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것인데, 흥미롭게도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가 선정한 '2010년도 대학 신입생을 위한 추천도서 20종'에 포함돼 있다('대학원 신입생'을 위한 책이 아닐까?). 겸사겸사 추천도서의 리스트를 훑어보고, 분야별로 몇 권씩 묶어놓는다(작년에도 같은 리스트를 올려놓은 적이 있군. 목록을 비교해보도 좋겠다). 폴 크루그먼의 <불황의 경제학>과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는 임의로 두 권씩을 덧붙였다. 

  

1. 문학 

 

2. 역사 

 

3. 철학 

 

4. 과학 

 

5. 예술 

 

6. 교양 

 

7. 경제 



8. 연애 

 

10. 03. 07.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노바바 2010-03-08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록 중에 절반은 대학 신입생이 쥐어들엇다가 독서 취미를 평생 잃어버리기 알맞은 책들이 아닌가 싶네요 -_-

로쟈 2010-03-08 20:12   좋아요 0 | URL
그래도 많이 나아진 듯해요. 절반은 읽을 수 있을 만한 책이니까요.^^

다크아이즈 2010-03-08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신입생 둔 엄만데요, 저 목록에 있는 책 울집에도 몇 권 있는데 안 읽던데요. 인문학적 소양과는 담 쌓고(이과 출신이라는 핑계로)그냥 싸이월드 죽순이로 지내는걸요. 전 그냥 일반교양인을 위한 추천서로 생각할래요. ㅋㅋ

로쟈 2010-03-08 20:12   좋아요 0 | URL
단골도 몇 권 있습니다. 그냥 참고하시란 거지요.^^

이진이 2010-03-08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생각이 좀 느린편이라 그런지 대학생때는 읽어도 책맛(?)을 잘 모르고 그저 읽은 책
편수만 늘이는 데 급급했던 것 같아요.
혹자는 젊은 시절 읽었던 책만으로도 인생의 좌표가 생기는 데 말이죠.저는 이제와서 다시 읽어보면 '아 이렇게 깊은 뜻이...'라고 감동의 도가니탕으로 빠지는 건지...

로쟈 2010-03-08 20:13   좋아요 0 | URL
그래도 아직 늦지는 않은 것이죠.^^

보고사는 책방 2010-03-08 1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의 인문학 서재'를 보고 찾아왔습니다. 매번 책을 보면서도 먼가 허전합을 느끼곤했는데, 알라딘에 이런 공간을 만드신 것을 보고 놀라웠습니다. 그동안 번역서를 보면서도 답답함을 느끼곤 하였는데,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몇몇 책들도 오역리스트에 올라있군요.(책값이 아까워집니다) 계속해서 멋진 활동 부탁드립니다... 위에 있는 책들중 정말 몇몇은 신입생이 보기에 버거울 수 있겠네요. 공부 좀 하라는 메세지로 전 받아들이겠습니다. ㅋㅋ

로쟈 2010-03-08 20:14   좋아요 0 | URL
멋진 활동은 아니어도 '꾸준한' 활동은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빵가게재습격 2010-03-10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대학 신입생이 가장 읽기 어려운 책'으로 <난중일기>를 꼽고 싶은데요. <난중일기>가 어떤 역사적 가치와 의의가 있다고 해도, 날씨와 사건의 나열로만 이루어진 책을 전후 맥락없이 '읽어볼만하다'고 내미는 건 너무 무리해 보여서요. -저는 책을 읽고 나니 '맑음, 망궐례 드렸다. 활 몇 순 쏘았다. 누구 곤장때렸다.' 밖에 기억나지 않더군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저열하기 때문이겠으나,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더군요.--; - 어짜피 고전을 추천해야 했다면 차라리 <열하일기>가 훨씬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여기까지 쓰니까 아내가 옆에서 '그 긴 걸 언제 다 읽어?' 하네요.--;;;)

로쟈 2010-03-11 08:51   좋아요 0 | URL
<칼의 노래>와 같이 읽으면 되지 않을까요?^^;
 

지난주에 나온 놀라운 책 중의 하나는 마틴 켐프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유문화사, 2010)이다. 저자는 옥스포드의 미술사학과 교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전문가이고 국내에도 이미 그의 <레오나르도>(을유문화사, 2007)가 번역돼 있다. 

