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대표적인 역사학자의 한 명이라는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알마, 2006)가 지난주에 출간됐고, 나는 어제 책을 구했다. 사실 에릭 포너란 사람인 누구인지도 몰랐고,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좀 구닥다리 제목이 붙은 책을 손에 들기는 쉽지 않지만(왜 'Who owns history?'란 원제를 살리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일부 서평에서 읽은 바 그를 '소련 체제의 노골적인 옹호자이며 미국에 대해서는 앙심을 품은 역사학자'라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다고 해서 관심을 갖게 됐다. 게다가 책은 '새로운 역사를 원하는 러시아 사람들'이란 장도 포함하고 있는데, 저자가 1990년 4개월간 모스크바대학에 교환교수로 체류한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라 한다. 내가 궁금증을 가질 만한 이유이다.

우연이긴 하지만, 책이 출간된 것과 동시에 조지 부시에 대한 미국 역사가들의 평가가 보도되었다. 그를 '사상 최악의 대통령'이라 평하는 역사학자들의 명단에 에릭 포너란 이름이 단연 선두에 올라 있다. 이 정도면 "지난 20년 사이 가장 많은 저술을 발표한, 독창적이면서도 영향력 있는 미국 역사가"(워싱턴포스트)란 평판이 근거없는 립서비스는 아니라는 게 분명하다. 번역서의 타이틀이 '에릭 포너의 역사란 무엇인가'라고 뽑힌 이유이기도 하겠고(그러니까 '에릭 포너'란 이름을 한 열 번 정도 중얼거려서 얼른 '하워드 진'만큼 입에 익도록 해두는 게 좋겠다). 관련기사들을 옮겨놓고 몇 개의 이미지를 붙여둔다. 당연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의 러시아 이야기 정도는 조만간 읽어보고 몇 마디 적어둘 참이다.

뉴스21(06. 12. 05) "부시, 역대 최악 대통령"

미국 역사가들이 조지 W. 부시대통령을 ‘사상 최악의 지도자’로 꼽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중간선거 참패 이후 다시 한번 부시 대통령의 체면이 구겨졌다. 워싱턴 포스트지가 3일 보도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부시 대통령에 대해 냉혹하다. 대부분 ‘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거나 ‘최악의 대통령 톱5’, ‘백악관 불명예 전당 헌액’ 등 재임 6년간의 치적에 혹평을 가하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참여하는 이 평가는 지난 1948년 처음 시작된 뒤 미국민들의 큰 관심을 모아왔다.



컬럼비아 대학의 에릭 포너 교수는 역대 대통령 중 부시 대통령을 ‘최악’으로 꼽고 있다. 부정부패, 초법적 오만, 전쟁 등 대규모 재앙 초래 등 역대 대통령들이 재임 중 저지른 실수들을 교훈으로 삼기는커녕 ‘종합적’으로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포너 교수는 부시 대통령의 경우 전쟁 포로를 다루는 가운데 피의자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 기본적 인권을 무시하고 비밀교도소를 운영하는 등 법을 무시한 독선적 스타일로 오히려 미국의 명예를 훼손하고 국제적 고립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부시 대통령은 명분도 없는 이라크전을 감행해 결국 국가적 재앙을 초래했으며, 대통령의 독단으로 전쟁을 감행한 제임스 폴크 대통령과 비견되나 폴크 대통령은 멕시코와의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는 데 성공해 오히려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접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시 대통령은 또 베트남전으로 혹평받고 있는 린든 존슨 대통령보다 낮은 평가를 받고 있는데, 존슨 대통령은 국내 정책면에서는 민권법과 의료보장 등 치적을 평가받고 있다. 이들 전문가들은 아직 임기가 2년 남은 부시 대통령에게 ‘오사마 빈 라덴 사살’ ‘김정일 핵포기’ 등 사태 반전 요소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지난 6년간의 실적만으로 이미 최악의 대통령 반열이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중앙일보(06. 12. 09) '색안경' 벗고 미국사 틀린 그림 찾기

역사는 사실만으로 이뤄진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일본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중국은 우리의 고대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뿐인가. 우리 내부에서도 이념에 따라 같은 사실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비틀려 버린다. 어떤 이는 이를 '역사 전쟁'이라고도 한다. 여러 역사 해석들이 충돌하고 대립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역사가 돼버렸다. 그래서 누가 쓰느냐에 따라 제각각의 역사가 생겨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역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역사는 누가 쓰느냐', 또는 '역사는 누가 소유하느냐'로 바꿔놓으면 답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법하다. 이 책의 원제도 '누가 역사를 소유하는가(Who Owns History?)'다. 서로 다른 주제의 에세이들을 모아놓아 잡다해 보이긴 하지만 역사해석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전체를 일관성 있게 묶어 준다.

누가 쓰든 역사 서술에서 사실과 해석을 엄격히 분리하기는 어렵다. 일부 사실을 골라내 부각시키고, 다른 사실은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을 훼손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선별 작업 자체가 바로 해석 행위인 셈이다. 이 같은 해석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오류들을 저자는 조목조목 지적한다.

