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을 틈타 몇 자 적는다. 몇 권에 대하여. 흔히 전체주의 사회라고 지칭되는, 그래서 모든 인민이 철저한 감시하에 놓여 있었다고 간주되는 스탈린 시대 소련사회에서도 '인민들'은 (직접적/공식적인 방식은 아니었더라도) 이런저런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다 표현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령, <1984년>(문예출판사/민음사)이나 <멋진 신세계>(문예출판사)에서와 같은 '거의 완벽한' 통제사회는 아마도 '이론'이나 '소설' 속에서만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이들 반유토피아 소설의 원조가 되는 자먀찐의 <우리들>(열린책들)이 절판된 것은 유감스럽다). 갑자기 이런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긴급한 프로젝트에 발목이 잡혀서 학교에 나와 있으면서도 손가락은 이런 식으로 '탈주'하며 자신의 '향락'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변호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엔 우리가 말릴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 것인지!

지난주에는 고맙게도 나에게 부담을 주는 책들이 한권도 나오지 않았다. 부담을 주는 책들이란 (1)급하게 읽어야 하는 책, (2)그런데, 읽기가 버거운 책(영어식 표현이 'great books'라고), (3)게다가 값비싼 책이다. 부담감의 난이도는 그런식으로 증가하는바,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에는 고난도의 책이 없었다는 것(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너무 없다 싶어서 네댓 종의 북리뷰들을 읽고 나서도 이래저래 검색을 하다가 찾은 것이  엘스베트 볼프하임의 가벼운 평전 <마야코프스키와 에이젠슈테인>(아카넷)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독일 사람이고 슬라브문학을 전공한 문학애호가이다(약력에는 강단에 몸담았다는 기록이 없다). 20세기 러시아문학에 대한 책을 여러 권 썼다고 소개돼 있는데, 약간의 뒷조사를 해보니까, <안톤 체홉>(1996), <불가코프>(1996) 등의 저서를 갖고 있고 이번에 번역돼 나온 건 2000년 신작이다. 203쪽 분량이니까 원서로는 150-160쪽 정도의 분량일 것이고 나로선 특별히 기대할 만한 내용이 없어 보인다. 이미 마야코프스키의 전기와 관련해서는 <마야코프스키>(까치글방, 2001재판)이 나와 있고, 절판됐지만 후고 후퍼트의 <나의 혁명, 나의 혁명>(역사비평사, 1993)도 207쪽 분량이었다. 볼프하임의 책은 그 절반 정도에도 못 미친다. 대신에 에이젠슈테인과 같이 묶었다는 게 특장이다. 에이젠슈테인이 영화론 번역서들이 이전에 많이 출간됐었지만(1990년 전후였다), 기억에도 가물가물해져 가는데, 신간은 그에 관한 기억을 다시 되살려줄지도 모른다.

러시아에서도 몇 년 전부터 에이젠슈테인 전집이 다시 편집돼 나오는바, 작년에 나는 두툼한 책 네 권을 구입했었다. 그의 회고록 2권은 별권이고. 영화사나 혁명영화에 관심있는 이들에게는 필독서가 되겠지만, 그들을 위한 책이 과연 쉽게 (번역돼)나올 수 있을는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회고록은 889쪽 짜리로 영역돼 있다. 영화론은 저명한 소련영화사가 제이 레이다가 엮은 책 2권이 있고, 최근엔 리처드 테일러가 엮은 선집도 나왔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의 연구서 <에이젠슈테인의 영화>(하버드대출판부, 1994)가 영어권의 가장 유용한, 에이젠슈테인 가이드북이다(그만한 연구서는 러시아에서도 나온바 없지 않을까 싶다. 모스크바의 대형서점들에 처음 갔을 때 놀란 것 중의 하나는 어쩌면 그렇게도 '영화학' 책들이 없을까, 라는 것이었다. 나는 '영화박물관'에서 에이젠테인 영화의 카메라나 소품 등을 구경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손은 안으로 굽는다고, 러시아쪽 책부터 소개하는 건 나로선 불가피하다. 두번째 책은 그걸 중탕시키기 위한 꼽은바 로알드 달의 소설집 <맛>(강). 동아일보 리뷰에 굉장히 크게 소개가 되었길래 내겐 생소한 이름이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까 <마틸다>(시공사)의 저자였다. <마틸다>는 내가 드물게 읽어본 어린이 책('주니어부'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인데, "천재이지만 어리석은 부모와 학교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마틸다의 학교생활과 어리석은 어른에 대한 통쾌한 복수를 유쾌하게" 그린 작품. 이 요약에 빠져 있는 건 마틸다가 '천재적인 독서광'이라는 사실. 당연히 내가 좋아할 만한 캐릭터인데, 사실 그런 이유만으로 그 책을 읽은 건 아니고 생업을 위해서 학원강사로 뛸 때 초등학생들에게 읽힐 만한 책을 찾다가 고른 게 <마틸다>였다. 내가 두어 개의 에피소드들을 복사해서 나누어주고 줄거리를 말해봐라, 느낀 점을 써라 등등의 주문을 학생들에게 했다. 비록 기대와는 다르게 '나도 마틸다처럼 독서광이 되고 싶어요'란 반응은 얻어내지 못했지만, 나는 어쨌든 (어른을 괴롭히는 일에 있어서) 마틸다 못지 않을 아이들과의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저자의 이름도 잊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로알드 달이었던 것.

<마틸다>를 떠올려보니까 입심 하나로 유명 여배우와 결혼했다는 작가의 '영웅담'도 허황돼 보이진 않는다. 그가 "현대 동화에서 '가장 대담하고, 신나고, 뻔뻔스럽고, 재미있는" 어린이책을 만든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으며, 구미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손꼽힌다."는 것도 믿어줄 만하다(국내에도 이미 '로알드 달 베스트'가 3권 짜리로 나와 있다). 물론 이번에 나온 '선집'은 어른용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역자인 정영목씨 왈 "재미없다는 쪽에 당신이 내기를 걸면 아마 남아날 손가락이 없을 것"이라고 하고, 소설가 성석제가 거들기를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소설의 서열을 매기라 한다면 나는 로알드 달의 소설을 다섯 손가락 안에 놓겠다." 이 정도면 거의 칼만 안든 수준 아닌가?


 

 

 

사실 달(Dahl)이란 이름에서 내가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은 로알드가 아니라 로버트이며, 로버트 달은 저명한 정치학자이다. 출간순서를 역순으로 꼽으면 <미국헌법과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04),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문학과지성사, 1999), <민주주의>(동명사, 1999) 등이 그의 책이다. 제목에서부터 '민주주의'론의 권위자란 게 팍팍 드러난다. 한때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란 테마로 책을 좀 읽어보려고 자료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로버트 달 정도 읽어주면 절반은 카바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그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지만(요즘은 다시 전체주의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어쨌든 같은 성씨를 쓰는 걸로 봐서 로알드와 로버트가 인척 관계인지도 모르겠다. 그것까지 뒷조사할 여력은 없지만(알라딘에는 세계 미스테리 어쩌구 하는 책들도 로버트 달의 책으로 뜨는데, 로알드와 로버트를 혼동한 착오이다).

 

 

 

 

<정치인을 위한 변명>(개마고원)은 지나가는 김에 꼽아본 책이다. 아직 정치의 계절도 아닌데, 벌써부터 이런 제목의 책이 나오는 게 좀 이상하지만, 현대의 '상시적인' 정치체제라는 걸 암시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책은 강준만과 떼놓을 수 없는 출판사에서 나왔으므로 '중도 좌파'(?) 정도의 입지점을 갖는지 모르겠고.  저자인 헤르만 셰어의 말을 다시 옮겨둔다. "민주주의는 선택하는 것이고, 선택을 위해서는 구분이 필요하다. 정치인, '정치계층', '정치계급'에 대한 일반화된 폄하와 개별 정치인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가 구분되지 않는다면, 더욱 정열적이고 능력 있는 정치인에 대한 사회의 요구는 공허한 외침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언젠가는 참여하는 사람이 전혀 없는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 그 민주주의 공부를 위해서도 나중에 한번 읽어봐야겠다.

 

 

 

 

세번째 책은 <맛>의 역자인 정영목씨와 공역서 <세계를 뒤흔든 반항아 말론 브란도>(푸른숲, 2003)까지 낸바 있는 한겨레의 문화부 고명섭 기자의 <지식의 발견>(그린비)이다. 소개에 따르면, "출판 담당 기자를 지냈던 저자가 예민하고 꼼꼼한 시선으로, 한국의 대표적 지식인들이 쓴 19권의 책에 대한 서평들을 모아 펴낸 책이다. 저자가 언급하는 책들은 모두 우리 학자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현실을 진단하고 바꿔보려 한 노력의 산물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학자들이 쓴 책 19권에 대한 서평집이라는 것. 아직 실물을 보지 않아서, 그리고 목차에 대한 정보가 뜨지 않아서 19권의 목록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나름대로 한가닥하는 식견과 의식을 갖춘 저자이기에 읽어봄 직하겠다(내게 고기자는 '벤야민'의 표기를 '베냐민'으로 고집하는 기자로 각인돼 있는데, 시집을 낸 경력도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 생각건대, 그러한 고집은 기자의 것이 아니라 시인의 것이지 않을까?).

요즘은 이름이 잘 눈에 띄지 않아 퇴직하거나 휴직한 게 아닐까 생각되는 이로 역시 한겨레의 이상수 기자가 있다. 기자생활과 병행하여 그는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전공했었는데, 그 부산물이 <오랑캐로 사는 즐거움>(길, 2001)이었고, 내가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은 책이다(이 책의 일부는 고등학생들 논술 수업에 활용하기도 했다). 해서, 고기자의 <지식의 발견>은 내게 이기자의 <오랑캐의 즐거움>과 나란히 놓인다. 억지스럽지만, 둘을 섞어서 <오랑캐의 발견>이나 <지식의 즐거움>이란 책이 나오지 말란 법도 없으므로 그냥 그렇게 놓도록 하겠다. 하긴 이런 조합도 가능하군. '지식(인)=오랑캐' '발견=즐거움'.