  

하지만 이번에 나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단순히 미술사에 관한 책이 아니라 '레오나르도에서 하블 망원경까지'란 부제대로 과학사까지 포괄한 책으로 '시각적인 것'의 역사와 '시각적 직관'의 의미에 대해서 두루 다루고 있다. 아직 마땅한 서평이 뜨지 않아서 책소개를 일부 참고하면 "르네상스 시대 초기 원근법부터 바늘구멍 사진기, 입자 가속기, 허블 망원경, 3차원 컴퓨터 모델까지 예술가와 과학자들이 고안했던 도구를 다양하게 언급하는 이 책은 예술가로 레오나르도, 뒤러부터 사진 발명가, 현대 조각가까지 다루고 있으며. 과학자로 갈릴레오, 다윈에서 리처드 도킨스, 스티븐 굴드, 에어빈 슈뢰딩거까지 소개하고 있다. 미술, 건축, 사진술, 천문학, 의학, 수학, 생물학 등 박학다식한 지식의 통섭을 지향하는 백과사전 같은 책이다." 

  

지은이는 시각적인 것을 바라보는 참신한 역사적 관점을 제시한다. 미술과 과학의 엄격한 경계와 구분에서 뒤로 물러섬으로써 공통 테마들을 끌어내어, 시각적인 것의 역사가 제공하는 자유와 통찰력을 누려 볼 것을 호소한다. “예술과 과학은 둘 다 지식이 무너지는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의 나의 강한 느낌이다. 시각적 직관은 미지의 세계 속을 더듬어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가진 가장 막강한 도구 중 하나다. ”레오나르도에서 허블 망원경까지 추적하는 이 탐사에서 지은이는 공간에 대한 처리와 공간 좌표의 지속성, 부분과 전체의 관계, 자연 속의 기하학, 질서와 카오스의 계, 임계성에서의 계, 카메라의 사용, 초기 사진의 신뢰성과 객관성 문제,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이미지 작업-입자 궤도, 파인만 다이어그램, 의학 스캔-등을 생각해 본다.

   

제목 자체는 불가불 메를로퐁티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동문선, 2004)을 같이 떠올리게 하는데, 비록 원제는 일치하지 않더라도 '시각적인 것'의 경험과 그 의미에 대해서 깊이 숙고해보고 싶은 욕구를 부추긴다. 책은 어제 구입했지만 독서는 좀 미뤄질 듯하다. 서평을 쓸 기회가 생기면 당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10. 03. 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앙리 파브르만큼 친숙한 곤충학자의 이름은 없지만, 그가 쓴 <파브르 곤충기>를 다 읽은 독자는 거의 없다. 그건 기존에 나와 있는 책들이 모두 축약본이거나 각색본이기 때문인데, 이번에 드디어 제대로 된 완역본이 나왔다. 분량은 생각보다 방대하다. 10권짜리니까. 이 정도면 어린이용이라고만도 볼 수 없겠는데, '내집마련'을 하게 되면 서가 한쪽에 꽂아두고 싶다. 완역이라는 거대한 작업을 해낸 역자 김진일 교수와의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10. 03. 06) "왜 벌레냐고? 곤충 무게는 인류의 1만배” 

인터넷서점에서 <파브르 곤충기>를 검색하면, 200여권의 책이 좌르르 쏟아진다. 대부분 어린이물이거나 만화각색본, 또는 발췌축약본이다. 이도 아니면 일본어 축약본을 재번역한 것들이다. 이런 차에, 평생 곤충 연구에 매달려온 곤충학자 김진일(68·성신여대 명예교수)씨가 <파브르 곤충기> 열 권을 완역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10년쯤 전에 한 완역본이 있었으되, 오래전 절판된데다 비전공자의 번역이어서인지 내용 오류가 적잖았으니, 김진일판 <파브르 곤충기>는 명실공히 완역 정본이라 하겠다. 



<파브르 곤충기>를 쓴 장 앙리 파브르(1823~1915)는 아흔세 살까지 살았다. 박물학자이자 시인 겸 철학자였던 그가 생의 말년에, 그러니까 56살부터 86살까지 30년에 걸쳐 곤충(벌레) 관찰과 실험을 동시진행 해가며 집필한 책이 <파브르 곤충기>다.