저자는 미국사를 중심으로 학계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쟁점들을 다룬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에선 왜 사회주의가 발흥하지 못했는가라는 주제다. 저자는 이를 규명하려는 갖가지 접근방식들을 소개한다. 미국에선 봉건주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잡다한 문화와 인종 탓에 노동자들이 단결하지 못했다, 민주주의가 일찍 도입돼 계급의식이 미처 자라나지 못했다….

개별적으론 그럴듯 해보이는 해석들이지만 저자는 각각의 허점을 가차없이 들춰낸다. 그러곤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토록 오랫동안 역사학자들이 해답을 찾지 못했다면 물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라며. 즉 '미국에선 왜 사회주의가 없느냐'는 질문은 자본주의의 발전엔 반드시 사회주의가 수반된다는 선입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질문에 이미 해석이 섞였으니 답에도 해석이 들어갔던 셈이다. 저자는 또 미국인들이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자유'라는 구호도 인종적 배타주의 속에서 나왔다고 비판한다. 독립선언문에 나온 개인의 자연권은 백인들에게만 해당하지 흑인들은 제외돼 있었다는 것이다.

컬럼비아대 종신교수이자 남북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는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에 열성적이다. 그 연장선에서 저자는 미국의 팽창주의와 군사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이때문에 저자는 미국의 보수파에겐 성가신 존재로 찍혀 있다. 한 보수 언론인은 그를 '미국을 망치고 있는 100인 가운데 75번째 인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선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그는 이례적으로 미국역사학자기구(OAH), 미국역사학회(AHA), 미국역사가협회(SAH) 등 3대 역사학 단체의 회장을 모두 지냈다.(남윤호 기자)

06. 12. 15.

P.S. 참고로, 미국의 한 언론인에 따르면 "에릭 포너의 <미국인이 생각하는 자유>는 미국의 모든 학교에서 읽어야 하는 필수적인 저작"이다. 아마도 이 책이 그의 대표작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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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발바닥 2006-12-15 20:45   좋아요 0 | URL
간만에 리플을 남기게 되네요. 미국이나 미국을 보는 우리의 시각 같은 주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감사히 퍼가겠습니다. ^^;;

마노아 2006-12-15 22:29   좋아요 0 | URL
원제를 살렸으면 더 매력적이었을 것 같은데 제목이 아쉽네요.

로쟈 2006-12-15 23:05   좋아요 0 | URL
외로운 발바닥님/ 저도 그냥 지나치려고 했던 책인데, 우연히 책을 구하게 되어 몇 자 적어놓았을 뿐입니다. 게다가 옮겨왔을 뿐인데요...

마노아님/ 편집자들의 판단이 때론 의아할 때가 있습니다...

Ritournelle 2006-12-16 02:23   좋아요 0 | URL
* E.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의식한 출판사의 의도가 아닐런지요? 올 한해 로쟈님의 서재로 인해 풍성함을 많이 얻어간 것 같습니다. 새해부터 시작될 푸꼬의 {지식의 고고학} 읽기가 좋은 성과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 요즘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를 읽고 있는데, 서론만 읽고 난 후 느낀 점은 다시 '푸꼬'를 읽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전 {임상의학의 탄생}부터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남은 한해 잘 마무리하시고 새해에도 평안하세요.

로쟈 2006-12-16 09:51   좋아요 0 | URL
네, 그런 '의식' 자체가 좀 의아하다는 것이죠. 어떻게 눈에 띄는 제목이 아니라 묻히는 제목을 다느냐는. 그리고, 자율평론 세미나팀이 옮긴 '호모 사케르'의 국역본도 어디 떠돌아다닐 겁니다. <임상의학의 탄생>은 전공자들이 '최악의 책'으로 꼽더군요. 참고하시길...
 

엊그제 구내서점에 들렀을 때 눈길을 잡아끈 책은 이문재 시인의 첫산문집 <이문재 산문집>(호미, 2006)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빨간색의 원색 표지에 제목이 달랑 '이문재 산문집' 아닌가. 독특한 제목과 장정이 일단은 시선을 끈다. 그리고 한국문학에 약간 눈치가 있는 독자라면 이게 중견시인의 '첫'산문집이라는 사실과 시인이 편집위원으로 몸담고 있는 문학동네가 아닌 비교적 생소한 출판사에서 책을 냈다는 사실이 이채로울 것이다. 아침신문에 이에 관한 리뷰기사가 있어서 일단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2. 15) 이문재 시를 물로 번지게 한 글들

원로 시인 정공채(72)씨가 1979년에 낸 시집의 제목은 ‘정공채 시집 있읍니까’(당시의 표기대로)였다. 독자가 서점 직원에게 문의할 경우 “‘정공채 시집 있읍니까’ 있습니까?”라고 물어 보아야 했던 셈이다.

