 우려가 있습니다(독자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독자에게 분명한 소통을 제공하려면 작가의 웃줄함 등을 빼는 것이 작품에 대한 공감성을 높이게 합니다.

저 또한 그/그녀'라는 대명사를 즐겨 자주 사용하는 편입니다. 몇 편의 글을 지인에게 건네주었더니 지인은 시쿤둥했습니다. 제 글의 불분명한 대명사에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 일요일인데도, 그는 죽으러 나가려고 구두끈을 매고 있었다, + 일요일인데도, 김사장은 죽으러 나가려고 구두끈을 매고 있었다, = 위 문장에서 그를 김사장으로 대처함으로서 죽으려는 사람의 사회적 속성을 독자에게 쉽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유교문화의 속성상 간접 호칭을 사용합니다. 즉 직접 호칭 사용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글의 첫 문장부터 속성이 불분명한 대명사를 사용함으로서 독자에게 넌지시 드러내려는 것으로 오인받을 수 있습니다. 영어 등 번역문화의 영향도 한 목합니다(즉 he, she, her 등). 미국의 수필가 해리 골든의 수필 '연극은 계속되어야 한다'를 읽어보면 대명사는 없습니다. 글의 명확성과 간결함 때문에 독자는 쉽게 공감합니다.

로쟈 2009-09-20 09:31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전에는 별로 의식하지 않았던 문제 같기도 합니다. 한국소설의 '관행'은 따로 있을 듯도 해요. 다시 보면, 좀 '특이한' 관행입니다...

2009-09-20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20 0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9-09-20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지적입니다. 샐린저의 아홉가지 이야기를 그리고 체호프의 단편선을 다시 읽어보고 싶고, 앞으로 소설을 읽기 시작할때 어쩐지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될 것 같아요. 이 페이퍼 무척 재미있습니다.

로쟈 2009-09-20 14:58   좋아요 0 | URL
네, 시작이 주요하지요. 눈에 띄는 시작보다는 신뢰감을 주는 시작을 저는 더 선호합니다...

로미 2009-10-10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읽다가 걸리는 표현이 있어서 몇 마디 씁니다.
'그', '그녀'가 한국 소설의 관행이라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 특히 '그녀'의 사용은 이전 소설가, 수필가들의 문장에서도 곧잘 걸리적거리는 것으로 지적되곤 하였습니다.
번역투의 그림자가 없을수록 문장이 산뜻합니다. 외국어 직역한 듯한 문장을 좋은 문장으로 꼽지 않고요.
요즘 언급이 뜸한 것은 뭐 다 아는 얘기, 굳이 더 하겠느냐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니 매번,
다 아는 얘기 또 하고 또 하고 그러게 되나 봅니다.

로쟈 2009-10-10 11:39   좋아요 0 | URL
네, 그것도 논란거리이긴 하지만, 저는 '그녀'를 써도 된다고 봅니다. 다만, 페이퍼에선 서두에 '그/그녀'가 막바로 나오는 것은 어색하다는 것이죠. 지시되는 인물이 먼저 제시되어야 나와야 문법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김명남의 과학책 산책'에서 매리언 울프의 <책 읽는 뇌>(살림, 2009)에 대해 다룬 걸 보고 청소년잡지인 SEM에 실은 짧은 글이 생각나 같이 옮겨놓는다. 내 글은 다섯 명이 참여한 '책, 내 마음의 길잡이'란 기획특집의 한 꼭지이다(청소년용이라 약간의 '협박'도 포함하고 있다). 사실 독서가 일상이 아니라는 걸 반증하는 이런 특집이 반가운 건 아니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뇌가 책을 읽도록 만들어지진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입증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한겨레(09. 09. 19) 뇌의 종합예술 '독서'  

뇌는 책을 읽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다. 코가 안경을 받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듯, 뇌가 독서용으로 진화했을 리는 없다. 인간에게 먼저 추상적 사고의 능력이 생겼고, 그것을 상징으로 표현하는 능력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문자와 문해 능력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독서 능력이야말로 모든 인지 능력을 대표하는 것이자 총집결이다.

