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궁정식 사랑, 혹은 물(物)로서의 여성'의 마지막 두 절을 옮겨놓는다. 영화 <크라잉 게임> 얘기가 공통적이고, 이 새 번역에서 '<크랑잉 게임>이 동쪽으로 가다'란 마지막 절에는 일부 번역이 누락돼 있기 때문에 그냥 같이 묶어놓는 게 좋을 듯하다. 지젝의 정치론/혁명론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어놓기 위해서라도 '궁정식 사랑' 이야기는 빨리 마무리짓는 게 좋겠다. 내가 갖고 있는 초판본 <향락의 전이>의 200-213쪽, 그리고 영어본의 102-109쪽이 이 새 번역에 대응한다(본문 중의 강조는 나의 것이다).

 

 

 

 

궁정식 게임에서 <크라잉 게임>으로

닐 조던의 <크라잉 게임>이 거둔 예상치 못한 특별한 성공의 열쇠는 그것이 궁정식 사랑의 모티프에 가한 결정적인 변주에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개요를 상기해보자. 포로가 된 영국 흑인 병사를 감시하는 IRA의 단원인 퍼거스는 그 병사와 친해진다. 병사는 사살되기 전에 그에게 런던의 교외에 살고 있는 자기 여자 친구 딜을 찾아가 마지막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병사가 죽은 뒤 퍼거스는 IRA에서 탈퇴해  런던으로 이주하고, 병사의 연인이었던 아름다운 흑인 여성을 방문한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졌으나 딜은 그에 대해 모호하고 아이러니한 독립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결국 그녀는 그의 접근을 허용하지만 그들이 침대로 가기 전 그녀는 잠깐 나가서 투명한 잠옷을 입고 돌아온다. 퍼거스는 그녀의 몸에 갈망하는 시선을 던지는 한편, 갑자기 그녀의 페니스를 지각한다. ‘그녀’는 복장도착자였던 것이다.

그는 구역질을 하면서 그녀를 잔인하게 밀쳐낸다. 딜은 떨면서 눈물에 젖어 자신은 일이 어떻게 된 것인지(주인공은 그녀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져 있었기에 그들이 늘상 만난 술집이 복장도착증자들의 회합장소였다는 사실을 포함하여 증가가 되는 일련의 세세한 것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항상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실패한 성적 만남의 장면은 프로이트가 페티시즘의 원초적인 트라우마라고 언급한 장면의 정확한 역전으로 구조화된다. 성기 쪽으로 여성의 벗은 몸을 훑어 내려가는 아이의 시선은 무언가(페니스)를 보기를 기대했던 그곳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충격을 받는다. <크라잉 게임>의 경우, 충격은 시선이 아무것도 기대치 않았던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 야기된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폭로 이후에 둘의 관계는 역전된다. 이제 딜은 그녀의 사랑이 불가능한 것임을 알면서도 퍼거스와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 있다는 것으로 밝혀진다. 그녀는 변덕스럽고 아이러니하며 군주스러운 여인에서, 절망적으로 사랑에 빠져 있는 섬세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과 같은 애처로운 인물로 변모한 것이다. 진정한 사랑, 즉 엄밀하게 라캉적인 의미에서 은유로서의 사랑이 솟아오르는 것은 오직 바로 이 지점이다. 우리는 사랑받는 자(eromenos)가 그녀의 손을 뻗어 ‘사랑을 되돌려 줌으로써’ 사랑하는 자(erastes)로 변모하는 숭고한 순간을 목격하는 것이다.

이 순간은 사랑의 ‘기적’을, ‘실재의 대답(answer of the Real)’의 순간을 보여준다. 이것으로써 우리는, 라캉이 주체 그 자체는 실재의 대답이라는 지위를 갖는다고 주장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을 포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말을 바꾸자면, 이러한 전도 이전까지는 사랑받는 자는 [아직까지는 주체가 아니며] 하나의 대상의 지위를 갖는다는 얘기다. 사랑받는 자는 ‘그 안에 있는 그 자신 이상의’ 것 때문에 사랑받는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모른다. 나는 그 질문, 즉 나는 타인에게 하나의 대상으로서 어떤 존재인 걸까? 그는 내 안에서 과연 어떤 (그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을 보는 것일까? 라는 질문에 결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따라서 비대칭성에 직면한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비대칭성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각각의 사랑하는 이가 사랑받는 이에게서 보는 것과 사랑받는 이 각각이 알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발생하는, 보다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부조화에 의한 비대칭성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받는 이의 위치(position)을 정의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교착상태를 발견한다. 타인은 내 안에서 무언가를 보고, 내게서 그것을 원한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그에게 줄 수는 없다, 혹은 라캉이 지적한 것처럼, 사랑받는 이가 갖고 있는 것과 사랑하는 이가 결여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사랑받는 이가 이러한 교착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이에게 손을 뻗어 ‘사랑을 되돌려주는’ 일 뿐인데, 말하자면, 은유적인 몸짓으로, 사랑받는 이로서의 그의 지위를 사랑하는 이의 지위로 교체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전은 주체화의 지점을 표시한다. 사랑의 부름에 대답하는 순간, 사랑의 대상이었던 것[사람]이 주체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바로 이런 역전에 의해서만 솟아오른다. 내가 단지 타인 속의 아갈마(agalma)에 의해 매혹당했을 때에는 나는 진정으로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내가 타인을, 즉 사랑의 대상을, 연약하고 [무언가를] 상실한 것, 즉 ‘그것’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경험할 때, 그 때 나는 진정 사랑에 빠진다. 나의 사랑은 이 상실을 견뎌내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역전의 핵심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각별히 주의해야만 한다. 비록 우리가 이제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라고 하는 처음의 이중성 대신에 두 명의 사랑하는 주체를 갖게 되었지만, 비대칭은 여전히 존속한다. 왜냐하면, 주체화되면서 그 자신의 결여를 고백했던 것은 바로 대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역전 속에는 무언가 매우 당황스럽고 정말 스캔들스러운 것이 존재하는데, 신비롭고 매혹적이며 잡히지 않는 사랑의 대상이 그 자신의 교착[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나는 갖고 있지 않다는 난관]을 폭로하고, 그로써 또 다른 주체의 지위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호러소설들에서 동일한 역전과 만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숭고한 순간은 괴물이 주체화되는 순간, 즉 (무자비한 살인 기계로 묘사되어 온) 괴물-대상이 일인칭으로 그 자신의 불행한, 동정을 불러일으키는 실존을 드러낼 때가 아닌가?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 근거한 영화들이 이러한 주체화의 몸짓을 회피해 온 것은 매우 징후적이다. 그리고 아마도, 궁정식 사랑에 있어서는, 귀부인이 하인에게 자비(Gnade)를 베풀 때, 오랫동안 고대되어온 최고의 충족 순간은 여인의 항복, 즉 성행위를 갖는 것에 그녀가 동의하는 순간도, 어떤 신비로운 입사식도 아니며, 여인 편에서 보내는 사랑의 사인(sign), 즉, 대상(Object)이 애원하는 이에게 그 자신의 손을 뻗어 대답했다는 그 ‘기적’인 것이다.  

그러면, <크라잉 게임>으로 돌아가 보자. 딜은 이제 퍼거스를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고, 퍼거스는 점점 더 자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이 갖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에 감동받고 매료당해 그녀에 대한 혐오를 극복하고 그녀를 지속적으로 위로한다. 마침내 IRA가 그를 다시 테러행위에 연루시키고자 할 때, 심지어 그는 딜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그녀가 저지른 살인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녀가 다시 도발적으로 유혹적인 여성으로 옷을 차려입고 그를 방문한 감옥에서 벌어지는데, 면회실의 모든 남자들은 그녀의 외양에 자극받는다. 퍼거스가 사천 일 이상 - 수감일 총계 - 을 견뎌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기꺼이 기다리겠다고 맹세하고 그를 정규적으로 면회한다…

여기서 외부적 장애물 - 어떠한 육체적 접촉도 막는 감옥의 유리 칸막이 - 은 궁정식 사랑에서 대상으로의 접근을 막는 장애물과 정확히 등가를 이룬다. 따라서 그것[유리 칸막이] 때문에, 이 사랑의 내재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즉 그는 철저한 이성애주의자고 그녀는 동성애적 의상도착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랑은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출간된 영화 각본의 서론에서 닐 조던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이야기는 일종의 행복과 더불어 끝난다. 난 일종의 행복, 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 행복 안에는 감옥이라고 하는 분리(separation)와 그 외의 더 심원한 분리들이, 즉 인종적, 민족적, 성적 정체성의 분리들이 포함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저 연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구분(division)하는 것들이 그들을 웃을 수 있게 만들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우리의 구분에는 여전히 희망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웃을 수 있게 하는 구분 - 극복할 수 없는 장벽 - 이란 것은 궁정식 사랑의 가장 간명한 메커니즘이 아니겠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사랑이다. 오로지 입장한 관객들의 응시를 매혹시키기 위해 고안된 가장(假裝)된 광경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는 사랑, 실현에 대한 기대가 끝없이 연기(延期)되는 것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는 사랑 말이다. 이 사랑이 계급, 종교, 인종의 장벽뿐만 아니라 성적 지향성과 성적 정체성의 장벽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장벽조차도 뛰어넘는 한, 이 사랑은 분명히 절대적인 사랑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역설이 존재하며, 또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이성애적 사랑을 남성적 억압의 산물로서 거부하지 않고, 이러한 사랑이 오늘날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성격을 보유할 수 있게 되는 딱 들어맞는 환경을 표현해내고 있다는 점 말이다.    