시인 이문재(47)씨의 산문집을 받아 들고 ‘정공채 시집 있읍니까’가 떠올랐다. 2003년에 낸 시인 탐방집 <내가 만난 시와 시인>을 제한다면 자신의 첫 산문집에 해당하는 이 책에 시인은 ‘이문재 산문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니까 <이문재 산문집>이라는 제목의 이문재 산문집이다. 정공채 시인의 시집 제목이 기발했다면, 이 산문집의 제목은 과감하다.

산문집은 크게 네 개의 묶음으로 나뉘는데, 그런 세세한 구분과 무관하게 시인의 문제의식은 일관되다. “내게 시와 산문은 아주 가까운 혈연이다. 나는 시를 통해 이 반인간적인 문명의 급소를 발견하고, 그 급소를 건드리고 싶었다. 내 시에 내장되어 있는 문제의식에 물을 묻혀 번지게 한 것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이다.”(‘시인의 말’)

급소를 건드린다는 말은 자칫 과격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천성이 비폭력 평화주의자인 시인의 발언 취지를 잘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시인이 보기에 문명이야말로 인간과 자연과 세계를 향해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두르는 원흉이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시인의 방식이란 어디까지나 소극적 저항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산책과 걷기, 휴대전화 전원 끄기, 식성껏 라면 끓이기, 기다리기 등이 그가 동원하는 세부 전술들이다.

가령 그는 여행이 아닌 관광으로 전락한 봄날의 꽃구경을 사절하고, 도시의 뒷골목을 게으르게 산책하기를 즐기며, 녹차가 우러나기까지의 기다림을 소중히 여긴다. 특히 “내 일상은 전력의 하수인이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전원 끄기(언플러그) 전술이야말로 그가 즐겨 구사하는 방법이다. 전원을 끔으로써 그는 일상에 빼앗겼던 자신을 되찾고 세계와 본질적으로 만난다.

“나는 전원을 끄는 순간, 세상과 단절된다. 서울 한복판이 망명지로 변한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자발적 망명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찬찬히 안팎을 둘러본다. 점심 시간이나 출퇴근길, 다 합해야 한 시간이 넘지 않지만, 나는 휴대 전화를 ‘무시’하며, 지금, 여기가 커지고 길어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최재봉 기자)

06. 12. 15.

P.S. 지금은 말쑥한 화술의 라디오방송 진행자로도 활약하고 있는 시인은 나름대로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문청시절 손꼽히는 '기인'으로 지기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던 시인의 이름을 내가 가장 자주 본 건 '시사저널'의 기사들 속에서였다(그는 '기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강단에서 시창작을 가르치는 '방송인'이다(인터넷 라디오문학 '문장의 소리' 진행을 맡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시인과의 첫만남은 (당연한 말이지만) 첫번째 시집을 통해서였는데, 이후 문학동네에서 두 차례 재간행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1988)이 그의 첫시집이다. 민음사에서 출간되던 시인총서들을 얼추 사모으던 내가 '시집다운' 제목의 시집을 비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기억에  두번째 시집이 <산책시편>(민음사, 1993)이다('구두'나 '산책' 같은 시어들이 시인의 걸어다닌 이력을 은근히 표나게 한다). 기억에 나의 관심을 끌었던 건 '부사성의 시학'이었는데, 나는 나대로의 흉내도 좀 내본 듯하다.

좀 터울 갖고 펴낸 <마음의 오지>(문학동네, 1999)가 세번째 시집인가(알라딘에는 동명이인의 시집들도 '1959년생 이문재'의 시집으로 잘못 등록돼 있다) . 하지만 이맘때는 시인으로서보다 기자나 문학잡지의 인터뷰어로 기억에 떠올리게 된다(기자시절에는 뛰어다녔을까?). '기억력' 탓만은 아닌 게 <내가 만난 시와 시인>(문학동네, 2003) 같은 쏠쏠한 탐방기들을 그가 썼기 때문이다(그런 유형의 탐방기로 내게 '원조'격은 김현의 <시인을 찾아서>이다). 시인이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건 지난 2002년이다.

지구의 가을 / 이문재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두려워 헤어라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 크게 뜨면 뜰수록
이 눈부신 음식들
육신을 지탱하는 독으로 보입니다

하루 세 번 식탁을 마주 할 때마다
내 몸 속에 들어와 고이는
인간의 성분을 헤아려보는데
어머니 지구가 굳이 우리 인간만을
편애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습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린다 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책으로만 보자면 시인의 이력은 비교적 단촐하다. 그건 종이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겠다는 의지와도 연관된 것인지 모르겠다. '자연친화적인' 외모에서도 드러나지만, 도시/문명과는 반친화적인(도시에서 그는 거주하는 게 아니라 다만 '산책자'로서만 행세하다) 그가 이번 산문집에서 표나게 내세우고 있는 것도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반인간적인 문명의 급소를 발견하고, 그 급소를 건드리고 싶었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집과 산문집을 굳이 따로 읽지 않아도 되겠다. 그러니 산문집을 그의 시로 들어가는 가장 친숙한 '골목길' 정도로 간주해도 무방하겠다. 가끔은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주며 잠시 쉬어가는 골목길, 곁에 가만히...