 

 

 

 

네번째 책은 스페인의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역사비평사). 서평마다 미국의 잡지 <애틀랜틱 먼스리>의 헌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18세기를 대변하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19세기를 대변한다면,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은 20세기를 대변할 것이다." 물론 대중에 대한 혐오와 독설로 가득 차 있는 책 자체는 세기의 책에 값하진 못하지만, 문제의식 자체는 20세기를 관통하는 것이기에 <대중의 반역>이 갖는 대표성을 얼마간 인정 못할 것도 없겠다. 나는 이전에 한마음사에서 나온 번역본을 갖고 있는데, 이번에 보다 좋은 번역본이 나왔는지도 모르겠고. 하지만, 책이 역사비평사에서 나왔다는 건 다소간 의외인데, 우나무노와 함께 20세기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러시아에도 가세트의 책들은 문고본으로까지 나와 있다) 철학자이긴 하지만 일반적으론 철저한 엘리트주의자로 평가되는 가세트이기에(이런 점을 표나게 강조한 이가 문학비평가 이동하였다), 내가 알기로 '민중의 역사'라는 역사관을 내세우는 역사비평사와는 뭔가 안 맞지 않은가란 생각 때문.

이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지만, 한겨레와 동아일보의 서평은 각기 다른 입지점에서 씌어졌다. 먼저, 한겨례: "당시 가세트가 목격한 것이 주로 파시즘의 군중 대열에 선 대중의 신념에 찬 얼굴이며 '유럽의 몰락'과 동시에 등장한 소비에트 정권과 미국의 대량산업 사회의 군중이었다는 점을 고려하고, 또 지금은 자연현상이 된 대중사회가 서투른 '원시성'을 지닌 채 막 등장하던 시대에 성찰한 대중사회 초입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그의 분석은 유익하다. 그래서 '평균'과 '편의'의 안위에 길든 현대인이 바로 가세트의 대중은 아닌지 다시 성찰하게 하는 힘을 지닌다." 그리고 동아일보: "그렇다면 21세기 한국에서 이 책의 의미는 무엇인가. 다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따돌림당하는 '왕따 현상'과, 평범함이 비범함보다 우선되는 반지성주의, 그리고 대중의 '직접 행동'을 강조하는 참여민주주의 시대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겨레는 현대인과 대중간의 간격을 도입하면서, '우리 가세트의 대중은 되지 말자!'라는 자기반성을 유도한다는 데에서 책의 현재적 의의를 찾고 있고, 동아일보는 참여민주주의라고 에둘러서 표현한 현 참여정부('포퓰리즘 정권')에 대한 비판의 근거를 같은 책에서 발견한다. 이런 제각각의 읽기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독자의 반역'을 허락한다는 점에서 <대중의 반역>은 '고전'에 근접한다.  

 

 

 

 

네번째 책은 그러한 가세트의 대중들을 '당나귀들'로 호명하는 배수아의 장편소설 <당나귀들>(이룸)이다. 1995년에 첫 소설집을 냈으니까 올해는 작가가 데뷔한 지 만 10년이 되는 해이고, 그간에 열댓권 이상의 책을 냈으니까 제법 부지런한 작가군에 속한다. 한국 소설 읽기에 둔감은 내가 제대로 읽은 작품은 한 권도 없지만, 이런저런 풍문을 통해서 그녀의 향방에 대해서는 얼마간 가늠하고 있다. 병무청을 그만두고 독일에 둥지를 튼 것까지도(고고학을 배우러 떠난 시인 허수경이 아마 그녀의 말벗이 돼 주는지).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그냥 좀 특이한 여자애' 소설쓰기에서 점차 자본주의, 혹은 자본주의적 대중 비판으로 넘어가는 지점이다. 재작년에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던 걸로 기억되는(그리하여 소위 문단의 '주류'로 인정받게 되는) 작품 <일요일 스키야기 식당>(문학과지성사, 2003)이 그런 방향으로의 전환점이 아닌가 싶고(아직 '독자'가 아닌 나로선 확증할 수 없지만).

물론 그러는 과정에서 소설이란 '미학적 형식'은 그녀에게 이전만큼의 제어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듯하다. "계몽의 시대가 도래했어야 할 바로 그 적절한 순간에 굶주림의 시대에서 천박의 시대로 바로 월반해 버린 윌반해 버린 우리의 역사"(25쪽) 같은 대목에 대해 한겨레의 최재봉 기자는 '울림 깊은 문장'이라고 평하지만 내가 보기엔 소설의 문장으로서 천박하다. 그런 문장들로 재단되고 구획될 만큼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나는 작가가 세상에 대한 혐오감(혹은 '복수심'이라도 무방하다)을 그런 서툰 방식(최재봉 기자는 소설의 3요소가 빠진 '독후감 소설'이라고 평했다)이 아니라 보다 본때나는 방식으로 형상화해주기를 바란다. 혐오도 경우에 따라선 '위대한 혐오'에 이를 수 있지 않겠는가?

배수아의 신작과 나란히 나온 소설집은 김경욱의 <장국영이 죽었다고?>(문학과지성사)이다. 배수아와 마찬가지로 내가 별로 읽은바 없는 젊은 작가이지만, 나는 그가 영화를 너무 많이 베낀다는 불만은 한켠에 갖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 불만은 교정되지 않게 돼버렸다. 짐작에 소설은 배수아의 그것보다 재미있을 것이며 더 많이 팔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쓴 소설'들의 최상급은 김영하의 소설 정도이다(돈벌게 해주는 '포스트잇'을 쓰는 게 작가이다. 역사도 팔고, 사랑도 팔고, 때론 운명도 팔면서). 해서, 나로선 매끈한 김경욱보다는 천박한 배수아를 지지하겠다. 그가 아닌 그녀에게 베팅하겠다. 신용불량자가 되어 피시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김경욱의 인물은 "그 누구와도 관계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겨우 존재할 수 있다"(9쪽)고 말하지만, 배수아는 어차피 장국영도 없는 세상에서 당나귀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를 증언한다. 내가 편드는 건 소설의 테크닉이 아니라 작가의식이다.

05. 06. 04.

P.S. 그밖에 마크 롤랜즈의 (미디어2.0)도 눈길을 줄 만한 책이다. "소크라테스에서 아놀드 슈워제네거까지 SF 영화로 본 철학의 모든 것"이란 부제 때문에 이미 좀 팔려나가고 있는 책인데, 원제 "The Philosopher at the End of the Universe"(2003)대로 했다면, 다소 무겁게 여겨졌을 법한 책이다. 이른바 SF영화라는 당의정 속에 철학적 주제를 담아놓은 것이 될 텐데, 그런 것에 얼마간 식상한 나로선 별로 새로운 게 없지 않을까 싶었는데, 저자는 <동물의 역습>(달팽이, 2004)을 전작으로 갖고 있는 철학자이다. 해서 신간보다 오히려 눈길이 가는 것은 그의 구간이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그 책은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좌파출판사로 유명한 영국의 Verso Books의 Practical Ethics Series(실천윤리학 시리즈) 중 한 권"이고,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인간사랑, 1999)에 비견될 만한 책이다: "이 책은 핵심적 주장은 "동물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이 주제에 관심있는 분이라면 Peter Singer가 1973년 발표한 <동물해방>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Mark Rowlands가 2002년 발표한 이 책은 더욱 세련되고, 더욱 설득적이며, 더욱 읽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아마도 <동물해방>에 못지 않은 새로운 걸작이라 불러도 좋을 듯합니다."

 

 

 

 

철학자 데리다가 말년에 숙고한 주제 또한 이 '동물(성)'인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조만간 가볍고 묵직한 책들이 여러 권 더 선보일 것이다. 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주제들로 나는 (죽음 대신에) '노인/노년'과 (타자 대신에) '동물'을 꼽고 싶다. 물론 이때의 동물은 우리 안의 '동물'을 포함하는 것이다. 동물(짐승)과 신 사이의 존재로 인간을 규정했던, 그리하여 "동물에서 신으로!"란 구호를 내건 형이상학이 상승의 철학이라면, 하강의 철학으로서 탈형이상학의 관심은 "신에서 동물로!" 향한다. 아마 이 대목에서 형이상학에 고질적으로 고정된 인간의 지능/두뇌는 고전을 면치 못할지도 모르겠다. 해서, 인간을 대신하여 철학(궁리질)을 담당할 동물들이 나서야 하는지도. 누구? 들뢰즈의 진드기? 데리다의 고양이? 카프카의 물벼룩?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를 대신할 호모 사피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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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6-04 18:41   좋아요 0 | URL
배수아의 신간소식은..로쟈님을 통해 처음 듣네요.*^^ 감사..
정치인을 위한 변명,과 지식의 발견,대중의 반역..등도 관심이 갑니다.여러책 소식들,늘 감사하게 잘 보고 있어요.*^^ 추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물론.

로쟈 2005-06-04 18:48   좋아요 0 | URL
감사까지야... 그런데, 이번엔 파란여우님보다도 먼저 다녀가셨군요.^^

히나 2005-06-05 02:36   좋아요 0 | URL
배수아의 팬으로서 조금 더 보충하자면 전환점은 그 이전에 쓴 '동물원 킨트'와 '이바나'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첫사랑'으로 절정에 이른 뒤 좀 삐딱하게 변해버렸죠 아마 이 작가 특유의 반골기질 때문인 거 같습니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자신의 전환을 문학적으로 검증받은 계기가 되었다고 할까요?

어제 주문한 '당나귀들'을 받고 앞 페이지 몇 장이지만 읽고나서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갈 때 까지 가려는 거 같습니다. 불안한 길이지만 팬으로서 지켜보는 수 밖에 없겠죠.

배수아는 자신 안에 '길들이지 않은 짐승'이 산다고 토로한 적이 있는데 날짐승이 길이 들고나니 우리(밖)를 박차고 나가는 위험한 기운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사람(안)을 향한 흉폭함만 남은 거 같아요. 전 아직도 그녀의 최고작은 '심야통신'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기대를 버리고 있지 않습니다.