<크라잉 게임>이 동쪽으로 가다

크라잉 게임에 대한 이런 독해는 곧장 라캉 이론에 대한 표준적인 비난 중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여성적 비일관성[모순], 그리고 기타 등등에 대한 그의 모든 이야기들에서, 라캉은 오직 남성적 담론 속에서 나타나거나 거울반사되는 여성에 대해서만, 그리고 여성들에게는 비친화적인 매체에서 그녀들이 왜곡되어 반영되는 모습에 대해서만 다룰 뿐, 여성 그 자체에 대해서는 결코 다루지 않는다는 비난 말이다. 일찍이 프로이트에게도 그랬듯, 라캉에게도 역시 여성 섹슈얼리티는 ‘어두운 대륙’으로 남는다[고 비난자들은 말한다]. 이 비난에 답할 때, 우리는 만약 반영성에 대한 헤겔의 근원적 역설이 어디에선가 유효하다면, 그것이 유효한 곳은 바로 여기라는 것을 단호하게 강조해야만 한다. 여성-그-자체로부터 거리를 두고 물러나서, 부재하는 원인(absent Cause)으로서의 여성이 어떻게 남성적 담론을 뒤트는가에 주목해야만 우리는 ‘여성적 본질’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여성’이란 궁극적으로는 단지 남성적 담론을 뒤틀리게 하고 굴절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명칭이 아닌가? '여성-그-자체‘라는 유령은 이러한 뒤틂의 능동적 원인이기 보다는, 차라리 그 뒤틂의 물화-물신화된 효과인 것이 아닌가? 이 모든 질문들은 그 부제를 ’<크라잉 게임>이 중국으로 가다‘라고 붙여볼 만한 영화 <마담 버터플라이M. Butterfly>에서 함축적으로 언급된다.[이하 <마담 버터플라이>에 대한  개괄적 설명이 이어지는 4개의 단락(영어본 pp.105-107) 생략]

영화의 고통스러운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이 그의 죄를 완전히 인정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감옥에서 주인공은 속물적이고 소란한 동료 죄수들 앞에서 연극을 상연한다. 그는 나비부인처럼 차려입고(일본 기모노를 입고 얼굴에는 짙게 화장을 하고) 푸치니의 오페라를 발췌하여 그의 이야기를 고쳐말한다. “화창한 날에 우리는 보리라”라는 절정에서 그는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그어 죽어버린다. 이렇게 여장을 하고 공개적으로 자살하는 남자의 장면은 오래고도 훌륭한 역사가 있다. 히치콕의 <살인Murder>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그 영화에서 살인자 핸들 페인이 여자 곡예사의 복장으로 그의 차례가 끝난 후 혼잡한 집에서 목을 매단다.

<살인>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담 버터플라이>에서도 이 행위는 엄밀히 윤리적인 성격을 지닌다. 두 경우 모두 주인공은 그의 사랑의 대상과의, 즉 그의 증환(존재하지 않는 여성, 즉 ‘버터플라이’라는 종합적 형성물)과의 정신병적 동일시를 상연한다. 다시 말해, 그는 대상 선택으로부터 대상과의 직접적인 동일시로 ‘퇴행’한다. 이러한 동일시의 해소되지 않는 곤궁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궁극적인 행위로의 이행(passage à l'acte)으로서의 자살이다. 주인공은 자살 행위를 통해 죄의식을, 그리고 대상이 그의 환상의 틀 바깥에서 그에게 주어졌을 때 그 대상에 대한 그의 거부를 보상한다.

물론 구식 반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예컨대, 궁극적으로, <마담 버터플라이>는 여성과의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 여성에 대한 남성 판타지의 희비극적인 혼합물 덩어리를 제공하는 것 아닌가? 영화의 모든 행동들은 남성들 사이에서 일어난다. 플롯의 그로테스크하고도 믿을 수 없는 성격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의상도착자에 대한 동성애적 사랑의 사례라는 사실을 감추면서 동시에 드러내는 것 아닌가? 하는 식의 반론 말이다. 영화는 정말 솔직하지 않으며, 이러한 뻔한 사실을 인정하길 거부한다[즉, 이 영화는 이러저러한 구식 논리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설'은 <마담 버터플라이>의 (그리고 <크라잉 게임>의) 진정한 수수께끼를 다루는 데 실패한다. 어떻게 해서 남자 주인공과 여장 남자인 그의 파트너 사이의 희망 없는 사랑이, [남성의] 여성과의 일반적인 관계보다 훨씬 더 ‘본래적으로(authentically)’ 이성애적 사랑의 관념을 [이들 영화에서처럼] 실현할 수 있는가? 라는 수수께끼 말이다. [물론, 이들의 사랑이 이성애적 사랑보다 더 이성애적인 이유는 그 안에 궁정식 사랑의 논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지젝의 답변일 것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궁정식 사랑의 모체가 이렇게 보존되고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것[궁정식 사랑의 모체가 보존되고 있다는 것]은 동시대 페미니즘이 어떤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의 증거이다. 맞다, 그의 여인에게 봉사하는 남성의 궁정식 이미지는 남성 지배의 현실을 감추는 하나의 가상(semblance)이다. 맞다, 마조히스트의 연극은 남성의 사회적 지배에 의해 짐 지워진 죄의식을 보상하기 위해 고안된 하나의 사적인 연출[미장센]이다. 그리고 맞다, 여성을 숭고한 사랑의 대상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그녀를 수동적 재료로, 혹은 남성적 자아-이상의 나르시즘적 투사를 위한 스크린으로 가치 저하시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라캉 그 자신, 궁정식 사랑이 성행했던 바로 그 시기에, 남성적 권력 놀음 속에서 교환의 대상들로 존재한 여성의 실제 사회적 지위는 아마도 최하였으리라고 지적한 터다.

그러나 그의 여인을 섬기는 남성의 바로 이러한 외양은 여성에게 그들의 정체성의 환상-실체를 제공하며, 그것의 효과는 실제적인[현실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들에게 소위 ‘여성성’이라고 하는 것을 구성하는 모든 특질을 제공하며, 여성을 그녀의 여성적 향락(jouissance féminine) 속에서 존재하는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남성과의 (잠재적) 관련 속에서 그녀가 그녀 자신을 참조하는 방식으로서, 즉 그의 욕망의 대상으로서 정의한다는 것이다. 거의 공황에 가까운 (남성들뿐만 아니라 많은 여성들의) 반작용들이 이 환상-구조로부터 일어나, 여성들에게서 그녀들의 바로 그 ‘여성성’을 박탈해버리기를 원하는 페미니즘으로 도약한다. ‘가부장적 지배’에 반대함으로써, 동시에 여성들은 그들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의 환상-밑받침을 침식하는 것이다.

문제는, 일단 두 성 간의 관계가 대칭적이며 상호보완적이고 자발적인 협력 혹은 계약으로 간주되면, 궁정식 사랑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환상 모체(the fantasy matrix)는 권력 속에 남게 된다는 것이다. 왜? 성적 차이가 상징화를 거부하는 실재적인 것인 한, 성적 관계는 비대칭적인 비-관계로 남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비-관계 안에서 타자는, 즉 주체가 되기 이전의 우리의 파트너는 하나의 물(Thing), 즉 ‘비인간적인 파트너’이다. 그래서, 성적 관계는 순수한 두 주체 간의 대칭적 관계로 옮겨질 수 없다.