소쩍새 우는 계절이다. 소쩍새는 울 때, 소와 쩍 사이를 길게 늘여놓는다. 소와 쩍 사이, 그 긴 침묵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소나 쩍보다 그 사이가 더 아팠다. 잠이 다 달아났다. 두세 음절로 끊어지는 자연의 소리나 기계음은 자주 의성어로 바뀐다. 뻐꾸기 소리나 초침 째깍거리는 소리는 매번 다르게 들린다. 뻐꾹뻐꾹이 바꿔바꿔로, 째깍째깍이 아퍼아퍼로 들릴 때가 있다. 소쩍이 훌쩍으로 들린다면, 그대는 슬픈 것이다. 그럴 땐 가만히 있어야 한다. 슬픔이 잘 마를 때까지 그 곁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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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12-15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 보관함으로 들어가야겠네요.양파나 무 보관함은 꽉차있어서..(조간 썰렁 개그인가? (^ㅜ^) ..이문재 시인 좋아해요.뭐랄까 근기가 있다고 해야하나.....

로쟈 2006-12-15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기'란 말이 아주 적절하네요. 저보다도 드팀전님이 만난 시인 이야기의 보따리가 더 클 거 같습니다.^^

2006-12-15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1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기억의 오타는 아니고, 불수의적인 손가락의 오타입니다.^^

파란여우 2006-12-15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 뚜껑이 닫히지 않지만 그래도 꽉꽉 눌러서!^^

로쟈 2006-12-15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건 좀 얇은 편이어서...^^
 

어제 배송받은 책 중의 하나는 들뢰즈의 <푸코>(동문선, 2003)이다. 다른 판본인 <들뢰즈의 푸코>(새길, 1995)를 갖고 있고 또 동문선의 책이 출간 당시 워낙에 '고가'여서 따로 구입하지 않았었는데, 영역본을 주대본으로 한 <들뢰즈의 푸코>가 부정확한 대목이 여럿 된다고 하여 불어본을 옮긴 <푸코>까지 주문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 덧붙여진 이유는 얼마전에 <바보배>(안티쿠스, 2006)도 출간된 김에 모셔두기만 했던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03)를 읽어볼까 해서 러시아어판과 같이 꺼내두었다가 이왕이면 <지식의 고고학>을 한번 더 읽고 시작하는 게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푸코>의 첫장은 <지식의 고고학>을 다루고 있다.

 

 

 

 

기억에 나는 그 책을 10년쯤 전에 영역본과 같이 읽었더랬다. 마치 10년전 일기를 꺼내읽듯이(그맘때 나는 갓 서른이 된다는 묘한 설레임을 갖고 있었을까?) 다시 책을 손에 든다. 그리고 <지식의 고고학>에 대한 리뷰들을 잠시 찾아보니 역자인 이정우 원장의 글이 눈에 띈다. 책에 대해서는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고전"이라는 강조밖에 하고 있지 않지만, 워밍업으로 읽어봐도 좋겠다.

경향신문(04. 10. 15) 담론의 논리적 기초 서술

1987년 6월 항쟁을 전후해서 한국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 후기 산업자본주의 시대, 정보화 시대, 포스트모던 시대, 탈근대의 시대 등 무엇으로 부르든 이 시대는 군정(軍政)시대와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다양한 특성들을 보여준다.

시대의 이런 변환과 더불어 철학에서도 큰 변화가 찾아왔다. 그것은 곧 19세기적인 사유 양태들(현상학, 해석학, 변증법 등)에서 새로운 사유양식들로의 이행이다. 이 새로운 사유양식들은 매우 이질적이어서 일반화하기 힘들지만, 이 사유들이 군정시대와는 크게 다른 90년대를 사유하기 위해서 논의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흐름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은 미셸 푸코이다.

유신 이후 한국 사상을 이끌어간 것은 마르크시즘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라캉의 정신분석학과 들뢰즈/가타리의 노마디즘, 데리다의 탈구축주의 등이 주도해가는 시대를 살고 있다. 푸코는 알튀세와 더불어 정확히 그 사이에 위치한다.

한국에서 푸코의 사유는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연구되었는데, 이 시대는 타자들(=소수자들)의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시대이며, 담론계가 전반적으로 재편성되던 시대이며, 마르크시즘 이후의 새로운 실천 방식들이 모색되던 시대이다. 이것은 곧 두 적대세력의 시대, 과학성의 시대, 혁명의 시대로부터의 단절 또는 변환을 함축한다.

한국에서 푸코의 사유는 무엇보다 권력의 이론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즉 푸코의 사유는 ‘지식-권력’의 틀에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때로 이 생각은 사회학적 환원주의와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곧 푸코에게서 ‘지식(savoir)’의 개념이 정확히 무엇인지가 잘 이해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이것은 곧 한국에서 푸코는 보다 현실적인 정치문제와 관련해서만 다루어지고 그 과학사적 맥락이나 철학적 토대는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음을 함축한다. 이것은 또한 푸코 사유에의 보다 지속적인 관심과 선용(善用)이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지식의 고고학’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중요한 위상을 점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 저작은 푸코 사유의 허리에 위치한다. 이전의 고고학적 저작들(‘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말과 사물’)과 이후의 계보학적 저작들(‘감시와 처벌’ ‘지식에의 의지’) 및 윤리학적 저작들(‘쾌락/기쁨의 선용’ ‘자기 돌보기’) 사이에 위치하면서 푸코 사유의 전반적인 문제의식, 논리적 기초, 원리적인 개념들, 중요한 방법들 등을 전반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저작이다.