우리에게는 독서 유전자나 독서 중추 같은 것은 없다. 그야 어쨌든, 아니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독서는 환상적인 기예이다. 감각 기관들과 뇌가 한치 흐트러짐 없이 손발을 맞춰야 한다. 청각에 문제가 있어 음소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언어 이해가 더디고, 주변 시야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빠르게 텍스트를 훑어 내릴 수 없다. 뇌는 시각과 청각 정보를 잘 처리해야 함은 물론이고, 안구가 기민하게 움직이도록 쉴 새 없이 운동 명령을 내려야 한다. 피질 적소에서 기억을 인출해야 한다. 때로는 변연계를 통해 감정과 정서를 소환해야 한다. 그래야 행간을 읽거나 추체험을 할 수 있다. 자동적으로 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단계단계 짚어가며 해야 하는 일이라면 엄두도 못 낼 만큼 복잡다단하고 섬세한 작업이다.

<책 읽는 뇌>는 인지심리학과 뇌과학을 통해 이 경이로운 인간 능력을 파헤치고자 한다. 첫째로 독서 능력의 진화 과정을 밝히고, 둘째로 한 인간이 독서 능력을 습득하는 과정을 밝히고, 셋째로 독서 능력이 잘못되는 경우를 소개했다. 독서의 계통발생, 독서의 개체발생, 독서의 장애라는 삼 단계 구성은 삼단뛰기마냥 완벽한데, 내용이 다소 난삽한 게 흠이다. 영어를 기본으로 놓고 이야기하기 때문에 한국어·한글과는 사정이 다른 대목이 있는 점, 독서 교육에 관한 조언들이 간간이 서로 모순되는 점도 맘에 걸린다. 그러나 독서가 뇌의 기본 장착 기능이 아니면서도 이토록 매끄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배우기에는 충분하다. 

그런데 이 책의 진가는 의외로 난독증을 다룬 부분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독서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뇌’는 어떤 형태이고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 살펴봄으로써 ‘독서하는 뇌’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독서가 다단계, 다차원 과정이니만큼 난독증에도 서너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고, 일반인은 언어 반구인 좌뇌로 독서를 처리하지만 난독증 환자는 우뇌를 활성화한다는 것, 즉 다른 신경 회로를 쓴다는 점도 재미있다. 사실 ‘환자’라는 말은 틀렸다. 책이 시종 강조하듯, 독서가 선천 능력이 아니므로 난독증은 장애가 아니다.  

여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중에 공교롭게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를 함께 읽었다. 그래서 소설의 등장인물 중 남녀 주인공에 도무지 집중하지를 못하고 난독증 소녀 후카에리에 빠져버렸다. 후카에리는 뭔가 영적인 것을 느끼는 소녀라는 설정인데, <책 읽는 뇌>에서 주장하듯 난독증이 공간감각 같은 우뇌형 재능과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면, 후카에리의 능력도 그런 것일까? 후카에리가 공감각을 지녔다는 암시를 주는 대목도 있던데, 그것도 관계가 있을까? 후카에리는 왼손잡이일까? 아, 내 독서하는 뇌의 난독은 어떻게 해야 하나.(김명남 과학책 번역가)  

SEM(09년 9월호) 두뇌에 '파워옵션'을 달자

<책 읽는 뇌>란 책의 저자 매리언 울프에 따르면 독서는 선천적인 능력이 아니다. 곧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독서는 후천적으로 개발되는 능력이고, 한 인지과학자의 표현을 빌면 ‘옵션 액세서리’다. ‘나는 독서에 흥미가 없다’거나 ‘나는 책을 잘 못 읽겠어’라는 투정은 따라서 특별히 이상하거나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옵션’이 장착돼 있지 않다는 것뿐이니까.  