파브르는 프랑스 남쪽 지중해안의 몽펠리에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옮긴이 김진일씨 역시 그 대학에서 지중해안 모래풍뎅이 연구로 197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 “파브르가 관찰하고 연구한 곳을 발품을 팔아 돌아다녔던” 그이기에 이번 완역본 출간은 30여년 묵은 소망을 비로소 이룬 셈이다.

3일 서울 사직동의 집필실을 찾았을 때 그는 오래도록 끌었던 일을 털어낸 듯 덤덤한 표정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파브르 곤충기>를 이미 교수 정년퇴임 한 해 전인 2006년 중반에 3년에 걸쳐 다 마친 상태였다고 말했다. 곤충 연구와 후학 양성으로 바삐 달려온 그는 만약 자신이 하지 않는다면 누가 번역할까 하는 절실함이 있었다고 했다.

“앞으로 저 원전을 번역할 사람 안 나와요. 왜냐, 연구 환경이 달라요. 저만 해도 초창기 사람이니 넓게 공부했거든요. 풍뎅이도, 나비도 이야기도. 그런데 요즘은 풍뎅이라도 모래풍뎅이 하나만 파요. 다른 풍뎅이는 몰라요. 사실 교수 말년이면 잡무도 없었고요.”

우리나라 곤충학의 권위자인 그는 국내 곤충학의 사정을 묻자 곤충 연구에 대한 세간의 무심함을 오래 감내해온 노학자답게 “도무지 한국 사람들은 ‘벌레’가 지구 생물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상상을 안 한다”며 외려 질문을 던졌다.

“이거 대답해봐요. 전세계 개미를 다 모아놓으면 무게가 얼마나 될까?” 눈만 멀뚱거리고 있는데, 그는 금세 답을 일러줬다. “어디까지나 추산이지만 개미 체중을 합치면 인간의 100배가 돼요. 개미는 전체 곤충의 100분의 1밖에 안돼요. 그러니 곤충 무게가 사람 종족의 1만배라는 얘기예요. 곤충들 기존 종명만 해도 150만개가 넘어요.”

<파브르 곤충기>에는 파브르가 곤충 관찰에 빠져 있다가 동네 아낙들에게 정신이 모자란 이 취급을 받는 일화가 나오는데, 그는 그게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했다. “젊은 시절 벌레를 잡으러 다닐 때 ‘하필이면 왜 벌레냐’는 눈길들이었어요. 흰불나방이 창궐하던 여름, 불광동 근처를 가다 번데기를 뒤지니까, 누군가 무슨 약에 쓰냐고 묻더라고. 연구라고 했더니 저 혼자만 쓰려 안 가르쳐준다고 화를 내더라고요.”

그는 파브르의 큰 업적으로 동물행동학의 선구적 역할을 꼽았다. “동물행동학이 생물학 정식 분과가 된 게 불과 30년인데, 파브르는 이미 100년 전에 이 책을 썼어요. 행동 관찰을 통해 종마다 다 특성이 있음을 드러냈죠.”

옮긴이 역시 국내 최초로 동물행동학을 개설했다. <파브르 곤충기> 열 권에는 권마다 초입에 옮긴이의 ‘맛보기’ 글이 실렸는데, 풍뎅이 등 국내 곤충을 체계적으로 분류한 분류학자이기도 한 옮긴이가 분류학에 무지했던 파브르를 시종 비판하는 대목들도 흥미롭다. 파브르는 분류학자들에게 불평을 쏟아내며 기존 학명을 무시하고 종종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붙여 썼다. 옮긴이는 “파브르가 학명을 써주었다면 혼란이 덜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사실 김진일판 번역본의 특징은 파브르가 오기한 숱한 학명을 바로잡고 그가 잘못 이해했던 생물학적 사실들도 알려준다는 데 있다. “파브르는 진화론을 부정했어요. 곤충들은 ‘본능’ 행동밖에 없다는 거야.”