이 저작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담론’이다. 90년대에 새롭게 도래한 단어들 중 아마도 가장 넓게 퍼진 단어들 중 하나가 담론일 것이다. 이 개념은 곧 과학적 명제의 차원이 아니라 보다 넓은 언어적 차원을 가리킨다. 즉 담론 개념은 90년대에 있었던 문화적 변화들을 단적으로 응축하고 있는 개념인 것이다. ‘지식의 고고학’이 새롭게 도래한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읽어야 할 고전인 것은 이 때문이다.(이정우|철학아카데미 원장)

06. 12. 14.

P.S. <지식의 고고학>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은 그의 콜레주 드 프랑스의 취임강연인 <담론의 질서>(서강대출판부, 1998)이다. 이 또한 새길사(1993)에서 먼저 출간되었던 책이고 나는 그 판본으로 읽었었다(영역본에는 두 텍스트가 합본돼 있다). 김화영 교수의 번역으로 계간 <세계의 문학>에 게재된 적도 있다. 게리 거팅의 <미셸 푸코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백의, 1999)도 <지식의 고고학>에 대한 유용한 안내를 포함하고 있다.

Археология знания

러시아에서 내가 구한 책들 가운데 아끼는 책의 하나는 바로 러시아어판 <지식의 고고학>(2004)이다. 마침 내가 체류 중에 책이 나왔고, 장정도 예쁘게 돼 있다. 416쪽 분량이니까 두께도 만만치 않지만(국역본보다 왜 더 두꺼운지는 아직 모르겠다. 비록 들뢰즈의 <지식의 고고학>론이 부록으로 포함돼 있긴 하지만), 가격은 저렴했다. 여하튼 읽을 책들은 차고 넘치지만 2007년 1월에 읽을 책으로 <지식의 고고학>을 미리 예약해 두기로 한다. 10년쯤 시간을 되돌려 (비록 '고고학적 시간'은 아니더라도) '회고적 시간'을 잠시 살아보는 것도 어색하지 않은 나이가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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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2-1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난해하던데요 ;;;

로쟈 2006-12-15 0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역자였나) '회색'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풍부한 사례들을 다룬 푸코의 다른 저작들에 비하면 난해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 게 오히려 매력이기도 하구요...
 

한 영화의 자막을 번역하느라고 하루종일 집안에 붙박혀 있었다. 간간히 딴짓을 하기도 했지만 하루종일 한 가지 일에 매달려본 것도 오랜만인 듯하다. 그게 다 학기가 거의 종료된 시점이어서 가능한 일이리라. 어쨌거나 교정을 보기 전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단순작업을 하나 해둔다. 마땅한 일이 뭐가 있을까 둘러보다가 집어든 책이 두달 전에 출간된 장경렬 교수의 <코울리지: 상상력과 언어>(태학사, 2006)인데, 책은 장경렬(영문학), 김상환(철학) 두 교수가 기획위원을 맡은 '알레테이아 총서'의 첫권이었다.

'단순작업'이라고 한 건 책머리에 실려 있는 그 총서의 발간사를 옮겨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요즘도 새로운 기획의 총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발간사'를 표나게 내세우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데다가 관심 또한 나의 전공/적성과 맞아떨어지기도 해서 수고를 무릅쓸 만하다. 더불어, 총서의 제2권으로 근간목록에 올라 있는 김상환 교수의 <들뢰즈: 차이와 반복>의 출간을 고대하는 마음도 그 수고에 보태도록 한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인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가장 의미있는 사건 가운데 하나는 문학과 철학의 화해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던 문학과 철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대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인정하고 서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인문학적 사유방식들이 새롭게 조명되거나 싹트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도 여전하다. 변화가 있다면 다양한 사유방식들에 대한 접근과 논의가 어느 때부터인가 개별 문화권을 뛰어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실로 21세기는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새로운 노마디즘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정황은 수많은 인문학도들에게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심각한 고뇌에 빠져들게 한다. 노마드의 삶은 본질적으로 방황의 삶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너무도 다양한 사유방식들 가운데 어느 쪽을 향해 갈 것인가 설사 선택이 문제되지 않더라도 문제의 사유방식을 어느 방향에서 접근해야 할 것인가, 또한 다시금 어느 사유방식을 향해 걸음을 옮겨야 할 것인가 등등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태학사의 '알레테이아 총서'는 이런 고민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준비된 것은 아니다. 다만 노마드의 삶 앞에 펼쳐진 황야 저편의 밤하늘에 길잡이별을 띄우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 가능하리라는 믿음에서 준비된 것일 뿐이다. '알레테이아 총서'가 기본적으로 하나 또는 둘의 사유 개념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함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인문학의 핵심 개념에 대한 이해가 일종의 길잡이별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알레테이아 총서'는 출발한다.(*아래 사진은 하이데거 부처와 라캉)