인류가 독서라는 새로운 능력을 발명해낸 것은 불과 수천 년 전이다. 이른바 문자와 기록을 갖게 된 ‘역사시대’의 개막이다. 하지만 독서능력이라는 ‘발명품’은 인간의 뇌 조직을 재편성했고 사고능력을 확대시켰으며 역사를 바꾸어놓았다. 이러한 인류사는 한 개인의 역사에서도 반복된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다른 세계, 또 다른 우주에 들어서게 된다.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 독서는 전환점이자 도약의 디딤판이다. 독서 능력이라는 ‘옵션 액세서리’는 있으나 마나한 장신구가 아니다.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강력한 무기다.  

물론 독서 능력 자체는 오늘날 표준적이며 어느 정도 보편화된 능력이다. 그것이 우리를 오징어와는 다른 존재로 구분해주지만 다른 학생과 구별해주지는 못한다. 각자가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이 독서 능력 또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필요가 있다. 아니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다양하고 풍부한 독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 독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하나의 여정이고 진화의 과정이다.  

<데미안>의 저자 헤르만 헤세는 우리 모두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힘껏 노력하지만 결과는 다양하다고 말했다. 더러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에, 도마뱀에, 개미에 그친다. 또 더러 위는 사람이지만 아래는 물고기인 채로 남는 경우도 있다. 독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말미잘에 머물 수도 있고 넙치에 만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갈망할 수 있으며, 강인한 독서는 우리를 그를 위한 여정으로 이끈다.  

청소년기에 필요한 것은 장기적인 이 여정을 위한 ‘파워 옵션’을 마련하고 장착하는 것이다. 곧 책을 읽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책 읽는 뇌’의 용도를 넓혀나가고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개선해나갈 때 우리의 사고 지평이 달라진다. 우리가 꿈꾸는 미래 또한 달라진다. 여러분은 자신의 뇌를 ‘장신구’로 내버려둘 것인가 아니면 ‘책 읽는 뇌’로 단련할 것인가.   

09. 09. 1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동 2009-09-19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뇌의 가소성을 가장 잘 활용한 것은 '독서'다. 황해 홍길주는 '문장은 독서에만 있지 않고, 독서는 책에만 있지 않다' 했다.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을 독서의 범주에 둔 것이다. 그중 사유의 정제품인 책을 읽는다는 것은 위대한 발명이다.
열반하신 성철스님이나, 서거하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 독서가다. 두 분은 배움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었던 모양이다. 부조리하게도 스님의 '수자오계'에는 '책을 읽지 마라' 하셨지만 (진리는 문장이 아니라 오직 자기 마음에 있다), 일반 신도에게는 독서를 권장하셨다고 한다.
산업혁명시대 다음으로 정보'제어시대'에 뇌의 신경학적인 연구들이 활발하다.
만약 뇌신경세포중 '성상세포'가 많아진다면 인간의 지적능력과 과학적인 발전은 더 커질것이다. 따라서 독서는 '뇌의 가소성'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우리는 지금 그 현장(로쟈)에 와 있다.

로쟈 2009-09-19 17:52   좋아요 0 | URL
뇌의 가소성 이상으로 영양과 휴식도 중요한 듯합니다.^^;
 

지젝의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그린비, 2009)에 대한 고명섭 기자의 서평기사를 옮겨놓는다. 지난주에 출간된 책이지만, 분량 때문인지 한 템포 늦추어 다루고 있다. 아직 읽을 짬을 못 내고 있지만, 나도 서평을 써봐야 하는 책인지라 요긴한 참조가 된다. 사실 책의 몇몇 부분은 그간에 다른 책들, 특히 '레볼루션 시리즈'(프레시안북)의 서문을 통해서 이미 읽은 것이기도 하다. 분량은 부담스러울 테지만, 놓치면 후회할 만한 책이다. 아래 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해볼 수 있지만, 순수하게 '재미'라는 척도만 가지고도 책은 베스트셀러감이다. 