그가 파브르에게 가장 감탄했던 것은 ‘관찰방법’이다. “아, 이 사람이 이런 걸 쉽게 풀어가는구나. 땅속 개미가 굴을 뚫어놨지, 어떻게 그 굴 속으로 들어갈까? 지푸라기를 집어넣고 파기 시작한 거라. 아주 쉽지, 그러나 그 방법을 생각해 실천한 건 누구냐 말이지. 그게 뛰어난 거죠. 장수금풍뎅이는 갈대를 꽂아놓고 따라 들어갔지. 그걸 꽂지 않으면, 굴이 어딨는지 모르잖아요. 그걸 팍 생각해 냈다는 거. 콜럼버스의 달걀이다 이겁니다. 이 책 안에는 콜럼버스의 달걀이 정말로 많단 얘기예요.”

첫 권을 낸 지 5년여 만에 완간된 김진일판 <파브르 곤충기>에는 갈피마다 파브르의 문학적 표현들이 살아 숨쉰다. 이를테면 10권에선 유럽장수금풍뎅이의 굴 파기를 관찰하며 크레타 미궁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붙잡고 빠져나온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신화 속 이야기와 그 벌레가 살아남는 방식이 얼추 닮은꼴임을 보여주는 식이다.

“파브르가 연구 결과를 놓고 책을 냈다면 쉬웠어요. 실은 실험·관찰을 진행하며 책을 썼거든. 그런데도 도입, 본론, 결론으로 순서가 정연하거든. 곤충들 제멋대로 행동하는데, 나는 이건 천재 아니곤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요.” (허미경기자) 

10. 03. 07.   

 

P.S. 올해 나올 과학서로 기대를 갖고 있는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과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 그리고 스티븐 제이 굴드의 과학에세이집 등이다. <종의 기원>과 <사회생물학>은 새 번역본. 굴드의 에세이집은 세 권 가량이 예정돼 있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넷 2010-03-07 19:34   좋아요 0 | URL
저도 언젠가는 10권 다 마련해서 꽂아 두고 싶네요(한권 한권이 가볍게 볼 가격은 아니지만...;). 어렸을때 축약본을 재미있게 보고는 했었는데요. 그래도 실제 벌레들은 싫더군요. 무서워요-.-

로쟈 2010-03-08 20:18   좋아요 0 | URL
보통은 발이 많고 기어다니는 동물에 대해선 혐오감을 갖기 마련이죠...

노이에자이트 2010-03-07 20:47   좋아요 0 | URL
시튼의 동물기와 파브르의 곤충기를 모두 외워버리겠다고 결심한 적이 있었는데...좋아하는 곤충이 있나요?

로쟈 2010-03-08 20:16   좋아요 0 | URL
실제로 곤충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지요.^^; 교과서에 나온 말똥구리 정도라면 모를까.

노이에자이트 2010-03-09 16:20   좋아요 0 | URL
저는 웬만한 곤충은 다 좋아해요.제일 귀여운 것은 배추벌레.여치도 좋아해요.날개를 떨면서 우는 모습은 정말 신비합니다.

비로그인 2010-03-08 14:32   좋아요 0 | URL
막내아들이 7살이고 이제 초등 1학년인데, 이녀석 꿈이 곤충학자예요. 이걸 사둬야 되는건지, 나중에 때가 되면 사는게 맞는건지...ㅠㅠ. 스물스물 지름신이 자꾸 고개를~~ㅋㅋ.

로쟈 2010-03-08 20:14   좋아요 0 | URL
곤충학자가 꿈이라면 바로 사주셔야겠는데요.^^

루체오페르 2010-03-08 16:15   좋아요 0 | URL
와 장인정신이 느껴지는 책이네요. 언젠가는...리스트에 올려놔야겠습니다.

로쟈 2010-03-08 20:14   좋아요 0 | URL
네, 소장해둘 만한 책입니다...

두리아재 2010-05-22 22:22   좋아요 0 | URL
10년전 이미 출간된 바 있는 1999년 완역본(탐구당)을 개작한 것인지? 진짜 김씨 스스로 번역한 것인지..? 곤충기 번역은 단순히 곤충전공자의 곤충 용어 지식 보다는 프랑스 어문학에 대한 깊은 인문학적 지식을 필요로 합니다.불문학자들이 10년 넘어서야 완성한 원고지 2만장의 분량의 대작을 김씨는 3년만에 번역했다고 자랑을 하는데... 글쎄요? 무언가 검증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로쟈 2010-05-22 22:36   좋아요 0 | URL
10년전 완역본이 탐구당본이군요. 찾아보니 소장하고 있는 대학도 6곳밖에 안됩니다. 관심을 갖고 계신 분들이 '검증'은 해주시면 좋을 텐데요...

