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화의 자막을 번역하느라고 하루종일 집안에 붙박혀 있었다. 간간히 딴짓을 하기도 했지만 하루종일 한 가지 일에 매달려본 것도 오랜만인 듯하다. 그게 다 학기가 거의 종료된 시점이어서 가능한 일이리라. 어쨌거나 교정을 보기 전에 잠시 머리도 식힐 겸 단순작업을 하나 해둔다. 마땅한 일이 뭐가 있을까 둘러보다가 집어든 책이 두달 전에 출간된 장경렬 교수의 <코울리지: 상상력과 언어>(태학사, 2006)인데, 책은 장경렬(영문학), 김상환(철학) 두 교수가 기획위원을 맡은 '알레테이아 총서'의 첫권이었다.

'단순작업'이라고 한 건 책머리에 실려 있는 그 총서의 발간사를 옮겨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요즘도 새로운 기획의 총서들이 계속 나오고 있지만 '발간사'를 표나게 내세우는 경우는 흔하지 않은 데다가 관심 또한 나의 전공/적성과 맞아떨어지기도 해서 수고를 무릅쓸 만하다. 더불어, 총서의 제2권으로 근간목록에 올라 있는 김상환 교수의 <들뢰즈: 차이와 반복>의 출간을 고대하는 마음도 그 수고에 보태도록 한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인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20세기의 가장 의미있는 사건 가운데 하나는 문학과 철학의 화해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이후 소원한 관계를 유지하던 문학과 철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대의 존재가 필수적임을 인정하고 서로를 적극적으로 끌어안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인문학적 사유방식들이 새롭게 조명되거나 싹트게 되었으며, 이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도 여전하다. 변화가 있다면 다양한 사유방식들에 대한 접근과 논의가 어느 때부터인가 개별 문화권을 뛰어넘어 세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실로 21세기는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새로운 노마디즘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정황은 수많은 인문학도들에게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심각한 고뇌에 빠져들게 한다. 노마드의 삶은 본질적으로 방황의 삶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너무도 다양한 사유방식들 가운데 어느 쪽을 향해 갈 것인가 설사 선택이 문제되지 않더라도 문제의 사유방식을 어느 방향에서 접근해야 할 것인가, 또한 다시금 어느 사유방식을 향해 걸음을 옮겨야 할 것인가 등등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태학사의 '알레테이아 총서'는 이런 고민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 준비된 것은 아니다. 다만 노마드의 삶 앞에 펼쳐진 황야 저편의 밤하늘에 길잡이별을 띄우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 가능하리라는 믿음에서 준비된 것일 뿐이다. '알레테이아 총서'가 기본적으로 하나 또는 둘의 사유 개념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자 함은 이 때문이다. 요컨대, 인문학의 핵심 개념에 대한 이해가 일종의 길잡이별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서 '알레테이아 총서'는 출발한다.(*아래 사진은 하이데거 부처와 라캉)

-하이데거는 '진리'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의 '알레테이아'를 어원에 충실하게 번역함으로써, '인식과 사실의 일치'라는 전통적 진리 개념을 뛰어넘어 '존재자의 탈은폐 또는 드러냄'으로서의 '진리'야말로 인문학의 다양한 사유 방식에 접근하는 데 기본원리가 된다고 믿기에 우리는 알레테이아를 총서의 명칭으로 택한다. '존재자를 드러내는 탈은폐'를 가능케하는 길잡이별을 저 노마드의 밤하늘에 띄우기 위해, 또는 그러한 별을 찾기 위해, '알레테이아 총서'는 존재할 것이다.

 

 

 

 

'알레테이아'로서의 진리에 대한 하이데거의 주석은 <이정표2>(한길사, 2005) 중 '진리의 본질에 대하여'란 글에 나온다. 자유를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으로 재정의하면서 하이데거는 다시 이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이란 말을 "각가의 존재자가 이미 그 안에 들어서 있고 또한 각각의 존재자가 이를 테면 수반하고 있는 저 열려 있음에 대해 관여함을 의미한다"고 적는다. 거기에 이어지는 대목이 '알레테이아'에 관한 구절이다.

"이 열려 있는 장을 서구의 시원적 사유는 타 알레테아, 즉 '비은폐적인 것'으로개념 파악한 바 있었다.우리가 알레테이아진리 대신 오히려 비은폐성으로 번역한다면, 이러한 번역은 그 낱말에 더 충실할 뿐더러, 진술의 올바름이란 의미의 진리의 통례적 개념을 달리 사유해보고 존재자의 탈은폐성과 탈은폐라는 저 아직 개념 파악되지 않은 것을 소급해 사유해보라는 지침을 포함한다."(107쪽)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자유 -->존재자를 존재하게 함 --> 존재자를 열려있는 장으로 데려감 --> 탈은폐(밝게 드러냄)가 된다. 곧 '밝게 드러냄'은 자유의 행사이자 진리의 당당한 자기주장이다(누드 비치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러한 '열림터'를 마려하는 게 '알레테이아 총서'의 역할이기도 하겠다. 책이 나오는 추세가 좀 굼뜨고 총서의 목록이 다 카바될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여하튼 몇 걸음을 가더라도 족적은 남지 않겠는가...

06.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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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13 0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13 11:46   좋아요 0 | URL
**님/ 지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니까 그것 말고도 오타 투성이네요. 제 타이핑 실력이 예전 같지 않은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