한겨레(09. 09. 19) 가난한 이들의 해방은 어떻게 이룰까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최근작이다. 2008년에 나온 이 책은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는’ 지젝의 급진적 견해가 다른 어떤 책에서보다 과격하고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머리말에서 지젝은 말한다. “이 책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보편적 해방을 위한 투쟁이라는 메시아적 관점에 선다.”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주장을 비웃지만, 지젝이 보기에, 후쿠야마의 테제는 지금의 세계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다. 진보·좌파가 저마다 대안을 이야기하지만, 그 대안이란 것들이 근본적 변혁을 포기한 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지젝은 이 ‘상식의 한계선’을 돌파하려면 ‘신념의 도약’, 다시 말해 그 상식의 지평에서는 광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잃어버린 대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젝이 이 책에서 굳건한 연대의식을 보이는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발언은 지젝의 관점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대중적 규율을 필요로 한다. 더 나아가 ‘아무것도 갖지 못한 자들은 오직 자신의 규율만 가지고 있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들, 아무런 재정적·군사적 수단도, 아무런 권력도 갖지 못한 사람들, 그들이 지닌 것은 규율과 단결력뿐이다.” 지젝은 이런 ‘스파르타적’ 요소야말로 변혁의 거점이라고 말한다. “스파르타의 군사적 규율 안에는 해방적인 고갱이가 있다. 그래서 트로츠키가 ‘전시공산주의’의 어려운 시기에 소비에트연합을 ‘프롤레타리아 스파르타’라고 부른 것도 이상할 게 없다.”

이런 주장에 당장 ‘전체주의·근본주의 아니냐’는 힐난이 날아들 것이 분명하다. 지젝은 이런 비난 앞에서 물러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전체주의’라는 비난이 두려워 근본적 변혁을 회피해서는 진정한 해방의 지평을 열 수 없다는 것이 지젝의 신념이다. 그런 신념에 입각해서 그는 스스로 ‘악몽의 호러쇼’라고 부르는 이름들을 차례로 불러낸다. 진리를 앞세워 폭력과 공포를 휘둘렀던 혁명적 실험들, 곧 프랑스혁명의 자코뱅, 러시아혁명과 스탈린 체제,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이 여기서 적극적으로 또는 긍정적으로 참조된다. 이 실험들이 실패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해방적 고갱이’가 있었다는 것이 지젝의 판단이다. “우리는 더러운 물과 함께 아이까지 버려서는 안 된다.”    
 
지젝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그는 20세기 최악의 정치적 악몽이라 할 히틀러의 나치즘까지 적극적 검토의 대상으로 세운다. 그가 보기에 나치즘은 단순히 정치적 일탈이나 변종이 아니었다. 나치즘의 핵심 요소들은 좌익 혁명운동에서 빌려온 것들이었다. 그 안에는 근본적 변혁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지젝은 벼랑까지 사고를 밀어붙인다. “미친 주장일지 모르지만, 히틀러의 문제는 충분히 폭력적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부연하면, “나치즘은 충분히 극단적이지 않아서 현대 자본주의 사회공간의 근본 구조를 파괴하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치즘은 유대인이라는 창조된 외부의 적을 파괴하는 데 몰두한 것이다.” 히틀러는 과격해서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비겁해서 비난받는다.

지젝은 나치즘 문제를 숙고하기 위해 ‘나치 참여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를 끌어들인다. 많은 하이데거 연구자들이 하이데거 철학이 나치즘과 무관하다거나, 그가 한때 나치였지만 실체를 알고 거리를 두었다거나, 처음부터 나치가 아니었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를 변호한다. 그러나 지젝은 하이데거는 나치였을 뿐만 아니라, 나치에 참여했을 때 올바름에 가장 가까웠다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가장 많이 틀렸을 때, 다시 말해 그가 나치에 참여했을 때, 그는 가장 진실에 근접했다.” 하이데거는 나치를 통한 근본적 변혁에 몰두했다는 것이다. 그 변혁의 내용이 좌익적 변혁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음을 지젝은 일화를 들어 말한다. “1968년 독일 학생운동 대표가 하이데거를 방문했을 때, 하이데거는 자신은 학생들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하며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비록 정치적 입장은 다르지만 1933년 프라이부르크대학 총장으로 있을 때 하이데거 자신이 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지젝은 이렇게 파시즘을 뒤집어 해석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파시즘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들, 곧 총체성·규율·집단성 같은 것들이 애초에 파시즘과는 무관한 것들이라고 강조한다. “파시즘은 그것의 본디 창조자인 노동자들의 운동으로부터 그것을 훔쳐내서 자기화한 것이다. ‘원파시즘적’ 요소들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 파시즘적인 것은 없다.” 일본 파시즘의 원형으로 묘사되는 ‘죽음을 초월한 사무라이 정신’도 파시즘과 관련이 없다. “우리는 이것을 파시즘적 군사주의의 일환으로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혁명적인 입장의 구성요소로 간주해야 한다.” 지도자라는 범주도 “대의를 향한 열광을 촉발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라고 그는 말한다. 파시즘 운동의 특수한 접합이 이 모든 것들을 파시즘적인 것으로 비틀었을 뿐이다.  