-하이데거는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알레테이아'를 어원에 충실하게 번역함으로써, '인식과 사실의 일치'라는 전통적 진리 개념을 뛰어넘어 '존재자의 탈은폐 또는 드러냄'으로서의 '진리'야말로 인문학의 다양한 사유 방식에 접근하는 데 기본원리가 된다고 믿기에 우리는 알레테이아를 총서의 명칭으로 택한다. '존재자를 드러내는 탈은폐'를 가능케하는 길잡이별을 저 노마드의 밤하늘에 띄우기 위해, 또는 그러한 별을 찾기 위해, '알레테이아 총서'는 존재할 것이다.

 

 

 

 

'알레테이아'로서의 진리에 대한 하이데거의 주석은 <이정표2>(한길사, 2005) 중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란 글에 나온다. 자유를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으로 재정의하면서 하이데거는 다시 이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이란 말을 "각가의 존재자가 이미 그 안에 들어서 있고 또한 각각의 존재자가 이를 테면 수반하고 있는 저 열려 있음에 대해 관여함을 의미한다"고 적는다. 거기에 이어지는 대목이 '알레테이아'에 관한 구절이다.

"이 열려 있는 장을 서구의 시원적 사유는 타 알레테아, 즉 '비은폐적인 것'으로개념 파악한 바 있었다.우리가 알레테이아진리 대신 오히려 비은폐성으로 번역한다면, 이러한 번역은 그 낱말에 더 충실할 뿐더러, 진술의 올바름이란 의미의 진리의 통례적 개념을 달리 사유해보고 존재자의 탈은폐성과 탈은폐라는 저 아직 개념 파악되지 않은 것을 소급해 사유해보라는 지침을 포함한다."(107쪽)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자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 --> 존재자를 열려있는 장으로 데려감 --> 탈은폐(밝게 드러냄)가 된다. 곧 '밝게 드러냄'은 자유의 행사이자 진리의 당당한 자기주장이다(누드 비치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러한 '열림터'를 마려하는 게 '알레테이아 총서'의 역할이기도 하겠다. 책이 나오는 추세가 좀 굼뜨고 총서의 목록이 다 카바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여하튼 몇 걸음을 가더라도 족적은 남지 않겠는가...

06.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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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3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13 11:46   좋아요 0 | URL
**님/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니까 그것 말고도 오타 투성이네요. 제 타이핑 실력이 예전 같지 않은 모양입니다.^^;
 

대학가는 지난주에 종강을 하고 이번주가 대개 시험주간이다. 월요일 강의를 나가던 학교에 마지막으로 나가 시험감독을 하고 돌아오다가 교보에 들러 (두리번거리다가) 두 권의 책을 샀다. 양서부에서 먼저 산 책은 데이비드(데이빗) 호이의 <비판적 저항(Critical Resistance)>(The MIT Press, 2005). 저자는 현재 캘리포니아대학의 철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는 모양인데, 이번에 다시 찾아봤지만 지명도에 비해서 저서가 몇 권 되지 않는 '고마운' 학자이다. 이번에 산 것까지 포함하면 그의 주요 저작은 모두 갖고 있는 것이 된다(그래봐야 네 권이지만).

책의 부제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 포스트-비판'까지로 돼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들뢰즈의 니체주의에서 지젝까지를 '비판적 저항'이란 키워드를 통해 관통하고자 한다. 일단은 책이 다루는 범위가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도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다(물론 복사할 경우보다는 2배 정도 비싸지만). 게다가 저자인 호이와는 '안면'도 있고. 그래봐야 책을 통한 안면이지만.  

데이비드 호이는 <해석학과 문학비평>(문학과지성사, 1988)으로 국내에 소개된 학자인데, 원제가 <해석학적 순환(The Critical circle)>(1978/1982)인 이 책은 "독일의 비판 철학자 하버마스와 미국의 비평가 허쉬의 해석 이론들을 가다머의 이론과의 차이로 분석한 후, 롤랑 바르트, 폴 리쾨르,자크 데리다 및 미국의 신비평과 프랑스의 구조주의, 독일의 수용미학을 해석철학과 대조한다."

그러니까 이 책 한권을 제대로 혹은 음미하며 읽으려고 해도 신비평과 구조주의와 수용미학과 해석학을 모두 건드리게 된다. 내가 그러한 비평이론과 철학적 조류들에 견문을 갖게 된 것은 다 이런 '문학이론서'를 읽으면서, 혹은 읽기 위해서였다(가장 대표적으론 테리 이글턴의 <문학이론입문>을 들 수 있는데, 나는 학부시절부터 문학이론세미나 '교사'를 하면서 이글턴의 책을 포함해 국내에 출간돼 있는 모든 문학이론입문서들을 최소한 두 번, 많게는 네댓 번씩 읽었다). 호이의 책은 '해석학'을 카바하는 기본 연장이었다. 그의 나머지 책 두 권?