배수아가 김경욱보다 영악한 것은 문화적인 아이콘을 빌려오더라도 상당히 쿨한 걸 가져온다는 겁니다. 일례로 상당히 오래 전에 2pac을 말한 적이 있죠. 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장국영이 죽었다고? 김경욱의 질문은 시효가 지난 촌스러운 뒷북이라고 생각됩니다. 요즘은 아무도 너바나를 듣지 않거든요.

에고, 너무 길어져서 민망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냥 생각이 나서요 ㅡ_ㅡ;;;

로쟈 2005-06-05 14:22   좋아요 0 | URL
보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palefire 2005-06-09 13:47   좋아요 0 | URL
에이젠슈테인 전집이 러시아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나왔다니 반갑네요. 국내에 번역된 에이젠슈테인 관련 문헌들은 모두 영어 아니면 일어의 중역들(특히 일어중역)이었죠. 에이젠슈테인이나 지가 베르토프와 같은 감독들, 그리고 말레비치나 메이어홀드와 같은 사람들의 문헌도(사실 국내에 아직 나오지도 않은) 러시아어 원전을 통한 번역본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모 소식통을 통해 지가 베르토프의 [KINO Eye:The Writings of Dziga Vertov]가 번역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책([KINO-Eye])은 Annette Michelson이라는 탁월한 영화학자가 감수하긴 했지만 영역본을 중역하기 때문에 신뢰하고 있지 않습니다.(앞의 짧은 선언문도 걱정이지만 뒤의 그 수많은 일기는 어쩌려고;;) 이런 사례로 알고 있는 가장 최근 경우는 벨라 발라즈의 [영화의 이론](주어캄프에서 독어원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본 중역)이 있겠군요. 참, 그리고 보드웰의 [에이젠슈테인의 영화]는 보드웰 특유의 꼼꼼한 쇼트분석은 마음에 들지만 그 이상의 의미는 찾기 힘들지도 모르겠네요. Jacques Aumont의 [Montage Eisenstein](불어원본/영역본도 있음)이 에이젠슈테인의 이론적 변천과 영화적 실천을 조감하는데 더욱 충실해 보입니다.

palefire 2005-06-09 13:49   좋아요 0 | URL
그리고, [SF철학]은 '정말로 눈길만 주고 말' 정도로 허접스러운 책입니다. '철학으로 영화보기'란 말이 오도되는 가장 전형적이고도 천박한 사례라는 혹평을 던질 수 있어요.

로쟈 2005-06-09 14:21   좋아요 0 | URL
'창백한 불꽃'(에서 따오신 게 맞다면)님의 전공이 확실히 드러나는 댓글이네요.^^ 지가 베르토프에 관한 문헌은 저로서도 러시아에서 구경한 적이 없습니다. 번듯한 책이 나온 적이 있을지 좀 의심스런 경우입니다. 언젠가 참조한 적이 있는 영어 연구서가 그래도 제가 본 가장 훌륭한 책이었구요. 보드웰의 책은 제가 갖고 있는지 어쩐지도 지금 잘 알지 못합니다(책들이 숨어 있길 좋아해서). 그리고, 오몽의 책에 대한 소개는 다른 분에게서도 들었고 현재 주문중입니다. 보충하자면, 에이젠슈테인 전집은 이전에 한번 나왔었고, 요즘 나오고 있는 것은 '영화박물관'에서 새롭게 편집한 것으로 현재 네 권이 나와 있습니다(그새 더 나오지 않았다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1
토니 마이어스 지음, 박정수 옮김 / 앨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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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이 우리의 인문학 동네를 떠돌고 있다. “마돈나가 싱글 앨범을 발표하는 것보다 더 정기적으로 책을 발표”하면서 “동시대의 정치적 무관심에서부터 이웃집 닭한테 잡아먹힐 걱정을 하는 남자에 관한 조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지절대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그 유령의 이름이다. 그 유령은 이미 지난 2003년 가을에 우리 곁을 다녀가기도 했는바 어느새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 ‘지젝거리는’ 이들이 그들이다. 최근에 급기야는 ‘지젝거리는’ 이들을 위한 교본까지 등장했으니,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가 그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 슬로베니아 출신의 '괴물' 철학자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을 통해서 영어권 학계/이론계에 등장한 지 불과 15년 만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 명단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등재시켰고, 저자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그의 파괴력/영향력은 갈수록 확고해질 가능성이 높다. 이미 <삐딱하기 보기>(시각과 언어, 1995) 이후에 열댓 권이 넘는 지젝의 책들이 우리말로도 번역/소개되었으니 우리 또한 그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 책들은 한편으론 “오늘날 활동하는 가장 탁월한 사상가” 지젝의 지적 파워를 확인시켜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의 말들을 (도대체 알아먹지 못할) 지저귀는 언어로 옮겨놓음으로써 가뜩이나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철학자”로 오해받는 지젝에 대한 반발과 미움을 더욱 부채질하기도 했다. 

 

이번에 나온 마이어스의 책은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로서 그러한 오해와 미움을 단번에 불식시켜줄 수 있는 책이다. 저자가 한 입 크기로 적당히 썰어놓은 지젝의 아이디어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다 보면 “아하, 그렇구나!”라는 감탄과 함께 결국엔 저자의 이러한 결론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지젝이 라캉으로 ‘되돌아가고’, 라캉이 프로이트로 ‘되돌아간’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지젝에게 ‘되돌아갈’ 것이다.”(231쪽) 

 

이러한 여정의 안내자로서 저자는, 이미 알려진 바대로 지젝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 즉 헤겔, 마르크스, 라캉에 대한 예비적인 설명을 앞세운 이후에 다섯 가지의 핵심 이슈로 그의 사상을 갈무리한다. (1)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2)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3)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4)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5)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이 주제들을 다루는 각 장의 말미에 친절하게 요약돼 있는 내용을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테지만 지젝에게서 과연 무엇이 새로운가는 잠시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가령, 지젝은 대부분의 현대철학자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근대적 주체로서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때 그가 말하는 주체(subject)는 ‘자기로의 철회’라는 극단적 상실의 결과로 이르게 되는, 부정성의 텅 빈 지점이고 텅 빈 공간이다. 그리고 이 텅 빈 자리는 주체화(subjectivization)의 과정을 통해서 채워지는바, 주체화란 우리들 자신을 언어 등과 같은 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이다. 

 

여기서 전제되는 것은 ‘주체’와 ‘주체화’의 차이이며, 이 차이는 하이데거에서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에 견주어 ‘주체론적 차이’라 이름붙일 만한 것이다(지젝의 철학박사학위 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순수한 부정성으로서의 주체는 아무런 내용물도 갖지 않는 텅 빈 장소이자 공백이지만, 이 공백은 언제나 주체화가 실패하는 지점을 표시한다. 이러한 주체로서의 코기토를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지젝은 근대(모던) 주체철학의 계보를 계승한다.

 

하지만, 그의 주체철학은 탈근대(포스트모던)의 탈-주체철학 이후에, 그것을 비판/극복한 자리에서야 비로소 도래 가능한 철학이다. 그것이 포스트모던 이후, 즉 포스트-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지젝이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자리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의를 우리는 그가 다루는 다른 주제들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아직 현재진행형인 지젝의 사상을 안내하는 여정의 끝에서 저자는 지젝의 이론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소급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고,“한마디로, 지젝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다(미래에 ‘존재’하게 될 것이기에 그는 현재 ‘유령’이다). 그러한 예언을 다만 미래의 것으로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1989/1991년 이후의 탈냉전 시대, 그리고 2001년 9.11 이후에 '가능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지젝의 작업들은 그가 어쩌면 '우리 시대의 헤겔'일지도 모른다는 걸 암시해준다. 

 

그리고, 마이어스의 책은 이 ‘또 다른 헤겔’ 입문서로서 현재로선 더없이 유익한 길잡이이다(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제대로 ‘지젝거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의의를 책의 제목에 반영하자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보다 더 적절한 것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가 될 것이다. 비록 그가 유령이라 한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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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6-15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젝거리고 싶은데요, 지젝의 책을 읽어볼까 하는 단계입니다. 이 책으로 시작해도 될까요. 그의 삐딱하게 보기나 소비사회와 대중문화를 읽어내는 '잉여쾌락'의 맥락을 짚어보고 싶어서요. 혹 먼저 추천해주실 만한 책 있나요?

로쟈 2005-06-1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엔 이 책이 제일 쉽습니다(몇 가지 오역/오타만 확인하시고 읽어보시길). 이어서,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정도를 읽으시면 될 텐데, 슬슬 만만찮아집니다. 물론 좀 익숙해지다보면, 지젝을 읽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얼마나 유익한가는 별개로 하더라도) 아시게 될 겁니다.^^

돌바람 2005-06-15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월에는 지젝이랑 놀아야겠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고 밑줄그어대는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 저도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로쟈님!
 

하여간에 책들은 계속 쏟아지고 있다. 마치 책사태처럼. 그런 사태는 지긋이 한번 무시하게 되면 계속 속편하지만, 괜히 한번 눈길을 주게 되면 속절없이 당하게 된다. 남의 돈 세는 일 같아 남세스럽지만, 대개는 사두지 못할 책들을 또 몇 권 나열해 본다(물론 가끔 한두 권씩을 사게 되고 읽게 된다. 나도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

 

 

 

 

처음에 꼽을 책은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처녀작' <세미오티케>(동문선). 아마도 '모스크바통신'을 하릴없이 유심하게 읽은 분이라면 작년에 나온 러시아어본 <크리스테바 선집>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반가워했는지 기억할지 모르겠다(모스크바에 온 보람을 안겨주었던 그 책이 내가 작년에 꼽은 '올해의 책'이다). 그 러시아어본에는 바흐친론인 <시학의 파괴>와 함께 <세미오티케>와 <소설 텍스트>가 합본돼 있었다(이 책들은 영어본이 아직 안 나와 있다).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세미오티케>(원서 제목은 희랍어로 돼 있다)는 박사학위논문인 <시적 언어의 혁명>과 함께 당시 프랑스 지식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 불가리아 출신의 젊은 여성 '사무라이'가 얼마나 '센지' 잘 보여주는 대표작이다. 아직 영어본도 나오지 않은 까닭에 우리말 번역은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떡하니 서점에 깔려 있어서 '경악'했다.    