동등한 주체들 간의 계약이라는 부르주아적 원칙은 오로지 도착적-마조히즘적-계약의 형태로서만 섹슈얼리티에 적용될 수 있다. 그 계약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균형 잡힌 계약의 바로 그 형식이 지배관계를 구성하는 데 봉사한다. 소위 대안적인 성적 실천(‘사도 마조히즘적인’ 레즈비언 그리고 게이 커플) 속에서 주인-과-노예 관계가 마조히즘적 연극의 모든 요소들을 포함한 채로 심각하게 재등장한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말을 바꾸면, 우리는 궁정식 사랑이라는 모체를 대체할 만한 어떤 새로운 ‘공식’도 발명해 낼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크라잉 게임>을 사생활로 도피하는 반정치적인 이야기로 독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를 정치적 파워게임의 잔인함에 환멸을 느껴 개인적 실현, 즉 진정한 실존적 충족의 유일한 영역으로서 성적 사랑을 발견하는 혁명가의 주제의 변종으로 읽는 것은 잘못이다. 이 영화는 정치적으로, 그 내적인 배경으로 작용하는 아일랜드적 대의에 충실하다. 역설은 주인공이 안전한 천국을 발견하기를 원했던 바로 그 사생활의 영역 속에서, 그는 훨씬 더 현기증 나는 혁명을 그의 가장 내밀한 개인적 태도 속에서 완수하도록 강요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크라잉 게임>은 ‘정치적 파워게임으로부터 면제된 진정성의 섬으로서 사생활’ 대 ‘정치적 활동의 여전히 또다른 영역인 섹슈얼리티’라는 통상적인 이데올로기적 딜레마를 피해간다. 그보다 영화는 공적인 정치적 활동과 사적인 성적 도착 사이의 적대적 복합성을(*'복합성'은 '공모성complicity'의 오역이다) , 즉 정치적 혁명의 궁극의 성취로서 성적 혁명을 요구한 사드에게서 작동하고 있는 그 적대를 볼 수 있게 한다. 간단히 말해, <크라잉 게임>의 부제는 “아일랜드인들이여, 당신이 공화주의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또다른 노력을 해라!”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0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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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6-10-30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명령문을 곱씹어 보다가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하고 생각이 모아지네요. "공화주의자의 주체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주권의 역설- 인민에 기반을 두면서도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는-을 '주체와 대상'이라는 '가면 놀이'라는 역할극이 수시로 상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연애라는 무대 위에서 말이죠..."

로쟈 2006-10-30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보니까 마지막 문단에는 오역이 포함돼 있습니다(번역을 제가 다 확인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멘트를 저는 좀더 단순하게 생각하는데, 정치적 혁명이 다가 아니다. 성적 혁명이 더 필요하다(yet another effort), 라는 것이죠. "Irishmen, yet another effort, if you want to become republicans!"
 

다소 과장된 타이틀로 보이지만, 최근에 불역된 이승우의 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에 대한 호의적인 반응을 전하는 기사의 제목이 그렇다. '한국문학 유럽서 뿌리내린다'. 이전에 한국문학 번역현황과 관련된 페이퍼를 올린 거 같은데,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기사를 옮겨놓는다. '문학의 뒷계단'이란 카테고리에도 맞을 듯하고(우리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들은 유감스럽게도 계속 미뤄지고 있다. 평일에 한국문학이 아니라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는 처지인지라 마땅히 시간을 내기가 어렵다는 게 핑계이다). 재작년에 러시아 체류시 모스크바의 대형서점에서 단한권의 한국문학 작품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씁쓸했던 기억이 있는데, 러시아쪽 사정도 나아지기를 이 참에 기대해본다.

 

 

 

 

서울신문(06. 10. 27) 한국문학 유럽서 뿌리 내린다

한국문학이 유럽에서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프랑스, 독일 등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이 유럽 각지에 소개돼 평단의 호평을 받기 시작한 것은 오래됐지만 최근 들어 평론가의 관심은 물론 일반 독자들의 호기심을 끌어당기며 판매에서도 호조를 보이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최근 프랑스 서점가에서 돌풍을 일으킨 이승우의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이다. 지난 8월말 프랑스 줄마출판사에서 출간한 ‘식물들의 사생활’은 한국소설로는 이례적으로 출간 한달 만에 초판 2500부가 매진되는 기록을 세웠다. 2000년 ‘생의 이면’을 통해 이미 프랑스 문단에서 화제를 모은 바 있는 이승우의 소설은 출간과 동시에 일간지 ‘르 피가로’와 시사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등 언론매체에서 앞다퉈 기사를 다뤘고, 이어 프랑스 최대 서점체인망인 프낙의 ‘가장 주목받는 신간 외국소설 10권’과 또다른 대형서점 버진의 ‘가을 신간 권장도서목록 30권’에 선정됐다(*독역본 이미지들만 뜬다. 아래는 독역본 <생의 이면>).

번역을 지원한 대산문화재단 곽효환 팀장은 “프랑스에서는 바캉스 시즌이 끝난 가을에 신간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는데 올 가을 680여종의 신간 중에 이승우의 소설이 주목받았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라며 줄마출판사측도 놀라워했다.”고 전했다. 이승우 특유의 지적이고 관념적인 작품세계가 프랑스 독자들의 성향과 잘 맞았다는 분석이다.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독자의 눈길까지 사로잡았다는 점에서 이승우의 소설은 한국문학의 진정한 세계화에 장밋빛 기대를 걸게 하는 사례다.

이에 앞서 지난 4일 스웨덴 최대 일간지 ‘다켄스 니헤테르’는 박완서의 소설 ‘나목’을 문화면에 대서특필하며 큰 관심을 드러냈다.‘한국전쟁의 그늘 아래’라는 제목으로 실린 서평은 “한국전쟁과 1950년대라는 특수한 시공간을 다룬 작품임에도 모든 전쟁에 내재된 무감각한 증오 및 문화적 억압 그리고 전쟁 속에서 성숙해지는 주인공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고 호평했다.

대산문화재단과 한국문학번역원에 따르면 지금까지 해외에 번역·출간된 한국문학 작품은 세계 45개국, 총 1220여종. 작가별로는 고은 시인의 작품집이 8개국에서 16종이 소개됐고, 황석영 7개국 23종, 이문열 12개국 31종, 이청준 10개국 28종 등이다. 곽효환 팀장은 “한국문학이 세계 각국에 꾸준히 소개되고 있지만 이중 재판을 찍는 경우는 10권에 1권 정도”라며 “작가 선호도가 나라별로 다른 만큼 명확한 타깃마케팅이 필요한 때”라고 지적했다.

문화교류 차원을 넘어 세계 문학시장에서 우리 문학의 상품가치를 높이기위한 지원책도 적극 모색되고 있다. 한국문학번역원(원장 윤지관)은 지난달 25일부터 이달 3일까지 프랑스 파리, 스웨덴 스톡홀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등지에서 문학행사와 출판지원 조인식, 해외독후감 대회 시상식 등을 가졌다. 소설가 김훈, 은희경, 윤흥길, 황석영, 김인숙, 시인 김선우, 평론가 신수정 등이 참여했다. 번역원은 특히 내년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해외독후감대회를 확대할 방침이다. 윤부한 팀장은 “전세계 12곳의 한국문화원을 통해 독후감대회를 열어 현지 평론가와 독자 모두에게 우리 문학을 좀더 널리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이순녀기자)

06. 10. 29.

P.S. 아래가 불역본 <식물들의 사생활>이다. 여느 프랑스책들처럼 표지는 단촐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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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0-29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뿌리 내리다'와 '뿌리 내린다'의 차이. 후자는 뭔가 주술적인 바램이 포함된 것 같아요. ^^
날이 갈수록 번역된 문학 작품들을 도저히 못 읽겠어서 한반도에서 쓰인 것을 빼고는 띠엄띠엄 영어권의 작품만 읽어내고 있습니다. 흠.