하나는 저작이 아니라 그가 편집한 책 <푸코: 비판적 독해>(1986)인데, 분량은 두껍지 않지만 쟁쟁한 논자들의 푸코론을 편집한 책이고 호이는 그 서문과 함께 '푸코와 프랑크푸르트학파'를 다룬 논문을 썼다. 푸코가 한창 유행하던 시절에 대학가 서점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책이다. 나도 그때 구입했었고.

   

그리고 다른 한권은 하버마스 전문가인 토마스 맥카시와 공저한 <비판이론>(1994). 이미지의 사이즈가 들쭉날쭉이군. 여하튼 리처드 로티의 서평을 잠시 인용하면 이렇다: “The two authors disagree strongly about important philosophical issues, but each takes the other's position and arguments seriously. The book as a whole helps greatly in clarifying what is at stake in discussions of universalism versus historicism. The level of debate is as high as might have been expected from two of America's best expositors and interpreters of recent European philosophy. . . . The so-called Habermas-Foucault debate has been at the centerof philosophical discussion in Europe for a decade, and this book is an admirable overview, and continuation, of that exchange. It is a hopeful sign of long-overdue internationalization that a debate between an important French and an important German philosopher should be continued in English with no diminution in either sophistication or acuity.”(Richard Rorty - Ethics)

호이와 맥카시 두 사람이 각각 푸코와 하버마스 라인을 대표했다(도서관에서 복사한 책인데, 이건 또 어디에 처박혀 있나). 생각난 김에 적어놓자면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새물결, 1999)이 푸코와 하버마스 논쟁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여하튼 이렇게 네 권이 호이의 주저이다. 단독저서로 치면 <해석학적 순환> 이후에 <비판적 저항>으로 건너뛰는 것이니 이 얼마나 고마운 경우인가. 이 책에 대한 맥카시의 추천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포스트-니체주의 프랑스 철학에서 저항의 이론들에 대한 호이의 통찰력있고 다면적인 설명은 독보적이다." 북치고 장구치고...

 

호이의 책을 사들고 인문 신간 코너를 둘러보다가 발견한 책은 <스피박의 대담>(갈무리, 2006). 제목 그대로 가야트리 스피박의 대담집이다. 책의 원제는 '포스트-식민주의 비평가(The Post-colonial Critic)>(1990)이고 엊그제도 다른 책들을 찾다가 책장에서 본 바로 그 책의 번역본이었다(나는 몇년 전에 책을 복사했었다). 난해하다는 평판이 자자한 스피박 입문서로서는 제격인 책. 

 

그렇다면, 여기서 퀴즈. 왜 이 페이퍼의 제목은 '데이비드 호이와 가야트리 스피박'인가? 호이의 책엔 스피박이 전혀 언급되지 않으며, 스피박 또한 호이를 다룰 일이 없는데 말이다. 둘 사이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이 연결고리는 저자들과는 무관하다. 바로 역자가 그 고리이기 때문이다. <스피박의 대담>은 호이의 <해석학과 문학비평>을 우리말로 옮긴 이경순 교수의 번역이다. 해서, 링크 이론을 적용하자면 호이와 스피박은 2촌관계쯤 되겠다.   

 

 

 

 

어쩌다 보니 스피박의 책들은 나올 때마다 언급하게 되는데,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을 제외하곤 나와 있는 책들은 모두 원서와 함께 책장에 꽂아두고 있다. 그런 '인연'에는 물론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의 영역자에 대한 신뢰가 한몫한다(이 무명의 영문학도가 붙인 장문의 서문은 학계의 '전설'이 되었다). <스피박의 대담>은 이전에 나온 스피박 입문서 <스피박 넘기>의 저자 스티브 모튼이 "스피박을 처음 읽는 이에게 가장 좋은 책"이라고 추천한 책이다. 사실 그런 입문서적 '기질'은 대부분의 대담들이 공유하고 있는 자질이기도 하다. 하니 스피박에 처음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이 책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찾아보니, 스피박의 최신간은 <어느 학문의 죽음(Dearh of a disciple)>(2003)인데, 주디스 버틀러가 쓴 아래의 서평을 보니 그 '어느 학문'이란 '비교문학'을 뜻한다. 르네 웰렉 강의를 책으로 펴낸 얇은 책이다.