그 경악은 이중적인데, 한편으론 놀랍고 반갑지만, 다른 한편으론 지극히 걱정스러웠던 것. 거의 동문선 전속이라고 할 만한 역자는 이미 10여 권의 번역서를 낸바 있고, 그 중에는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과 그녀가 편집한 <미친 진실>도 포함돼 있다. 하지만, 수준은 좀 미심쩍은데, 피에르 마슈레의 <문학은 무슨 생각을 하는가>라는 생각없는 번역서를 보노라면 기본적인 자질까지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이미 사건은 터져 버린 것을. 게다가 크레스테바 전공자란 분들의 번역도 대개 기대 이하이기 때문에 이 경우만 유난스러울 건 없으리라는 계산까지 하게 되면, 결론은 '울며 겨자먹기'이다(이 책에 대한 자세한 읽기는 이번 여름에 시도해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감스러운 건, 12편의 논문 가운데, 4편이 빠진 채 8편만 번역돼 나왔다는 사실. 역자가 후기에 밝혀놓은 사실인데,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놓지 않고 있다. 분량 때문에?(도스의 <폴 리쾨르>도 890쪽짜리로 번역돼 나온 걸로 봐서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런데 빠진 논문들을 보니까 대개 기호학을 주제로 한 논문들이다(데리다의 <입장들>에 실린 대담 "기호학과 그라마톨로지"에서도 암시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60년대 후반 크리스테바는 프랑스에서 기호학의 선두주자였다). 해서, 우리말 <세미오티케>는 '기호분석론'이란 부제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책이 돼 버렸다. 거듭 유감스럽다. 번역의 질이 그 유감을 상쇄해줄 수 있을는지?

 

 

 

 

두번째 책은 작년에 방한하기도 했던 페터 슬로토다이크의 대표작 <냉소적 이성비판1>(에코리브르)이다(이번에 1권이 나왔는데, 2권도 곧 나오는 건지?). 작년에 나온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한길사)를 도서관에서 대출해 놓은지 제법 오래 됐는데(읽을 시간을 못내고 있다), 읽을 거리가 그새 또 추가됐다. 책은 이미 '냉소주의'를 우리시대,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로 지목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이 틈틈이 참조하고 있는 책으로 낯설지 않은데(<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에서도 이 점은 언급되고 있다) 소개에 따르면, "우리 시대에 냉소주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 그것이 철학적 전통인 계몽주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탐색하는 책이다. 책은 냉소주의가 우리의 시대정신이라는 점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고, 냉소주의와 계몽주의의 관계를 알아본다."

이 신간에 대해서는 동아일보의 리뷰가 요긴한데, 잠깐 옮겨오면, "<냉소적 이성비판>은 철학계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고 부를 만하다. 매우 선정적 방식으로 계몽주의 이후 현대철학의 총체적 파국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페터 슬로터다이크를 일약 독일 철학계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한 이 책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지 200주년을 맞은 1981년부터 집필됐다. 이 때문에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 등 3대 이성비판의 뒤를 잇는 '4대 이성비판'이라는 반응을 낳았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는 칸트보다는 니체의 후계자다. 이성과 비판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계몽의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 자기과시적인 '길거리 철학'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3가지 명제로 요약된다. '우리 시대는 냉소적이 됐다. 우리는 계몽됐지만 무감각해졌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를 말해야 한다.'" 물론 그러한 주장을 어디 써먹기 전에 우리는 이 책을 좀 읽어봐야 한다.

 

 

 

 

세번째 책은 미국의 영화학자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들뢰즈 영화론 연구서 <들뢰즈의 시간기계>(그린비)이다. 이 책의 의의는 물론 들뢰즈의 <시네마>를 친절하게 소개/해설해 준다는 데 있을 터이고, 그런 종류로는 좀 얄팍하지만 <들뢰즈: 철학과 영화>(열화당, 2004)란 책도 이미 소개돼 있다. 그리고 논문집 <뇌는 스크린이다: 들뢰즈와 영화철학>(이소출판사, 2003)도 이 주제로 참조할 만한 책이다. 한데, 신간은 저자가 이미 <현대영화이론의 궤적>(원제는 '정치적 모더니즘의 위기')란 책으로 널리 알려진 믿을 만한 영화학자이고, 들뢰즈의 영화론에 대해서만 상세하게 다루고 있기에 '참고서'로서 유용할 듯싶다. 문제는 정작 들뢰즈의 <시네마>가 아직 완간되지 않은 것. 애꿎게도 1권 운동-이미지만이 두 차례 번역되었을 뿐이다. 무얼 갖다놓아야 해설을 할 게 아닌가? 그러한 순서개념이 좀 부족한 것은 우리 학계/출판계의 '관행'이므로 크게 흠잡을 건 없지만, 조만간 바로잡히기를 바란다.

 

 

 

 

해설서로서 로도윅의 책에 견줄 만한 것이 철학분야의 신간, 발리바르의 <스피노자와 정치>(이제이북스)이다. 이미 마슈레의 <헤겔 또는 스피노자>(이제이북스 2004)를 소개한 역자의 '신작'인데, 발리바르와 마슈레는 모두 알튀세르의 제자들이고 조만간 소개될 듯한 자크 랑시에르까지 포함해서 알튀세르 사단의 3총사를 이룬다. 신간은 이들의 '파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한 계기를 마련해줄 듯. 앞에서처럼, 이 경우에도 순서는 좀 뒤바뀌었다. 정작 스피노자의 주저들이 번역/소개되기 이전에 대표적인 연구서들이 먼저 책장에 꽂히게 된 것. 역자의 계획대로 제대로 된 스피노자 번역본들이 조만간 소개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소설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신간들이 여러 권 나왔다.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풀베개>(책세상), 터키의 '대표작가' 오르한 파묵의 <눈>(민음사), 그리고 한국의 '유령작가' 김연수의 작품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창비) 등이 그것이다. 모두가 손꼽을 만하기에 그냥 내버려두고, 나는 좀 삐딱한 마음으로 러시아작품을 고르도록 하겠다. 보리스 필냑(삘냐끄)의 <마호가니>(열린책들)이 그것이다. 잠시 소개문을 인용하면, "보리스 삘냐끄의 '마호가니(Krasnoe Derevo)'는 1929년 베를린에서 출간된 작품으로, 트로츠키 공산주의자의 시점에서 혁명 후 10년의 사회와 문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작품으로 인해 당국의 격렬한 비판을 받은 삘냐끄는, 작가 동맹에서 추방당하고 1937년 대숙청기에 체포된 뒤 사살되었다."

 

 

 

 

필냑은 스탈린 체제 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30년대에 나름대로 아부도 하고 분투도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하지는 못한 불운한 작가였는바, 그의 대표작 <벌거벗은 해>(1921)은 이미 소개돼 있다. 내가 더 좋아하는 작가/작품은 <마호가니>에 같이 묶인 유리 올레샤의 <질투>(이들 작품들은 모두 이전에 중앙일보사에서 나온 소련동구문학전집에 수록돼 있던 것이 단행본으로 재출간된 것이다). 올레샤는 <기병대>의 작가 이삭 바벨과 함께 오뎃사 출신의 대표적인 '동반자작가'인바, 개인적인 생각으론 새로운 이념에 헌신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그걸 무시하지도 못하는 '동반자' 문학의 핵심이 <질투>에는 잘 그려져 있다. 게다가 아주 코믹하다(하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코믹이다). 그리고 그 코믹은 '감정의 음모'라고 지칭되기도 한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인데, 작년에는 올레샤의 동화 <세 명의 배불뚝이>(기탄출판)도 출간되었다. 그의 '음모'가 얼마나 코믹한지 한번 구경들 해보시길.  

여러 분야에서 읽어볼 만한 책들이 많이 나왔지만, 이 자리에서 다 헤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끝으로 한 권만 꼽자면, 문학평론가 정과리의 새 비평집 <문학이라는 것의 욕망>(역락). 문학평론집으로서는 최근에 서영채의 <문학의 윤리>에 이어서 꼽아보게 되는 책이다.

 

 

 

 

책은 '존재의 변증법4'라는 부제를 갖고 있는데, 그건 이 책이 그의 네번째 비평집이란 뜻도 된다. <문학, 존재의 변증법>(문학과지성사, 1985)을 시작으로, <존재의 변증법2>(청하, 1986), <스밈과 짜임>(문학과지성사, 1988), <무덤 속의 마젤란>(문학과지성사, 1999) 등이 그가 이전에 낸 비평집들인데, 기억에 아마 시비평들만을 묶은 마지막 책을 제외하고 '존재의 변증법'이란 문구를 제목이나 부제로 갖고 있었던 듯하다. 실상 '존재의 변증법'이란 모호한 문구가 문학의 술어로서 얼마나 생산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굉장히 선호하는 문구라는 것만은 틀림없다. 자신의 비평행위를 그 문구에 집약하고자 하므로.  

정과리는 '문지' 4인방의 뒤를 이은 '문사' 세대의 대표적인 비평가로 활동했었지만(작년에 그만두었다고 하고, 이번 비평집도 문지가 아닌 다른 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리고 평론가 김현 사후에 그를 계승할 만한 가장 유력한 비평가로 지목됐었지만(적어도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비록 생전에 그의 일부 비평에 대해서 '관념의 체조 같다'는 평을 '스승'인 김현은 내린바 있지만) 비평가로서의 그의 궤적은 그러한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이 문학의 지형변화, 혹은 문학에 대한 그의 태도변화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싶다(그 두 가지는 맞물리는 것이지만).

태도의 변화? 가령 이번 비평집에도 수록돼 있지만, "옛날 옛적에 문학이 있었지"라는 식의 태도. 해서, 그의 비평은 문학 이후, 문학의 죽음 이후, 문학의 무덤을 앞에 둔 비평이다. 그러니 애도는 있을지언정 열정은 더이상 자리하지 않는다. 대신에 부각되는 건 <문명의 배꼽>(문학과지성사, 1998). 비평이 '디지털화'하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가를 내게 암시해준 책이고, 한 젊은 비평가의 '패배주의'를 확인하게 해준 책이다. 이후에 그는 알다시피,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 종신 심사위원에도 합류하면서 '최연소' 원로 비평가로 자리하게 된다. 그에게 어떤 영광이 더 남아 있는 것인지?