로쟈 2006-10-2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서 '오타'가 났었네요.^^

테렌티우스 2006-12-02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서재를 읽는 것이 일상생활의 하나가 되었네요...^^
불어본 이미지는 아래의 프낙 서점 사이트에 있고요... 그림을 클릭하면 큰 사진이 뜹니다...

http://www4.fnac.com/Shelf/article.aspx?PRID=1843378&Mn=6&Ra=-1&To=0&Nu=2&Fr=3


로쟈 2006-12-02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이미지를 옮겨놓았습니다. 프랑스쪽은 표지장정에는 돈이 별로 안 들 거 같습니다.^^
 

오랜만에 '한겨레21'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눈에 띈 칼럼을 옮겨온다 제목이 '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지면?'이니까 '로자의 방주'라는 카테고리에 딱 맞는 테마이기도 하다. 필자는 저명한 과학칼럼니스트 김동광씨이다. 예전에 교양과학서 전문번역집단이었던 과학세대의 리더격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저술에도 주력하고 있는 듯하다(그와 함께 과학 저술가로서 기억해둘 만한 이름은 이인식씨이다). 그가 번역한 책들을 검색해보니 내가 갖고 있는 것만 해도 상당한 수에 달한다. 특히 눈에 띄는 건 스티븐 제이 굴드나 스티븐 호킹의 책들이다. 국내에서도 굴드급의 과학 저술가가 나오기를 은근히 기대해본다(강조는 나의 것이다).

 

 

 

 

한겨레21(06. 10. 24) 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지면?

진화생물학자들은 생물의 기나긴 진화 과정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위치를 밝혀내려고 노력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생물의 진화 과정을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했고, 단세포 생물에서 영장류에 이르는 과정을 일직선이나 계단처럼 매끄럽게 이어지는 단일한 경로로 간주하곤 했다. 인류의 탄생이 지극히 우연적인 과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생물 총회’가 열리면 인간은 퇴출 대상

그런데 인류가 등장한 세상은 그 이전에 견줘 너무나 크게 변화했다. 이제 인류가 등장하기 이전의 세계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이다.


△ 인간들이 생태계 깊숙이 들어가면서 자연의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의 해안에서 하마 떼가 떠내려가고 있다.(사진/ REUTERS)

그 변화는 대부분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행됐다. 일부 추정에 따르면 인류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생산성의 약 40%를 무단으로 징발해서 오로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고 한다. 상당 부분이 먹고사는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른바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인해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화적 생활을 위해 들어가는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물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로 인해 불과 100여 년 전과 비교할 수도 없는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쏟아낸다. 사람들이 도시를 짓고 농장을 만들면서 전유하고 있는 토지는 지구 전체 면적의 3분의 1에 이른다. 울창하던 숲과 지구의 허파이자 생물다양성의 보고로 알려진 열대우림도 이제는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오대양의 주요 어장들 중 상당수는 이미 오래전에 어자원이 고갈됐다. 남획과 오염, 그리고 서식지 파괴로 생존 기로에 서 있는 생태계의 다른 구성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류는 터무니없는 탐욕과 횡포를 부리고 있는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인류는 자신들끼리의 다툼으로 시시각각 생물권 전체의 존재 가능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도박판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소련은 냉전 종식 이후 상당량의 핵무기를 해체하면서 핵으로 인한 절멸 가능성을 크게 줄이는 듯했지만 얼마 전부터 파키스탄 등이 다시 핵무장을 하면서 일촉즉발의 위험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더구나 북한과 미국이 핵을 둘러싸고 마주 달리는 폭주족처럼 누가 끝까지 버티느냐를 가리는 ‘겁쟁이 경기’를 벌이면서 자칫 한반도가 재앙의 터전이 될 수도 있는 위기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핵으로 인한 재앙은 생물권 전체의 파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쯤 되면 유엔이 아니라 생물들의 대표가 한자리에 모여서 한반도를 둘러싼 위기 고조를 생물권 전체의 위기로 간주하고 시급한 해결책을 논의하는 생물권 임시 총회가 열릴 법도 하다. 거기에서는 사람과 도롱뇽, 귀신고래, 들국화 그리고 미생물까지 모든 생물종이 똑같은 의결권을 가진다고 가정한다면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 과연 어떤 결정이 내려질까?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늦게 무대에 등장해서 가장 빠른 시간 동안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온갖 포악과 전횡을 해대는 골치 아픈 막내둥이를 영원히 퇴출하기로 결론짓지 않겠는가? 사실 그런 결정이 나도 우리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는 셈이다.

인간이 퇴출되어 어느 먼 외계 행성에서 재교육을 받기 위해 강제 송환됐다면, 지구는 어떻게 될까. <뉴사이언티스트> 최근호는 ‘사람이 없는 지구를 상상해보자’라는 특집 기사를 통해 지구에서 어느 날 갑자기 사람이 모두 사라졌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했다(*이 기사는 아래에 옮겨놓았다). 미국 샌타바버라에 있는 국립생태분석종합센터의 보전생물학자인 존 오록은 사람의 자취가 사라지는 순간 지구의 생태계는 즉각적으로 호전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변화로 밤하늘에서 인공 조명이 사라지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 돌아오게 된다. 지구 전체의 18.7%가 인공 불빛에 오염됐다지만, 웬만한 도시 지역에서는 별을 보기 힘든 지경이다. 한동안 재생 가능 에너지를 이용하는 자동 전등들이 빛을 내더라도, 유지·관리가 되지 않기에 지구의 밤에서 문명의 불빛이 사라지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원전의 방사능 누출도 빨리 복원돼

건물들과 도로는 어떻게 될까? 오늘날의 건물은 약 60년, 교량은 120년, 댐은 250년가량 견딜 수 있게 설계된다고 한다. 그러나 이 수치는 누군가가 유지·관리를 하고 벌어진 틈을 메워주는 등 수리와 보수를 해줄 때 지속될 수 있고, 아무도 돌보지 않으면 훨씬 빨리 무너진다. 체르노빌 사고로 사람들이 철수한 프리프야트시가 실례이다. 올해로 체르노빌 사고가 일어난 지 꼭 20년이 된 이 도시의 건물들은 이미 붕괴가 진행 중이다. 그리고 태풍, 홍수 등의 자연재해로 입는 손상이 누적되면서 훨씬 빨리 폐허로 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건물이나 도로의 잔해들, 특히 콘크리트와 돌로 된 구조물의 일부는 수천 년 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


△ 지구촌의 약 19%가 인공 불빛에 오염됐다. 거대 건축물이 즐비한 이 지역은 인간이 사라진 상태에션 느리게 복구 될 수 밖에 없다(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현재 가동 중인 원자력 발전소는 어떻게 될까? 핵폐기물 관리 전문가인 로드니 윙은 원자력발전소를 유지·관리하던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면 냉각수가 증발하고 결굴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참사가 빚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로 인해 엄청난 양의 방사능이 누출된다. 그렇지만 자연의 복원력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강하다고 한다. 체르노빌의 경우에도 사람들이 철수한 뒤, 몇 년 만에 생태계가 복원되기 시작해서 현재는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는 늑대까지 번성하고 있다.

생태계의 복원 속도는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온난하고 습윤한 지역은 추운 지역에 비해 복원이 빠르게 진행된다. 사람의 토지 이용을 연구하는 생태학자 브래드 스텔폭스가 캐나다 지역을 대상으로 시뮬레이션한 결과 숲은 약 50년이 지나면 전 지역의 80%를 덮고, 200년 뒤에는 95%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반면 벼나 밀처럼 단일 품종이 경작되던 지역이 자연 상태로 돌아가기까지는 수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한다. 보전생태학자들은 일부 지역의 경우 사람이 사라져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가축이나 애완동물의 운명은? 일부는 그 선조였던 야생동물의 상태로 돌아가겠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인위 선택의 결과로 스스로 먹이를 찾거나 번식한 능력을 상실한 동물들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미국 환경보호국의 제이 라이히맨은 “사람이 사라진 들판에 푸들이 떼를 지어 달릴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고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유전자조작(GM) 작물들은 어떻게 될까? 일부는 야생종으로 살아남겠지만, 제초제 내성을 갖도록 조작된 식물들은 제초제가 없는 상황에서 경쟁종에 비해 유리할 것이 없기 때문에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사람이 사라지면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동물들이 다시 번성할 수 있을까? 서식지 파괴가 멸종의 큰 원인이기 때문에 상황이 나아질 수 있지만, 일부 종은 이미 개체 수가 더 이상 복원될 수 없는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크게 상황이 나아지기 힘들 전망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명맥을 유지하던 멸종위기종 가운데 상당수는 사람이 사라지면서 더 빨리 자취를 감출 수도 있다. 그 원죄는 인간에게 있지만 사람들을 그리워할 생물종은 이들이 유일한 셈이다.