두리아재 2010-05-22 23:57   좋아요 0 | URL
10년전 곤충이야기 10권 전체를 통독하고나서 느낀 점은 파브르는 곤충연구자라기 보다는 철학자의 영역에 가깝다는 것이었읍니다.특히 그의 백과전서적인 박식함과 어휘 구사력은 그야말로 서사시를 읽는 느낌이었지요. 프랑스어의 세밀한 뉘앙스를 우리 말로 옮기는일은 불문학을 전공한 역자들이라 해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요. 그런데 번역에 있어서의 윤리적 기준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신중한 처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이미 기존 번역물이 존재하고 있을때는 말이지요.위의 기사를 보면 김진일씨도 곤충 전공자로서 과거의 탐구당본을 이미 숙독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인데 그렇다면 그 자체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군요.자신의 것이 정본이라는 홍보성의 오만함보다는 보다 겸손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번역에 있어서 열화당과 예경출판사의 사례에서 보듯이 말이지요
 

네덜란드의 저명한 문화사가 요한 호이징하의 <호모 루덴스>(연암서가, 2010))가 새로 번역돼 나왔다. 이번에도 영역본에서 옮긴 중역판이긴 하지만, 원래 영역자가 호이징하 자신의 영역도 참고했다고 하므로 편차는 크지 않을 것 같다.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하려니 사실 까치에서 나온 <호모 루덴스>가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책이고, 내가 대학 1학년 때 읽은 것도 이 까치판이다. 최초의 번역본은 언론인 권영빈의 <호모 루덴스>(홍성사, 1981)이지만(<놀이하는 인간>(기린원, 1989)으로 다시 나온 바 있다), 현재는 절판된 책이다.   

새 번역본은 저자명 Johan Huizinga를 네덜란드 발음을 따르려는 의도에서인지 '요한 하위징아'라고 표기했는데, 실제 발음은 [joːhɑn hœyzɪŋxaː]라고 하므로 딱히 부합하지도 않는다. 공연한 부스럼이라고 해야겠다(참고로 러시아어로는 '효이진가'라고 부른다). 애초에 '호이징가'라고 소개됐다가 '호이징하'로 교정됐는데, '하위징아'는 어떤 근거인지는 몰라도 원칙 불명의 표기다. '하위징하'는 가능하지만,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호이징하'라는 관행을 존중하는 게 나을 듯하다(모음 표기까지 물고 늘어지자면, '모스크바'가 아니라 '마스크바'라고 불러야 한다). 한겨레의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10. 03. 06) 노동 예찬 사회…목졸리는 ‘놀이 정신’ 

네덜란드의 문화사가 요한 하위징아(사진·1872~1945)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호모 루덴스>(1938)가 새 번역본으로 나왔다. 인간을 ‘놀이하는 존재’로 규정한 저작이자 하위징아의 말년을 장식한 걸작이다.  



하위징아의 출세작은 1919년에 출간한 <중세의 가을>이다. 그에게 중세사가로서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것이 이 저작이다.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 20년의 간격을 두고 출간된 두 독창적 저작은 한 사람이 썼다고는 언뜻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주제가 다르다. 하나는 중세 말기 유럽인들의 ‘삶의 양식’을 조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류의 문화와 놀이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통사적으로 살핀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두 책 사이에는 자연스런 물의 흐름 같은 연속성이 있다. 하위징아 자신은 <호모 루덴스> 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중세의 가을>에서 … 문화와 놀이는 친밀한 관계라는 사상의 씨앗을 처음으로 마음에 뿌렸다.” 

14~15세기 유럽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중세의 가을>은 그 시절 중세인들이 겪었던 ‘삶의 쓰라림’에 대한 절실하고도 고통스러운 묘사에 이어 그 중세인들이 마음에 품었던 ‘더 아름다운 삶을 향한 열망’을 추적한다. 그 열망의 길 가운데 하나가 ‘꿈의 길’이다. “현실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세계를 거부하는 일도 너무 어렵다. 그렇다면 환상의 세계에서나 살자.”(<중세의 가을>) 그 길에서 하위징아가 만나는 것이 중세의 ‘기사도’와 ‘궁정 연애’인데, 바로 이 기사도와 궁정 연애가 <호모 루덴스>에서 말하는 ‘놀이 정신’의 중세적 표출이다.