책머리에 실려 있으면서 아마도 표제를 빌려주었을 '문학이라고 하는 것의 욕망'이란 평문은 1988년에 씌어진 것이고 나는 그 글을 읽던 때를 기억한다. 대학가의 그 골목과 지금은 없어진 그 서점에서 신간으로 나온 <문학과사회>를 들춰보던 때가 그 때였지 싶다. 욕망은 그때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원로 비평가'의 욕망도 그때 거기서 들끓지 않았을까? 나는 '쿨한' 욕망을 믿지 않는다...  

05. 05.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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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5-30 14:15   좋아요 0 | URL
들뢰즈의 <시네마> 2권 '시간-이미지'가 근간 예정이라고 한다. 구색을 맞추게 돼서 다행이고 반갑다...

주니다 2005-05-30 15:45   좋아요 0 | URL
<세미오티케>는 기대한 책이었건만 난감한 지경이군요. 동문선은 언제나 이름값을 하려는지...<시네마-1>은 두 종류의 번역서가 있던데 어떤게 상태가 좋은지요? 그리고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 <동물, 괴물지, 엠블럼>이라는 책이 의욕적으로 한꺼번에 나왔던데 살펴보셨습니까? 그나저나 이번 학기도 얼마 안남았군요.

로쟈 2005-05-30 16:42   좋아요 0 | URL
예, 말씀하신 두 권도 서점에서 봤습니다(제가 몇 마디 참견할 만한 책들은 아니어서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단한 필력이다 싶은데, 곧 이주헌씨 뺨치겠더군요.^^ <시네마>는 둘다 깔끔하지는 않다고 들었는데, 제가 비교해보지는 못했습니다(둘 다 갖고 있지도 않지만). 또 <시각영화>라는 책도 번역돼 나왔는데, 저로선 아무래도 제목 번역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청각영화'니 '후각영화'라는 게 있지 않은 한...

주니다 2005-05-30 17:29   좋아요 0 | URL
오, 이주헌씨 뺨 칠 정도라면....<시네마>는 주은우와 유진상씨가 번역했죠? 유진상씨는 미술이론하는 분 같은데, 서점 가면 찾아봐야 겠습니다. <시각영화>는 원제가 Visionary Film이더군요, Visionary의 원뜻으로 보나 "'몽환trance'이라는 맥락하에서 영화들을 분석하고 있다"는 소개글로 보나 탐탁지 않은 제목이로군요. 그냥 편집부에서 쉽게 간 것 같죠? 이 책은 일전의 '재귀적인 영화' 때문에 눈이 번쩍 뜨여서 보관함에 넣어 뒀었는데, 실물을 확인해보고 구입 여부를 결정해야겠네요.(본다고 확인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하핫)

로쟈 2005-05-30 17:36   좋아요 0 | URL
그렇죠. '실물'이 중요합니다. 화장빨이나 얼짱 각도에 속지 않기 위해서라도...

palefire 2005-05-30 17:43   좋아요 0 | URL
엄격히 말하자면 [운동-이미지]는 재역이 필요하겠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과거 나온 새길판(주은우/정원)이 좀 더 낫습니다. 비록 영역판을 많이 참고했다는 단점이 있지만 영화적, 철학적 개념어의 번역이나 들뢰즈에 대한 배경지식에 있어서는 새길판(아마도 지금은 절판상태?)이 더 낫습니다. 시각과언어판은 이런 점에서 단점이 많은 번역본입니다. (개정판이 나와주면 좋을텐데) 그리고 Visionary Film=시각영화도 정말 탐탁치 않은 제목이긴 해요. 환영적 영화 또는 몽환적 영화라고 번역하는 것이 시트니의 개념이나, 그가 다루고 있는 미국 아방가르드 영화의 흐름(당장 Deren과 Anger만 생각하더라도)에도 부합합니다. 저도 번역본은 보지 못했지만, 실험영화를 전공했고 현재 실천중인 시카고 MFA 출신들이 번역자로 참여해서 어느 정도의 신뢰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역어의 개념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유보적 예측을 해 봅니다.

주니다 2005-05-30 18:36   좋아요 0 | URL
palefire님의 예상치 못했던 답변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시각 언어>에 대한 palefire님의 자세한 서평을 기대해 봅니다.(영화전공이신듯 하여...문외한들을 위하여)

2005-05-31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5-05-31 17:30   좋아요 0 | URL
주니다님/ <어휘로 풀어읽는 영상기호학>은 오래 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번역에는 역시나 전문용어와 관련하여 오류들이 많았던 걸로 기억됩니다. 일종의 '사전'이기 때문에 구비해놓는 게 요긴한 책이긴 한데(원서를 참조하실 수 있을 겁니다). 크리스테바에 대한 책을 구하신다면, 역시나 크리티컬 씽커즈 시리즈에서 나온 <크리스테바>를 권하겠습니다(저는 며칠 전에 복사했습니다). 컴팩트한 분량에 깔끔한 정리가 그 시리즈의 특장이죠. 국내서 중에서는 역시나 리처드 커니와의 대담집을 추천하겠습니다.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 제 기억엔 후기 크리스테바의 '테마들'이 소개돼 있습니다. 마이클 페인의 <읽기 이론/이론 읽기>의 한 장이 크리스테바에 할애돼 있는데, <시적 언어의 혁명>에 대한 해제입니다. 초기 크리스테바와 관련하여 참고하시길...

주니다 2005-05-31 17:55   좋아요 0 | URL
Noelle McAfee가 쓴 것이 맞죠? 일단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부터 찬찬히 읽어 보겠습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로쟈 2005-05-31 19:5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2005-06-01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번에 <신곡>의 완역본이 나왔다는 얘기를 전하면서 '실물'을 보지 못한 까닭에 긴가민가해 하며 이전 번역서를 이미지로 올렸지만, 어제 '실물'을 구경할 수 있었다. 아래의 책. 968쪽에 38,000원이다. 이전 번역본을 다시 손본 것이라 해도 '본격적인' <신곡> 완역본이라 할 만하다. 역시나 다시 나온 것이긴 해도, 두어 달 전에 나온 <몽테뉴의 인생 에세이>와 함께 올해 나온 고전 번역서로서 손꼽을 만하다.  서해문집에서 같이 나온 <신곡> 해설서와 나란히 놓고 읽으면 구색도 맞으리라.  

 

 

 

 

지난번 신간 소개글을 올린 지 며칠 안 됐지만, 이후에 나온 책 몇 권을 또 열거해 보기로 한다.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제일 먼저 꼽고 싶은 건 움베르토 에코의 기호학 연구서 <칸트와 오리너구리>(열린책들).

 

 

 

 

아직 서점가에 깔려 있지는 않지만 곧 나올 책으로 돼 있고, 이미 일간지 리뷰에서도 소개된바 있다. 기호학자 에코의 출세작이기도 한 <기호학 이론>(이 책의 불어판 번역서<부재하는 중심>의 우리말 번역서는 <기호와 현대예술>)의 '속편'으로 지난 2000년에 나온 이 책을 나는 몇 년 전에 서울문고에서 처음 보고 구입한 적이 있는데, 이 신간과 함께 이제 읽어볼 만하겠다(분량상 원서를 독파하는 건 상당한 '여유'를 필요로 한다. 원서는 본문 464쪽이고, 번역본은 616쪽). 아마도 '칸트와 누구누구'라는 책 제목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오리너구리 앞에 선 칸트' 정도의 뜻으로, 혹은 유머로 새기면 될 듯하다. 책의 부제는 '언어와 인지에 관한 에세이들'이고, 전체 6개 장에서 2장이 '칸트와 퍼스, 그리고 오리너구리'에 대한 것이다(미국 철학자 퍼스의 책들이 이제껏 소개되지 않는 것도 기이한 일이다).

오리너구리? 한때 논란이 되었던 이 동물은 오리도 아니고, 너구리도 아니다. 그런 한편으로 오리이며 너구리다. 이걸 어떻게 분류해야 하나? 이걸 분류할 수 있는 (칸트식의) 선험적 도식을 우리가 갖고 있는가? 이 난처한 사태에 칸트라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매우 '철학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코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은 독자를 일단 다른 철학서들과는 다른, 편안한 태도로 이 책에 접하도록 한다(끝까지 엉덩이를 떼지 않는 건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기호학이론>을 <장미의 이름>보다 더 재미있게 읽어본 사람이라면(드물지만 없지는 않다. 물론 우리말 <기호학이론>은 재미있기에는 너무 곤란한 번역서이다. 개역본이 나와야 될.) 이 책은 배꼽을 잡고 읽을 만하겠다.

 

 

 

 

두번째 책은 '잡설가' 박상륭의 <소설법>(현대문학). 그의 다섯번째 창작집이고, 표제작은 '소설-법'이면서 '소-설법'의 의미라고. 한국문학의 이단적인 작가이면서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린) '주류' 작가이기도 한 박상륭에 대해서 사실 나는 별반 읽은 게 없다. 그의 <죽음의 한 연구>(작가는 <죽음의 연구>라는 제목을 끝까지 고집했었다고)를 비롯해서, 여러 권의 책을 사두긴 했지만, '잡설들'을 읽을 만한 '여유'를 그간에 갖지 못했던 것.  가령, "'小說'이라는 개새끼[怪色鬼]는, 어떻게도 갈블 수 없이 雜스러운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깊어지는데, 이는, '감성'과 '이성'이, 어지럽게, 그리고 사련적邪戀的으로 혼합되어, 학(鶴,은, 言語의 상징이기도 하거니!)의 털을 뽑고, 시뇨屎尿의 가마솥에 넣어 삶는 잡탕이라는 그 생각이 (글쎄, 패관만을 한정해 말이지만) 패관께는 깊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같은 '소설론'을 읽으면서 소설에 대해 깨치는 바가 있는 이라면, '난놈'이라 할 만하지만, 나는 박상륭 마니아도 아니고 '난놈'도 아니다. 다만, 그의 잡설들이 우리의 '근대소설'을 비춰보는 '거울' 정도는 된다고 생각한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그는 "동서고금의 종교 신화 철학을 아우르는 심오하고도 방대한 사유체계와 우주적 상상력으로 전개되는 거대한 스케일, 독보적인 문체로 한국문학의 지평을 확장시켜왔다"고 하는데, 그런 경우라면 All or Nothing이다(박상륭은 한국문학보다 크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다).  