지젝은 이런 검토 위에서 과거 혁명들이 수행했던 것들, 다시 말해, 진리의 정치, 당-국가-지도자 정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시 과감하게 실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런 정치를 수행하고 있는 사례가 있는가? 지젝은 우고 차베스(사진)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지목한다. 차베스의 정치는 여러 가지 약점과 결점이 있지만, ‘자기 몫이 없는 자들’ 곧 빈민들과의 특권적 연대라는 방식으로 민주주의 형식 안에서 일종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험하고 있다는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09. 18.


댓글(9)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yoonta 2009-09-1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요구해도 다시말해 노동계급의 규율성과 단결을 이야기해도 당과 (중앙집권적) 국가는 필요없다고 이야기하는 아나키스트들은 뭔가요?

2. 지젝이 이야기하는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변혁을 복지시스템이 비교적 잘 갖추어진 서유럽의 사람들이 원할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죠. 즉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라는 점. 물론 베네주엘라처럼 빈부격차가 극심해서 빈곤층이 혁명을 일으켜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곳에서 차베스가 인기있는 곳은 이와는 다른 이야기고..차라리 제도적 틀 내에서의 급진적 변화를 요구하는 발리바르식 접근법이 서유럽이나 자본주의가 발달한 여타 국가들에서는 더 가능성있는 변혁의 방법은 아닐지.

3. 아무리 "대의"가 본질적 변혁을 위해서 필요하다고는 하나 수백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히틀러나 스탈린을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개인의 자유나 생명 혹은 인권보다 대의가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마치 "주체"라는 대의를 추종하는 북한이 남한보다 낫다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 건지.

윗 서평을 읽고 드는 몇가지 궁금증을 적어봤습니다.


로쟈 2009-09-19 21:42   좋아요 0 | URL
지젝의 요지는 서문만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대의 옹호'의 진정한 목적은 스탈린주의나 테러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너무나 손쉽게 제출된 자유-민주주의적 대안을 문제삼는 것이다." 소련(북한)이 미국(남한)보다 낫다는 것이 아니라 소련(북한)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진지하게 일독해볼 시간은 우리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yoonta 2009-09-19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와 단절하는 근본적 변혁을 위해서는 소위 낭만적인 "아름다운 영혼"보다는 강철같은 규율이 필요다하는 이야기였었나요? 그러기 위해서 참조하는 것이 스탈린, 레닌이고 혹은 히틀러라는 이야기겠지요. 그리고 그것이 (구사회주의의)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주장이라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그 실패의 주요한 원인이 규율을 강조했을 때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권력의 집중 혹은 관료화라고하는 회피하기 힘든 문제인데 이것 때문에 결국 구사회주의가 실패했던 원인이기도 하지요.

결국 노동자나 피억압계층/계급의 자율성을 최대한 살리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발생하는 권력이 당이나 관료시스템에 돌아가지 않게끔 하는 장치가 전제되었을 때에만 "규율"이나 "대의"가 근본적 변혁을 위해 올바르게 작동될 것으로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요. 이와 관련된 (권력의 집중과정에서 발생하는 혁명의 아포리아와도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지젝에게는 있는지요? 만약 없다면 이것이 없이 어떻게 실패를 반복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수 있다는 것인지 저로서는 회의적입니다만.