하위징아는 1872년 네덜란드 북부 도시 흐로닝언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그리스어·라틴어·히브리어·아랍어를 공부했고, 흐로닝언대학에 들어가서도 언어학을 사실상 전공으로 삼았다. 특히 박사과정에서는 인도 고전어인 산스크리트를 공부했고, 산스크리트 문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97년 그는 하를럼고등학교 교사가 됐는데, 여기서 역사를 가르치면서 처음 유럽 중세사에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어 1905년에 흐로닝언대학, 10년 뒤에는 레이던대학 역사학 교수가 됐다. 수많은 고대어를 공부한 것이 역사학자 하위징아에게는 아주 훌륭한 무기가 되었는데, <호모 루덴스>에도 그리스·로마·산스크리트 문헌과 단어가 수시로 등장해 논거를 제공한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말도 ‘놀이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의 머리말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이란 뜻의 ‘호모 사피엔스’도, ‘(물건을) 제작하는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파베르’도 인간을 제대로 규정하기에는 미흡하다고 지적한다. “그리하여 나는 호모 파베르 옆에,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수준으로, 호모 루덴스를 인류 지칭 용어의 리스트에 등재시키고자 한다.” 이어 하위징아는 말한다.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문명이 놀이 속에서, 그리고 놀이로서 생겨나고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굳혔다.” 이 확신을 입증하는 것이 이 책인 셈인데, 그 계획을 수미일관하게 밀고 나간 뒤 결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진정한 문명은 놀이 요소가 없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이런 놀이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하나로 하위징아는 ‘경쟁’을 제시하는데, 그 경쟁의 성격을 가장 확연하게 보여준 것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이었다. 어떤 점에서 보면 그리스인들의 생활 전체가 그들에게는 놀이, 곧 경쟁으로서의 놀이였다고 하위징아는 말한다. 이 경쟁을 나타내는 그리스어가 ‘아곤’(agon)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경쟁의 성격을 지닌 것을 모두 경기, 곧 아곤으로 만들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일화는 극단적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부하 장수 칼라노스가 죽자 슬픔을 달래려고 아곤을 열었는데, 가장 술을 많이 마시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하여 아곤 참가자 35명이 현장에서 죽고, 나중에 6명이 더 죽었는데 그중에는 우승자도 들어 있었다.” 하위징아는 이 아곤과 결합된 놀이가 예술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신화·소송·전쟁·정치·상거래에도 깊숙이 개입돼 있음을 입증해간다.

하위징아는 놀이의 정신이 19세기에 소멸했음을 매우 안타까워한다. “노동과 생산이 시대의 이상이자 우상이 되었다. 유럽 전역은 작업복을 입었다.” 그렇다면 20세기는 어떨까. 하위징아가 보기에 20세기는 겉보기엔 놀이가 아주 많아진 것 같지만, 놀이 정신은 사라지고 없다. 특히 정치에서 놀이 정신이 죽고 ‘유치한 행위’가 판친다. 그가 이 책을 쓰던 때는 나치가 독일에서 정권을 잡고 발호하던 때였는데, 그 현상을 염두에 둔 듯 그는 “소리를 지르거나 요란하게 인사를 하고, … 우스꽝스러운 집단행위를 한다”고 썼다. 이 시대는 놀이의 정신에 관한 한 명예의 코드도, 게임의 규칙도 내팽개친 천박한 시대였다. 그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략한 것이 1940년 5월인데 이때 하위징아는 대학에서 쫓겨난 뒤 변방 도시 더스테이흐로 유폐됐다가 1945년 2월 숨을 거두었다.(고명섭 기자) 

10. 03. 07.  