 

 

 

 

세번째 책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생애를 다룬 <평전 파솔리니 - 죽음과 삶의 몽타주>(이룸). 소개에 따르면, "영화감독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그는 뛰어난 재능의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문학과 사회 분야의 평론가이자 생애와 작품이 모두 현대 유럽 사회의 예술과 정치, 종교와 성 담론에서 시대를 뒤흔들었던 현대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다." 사실 그의 전기로는 로로로 시리즈의 <파솔리니>(한길사, 2000)가 이미 소개돼 있지만, 이번에 나온 건 훨씬 방대한 분량이고(613쪽), 엔초 시칠리아노라는 이탈리아의 평론가의 솜씨이다. 그런데, 그의 이름 Pasolini는 '파솔리니'와 '파졸리니', 어느 쪽으로 발음해야 하는 건지 잘 모르겠다. <씨네21> 같은 영화지에서는 '파졸리니'라고 기재하기 때문이다.

지난주 <씨네21>에서는 30년 전에 살해당한(목이 잘려서 도심 쓰레기통에 버려졌다던가?) 이 문제적 감독 살인사건이 재조사될 거라는 외신을 전하고 있는데("동성애 혐의로 공산당에서 추방된 경험도 있는 그는 1975년 많은 의혹을 남긴 채 로마의 빈민가에서 17세의 동성애자에게 난자당해 숨졌다") 살해 혐의로 9년간 복역했던 용의자(동성애자)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파졸리니를 죽인 건 자신이 아니라 다른 세 청년이었고, 이들이 그를 "더러운 공산주의자"라고 욕하면서 구타해 숨지게 했다는 것이다. 어차피 비참한 죽음을 맞은 거지만, 요는 그가 동성애자로 죽었는가 아니면 공산주의자로 죽었는가 하는 것.

'파졸리니'란 이름으로는(그래서 '파솔리니'로는 검색되지 않는다) 10년 전에 그의 소설 <폭력적인 삶>(세계사, 1995)이 번역/소개된바 있고,  그의 영화로는 <마태복음> <테오레마> 등이 출시되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오래전 영화를 전공하던 선배로부터 빌린 비디오로 <살로, 소돔의 120일>, <오이디푸스왕>, <캔터베리 이야기> 등을 본 적이 있다. 이번주 <씨네21>의 작은 기사를 보니까 <살로, 소돔의 120일>은 네티즌들이 출시를 고대하는 DVD로 4위에 꼽혔다. 한 네티즌 왈 "과연 파졸리니 영화도 우리나라에 출시될 수 있는 건가요? 흠... 특히 무삭제로 나온다면 우리나라의 영화산업의 한 획을 긋는 충격적인 사건이겠네요." 이미 제자인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이 무삭제 개봉됨으로써 '한 획'은 그어졌지만, 스승의 <소돔 120일>은 같은 '한 획'이더라도 붓의 종류가 좀 다르다. 파졸리니의 '악몽'에 견주면, 베르톨루치의 '몽상'은 가히 천진난만이다.

같은 이탈리아 사람 에코의 책을 거명한 김에, 파솔리니/파졸리니의 평전을 거푸 거명하는 것이 '의리'에 맞을 듯하지만, 거리를 둔 건 이 신간의 편제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고상하고 육중하다. 나는 그런 모양새가 '격렬한 삶' 혹은 '폭력적인 삶'을 살았던 파솔리니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물론 덕분에, 글자도 큼직큼직하게 박은 책값은 아주 '격렬'해졌다).      

네번째 책은 문화비평가이자 '미디어 이론가'의 대명사 마샬 맥루한의 마지막 책 <지구촌>(커뮤니케이션북스)이다. 실상 그는 '지구촌(global village)'이란 말의 저작권자이기도 하다.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종언을 예언한 맥루한인 만큼 그에 책들에 대해서 주절이주절이 늘어놓는 건 어울리지 않을 듯하다. 이미지들로 대신한다.

 

 

 

 

제일 왼쪽이 이번에 나온 책이고, 오른쪽으로는 이어지는 두 권은 <미디어의 이해>에 대한 2종의 번역서이다(민음사판이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세번째는 또다른 주저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인데, 이전에 번역이 잘 안 읽힌다는 서평들을 읽은바 있다. 그리고 다섯번째 책이 <미디어는 맛사지다>(커뮤니케이션북스, 2001)인데, 분량으론(100쪽) 별볼일 없는 책이다. 맥루한의 책들이 대개 난해하다지만, 이 책도 기억에 남는 게 없다. 맛사지용으로도 불편하고. 그리고 마지막 <맥루안>은('맥루안'을 고집한 역자의 고집이 돋보인다) 가장 얇으면서 유일한 입문서.  

신간에 대한 한국일보의 리뷰를 잠깐 인용하면, "맥루한의 글은 화려한 비유로 넘치지만 비교적 읽기 좋게 번역한 데다 곳곳에 친절한 역자 주가 붙어 있어 읽기에 썩 어렵지는 않다. 다만 책의 무게에 걸맞지 않게 잡지처럼 너무 가벼운 표지를 쓴 것이나, 표지에 대문짝만하게 쓴 마샬 맥루한 영자 이름에 탈자를 낸 성의 없는 편집이 아쉽다." 그 탈자라는 표지에서 마샬(Marshall)의 'r'을 빼먹은 것(보이시지요?). '읽기 좋게 번역한' 것만으로도(그게 사실이라면) 다행스러움에는 틀림없지만, 외치건대, "마무리를 잘하자!"

 

 

 

 

다섯번째 책도 마무리가 잘 안된 책이다. 영국의 저명한 비평가 프랭크 커모드(1919- )의 <셰익스피어의 시대>(을유문화사)가 그것. 뒷표지처럼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문학가'는 아니지만(어떻게 비평가가 '가장 위대한 문학가'가 될 수 있는가? 과대포장도 예의는 아니다. 그냥 '이 시대 최고의 비평가' 정로로만 띄워좋도 충분하다. 물론 그것도 영국에서의 일이고), 프랭크 커모드는 명망있는 비평가이고 믿을 만한 저자이다(그는 기사작위까지 받았으니, '커모드 경'이다). 비록 우리에게 소개된 건 일천하지만. <종말의식>(1967/2000)이 <종말의식과 인간적 시간>(문학과지성사, 1993)으로 번역된 게 단행본으론 전부이다. 한 추천사에 따르면, 이 신간에는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 이 책에 격조있게 담겨 있다." 거기에 장점은 분량이 얇은 것. 200쪽 정도니까 반나절만 투자해도 남을 만한 분량이다(이미 여러 권 출간된 셰익스피어 관련 서적/평전 중에서 가장 얇다. 가장 지명도 있는 저자임에도).

내가 '마무리'를 들먹인 건 책날개에 실린 약력에서 커모드의 저서로 <로맨틱 이미지: 종말의 의미>라고 소개한 대목 때문. <로맨틱 이미지>와 <종말의 의미>는 각기 다른 책이고, 후자는 언급한 대로 국역돼 있다. 표지나 책날개처럼 눈에 잘 띄는 것도 없을 텐데, 좀더 세심한 교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책의 역자는 이미 이 책의 포함된 크로노스 총서에서 <르네상스>, <민족과 제국> 등을 번역한바 있는 전문가이다. 해서, 내용은 믿어봄 직하다. 한편, 셰익스피어 관련으로 내가 고대하는 책은 커모드급, 혹은 그 이상의 비평가 해롤드 블룸의 <셰익스피어: 인간성의 발명>이다(블룸의 셰익스피어를 결산하고 있는 이 책은 본문에 각주가 단 한 개도 달려 있지 않다). 방대한 분량이지만, (지명도만으로도) 소개되어야 할 책이다.     

이렇게 다섯 권을 다 꼽아버렸는데, 약간 아쉬운 책은 <수량화 혁명 - 유럽의 패권을 가져온 세계관의 탄생>(심산)이다. 제목만으로도 내용은 어림짐작할 수 있다. 소개에 따르면 "중세 후기에서 르네상스에 이르는 동안 서구 문명이 성취했던, 질적 관점에서 양적 관점으로의 전환을 논하는 책이다. 이러한 전환이 근대의 과학기술, 관료제, 상업 등을 가능하게 했고, 시공간의 정확한 측정 및 수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 대체적 추세로서의 '양화'가 아닌, 양화의 실상 즉 시간, 공간, 수학, 시각화, 음악, 회화, 부기 등 다양한 문화 아이템 각각에서 양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살핀다. 저자는 바로 그 양화가 유럽 제국주의의 성공을 가져온 요인으로 설명한다."

 

 

 

 

저자, 앨프리드 W. 크로스비는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이미 "다른 대륙, 다른 문명의 사람들과 달리 유럽인들은 근대 이전부터 해외로 팽창하여 왔다.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그런 곳으로서 이곳에서는 유럽 출신 백인들이 기존의 정주민들을 내몰고 그 땅을 빼앗은 다음 거기에 유럽 문명을 복제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럽의 제국주의적 팽창은 단지 인간의 소행일 뿐만이 아니라 생태계 전체가 팽창한 결과라는 점이 중요하다."(주경철)란 요지의 <생태 제국주의>(지식의풍경, 2000)가 우리에게 소개돼 있다.

05. 05. 23. 

P.S. 지난 20일 프랑스의 철학자 폴 리쾨르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아침 신문에서 읽었다(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빈다). 1913년 생이니까 그는 지상에서 꼬박 아흔 두 해를 살았다. 백 세를 넘겼던 가다머에 비하면 아쉬움이 있지만, 결코 짧았다고는 할 수 없는 생애이며, 그가 남겨놓은 업적과 자취 또한 후학들이 따라가기에 버거울 정도로 깊고 광대하다. 나는 부랴부랴 도서관에 들어온 프랑스와 도스의 전기 <폴 리쾨르 - 삶의 의미들>(동문선)을 앞당겨 대출했다. 890쪽이니까 그의 생애에 그 나름으로 견줄 만하다(참고로, 한 서평에 따르면 이 책은 200쪽까지 무난하게 나가지만 이후엔 '재난'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이제 그를 읽을 시간이 되었다.

