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구내서점에 들렀을 때 눈길을 잡아끈 책은 이문재 시인의 첫산문집 <이문재 산문집>(호미, 2006)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빨간색의 원색 표지에 제목이 달랑 '이문재 산문집' 아닌가. 독특한 제목과 장정이 일단은 시선을 끈다. 그리고 한국문학에 약간 눈치가 있는 독자라면 이게 중견시인의 '첫'산문집이라는 사실과 시인이 편집위원으로 몸담고 있는 문학동네가 아닌 비교적 생소한 출판사에서 책을 냈다는 사실이 이채로울 것이다. 아침신문에 이에 관한 리뷰기사가 있어서 일단 옮겨놓는다.

한겨레(06. 12. 15) 이문재 시를 물로 번지게 한 글들

원로 시인 정공채(72)씨가 1979년에 낸 시집의 제목은 ‘정공채 시집 있읍니까’(당시의 표기대로)였다. 독자가 서점 직원에게 문의할 경우 “‘정공채 시집 있읍니까’ 있습니까?”라고 물어 보아야 했던 셈이다.

시인 이문재(47)씨의 산문집을 받아 들고 ‘정공채 시집 있읍니까’가 떠올랐다. 2003년에 낸 시인 탐방집 <내가 만난 시와 시인>을 제한다면 자신의 첫 산문집에 해당하는 이 책에 시인은 ‘이문재 산문집’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니까 <이문재 산문집>이라는 제목의 이문재 산문집이다. 정공채 시인의 시집 제목이 기발했다면, 이 산문집의 제목은 과감하다.

산문집은 크게 네 개의 묶음으로 나뉘는데, 그런 세세한 구분과 무관하게 시인의 문제의식은 일관되다. “내게 시와 산문은 아주 가까운 혈연이다. 나는 시를 통해 이 반인간적인 문명의 급소를 발견하고, 그 급소를 건드리고 싶었다. 내 시에 내장되어 있는 문제의식에 물을 묻혀 번지게 한 것이 이 책에 실린 글들이다.”(‘시인의 말’)

급소를 건드린다는 말은 자칫 과격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천성이 비폭력 평화주의자인 시인의 발언 취지를 잘 새겨 들을 필요가 있다. 시인이 보기에 문명이야말로 인간과 자연과 세계를 향해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두르는 원흉이다. 그리고 그에 맞서는 시인의 방식이란 어디까지나 소극적 저항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산책과 걷기, 휴대전화 전원 끄기, 식성껏 라면 끓이기, 기다리기 등이 그가 동원하는 세부 전술들이다.

가령 그는 여행이 아닌 관광으로 전락한 봄날의 꽃구경을 사절하고, 도시의 뒷골목을 게으르게 산책하기를 즐기며, 녹차가 우러나기까지의 기다림을 소중히 여긴다. 특히 “내 일상은 전력의 하수인이었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된 전원 끄기(언플러그) 전술이야말로 그가 즐겨 구사하는 방법이다. 전원을 끔으로써 그는 일상에 빼앗겼던 자신을 되찾고 세계와 본질적으로 만난다.

“나는 전원을 끄는 순간, 세상과 단절된다. 서울 한복판이 망명지로 변한다. 지금, 여기에서 나는 자발적 망명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찬찬히 안팎을 둘러본다. 점심 시간이나 출퇴근길, 다 합해야 한 시간이 넘지 않지만, 나는 휴대 전화를 ‘무시’하며, 지금, 여기가 커지고 길어지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다.”(최재봉 기자)

06. 12. 15.

P.S. 지금은 말쑥한 화술의 라디오방송 진행자로도 활약하고 있는 시인은 나름대로 독특한 이력을 가졌다. 문청시절 손꼽히는 '기인'으로 지기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던 시인의 이름을 내가 가장 자주 본 건 '시사저널'의 기사들 속에서였다(그는 '기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강단에서 시창작을 가르치는 '방송인'이다(인터넷 라디오문학 '문장의 소리' 진행을 맡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시인과의 첫만남은 (당연한 말이지만) 첫번째 시집을 통해서였는데, 이후 문학동네에서 두 차례 재간행된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민음사, 1988)이 그의 첫시집이다. 민음사에서 출간되던 시인총서들을 얼추 사모으던 내가 '시집다운' 제목의 시집을 비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기억에  두번째 시집이 <산책시편>(민음사, 1993)이다('구두'나 '산책' 같은 시어들이 시인의 걸어다닌 이력을 은근히 표나게 한다). 기억에 나의 관심을 끌었던 건 '부사성의 시학'이었는데, 나는 나대로의 흉내도 좀 내본 듯하다.