P.S. 나에게 <호모 루덴스>는 <중세의 가을>보다 인상적인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주 오랜만에 목차를 다시 보니 흥미를 끄는 대목이 없지 않다. 대학 1학년 때 읽은 것이니 거의 안 읽은 것과 마찬가지고, 그사이에 책에 대한 안목도 달라진 때문일 것이다. 호이징하의 문제의식을 계승한 책으론 로제 카이와의 <놀이와 인간>(문예출판사, 1994)이 있다. 최근에 나온 버전으론 스티븐 나흐마노비치의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에코의서재, 2008)도 참고할 수 있겠다. 서양미술사학자인 노성두씨는 "나는 이 책을 호이징가의 <호모 루덴스>와 바꾸지 않겠다"고까지 평했다. 국내서로는 한경애의 <놀이의 달인, 호모 루덴스>(그린비, 2007)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Йохан Хейзинга Homo ludens. Человек играющий. Статьи  по истории культуры Homo ludens. Artiklen over de CultuurgeschiedenisЙохан Хейзинга Homo ludens. Человек играющий

마침 러시아에 있을 때 호이징하의 책이 양장본으로 새로 출간되어 구입한 기억이 있다. <중세의 가을>과 <호모 루덴스> 두 권의 러시아어본을 구했는데, 나머지 책은 여력이 닿지 않았고, 일단 국내에 소개된 책만이라도 구해놓자는 생각이었다. 다시 검색해보니 저렴한 문고본으로도 출간돼 있다. 왼쪽이 <호모 루덴스>의 러시아어 양장본이고 오른쪽이 문고본이다...


댓글(1) 먼댓글(1)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우리는 여전히 호모 루덴스인가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10-01 00:20 
    한겨레에서 '로쟈의 번역서 읽기'를 옮겨놓는다.지면사정으로 두달인가 쉬다가 다시 시작하는데, 너무 오랜만인지 '로자의 번역서 읽기'라고 나갔다. 첫문장에도 오타가 있어서 교정해놓는다.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를 대상으로 삼았다. 현재 두 종의 번역본이 나와있는데, 한겨레 지면에는 까치판이 소개됐다. 두 번역본을 다 확인하며 썼지만 주로 인용한 건 연암서가판이다.한겨레(11. 10. 01) 놀이와 ‘유치한 놀이’의 차이점인간이 ‘생각하는
 
 
yamoo 2010-07-19 1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성사와 기린원..정말 이 두 출판사의 엔날 리스트를 보면 갖고 싶은 책들이 한보따리입니다..ㅎㅎ 호모루덴스는 저도 까치 출판사본으로 갖고 있습니다.
 

책은 바로 구해놓았지만 다른 책들에 밀려 아직 읽지 못한 책은 웬디 브라운의 <관용: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갈무리, 2010)이다. 마땅한 리뷰가 올라왔기에 워밍업으로 미리 읽어둔다. 관용이 언제나 '강자'의 미덕이라는 상식을 새삼 상기시켜준다.   

   

서울신문(10. 03. 06) 관용이란 말에 속지 말라, 그 속에 정치·폭력 숨었다

이런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은 최근 같은 팀의 한 동료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처음에는 불쾌감과 함께 심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곧 그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전처럼 함께 일을 해 나가기로 했다. 소수자의 권리와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관용의 정신’을 발휘해서 말이다. 이런 경우 당신은 아마 스스로의 드넓은 포용력에 만족하며 “잘한 일이다.”라고 뿌듯해할 것이다. 
  
그러나 ‘관용-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승철 옮김, 갈무리 펴냄)을 펴낸 정치철학자 웬디 브라운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이를 두고 “관용의 탈정치적 전략에 속았다.”고 평가할 것이다. 그러면서 “관용을 운운하기 전에, 소수자에게 느끼는 불쾌감의 근거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관용만으로 해결이 될 문제인지를 고민하라.”고 요구할 것이다. 

 

홍세화 한겨레신문 기획위원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창비 펴냄)를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한 ‘관용(톨레랑스·Tolerance)’이란 개념은, 1995년 책 출간 당시부터 우리 사회에 진지한 성찰을 요구하며 크게 유행했다. 각종 갈등의 씨앗을 품고 있던 한국 사회에서 서로 다른 것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관용은 주목받는 단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관용은 한국 사회는 물론 세계 각 지역에서 여전히 결코 의심받지 않는 가치 중 하나로 존재한다.  