 

 

 

 

리쾨르의 책들이 그래도 여러 권 번역돼 있지만, 리쾨르에 관한 책은 아직 드물며, 때문에 입문서로 적당한 것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건 리처드 커니의 대담집 <현대 사상가들과의 대화>(한나래)에서의 리쾨르 편이다. <폴 리쾨르>의 중간에 실린 화보에는 1988년 한 학회에서 커니와 리쾨르가 함께  찍은 사진도 들어 있는데, 당시 75세의 노학자 리쾨르에 비해 커니는 20대라고 해도 믿을 만큼 '젊은' 모습이다. 커니의 책은 현대 사상가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고 있기에 다른 철학자/사상가들에 대한 입문서로서 아주 요긴하고 유익하다(데리다에 대한 두툼한 책을 쓴 존 카푸토는 데리다 입문서로도 이 대담집을 꼽은바 있다).    

지난 세기 프랑스 철학의 거장들 가운데, 이제 1908년생인 레비-스트로스 정도가 아직 지상에 남아 있는 듯하다(동급생인 메를로-퐁티가 죽은 지 거의 반 세기가 흘러가고 있다). 사상은 날로 '발전'해 가는 문명에 비례할 듯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서 거장들이 하나둘 무대를 떠나고 나면, 말 그대로 텅 비게 된다. 빈 자리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다(하다못해 올해로 상대성이론 탄생 100주년을 맞았지만, 21세기의 아인슈타인이 가능할지는 의심스럽다). 20세기 영화사가 그러하고 한국 현대시사가 그러하며, 한국문학 비평사가 그러하다. 해석학으로 분야를 지극히 한정하더라도 리쾨르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세울 만한 이가 또 나올는지는 의심스럽다(사상에는 구조주의가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남은 건 안락한 아류들의 지루한 여생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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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23 11:50   좋아요 0 | URL
칸트와 오리 너구리 리뷰 읽었어요.
기대되는 책이고, 또 구매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더군요.
전, 님으로부터 책공부와 러시아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걸 말씀드렸던가요?^^

갈대 2005-05-23 13:11   좋아요 0 | URL
'칸트와 오리너구리'는 번역이 걱정됩니다(미네르바 성냥갑의 안 좋은 기억). 역자가 독어본을 중역한 것 같은데 말이죠.

로쟈 2005-05-23 15:28   좋아요 0 | URL
파란여우님/ 역시 빠르시네요.^^ 갈대님/ 역자는 다르지요? 이번에는 <괴델, 에셔, 바흐>의 역자분인데, 저는 반신반의하는 쪽이고 확실한 건 '물건'을 열어봐야 알 수 있겠습니다...

2005-05-26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원래는 지난 주말에 작성되어야 하는 글이었는데, 사정상 며칠 늦어졌다. 그 런 사정을 반영하여, 제일 처음에 꼽고자 하는 것은 새로 나온 <단테>와 그 해설서이다. 이건 오늘 아침에 한국일보에서 <신곡>을 완역한 한국외대 한형곤 교수와 그 해설서 <신곡 - 단테, 신의 나라로 여행을 시작하다>(서해문집)를 쓴 부산외대 박상진 교수의 대화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이다. 다시 검색해 보니까 한형곤 교수의 이탈리어어 완역본은 지난 78년에 삼성출판사(세계문학전집)에서 나왔었고, 2003년에 개역본이 한국외대출판부에서 <풀어 쓴 단테의 신곡>으로 다시 나왔다. 이후에 새로운 판본이 다시 나왔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물론 요즘 <신곡>보다 더 많이 팔려나가는 것은 <단테 클럽>이나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 같이 단테의 이름을 '참칭'한 책들이지만,  교양있는 독자라면 셰익스피어, 괴테와 함께 세계 3대 문호로까지 꼽히는 단테의 <신곡>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혹은 읽은 척이라고 할 필요가 있고, 적어도 책이라도 서가에 꽂아둘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말 역자나 해설자도 지적하는 것이지만, 이 작품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커녕 끝까지 다 읽은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나부터도 그렇지만). 그건 원작 자체가 완벽한 형식미를 자랑하는 시라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겠다. 번역도 까다롭거니와 원작의 맛을 살려낸다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 이 '숭고한' 책에 대해 우리로서 할 수 있는 건 읽어보려고 노력하거나, 읽은 척하는 것이다. 다시 나온 번역본이나 새로 나온 해설서가 요긴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이다. 적어도 읽은 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정말로 '읽는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게 '읽은' 한국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러시아문학 전공자인 나로서도 단테는 (페트라르카 등과 함께) 하나의 콤플렉스 거리이다. 푸슈킨도 이 '단테 알리기에리'에 대해서 여러 모로 참조하고 있지만("푸슈킨과 단테"라는 게 "푸슈킨과 셰익스피어"만큼의 크기는 아니지만 연구주제이다), 가장 결정적으로는 고골의 <죽은 혼>이 그 3부작 구성에 있어서 이 <신곡>의 구성을 의도했었다는 점. 그러니, <죽은 혼>을 (강의에서건 어디에서건) 얘기할 때마다 단테의 <신곡>도 덩달아 언급하게 되지만, '정보' 이상의 내용을 말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강의'에 걸맞는 얘기를 하기 위해선 필수적으로 참조해야 하지만, '언어장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여건상 그간에는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이번에 나온 해설서는 그런 의미에서 반갑다. 물론 영어권에서 나온 해설서들도 참조할 수 있겠지만, <신곡>을 영역본으로 읽는 건 또 만만하겠는가?(나는 러시아어본도 구하긴 했다.)  

지난 2월에는 단테의 <새로운 인생>(민음사)도 우리말 번역본을 얻은바 있으니 언제 짬을 내서 단테의 세계로 한번 잠수해볼 일이다(이 책은 이탈리어 역이 아니라, 단테 로세티의 영역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T. S. 엘리엇에 의하면,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양분된다. 그 사이에 제3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괴테가 들으면 섭섭해 할 일이지만, 하여간에 사정들이 그러하다고도 하니 우리의 얄팍한 교양에 (헛)바람을 집어넣기 위해서라도 단테를 좀 읽어보도록 하자(중2 때 단테의 <신곡>을 들고 다니던 한 친구 때문에 나도 덩달아 얄팍한 번역서 한 권을 들고 다닌 적이 있는데, 그 번역이 제대로 읽혔을 리 없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아마도 해설에서 읽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사랑 이야기뿐).  

 

 

 

 

두번째 책은, 역시나 우리의 교양과 관련된, 그리고 단테만 아니었다면 당연히 첫손가락에 꼽았을 책인바, 프랑코 모레티의 <세상의 이치>(문학동네)이다. 영화감독 난니 모레티의 형이기도 이탈리아 출신의 영문학자 프랑코 모레티는(우리의 경우 그런 형을 둔 영화감독으로 봉준호가 있다) 동생만큼 유명한 건 아니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영문학 '연구자'의 한 사람이다(그에게 걸맞는 칭호는 '이론가'나 '비평가'가 아니라 '연구자'이다. 실제로 그는 스탠포드대학의 소설연구센터를 지휘하고 있는 연구 총책임자이기도 하다). 이미 <근대의 서사시>(새물결, 2001)로 우리에게 소개된바 있고 몇 년전에는 한국을 다녀가기도 했지만, 겸손하게도 고작 '연구자'인 탓인지 주변에서 생각만큼 많이 읽히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모레티는 중요하다(적어도 재미있다). 그러니 읽을 필요가 있다. 중요해서건, 재미있어서건.(모레티는 페터 지마만큼 이론 지향적이지만, 테리 이글턴만큼 재미있다.) 

모레티는 문학연구에 통계학이나 지리학, 생물학 등을 도입하는 걸로 유명한데, 기본적인 유물론(적 세계관)을 전제한다면, 그의 프로젝트는 '(러시아)형식주의 + 다위니즘'으로 요약할 수 있다. 텍스트의 형식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나에게 그는 텍스트사회학의 창시자 페터 지마를 떠올리게 하지만, 지마가 문학사회학의 상관항으로서 '텍스트성'을 파고든다면, 모레티는 대범하게 그러한 형식이나 텍스트성의 진화에 대해 고찰하고 기록한다(거기서 중요한 건 진화의 '단위'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아예 <유럽소설의 지도 1800-1900> 같은 걸 만들어보기도 한다. 비록 재미있다 하더라도 문학연구의 '핵심'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기도 하는 그의 작업 스타일은 내가 보기엔 역사학 연구에서 인구학자의 작업과 비슷하다. 인구변동의 통계나 다룰 듯하지만, 인구학적 접근은 역사에 대해서 생각보다 많은 걸 얘기해주는데(가령 인구학자 토드의 <유럽의 발견> 같은 책), 모레티의 작업 또한 그러하다. 문학사를 '문학의 도살장'으로 보는 그의 시각은 얼마나 (당연하면서도) 참신한 것인지!

지난 1987년에 처음 나온 <세상의 이치>는 모레티의 비교적 초기 저작이다(나는 Verso에서 나온 이 1판을 갖고 있는데, 역자에 따르면 얼마전 개정판이 나왔다. 확인해 보니까 2000년에 'New Edition'이 나온 것). '유럽 문화 속의 교양소설'이란 부제에 걸맞게 책은 '상징적 형식으로서 교양소설'이 근대사회사의 전개 속에서 갖는 의미맥락을 추적하고 재구성한다. 그런데, 결코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에드워드 사이드의 표현을 빌면, "모레티의 저작에는 페이지마다 순수한 지성이 살아숨쉰다." 읽어볼 도리밖에.