대기과학자인 수잔 솔로몬은 화석연료 사용 등으로 대기 중에 방출된 이산화탄소가 기후에 미치는 영향은 1천 년 이상 계속되고, 남아 있는 과잉의 이산화탄소를 바다가 모두 흡수하기까지는 2만 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모든 요소들을 종합해서 지구상에서 인류가 남겼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10만 년으로 예측된다. 먼 외계의 방문자가 지구를 찾아와 겉으로만 훑어본다면 어떤 문명의 흔적도 찾지 못할 것이다.

기후변화, 핵전쟁보다 무섭다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생각되는 인류 문명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지배적인 종으로 군림하던 인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도 지구와 생물권이 운행되는 데 아무런 문제도 없다. 오히려 피폐해지던 생태계는 즉각 복원 작업을 시작하고, 그 누구도 인간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이다. 생태학자들은 핵전쟁보다 더 심각한 위기가 갑작스런 기후변화와 그로 인한 생태계의 교란이라고 주장한다. 요즘 한반도는 들어보지도 못한 가을 더위에 시달리고 있다. 핵위기에 떠밀려 하찮은 현상으로 치부되지만, 어쩌면 우리를 더 낯선 상황으로 몰아갈 전조일지도 모르지 않은가.(김동광 과학저술가·고려대 강사)

Cover of  issue of New Scientist magazine 

Imagine Earth without people

  • Bob Holmes
  • Humans are undoubtedly the most dominant species the Earth has ever known. In just a few thousand years we have swallowed up more than a third of the planet's land for our cities, farmland and pastures. By some estimates, we now commandeer 40 per cent of all its productivity. And we're leaving quite a mess behind: ploughed-up prairies, razed forests, drained aquifers, nuclear waste, chemical pollution, invasive species, mass extinctions and now the looming spectre of climate change. If they could, the other species we share Earth with would surely vote us off the planet.

    15,589 Number of species threatened with extinction

    Now just suppose they got their wish. Imagine that all the people on Earth - all 6.5 billion of us and counting - could be spirited away tomorrow, transported to a re-education camp in a far-off galaxy. (Let's not invoke the mother of all plagues to wipe us out, if only to avoid complications from all the corpses). Left once more to its own devices, Nature would begin to reclaim the planet, as fields and pastures reverted to prairies and forest, the air and water cleansed themselves of pollutants, and roads and cities crumbled back to dust.

    "The sad truth is, once the humans get out of the picture, the outlook starts to get a lot better," says John Orrock, a conservation biologist at the National Center for Ecological Analysis and Synthesis in Santa Barbara, California. But would the footprint of humanity ever fade away completely, or have we so altered the Earth that even a million years from now a visitor would know that an industrial society once ruled the planet?

    9.7 Average eco-footprint of a US citizen, in hectares

    If tomorrow dawns without humans, even from orbit the change will be evident almost immediately, as the blaze of artificial light that brightens the night begins to wink out. Indeed, there are few better ways to grasp just how utterly we dominate the surface of the Earth than to look at the distribution of artificial illumination (see Graphic). By some estimates, 85 per cent of the night sky above the European Union is light-polluted; in the US it is 62 per cent and in Japan 98.5 per cent. In some countries, including Germany, Austria, Belgium and the Netherlands, there is no longer any night sky untainted by light pollution.

    18.7 Percentage of Earth's surface affected by light pollution

    "Pretty quickly - 24, maybe 48 hours - you'd start to see blackouts because of the lack of fuel added to power stations," says Gordon Masterton, president of the UK's Institution of Civil Engineers in London. Renewable sources such as wind turbines and solar will keep a few automatic lights burning, but lack of maintenance of the distribution grid will scuttle these in weeks or months. The loss of electricity will also quickly silence water pumps, sewage treatment plants and all the other machinery of modern society.

    The same lack of maintenance will spell an early demise for buildings, roads, bridges and other structures. Though modern buildings are typically engineered to last 60 years, bridges 120 years and dams 250, these lifespans assume someone will keep them clean, fix minor leaks and correct problems with foundations. Without people to do these seemingly minor chores, things go downhill quickly.

    The best illustration of this is the city of Pripyat near Chernobyl in Ukraine, which was abandoned after the nuclear disaster 20 years ago and remains deserted. "From a distance, you would still believe that Pripyat is a living city, but the buildings are slowly decaying," says Ronald Chesser, an environmental biologist at Texas Tech University in Lubbock who has worked extensively in the exclusion zone around Chernobyl. "The most pervasive thing you see are plants whose root systems get into the concrete and behind the bricks and into doorframes and so forth, and are rapidly breaking up the structure. You wouldn't think, as you walk around your house every day, that we have a big impact on keeping that from happening, but clearly we do. It's really sobering to see how the plant community invades every nook and cranny of a city."

    With no one to make repairs, every storm, flood and frosty night gnaws away at abandoned buildings, and within a few decades roofs will begin to fall in and buildings collapse. This has already begun to happen in Pripyat. Wood-framed houses and other smaller structures, which are built to laxer standards, will be the first to go. Next down may be the glassy, soaring structures that tend to win acclaim these days. "The elegant suspension bridges, the lightweight forms, these are the kinds of structures that would be more vulnerable," says Masterton. "There's less reserve of strength built into the design, unlike solid masonry buildings and those using arches and vaults."

    But even though buildings will crumble, their ruins - especially those made of stone or concrete - are likely to last thousands of years. "We still have records of civilisations that are 3000 years old," notes Masterton. "For many thousands of years there would still be some signs of the civilisations that we created. It's going to take a long time for a concrete road to disappear. It might be severely crumbling in many places, but it'll take a long time to become invisible."

    The lack of maintenance will have especially dramatic effects at the 430 or so nuclear power plants now operating worldwide. Nuclear waste already consigned to long-term storage in air-cooled metal and concrete casks should be fine, since the containers are designed to survive thousands of years of neglect, by which time their radioactivity - mostly in the form of caesium-137 and strontium-90 - will have dropped a thousandfold, says Rodney Ewing, a geologist at the University of Michigan who specialises in radioactive waste management. Active reactors will not fare so well. As cooling water evaporates or leaks away, reactor cores are likely to catch fire or melt down, releasing large amounts of radiation. The effects of such releases, however, may be less dire than most people suppose.

    The area around Chernobyl has revealed just how fast nature can bounce back. "I really expected to see a nuclear desert there," says Chesser. "I was quite surprised. When you enter into the exclusion zone, it's a very thriving ecosystem."

    The first few years after people evacuated the zone, rats and house mice flourished, and packs of feral dogs roamed the area despite efforts to exterminate them. But the heyday of these vermin proved to be short-lived, and already the native fauna has begun to take over. Wild boar are 10 to 15 times as common within the Chernobyl exclusion zone as outside it, and big predators are making a spectacular comeback. "I've never seen a wolf in the Ukraine outside the exclusion zone. I've seen many of them inside," says Chesser.

    The same should be true for most other ecosystems once people disappear, though recovery rates will vary. Warmer, moister regions, where ecosystem processes tend to run more quickly in any case, will bounce back more quickly than cooler, more arid ones. Not surprisingly, areas still rich in native species will recover faster than more severely altered systems. In the boreal forests of northern Alberta, Canada, for example, human impact mostly consists of access roads, pipelines, andother narrow strips cut through the forest. In the absence of human activity, the forest will close over 80 per cent of these within 50 years, and all but 5 per cent within 200, according to simulations by Brad Stelfox, an independent land-use ecologist based in Bragg Creek, Alberta.

    In contrast, places where native forests have been replaced by plantations of a single tree species may take several generations of trees - several centuries - to work their way back to a natural state. The vast expanses of rice, wheat and maize that cover the world's grain belts may also take quite some time to revert to mostly native species.

    At the extreme, some ecosystems may never return to the way they were before humans interfered, because they have become locked into a new "stable state" that resists returning to the original. In Hawaii, for example, introduced grasses now generate frequent wildfires that would prevent native forests from re-establishing themselves even if given free rein, says David Wilcove, a conservation biologist at Princeton University.