좀 터울 갖고 펴낸 <마음의 오지>(문학동네, 1999)가 세번째 시집인가(알라딘에는 동명이인의 시집들도 '1959년생 이문재'의 시집으로 잘못 등록돼 있다) . 하지만 이맘때는 시인으로서보다 기자나 문학잡지의 인터뷰어로 기억에 떠올리게 된다(기자시절에는 뛰어다녔을까?). '기억력' 탓만은 아닌 게 <내가 만난 시와 시인>(문학동네, 2003) 같은 쏠쏠한 탐방기들을 그가 썼기 때문이다(그런 유형의 탐방기로 내게 '원조'격은 김현의 <시인을 찾아서>이다). 시인이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한 건 지난 2002년이다.

지구의 가을 / 이문재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두려워 헤어라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 크게 뜨면 뜰수록
이 눈부신 음식들
육신을 지탱하는 독으로 보입니다

하루 세 번 식탁을 마주 할 때마다
내 몸 속에 들어와 고이는
인간의 성분을 헤아려보는데
어머니 지구가 굳이 우리 인간만을
편애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들어와
툭툭 끊기고 있습니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린다 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책으로만 보자면 시인의 이력은 비교적 단촐하다. 그건 종이를 허투루 낭비하지 않겠다는 의지와도 연관된 것인지 모르겠다. '자연친화적인' 외모에서도 드러나지만, 도시/문명과는 반친화적인(도시에서 그는 거주하는 게 아니라 다만 '산책자'로서만 행세하다) 그가 이번 산문집에서 표나게 내세우고 있는 것도 시에서와 마찬가지로 "반인간적인 문명의 급소를 발견하고, 그 급소를 건드리고 싶었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집과 산문집을 굳이 따로 읽지 않아도 되겠다. 그러니 산문집을 그의 시로 들어가는 가장 친숙한 '골목길' 정도로 간주해도 무방하겠다. 가끔은 젖은 구두를 벗어 해에게 보여주며 잠시 쉬어가는 골목길, 곁에 가만히...

소쩍새 우는 계절이다. 소쩍새는 울 때, 소와 쩍 사이를 길게 늘여놓는다. 소와 쩍 사이, 그 긴 침묵이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소나 쩍보다 그 사이가 더 아팠다. 잠이 다 달아났다. 두세 음절로 끊어지는 자연의 소리나 기계음은 자주 의성어로 바뀐다. 뻐꾸기 소리나 초침 째깍거리는 소리는 매번 다르게 들린다. 뻐꾹뻐꾹이 바꿔바꿔로, 째깍째깍이 아퍼아퍼로 들릴 때가 있다. 소쩍이 훌쩍으로 들린다면, 그대는 슬픈 것이다. 그럴 땐 가만히 있어야 한다. 슬픔이 잘 마를 때까지 그 곁에 가만히 있어야 한다.(이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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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12-15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근 보관함으로 들어가야겠네요.양파나 무 보관함은 꽉차있어서..(조간 썰렁 개그인가? (^ㅜ^) ..이문재 시인 좋아해요.뭐랄까 근기가 있다고 해야하나.....

로쟈 2006-12-15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기'란 말이 아주 적절하네요. 저보다도 드팀전님이 만난 시인 이야기의 보따리가 더 클 거 같습니다.^^

2006-12-15 1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2-15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기억의 오타는 아니고, 불수의적인 손가락의 오타입니다.^^

파란여우 2006-12-15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관함 뚜껑이 닫히지 않지만 그래도 꽉꽉 눌러서!^^

로쟈 2006-12-15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건 좀 얇은 편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