참고로, 러시아문학과 관련해서는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1831)과 레르몬토프의 <우리시대의 영웅>(1840)이 이 책에서 언급되는 러시아문학 작품(곧 교양소설)이다. 주로 스탕달을 다루고 있는 장에서. 이 때문에, 나는 이전에 이 책을 부분적으로 읽었었다. 이들과 더불어 거명되고 있는 유일한 러시아인은 미하일 바흐친이다. 한가지, 사실주의(리얼리즘)이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발달한 문학형식이라는 게 모레티의 대전제인데, 이러한 이론적 전제에 잘 들어맞지 않는 게 러시아문학이며, 모레티 자신이 그 점을 시인하고 있다. 한 대담에서 루카치가 최고의 리얼리즘 작가로 꼽은 톨스토이와 당대 러시아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모레티는 이렇게 답한다. "톨스토이는 제게 골치아픈 적수죠. 제 주장과 어긋나는 작가거든요. 이 질문에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안과밖>, 제12호, 273쪽) 모레티는 솔직한 사람이다.

 

 

 

 

세번째 책은 데이비드 하비의 <신제국주의>(한울). 아마도 현대 지리학자 중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학자이자 가장 많이 소개되고 있는 이가 하비일 것이다(그의 책은 최소한 7권이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다). 지난번에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생각의나무)라는 묵직한 책이 나온바 있는데, 이번엔 2003년에 나온 그의 최신간이다. 역자는 하비의 책을 번역한바 있는 최병두 교수. 하비에 대해선 영국 옥스포드의 좌파(맑시스트) 지리학자 정도로 기억하고 있었는데(나는 그의 책 몇 권을 사두었지만 아직 읽지 않고 있다), 이번 저자 소개를 보니까 뉴욕시립대학의 인류학과 교수로 돼 있다. 지리학자에서 인류학자로 변신? 한편으론, 그가 지리학의 외연을 거의 인류학 수준으로 확장했다는 걸 떠올려볼 수 있다(이 경우는 문화인류학의 하위범주로서 '도시인류학'이 될 것이다). 한편, 지난번에 나온 책과 관련하여 갖는 바람. 또 다른 '맑시스트' 마샬 버만에 따르면, 모더니티의 또다른 수도는 파리 외에 페테르부르크와 뉴욕이 있다. 하비급의 학자가 나서서 이 '두 도시 이야기'마저 파리 이야기만큼 써주었으면 좋겠다. 근대의 세 도시, 혹은 근대의 세 가지 유형학에 대하여. 

                    

 

 

  

네번째 책은 프랑스쪽의 '행동하는 지성'들에 관한 것. 거물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실천이성>(동문선)이 불쑥 나왔고, 드레퓌스 사건을 촉발했던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하다>(책세상)가 책세상문고의 한권으로 선보였다. 역자에 따르면, 이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유익한 책은 아르망 이스라엘의 <다시 읽는 드레퓌스 사건>(자인, 2002)인바,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되겠다. 부르디외의 신간은 동문선의 간판 번역자 김웅권의 작품인데, 그가 번역한 <파스칼적 명상>에 대한 평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기에 나로선 유보적이다. <순진함의 유혹> 같은 좋은 번역서도 있는 반면에, <구조주의의 역사2-4> 같은 어수룩한 번역서도 내놓고 있기 때문인데, 이런 경우는 다른 분들이 먼저 읽고 판별해 주었으면 한다(책값이 싼 것도 아니고). 여하튼, 부르디외의 거의 모든 책들이 번역되었다. 해서, 부르디외식 사회학이 한국에서도 꽃필 수 있을까? 기대는 해보지만, 판돈을 걸지는 않겠다. 부르디외 '전공자'가 태연하게 조선일보에도 글을 쓰는 나라가 한국이고 한국 사회이기에.

 

 

 

  

다섯번째 책은 오랜만에 꼽는 시집, 조정권의 <떠도는 몸들>(창비). <산정묘지>(민음사, 1991), <신성한 숲>(문학과지성사, 1994) 이후에 10여년만에 나온 신작 시집인데(정말이다!), 그런 만큼 기대해봄 직한 시집(적어놓고 보니 시인은 출판사들도 떠돌고 있다). 마흔을 갓 넘긴 나이때  "육신이란 바람에 굴러가는 헌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다"('산정묘지1')라고 선언했던 '조로한' 시인의 '후일담'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헌 누더기'의 행적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은데, 서평들을 보니 시집의 컨셉은 여행인 듯하다. 동아일보 서평에 따르면,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자취가 깃든 여행지를 순례하는 과정에서 저자 자신은 예술가의 길을 가고 싶지만 결과적으로 일상에 발목을 잡히는 모습은 예술가로서 저자의 고민을 공감하게 한다. '어디로 가도 지상의 오줌냄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시인은 스스로를 망명자로 자처한다'(국내 망명자)는 이 같은 시인의 마음을 극명히 보여준다." 망명시인의 명단을 하나 더 늘여야 할 모양이다...

05. 05. 18.

 

 

 

 

P.S. 알고 보니까 연초에 타르코프스키의 <봉인된 시간>(분도출판사) 새로운 장정으로 나왔다. 하지만, 아쉽게도 표지만 바뀌었을 뿐,  편제나 내용 자체는 그닥 달라진 것 같지 않다(이젠 칼라화보라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얼마전 <씨네21>의 창간 10주년도 맞고 해서 영화관련 글들을 제법 읽게 되었다. 그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머리속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데, 타이밍을 못 맞추고 있다. 조만간 영화와 영화비평에 관한 이야기들을 늘어놓을 수 있게 되기를(이렇게 적어놓으면, '의무감'에서라도 몇 자 적게 되지 않을까? 이런 게 화행, 곧 'speech act'이다)...   

 

 

 

  

P.S.2. 부르디외 사회학의 한국적 적용과 관련하여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책은 <문화와 계급>(동문선, 2002)이다. 그 중 문화자본에 대한 장미혜 박사의 (실증적인)연구가 나로선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장박사는 짐작에 "소비양식에 미치는 문화자본과 경제자본의 상대적 효과" 같은 주제의 학위논문을 썼는데, 언론에 보도되었던 내용을 더듬어보자면, '경제자본'과는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문화자본'이라는 게 있고, 이 두 변수(돈과 눈높이)에 따라 네 가지 사회적 계층이 분류될 수 있다(이 경우 사회계층이란 게 이분법적이지 않다). (1)돈도 많고 눈도 높은 경우, (2)돈은 많지만 눈은 없는 경우, (3)돈은 없는데, 눈만 높은 경우, (4)돈도 없고 눈도 없는, 속편한 경우. 거기서 가장 '문제적인' 계층은 (3)이다. 책 살 돈은 없으면서 즐겨 책타령을 늘어놓는 어떤 이도 분류하자면 거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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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05-18 12:26   좋아요 0 | URL
맨날, 사정상......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영화야그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으실꺼죠?^^

로쟈 2005-05-18 12:32   좋아요 0 | URL
예, 맨날, 날이면 날마다...

비로그인 2005-05-18 13:26   좋아요 0 | URL
아 봉인된 시간 안그래도 이번에 구입할 생각이었다 장바구니에서 뺐는데 로쟈님이 말씀하시니 여쭤봐야겠네요. 보니 독일어를 번역해놓은거더라구요 원래 독일어로 쓴건 물론 아니겠죠? 번역이 어떤지요? 읽을만하면 그냥 한국어번역본으로 구입하게요. 그의 영화에 머리깼던 생각이 나서 읽고는 싶은데 괜히 책도 겁납니다..^^

로쟈 2005-05-18 13:30   좋아요 0 | URL
'이상한' 일이지만, 제가 러시아어본을 아직 못 봤습니다(타르코프스키에 대한 책들을 제법 많이 갖고 있음에도). 국역본은 읽을 만한 책입니다. 정 미심쩍으시면, 영어본을 읽으셔도 되겠지만...

주니다 2005-05-18 19:19   좋아요 0 | URL
소개하시는 책들에게 Thanks to 할 수 있도록 편집해주시죠. 좀 귀찮으시겠지만. 그럼 쌓일 적립금이 꽤 되지 않을까요? 번번이 날로 먹자니 원....

로쟈 2005-05-18 19:41   좋아요 0 | URL
책 표지사진만 끌어다 놓았습니다. 제가 '편집' 같은 데 서툴러서요. 제가 누구처럼 책을 공짜로 드리는 것도 아닌데.^^

주니다 2005-05-18 20:11   좋아요 0 | URL
로쟈님 링크를 책 전체에 걸어야 되나 봅니다. 풀어 쓴 단테의 신곡만 Thanks to가 생기는 걸로 봐서는.... 다시 해 주세요 ㅎㅎㅎ 이왕이면 귀국 후 쓰신 글들에도 다 해주세요.

주니다 2005-05-18 20:14   좋아요 0 | URL
여기서 노는 사람들은 대충 3번째의 문제적 사회계층이 가장 많지 않을까요? 심지어 주제는 모르고 눈만 높아서 결혼도 못한 사람도 있고....크크크

로쟈 2005-05-19 15:25   좋아요 0 | URL
주제를 모르신다면, 아직 '가망'이 있습니다. 지 주제를 알고 결혼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balmas 2005-05-20 00:57   좋아요 0 | URL
어이구,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왔군요.
그런데 [신곡] 완역본이 300쪽밖에 안된다는 게 말이 되나요?

로쟈 2005-05-20 13:35   좋아요 0 | URL
그게 대조해 보지 않아서 현재로선 잘 모르겠습니다. '풀어썼다면' 분량이 더 늘어나야 정상일 텐데요.^^

n69 2005-12-09 04:01   좋아요 0 | URL
부르디외의 <파스칼적 명상>은 물론 어렵긴 하지만, 읽었을 때 도대체 의미판독이 안되는 책은 아닙니다. 역자가 <실천이성>을 번역하면서 <파스칼적 명상>의 번역이 어려웠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허나, 다른 부르디외 번역서 이를테면 <예술의 규칙>이나 <텔레비전에 관하여>보단 훨씬 훌륭해 보입니다. 불어할 줄 전혀 모르나, 읽어보았을 때 그렇다는 겁니다...^^

로쟈 2005-12-12 12:16   좋아요 0 | URL
<파스칼의 명상>을 자세히 검토하진 않았기에 제 의견이 과장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주변의 의견까지 참조하면 그리 과장된 건 아니지만). 역자에 대해서는 저는 양가적인 감정을 갖는데, 훌륭한 번역서와 남루한 번역서들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좀 의아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