    Feral descendants of domestic animals and plants, too, are likely to become permanent additions in many ecosystems, just as wild horses and feral pigs already have in some places. Highly domesticated species such as cattle, dogs and wheat, the products of centuries of artificial selection and inbreeding, will probably evolve back towards hardier, less specialised forms through random breeding. "If man disappears tomorrow, do you expect to see herds of poodles roaming the plains?" asks Chesser. Almost certainly not - but hardy mongrels will probably do just fine. Even cattle and other livestock, bred for meat or milk rather than hardiness, are likely to persist, though in much fewer numbers than today.

    3.3bn Global population of cattle, sheep and goats

    What about genetically modified crops? In August, Jay Reichman and colleagues at the US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s labs in Corvallis, Oregon, reported that a GM version of a perennial called creeping bentgrass had established itself in the wild after escaping from an experimental plot in Oregon. Like most GM crops, however, the bentgrass is engineered to be resistant to a pesticide, which comes at a metabolic cost to the organism, so in the absence of spraying it will be at a disadvantage and will probably die out too.

    Nor will our absence mean a reprieve for every species teetering on the brink of extinction. Biologists estimate that habitat loss is pivotal in about 85 per cent of cases where US species become endangered, so most such species will benefit once habitats begin to rebound. However, species in the direst straits may have already passed some critical threshold below which they lack the genetic diversity or the ecological critical mass they need to recover. These "dead species walking" - cheetahs and California condors, for example - are likely to slip away regardless.

    784 Number of species that have gone extinct in the wild since 1500 AD

    Other causes of species becoming endangered may be harder to reverse than habitat loss. For example, about half of all endangered species are in trouble at least partly because of predation or competition from invasive introduced species. Some of these introduced species - house sparrows, for example, which are native to Eurasia but now dominate many cities in North America - will dwindle away once the gardens and bird feeders of suburban civilisation vanish. Others though, such as rabbits in Australia and cheat grass in the American west, do not need human help and will likely be around for the long haul and continue to edge out imperilled native species.

    388 Number of species listed on the invasive species database

    Ironically, a few endangered species - those charismatic enough to have attracted serious help from conservationists - will actually fare worse with people no longer around to protect them. Kirtland's warbler - one of the rarest birds in North America, once down to just a few hundred birds - suffers not only because of habitat loss near its Great Lakes breeding grounds but also thanks to brown-headed cowbirds, which lay their eggs in the warblers' nests and trick them into raising cowbird chicks instead of their own. Thanks to an aggressive programme to trap cowbirds, warbler numbers have rebounded, but once people disappear, the warblers could be in trouble, says Wilcove.

    On the whole, though, a humanless Earth will likely be a safer place for threatened biodiversity. "I would expect the number of species that benefit to significantly exceed the number that suffer, at least globally," Wilcove says.

    On the rebound

    In the oceans, too, fish populations will gradually recover from drastic overfishing. The last time fishing more or less stopped - during the second world war, when few fishing vessels ventured far from port - cod populations in the North Sea skyrocketed. Today, however, populations of cod and other economically important fish have slumped much further than they did in the 1930s, and recovery may take significantly longer than five or so years.

    The problem is that there are now so few cod and other large predatory fish that they can no longer keep populations of smaller fish such as gurnards in check. Instead, the smaller fish turn the tables and outcompete or eat tiny juvenile cod, thus keeping their erstwhile predators in check. The problem will only get worse in the first few years after fishing ceases, as populations of smaller, faster-breeding fish flourish like weeds in an abandoned field. Eventually, though, in the absence of fishing, enough large predators will reach maturity to restore the normal balance. Such a transition might take anywhere from a few years to a few decades, says Daniel Pauly, a fisheries biologist at 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in Vancouver.

    With trawlers no longer churning up nutrients from the ocean floor, near-shore ecosystems will return to a relatively nutrient-poor state. This will be most apparent as a drop in the frequency of harmful algal blooms such as the red tides that often plague coastal areas today. Meanwhile, the tall, graceful corals and other bottom-dwelling organisms on deep-water reefs will gradually begin to regrow, restoring complex three-dimensional structure to ocean-floor habitats that are now largely flattened, featureless wastelands.

    Long before any of this, however - in fact, the instant humans vanish from the Earth - pollutants will cease spewing from automobile tailpipes and the smokestacks and waste outlets of our factories. What happens next will depend on the chemistry of each particular pollutant. A few, such as oxides of nitrogen and sulphur and ozone (the ground-level pollutant, not the protective layer high in the stratosphere), will wash out of the atmosphere in a matter of a few weeks. Others, such as chlorofluorocarbons, dioxins and the pesticide DDT, take longer to break down. Some will last a few decades.

    The excess nitrates and phosphates that can turn lakes and rivers into algae-choked soups will also clear away within a few decades, at least for surface waters. A little excess nitrate may persist for much longer within groundwater, where it is less subject to microbial conversion into atmospheric nitrogen. "Groundwater is the long-term memory in the system," says Kenneth Potter, a hydrologist at the University of Wisconsin at Madison.

    Carbon dioxide, the biggest worry in today's world because of its leading role in global warming, will have a more complex fate. Most of the CO2 emitted from burning fossil fuels is eventually absorbed into the ocean. This happens relatively quickly for surface waters - just a few decades - but the ocean depths will take about a thousand years to soak up their full share. Even when that equilibrium has been reached, though, about 15 per cent of the CO2 from burning fossil fuels will remain in the atmosphere, leaving its concentration at about 300 parts per million compared with pre-industrial levels of 280 ppm. "There will be CO2 left in the atmosphere, continuing to influence the climate, more than 1000 years after humans stop emitting it," says Susan Solomon, an atmospheric chemist with the US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NOAA) in Boulder, Colorado. Eventually calcium ions released from sea-bottom sediments will allow the sea to mop up the remaining excess over the next 20, 000 years or so.

    Even if CO2 emissions stop tomorrow, though, global warming will continue for another century, boosting average temperatures by a further few tenths of a degree. Atmospheric scientists call this "committed warming", and it happens because the oceans take so long to warm up compared with the atmosphere. In essence, the oceans are acting as a giant air conditioner, keeping the atmosphere cooler than it would otherwise be for the present level of CO2. Most policy-makers fail to take this committed warming into account, says Gerald Meehl, a climate modeller at the National Center for Atmospheric Research, also in Boulder. "They think if it gets bad enough we'll just put the brakes on, but we can't just stop and expect everything to be OK, because we're already committed to this warming."

    That extra warming we have already ordered lends some uncertainty to the fate of another important greenhouse gas, methane, which produces about 20 per cent of our current global warming. Methane's chemical lifetime in the atmosphere is only about 10 years, so its concentration could rapidly return to pre-industrial levels if emissions cease. The wild card, though, is that there are massive reserves of methane in the form of methane hydrates on the sea floor and frozen into permafrost. Further temperature rises may destabilise these reserves and dump much of the methane into the atmosphere. "We may stop emitting methane ourselves, but we may already have triggered climate change to the point where methane may be released through other processes that we have no control over," says Pieter Tans, an atmospheric scientist at NOAA in Boulder.

    No one knows how close the Earth is to that threshold. "We don't notice it yet in our global measurement network, but there is local evidence that there is some destabilisation going on of permafrost soils, and methane is being released," says Tans. Solomon, on the other hand, sees little evidence that a sharp global threshold is near.

    All things considered, it will only take a few tens of thousands of years at most before almost every trace of our present dominance has vanished completely. Alien visitors coming to Earth 100,000 years hence will find no obvious signs that an advanced civilisation ever lived here.

    Yet if the aliens had good enough scientific tools they could still find a few hints of our presence. For a start, the fossil record would show a mass extinction centred on the present day, including the sudden disappearance of large mammals across North America at the end of the last ice age. A little digging might also turn up intriguing signs of a long-lost intelligent civilisation, such as dense concentrations of skeletons of a large bipedal ape, clearly deliberately buried, some with gold teeth or grave goods such as jewellery.

    And if the visitors chanced across one of today's landfills, they might still find fragments of glass and plastic - and maybe even paper - to bear witness to our presence. "I would virtually guarantee that there would be some," says William Rathje, an archaeologist at Stanford University in California who has excavated many landfills. "The preservation of things is really pretty amazing. We think of artefacts as being so impermanent, but in certain cases things are going to last a long time."

    Ocean sediment cores will show a brief period during which massive amounts of heavy metals such as mercury were deposited, a relic of our fleeting industrial society. The same sediment band will also show a concentration of radioactive isotopes left by reactor meltdowns after our disappearance. The atmosphere will bear traces of a few gases that don't occur in nature, especially perfluorocarbons such as CF4, which have a half-life of tens of thousands of years. Finally a brief, century-long pulse of radio waves will forever radiate out across the galaxy and beyond, proof - for anything that cares and is able to listen - that we once had something to say and a way to say it.