"Gayatri Chakravorty Spivak's Death of a Discipline does not tell us that Comparative Literature is at an end. On the contrary, it charts a demanding and urgent future for the field, laying out the importance of the encounter with area studies and offering a radically ethical framework for the approach to subaltern writing. Spivak deftly opposes the 'migrant intellectual'approach to the study of alterity. In its place, she insists upon a practice of cultural translation that resists the appropriation by dominant power and engages in the specificity of writing within subaltern sites in the idiomatic and vexed relation to the effacements of cultural erasure and cultural appropriation. She asks those who dwell within the dominant episteme to imagine how we are imagined by those for whom literacy remains the primary demand. And she maps a new way of reading not only the future of literary studies but its past as well. This text is disorienting and reconstellating, dynamic, lucid, and brilliant in its scope and vision. Rarely has 'death'offered such inspiration." -- Judith Butler, UC Berkeley

 

 

 

 

방티겜과 바이스슈타인의 비교문학 개론서들이 소개된 지 20여 년쯤 된 것 같은데, 그 마지막 자리에 놓일 만한 책이겠다. 한 학문의 죽음(위기)과 새로운 출발점. 끝으로 자신의 이론적 출발점에 대한 스피박의 자전적 고백을 (재)인용해놓는다.

"제가 하는 일이란 저의 학문상의 상태를 분명히 하는 데 있습니다. 저의 입장은 일반적으로 말해 반동적인 것입니다.저는 맑스주의자들에게는 너무나 기호적으로 비치고,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너무나 남성적으로 비치고, 토착 이론가들에게는 지나치게서구이론에 물들어 있는 것으로 비칩니다. 저는 이것이 불편하면서도 기쁩니다."(16쪽)

06.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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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7-04-23 23:14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푸코-하버마스 논쟁을 다루고 있는 정일준씨 편역의 책 제명은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정 : 푸코-하버마스 논쟁 재론>입니다... <- 전망>이 아니고요... 오타이네요... ^^

그리고 책은 3부로 나뉘어져서

1부는 푸코의 논문 혹은 대담 네 편으로 <니체, 프로이트, 맑스>(1964/1967), <비판이론과 지성사>(1983), <정치와 윤리>(1983) 그리고 <도덕의 회귀>(1984),

2부는 역시 푸코의 칸트 혹은 계몽주의 논문 3부작
<비판이란 무엇인가?>(1978)
<혁명이란 무엇인가?>(1983/1984)
<계몽이란 무엇인가?>(1984) 및
드레퓌스/래비노우의 <성숙이란 무엇인가?>(1986),

마지막 3부가 바로 푸코-하버마스 논쟁으로서
하버마스의 <현대의 심장을 겨냥하여>(1986),
낸시 프레이져의 <푸코는 소장 보수주의자인가?>(1986),
디디에 에리봉의 <자유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열망>(1994),
드미니크 쟈니코의 <합리성, 힘, 권력>(1992),
프랑수아 에발드의 <외부가 없는 권력>(영역1992)로 구성되어 있는데...

논문의 선정은 매우 좋다. 특히 <비판이란 무엇인가?>는 푸코의 선집인 Dits et Ecrits에 수록되지 않은 희귀 논문으로서 영역으로부터의 중역이나마 내용의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참고로 <혁명이란 무엇인가?>와 <계몽이란 무엇인가?>는 불어본 이름이 Qu'est-ce que les Lumières로서 같은데(내용은 다르다), 논문의 내용에 따라 전자를 <혁명이란 무엇인가?>로 번역했다.

다만 지적한 것처럼 영역으로부터의 중역인 것이 흠이나, 책이 발행된 것이 1999년임을 고려하면 당시의 사정으로서는 최신 논쟁의 소개 및 정리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번역 자체는 그리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어도 나쁜 번역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뛰어난 번역이라 하기도 역시 어려운데 ... 최악은 아니지만 최상도 아닌 중간에서 위 아래로 논문에 따라 많이 편차가 지는 번역이다...

다만 결정적으로 아쉬운 것은 이 논쟁의 핵심 개념인 modernité, actualité, contemporaineité 등이 구분없이 맥락에 따라 근대성, 현대성 등으로 일관성 없이 번역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칸트 계몽주의를 다루는 3부작 논문에서 그러한데, 이는 논문의 핵심 논점을 - 우리말로는 - 파악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오류이다.

이 세 단어를 예를 들면, 근대성(혹은 모더니티), 시사 문제(혹은 당대의 현실문제 전체를 이르는 광의의 시사성, 당대성), 현대성(혹은 동시대성) 등으로 - 여하튼 한 저작, 논문 내에서 - 일관적으로 번역하지 않는다면, '근대성'의 개념을 옹호하는 사상가로서의 푸코를 결코 이해할 수가 없다(따라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푸코에게 포스트-모더니티는 일종의 '사이비 문제'로 간주된다).

이상의 지적된 점들만을 제외한다면 논문의 선정 및 시의성은 매우 적절한, 유익한 추천할 만한 책이다.

로쟈 2006-12-12 12:58   좋아요 0 | URL
오타는 수정했습니다. 거기에 발빠른 서평까지 보태주셨네요.^^ <비판이란 무엇인가>는 불어에서 직역된 글이 이상길 교수의 번역으로 <세계의 문학>에 게재된 적이 있습니다...

테렌티우스 2006-12-12 22:01   좋아요 0 | URL
서평까지는 전혀 아니고요, 다만 글을 읽으시는 분들을 위한 정보 차원에서 간략하게 적어본 것입니다. 읽으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저나 로쟈님에게도 기분 좋은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