하지만 브라운 교수는 이렇게 관용에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경계한다. 그는 관용이 ‘자유’나 ‘평등’의 동의어가 아님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관용이란 이름 뒤에 숨은 정치적인 계산들과 헤게모니 투쟁, 심지어 그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의 실태를 낱낱이 고발한다. 그는 최근 20년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예로 들며, 이런 ‘관용의 폭력’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지적한다. 책에서 설명하는 관용의 탈정치성은 앞서 예로 든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비슷하다.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인식 문제는 정치적·사회적으로 이해해야 할 요소가 분명 있다. “동성애자는 불쾌하다.”는 차별적 인식을 갖게 한 사회 구조는 무엇인지, 또 이런 차별을 어떻게 해결할지의 문제는 개인이 아닌 국가나 사회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관용은 이러한 국가나 사회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논리로 이용되고 있다고 브라운 교수는 말한다. 인종차별, 동성애 혐오 등 사회적 문제를 단지 관용이 부족한 개인의 탓으로만 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에 대한 본격적인 정치 논쟁을 피하고, 소수자들을 배려받아야 할 수동적 위치로만 몰아가면서 이들이 정치세력화되는 것도 막는다.

나아가 브라운 교수는 책의 부제로 붙였듯 이런 식으로 관용이 현대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이 될 수 있음도 지적한다. 관용을 전략적으로 활용하면, 사실상 소수자를 포함한 국민의 권리 보장과 계층 간의 소통을 책임져야 할 국가는 교묘하게 이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기득권에 대한 도전 역시 사전에 막을 수 있다.

브라운 교수는 관용이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에도 활용되고 있다고 전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이 중동 국가를 상대로 벌인 수많은 전쟁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관용의 논리가 적용됐다. 미국은 이슬람국가나 후진국의 문명은 불관용적이기 때문에 서구 선진 국가의 관용적인 문명이 이들을 처단하고 민중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논리로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관용의 범위를 자의적으로 정하고 그것을 벗어나는 것들에는 거리낌 없이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책에서 브라운 교수는 계보학의 방법을 통해 관용 담론이 전략적으로 사용된 흐름을 추적해 간다. 애초 종교개혁 이후 종교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사용된 때부터 인도주의로 의미가 확장되고 또 최근 다문화주의의 한 담론이 되기까지, 다양하게 변화한 관용의 용법을 소개한다.(강병철기자) 

10. 03. 06.


댓글(7) 먼댓글(1)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잡담] 관심가는 책 '관용 :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from High enough! 2010-03-06 21:00 
    다문화제국의 새로운 통치전략 - 로쟈의 저공비행관용, 일명 똘레랑스.어쩐지 좀 멋있고, 어쩐지 좀 유식해 보이고, 어쩐지 좀 있어 보이는 그런 말이다. 사회의 소수자에 대한, 또는 대립적인 어떤 세력들 간의 적대적인 태도 대신 그저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좀 뿌듯하고 멋있는 그런 개념이랄까 뭐 그렇다.오, 하지만 저 책의 시점은.'왜 소수자에 대한 시각이 불편한 거지?' 같은 근원적인 문제 해결은 없다는 거 알고 있니-라고 한...
 
 
노이에자이트 2010-03-06 20:40   좋아요 0 | URL
개인이 먼저 바뀌어야 하느냐 사회가 먼저 바뀌어야 하느냐는 오래된 논쟁이 생각나는군요.브라운은 사회가 바뀌어야 한다는 소신인 듯합니다.하지만 사람은 가만 있고 사회가 바뀌나요? 개개인의 변화를 강조하면 기존체계는 그대로 유지하게 하는 보수적인 주장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글쎄올시다 입니다.

로쟈 2010-03-07 09:37   좋아요 0 | URL
저는 그 개인도 강대국의 개인이냐, 약소국의 개인이냐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주장만을 펼친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관용의 담론이 어떻게 사용됐는가를 보여주는 게 책의 강점이라고 생각하고요...

돈케빈 2010-03-07 01:05   좋아요 0 | URL
에이미 추아 <제국의 미래>도 중심키워드가 '관용'이더라구요.

로쟈 2010-03-07 09:37   좋아요 0 | URL
관용은 제국의 필수적인 미덕이기도 하지요...

2010-03-07 0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7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7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