    But these will be flimsy souvenirs, almost pathetic reminders of a civilisation that once thought itself the pinnacle of achievement. Within a few million years, erosion and possibly another ice age or two will have obliterated most of even these faint traces. If another intelligent species ever evolves on the Earth - and that is by no means certain, given how long life flourished before we came along - it may well have no inkling that we were ever here save for a few peculiar fossils and ossified relics. The humbling - and perversely comforting - reality is that the Earth will forget us remarkably quickly.(From issue 2573 of New Scientist magazine, 12 October 2006, page 36-41)

    06.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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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젝의 '궁정식 사랑, 혹은 물(物)로서의 여성' 세번째 파트이다(이 페이퍼를 처음 접하신 분들은 앞의 두 글을 먼저 읽어보시길). 내용은 궁정식 사랑의 다양한 사례들/변종들을 다루고 있기에, 더구나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들을 분석하고 있기에 읽기에 가장 편하고 흥미로운 절이기도 하다. 원래 절제목은 그냥 '예증(Exemplications)'이지만 내용을 고려하여 '궁정식 사랑의 변종들'이라고 바꿔달고서 몇 가지 이미지들을 보충해넣도록 한다. 알다시피 강조와 군말은 나의 것이다.

     

     

     

     

    13세기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궁정식 사랑의 이러한 매트릭스에서 나온 수많은 변종들과 조우한다. 예컨대 <위험한 관계>에서, 몽트레이유 후작부인과 발몽의 관계는 분명히 변덕스러운 귀부인과 그녀의 하인과의 관계다(*알다시피 드 라클로 원작의 <위험한 관계>는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고, 또 각색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스티븐 프리어즈의 <위험한 관계>, 밀로스 포먼의 <발몽>, 그리고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이 있다).


     

     

     

     

    여기서 역설은 하인이 약속받은 자비의 제스처를 얻기 위해 그가 수행해야 하는 임무의 성격에 달려 있다. 그는 다른 여인들을 유혹해야 한다. 그의 호된 시련은 열정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조차도 그의 희생자들에 대한 차가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을 요구한다. 승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그의 희생자들을 버려야 하며, 그럼으로써 귀부인에 대한 그의 충성을 증명한다.

    상황은 발몽이 그의 희생자들 중 한 명(투르벨 회장부인)과 사랑에 빠져 ‘의무를 방기’했을 때 복잡해진다. 후작부인은 정당하게도 그의 변명(그 유명한 “억제하기 힘들다.” 즉 그것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그렇게 되어갈 수밖에 없다)을 발몽의 존엄성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서, (그 용어의 칸트적인 의미에서) ‘정념적’ 상태에 대한 불쌍한 의존으로 치부한다.

    따라서 발몽의 ‘배신’에 대한 후작부인의 반응은 엄밀히 윤리적이다. 발몽의 변명은 도덕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이 의무를 수행하는 데 실패했을 때 하는 변명 - “어쩔 수 없었어. 그것이 내 본성이고, 난 그저 충분히 강하지 못하거든……- 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발몽에 대한 그녀의 메시지는 ”너는 해야 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Du kannst, denn du sollst!)"라는 칸트의 모토를 상기시킨다. 그런 까닭에, 발몽 후작에게 가해진 처벌은 꽤 적절한 것이다. 투르벨 회장부인을 거절하면서 그는 정확히 똑같은 말에 의존해야 한다. 즉 그는 그녀를 향한 열정이 만료되었다면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는, 일은 그렇게 되어갈 뿐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설명하는 편지를 작성해야 한다.

     

     

     

     

    궁정식 사랑의 매트릭스에서 나온 또다른 변종은 시라노 드 베르주락(Cyrano de Bergerac)과 록산(Roxane)의 이야기에서 출현한다(*우리에겐 제라르 드 파르디유 주연의 영화 <시라노>(1990)로 소개된 바 있다). 키라노는 그의 외설적인 자연적 기형(지나치게 긴 코)을 부끄러워해서 아름다운 록산에게 감히 사랑을 고백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는 그와 그녀 사이에 잘 생긴 젊은 병사를 개입시키고, 그 병사에게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대리인의 역할을 부여한다. 록산은 변덕스러운 귀부인에게 어울리게도 그녀의 연인이 우아한 시적인 단어로 사랑을 표현하기를 요구한다. 불운하고 순진한 병사가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자 시라노는 급히 그를 도와 전쟁터에 있는 병사를 위해 열정적인 사랑의 편지를 쓴다.

    대단원은 두 단계에서, 즉 비극적 단계와 멜로드라마적 단계에서 일어난다. 록산은 병사에게 그의 아름다운 육체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세련된 영혼을 더 사랑한다고, 그의 편지에 깊이 감동받은 까닭에 그의 몸이 상하고 못 생겨질지라도 그를 계속 사랑할 것이라고 말한다. 병사는 이 말에 전율한다. 그는 록산이 실제의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편지를 쓴 남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시라노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모욕을 참을 수 없어 자살하려는 듯 돌진해 죽는다. 록산은 수도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파리 사교계의 생활에 대한 정보를 주는 시라노의 정기적인 방문을 받는다.

    이러한 방문이 이루어지는 동안 록산은 그에게 그녀의 죽은 연인의 마지막 편지를 큰 소리로 일어달라고 요청한다. 이제 멜로드라마적 계기가 작동한다. 록산은 갑자기 시러노가 편지를 읽지 않고 있고 암송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그가 편지의 진짜 작성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녀는 심한 동요 속에서 이 신체장애가 있는 건달 안에서 그의 진정한 사랑을 알아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시라노는 이러한 만남에서 치명적으로 상처받아왔기 때문이다……

    데이빗 린치의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괴로운 장면 중의 하나는 궁정식 사랑을 특징짓는 지연의 논리라는 매트릭스에 기대서만 이해할 수 있다. 외로운 모텔 방에서 윌럼 대포는 로라 던을 난폭하게 내리누른다. 그는 그녀의 내밀함의 공간을 침범하고 위협적으로 “날 씹해주세요, 라고 말해봐”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그녀를 만지고 꽉 껴안는다.