로쟈 2009-09-19 22:34   좋아요 0 | URL
yoonta님은 성공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판돈을 걸겠다는 입장이신 거 같습니다.^^; 지젝의 입장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과감히 실패함으로써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이구요. 바디우를 인용하면, "탈존재보다는 재앙이 낫다"는 게 이 '전체주의' 철학자들의 생각입니다...

yoonta 2009-09-20 0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공한다는 보장이 있을 경우에만 판돈을 건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해 보아야 할 지점이라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실패를 두려워해서 하지 말자는게 아니라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고민해봐야 할 지점이라는 겁니다. 자본주의와 단절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변혁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의견을 달리 한다는 것이지요.

바디우의 플라톤주의나 지젝의 헤겔주의 혹은 라캉주의는 저도 상당부분 동의하고 긍정합니다만 현실에서의 정치적 운동이라는 것은 이런 원칙적 대의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없이는 그냥 구호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지요. 아니면 극단적 테러가 되거나..얼마전 본 <바더마인오프>라는 독일적군파 이야기를 그린 영화를 보면서 다시한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리 "대의"가 올바르다고 해도 그것을 추구하기 위한 과정을 다수 대중이 수용하지 못한다면 소수의 테러가 될 뿐이다라는 것을 말이지요. 알카에다와 같은 회교근본주의자들의 문제점도 거기에 있는 것이겠고요. 똑같은 정치적 폭력이더라도 다수 대중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된 프랑스 혁명때의 자코뱅파라던지 러시아 혁명에서의 볼세비키들이 그들과 다른 점은 대중들의 동의를 기반으로 그것을 시행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본다면 문제는 어떻게 그들에게 대의를 위한 동의를 획득할 것인가가 되어야 겠는데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반복하지만 구체적힌 현실과의 접점이 요구된다는 겁니다. 구체적인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조건에 기반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한국사회에서 지젝식의 레닌주의적인 사회주의 혁명을 하자고 외치면 누가 거들떠나 보겠습니까? 아무리 그것이 "대의"로서는 원칙적으로 올바르다고 하더라도요. 오늘날 소위 좌파진영에서 정치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고민들이 대부분 이런 지점에 있는 것이겟지요. 원칙이나 대의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만 현실을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을수 없다는 현실. 그래서 정치는 때로는 정치적 반대파와 타협하기도 해야하는 기술이라고도 이야기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현실적인 문제점들을 다 거세하고 지젝은 때로는 뭐랄까 너무 나이브한 원론만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젝의 비판이 포스트주의에 대한 비판은 될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컨대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은 될수 없다고 그래서 저는 생각한 답니다.

2009-09-20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09-20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젝은 첨병-담론(제가 만든 말)을 이끌어 내려 합니다.
이즘의 원형을 내재한 역사의 건에서 재사용(reuse)이 아닌
순도 높은 재활용(recycle)의 가치를 찾자고 합니다.

그것은 '신념의 도약'이라는. 즉 역사적 '상식의 한계선'을
돌파함인데, 역사의 인큐베이터 밖에서 쉽지 않는 접점(실전부대)을 찾아야 합니다.

예로, 우울증 환자을 위해 항우울증치료제가 시판됩니다.
뇌의 행복물질인 '세로토닌(serotonin)' 재활용(recycle) 유도 보호제입니다.
부작용은 적지만 극심한 우울증 환자에게는 3주이상 투약이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 몸에 수분이 부족하면 배설물에서 물을 재흡수합니다.
소장의 경우는 80% 물을, 대장은 물 이외를 재흡수 하지 않습니다.
실패한 역사는 대장안으로, 그 안에서 생명수를 재흡수하자 합니다.

로쟈 2009-09-20 23:43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비유십니다.^^

목동 2009-09-27 22:32   좋아요 0 | URL
레닌의 아버지는 장학사이자 대지주였군요.
빈권층과 특권층의 연대, 즉 지젝은 NGO운동도 한계가 있다는 주장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