    Wild at Heart

    추하고 불쾌한 장면들이 지나간 다음 결국 지친 로라 던이 “날 씹해주세요” 하고 말했을 때, 대포는 갑자기 물러나 훌륭하고 친절한 웃음을 지으면서 기뻐하며 응답한다. “됐어! 나 오늘 시간 없어. 다른 때 즐겁게 하지…….” 그는 그가 실제로 원했던 것을 얻는다. 그것은 성 행위 자체가 아니라 단지 그 행위에 대한 그녀의 동의, 그녀의 상징적 굴욕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개입하는 것은 큰 타자, 즉 초(超)주체적인(trans-subjective) 상징적 질서의 개입이다. 대포는 침략적인 압력을 수단으로 하여 큰 타자의 장 속에서 그녀의 동의를 ‘기입’하고 ‘기록’하는 것을 얻어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동일한 모티프의 역전된 변종이 트뤼포의 <아메리카의 밤>에서의 한 짧은 사랑 장면에서 작동한다. 호텔에서 스튜디오로 운전해 가다가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났을 때, 보조 촬영기사와 여자 스크립터는 호숫가에 그들만이 있음을 발견한다. 오랜 동안 그녀를 쫓아다녔던 보조 촬영기사는 기회를 얻어 그가 그녀를 얼마나 갈망해왔는가, 그리고 지금 그들만이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얼마나 많은 것을 의미하는가, 그러니 그녀가 짧은 성교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에 관해 감동적인 말들을 쏟아붓는다. 여자는 그저 “그러지 뭐”라고 말하고는 바지 단추를 풀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고상하지 못한 제스처는 그녀를 접근할 수 없는 귀부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유혹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그는 단지, “어떻게 하라고요? 자 이렇게?” 라고 하며 머뭇거릴 뿐이다. 이 장면이 <광란의 사랑>에서의 장면(그리고 궁정식 사랑의 매트릭스 안에서 그것을 작동시키는 것)과 공유하는 것은 예기치 않은 거절의 제스처다. 오랜 끈질긴 노력 끝에 얻어낸 여성의 “예!”라는 말에 대한 남성의 응답은 그 행위를 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에릭 로메르의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에서 궁정식 사랑이라는 모체(matrix)의 보다 세련된 변형을 만나게 된다. 궁정식 사랑은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이 한 거짓말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를 제공한다. 영화의 중심 부분은 남자 주인공과 그의 여자친구 모드가 함께 보낸 밤을 묘사하는 데 할애된다. 그들은 몇 시간 오래 이야기하고 심지어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잤으나, 남자 주인공이 주저하였기 때문에 성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전날 저녁에 교회 앞에서 만난 신비로운 금발 여자에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모드와 섹스할 수 있는]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누군지조차 모르지만 이미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해버렸다(이를테면, 그 금발은 그의 귀부인Lady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뒤를 보여준다. 남자 주인공은 그 금발 여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결혼한 상태인데, 우연히 해변에서 모드와 마주친다. 그의 부인이 그에게 이 모르는 여자는 누구냐고 물었을 때, 남자 주인공은 거짓말을 한다, 그에겐 손해가 될 것으로 보이는 거짓말을. 그는 그의 아내에게, 모드는 결혼 전 그가 마지막으로 사랑의 모험을 나눈 상대[즉, 마지막 섹스 파트너]라고 거짓말을 한다. 왜 이런 거짓말을? 왜냐하면 그가 사실을 말할 경우, 모드 역시 [그에겐] 귀부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그의 아내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동안의 무의미한 성적 접촉이란 것이 불가능한 그런 귀부인 말이다. 그는 아내에게 간단히 거짓말을 함으로써, 즉 모드와 섹스를 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는 그의 아내에게 모드는 그의 여인이 아니었음을, 그저 한 때 지나쳐간 [즉, ‘짧은 시간 동안의 무의미한 성적 접촉’을 나눈] 친구일 뿐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십 년 동안(*'recent decades'이므로 '최근 몇 십년 동안'이라고 해야 맞다)  궁정식 사랑의 최종적 판본은 물론 필름 느와르에서의 요부(femme fatale)의 형상 속에서 나타난다. 외상적인 여성-물(Woman-Thing)은 그녀의 탐욕스럽고 변덕스러운 요구들을 통해 하드보일드 주인공을 파멸로 이끈다. 여기서 핵심 역할은, 요부를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제3의 존재(갱 집단의 보스 역할 같은)에 의해 수행된다. 그의 존재가 그녀를 접근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래서 남자 주인공과 그녀와의 관계는 위반의 관계로 낙인찍힌다. 그녀와 연루되면서 주인공은 그 자신의 보스이기도 한 아버지와 같은 인물을 배반하게 된다(*지젝이 거론하고 있는 영화 몇 편의 포스터들이다).

    느와르의 세계에서의 요부와 궁정식 사랑의 여인을 이렇게 연결시키는 일이 놀라운 것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필름 느와르에서 요부는 기사가 충성을 서약한 그 고상하고도 군주스러운 여인과는 정반대가 아닌가 말이다. 하드보일드 주인공은 요부에게 느끼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그는 그녀를,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그 자신을 혐오하지 않는가? 그는 요부에 대한 그의 사랑을 진정한 자기 자신에 대한 배반으로 경험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가 여인에 대한 이차적 이상화 말고, 여인이 갖는 원초적인 외상적 충격을 명심한다면, 관련성은 분명해진다. 여인처럼, 요부 역시 ‘비인간적인’ 파트너요, 그와는 어떤 관계도 불가능한 외상적 대상(Object)이며, 무의미하고 변덕스러운 명령을 부과하는 감정 없는(apathetic) 공동(空洞)이니까 말이다...  

    06.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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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0-29 1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0-29 1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벤더스의 영화였던가요? 언젠가 빨리 돌려봐서 봤다고도, 안봤다고도 하기 뭐하네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봐야겠네요...
     

    가방을 뒤지다 보니까 그제 날짜 한국일보가 나온다. 나중에 읽으려고 넣어둔 것인데, 그 '나중 읽기'의 대상이 이어령 교수와의 인터뷰 기사였다. 이번에 문학사상사에서 '이어령 라이브러리' 30권이 완간되었고, 또 1956년 한국일보 지면으로 등단한 바 문필활동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도 열린다고 한다. 200여권의 저작 중에서 내가 읽은 이어령은 몇 권 되지 않지만(30권으로 줄여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저항의 문학>을 읽었던 기억은 생생한 만큼 관련 기사들과 함께 몇 마디 군말을 덧붙여두도록 한다. '곁다리텍스트'로 분류한 것은 <저항의 문학>의 서문을 말미에서 읽어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먼저 읽을 건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의 기사들이다.

    한국일보(06. 10. 25)  문필활동 50년 전집으로 정리한 이어령

    누군가 재미 삼아 세어보니 직함이 무려 15개였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대학교수, 신문 칼럼니스트, 문화부 장관, 문명비평가, 에세이스트…. 그 앞에 서는 사람은 누구나 어느 호칭을 사용해 그를 불러야 할지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오롯이 글 쓰는 사람으로 규정할 뿐이다. 00

    문학과 정치, 문화와 문명을 가로지르며 쉼 없이 창조의 질주를 계속해온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72). 그의 50년 문필활동을 정리한 전집 <이어령 라이브러리>(문학사상사)가 이 달 30권으로 완간됐다. 1956년 5월6일 한국일보에 평론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지 꼭 50년. 그 반세기 동안 이어령이라는 이름을 저자로 달고 나온 200여권의 책 중 대표 작품들을 골라 묶어낸 전집이다.

    -선생님의 다산의 창조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난 어릴 때부터 ‘한 우물을 파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갈증이 나니까 우물을 파는 건데, 해갈이 되면 그만 파고 다른 데로 가야지 왜 계속 팝니까. 창조에 대한 갈증으로 50년간 이 우물 저 우물 파온 거고, 그 속타는 갈증이 날 여기까지 오게 한 거죠. 그러다 보니 직함도 많아졌고.”

    -그래도 타고난 성정이 아니면 책을 200권이나 쓰는 열정적 삶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중복된 것, 편저나 공저 등을 빼면 순수한 내 작품은 총 50권 정도인 것 같아요. 문단에 나온 지 50년이 됐으니 1년에 평균 한 권씩 쓴 셈인데, 글 쓰는 사람이 그 정도는 써야죠. 지금까지 <한국문학>에 <나신과 의상>을 연재하다 몸이 아파 그만두고 6개월 쉰 걸 빼면 글쓰기를 쉬어본 적이 없어요. 직업적으로 글 쓰는 게 몸에 밴 거죠.”

    -선생님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가 ‘말의 천재’인데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두 가지가 있는데 수필가와 달변이에요. 수필을 폄하해서가 아니라, 엄연히 수필과 평론이 구분되고, 난 평론으로 문단에 나왔는데 장르를 바꿔버리니 싫은 겁니다. 달변이라는 말은 ‘내용은 없어도 청산유수’라는 말인데, 참 모욕적이에요. 강연 후에 누가 ‘청산유수시네요’하면 할 말이 없어요. 아무리 눌변이라도 말할 값어치가 있는 말을 해야지. 그래서 말의 천재라는 말이 참 싫어요. 내가 세상에 많이 알려진 만큼 손해 보는 부분인데, 그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몰라요.”

    -‘달변의 수필가’라고 했다간 큰 일 나겠군요.

    “큰 일 나지.(웃음) 대외활동이 많다 보니 선입견으로 나를 보는 사람들이 많아요. 내가 과대포장됐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참 안타깝죠. 학계에서는 내 ‘공간기호론’ 같은 것은 정말 독창적이라며 오히려 내가 과소평가됐다고 하는 사람도 많아요. 내가 달변가, 수필가로 안 알려졌더라면 평가 받았을 저작들인데….”

    -선생님의 50년 글쓰기가 갖는 시대적 의미는 무엇입니까.

    “내 50년 글쓰기에는 나 개인이 아니라 우리나라 지성사, 글쓰기의 역사와 담론이 담겨 있습니다. 채집문명에서 농업문명, 산업문명, 정보문명, 이 네 가지를, 즉 인류의 1만5,000년 역사를 한 몸에 축약해 치러냈으니까요. 외국 지성에 비해 내 수준이 떨어질지 모르나 4개 문명을 다뤘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나를 따르지 못할 겁니다. 이건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한 인간이 50년간 글을 쓰면서 네 문명의 체험을 담아내는 건 체험의 밀도 면에서 아주 희귀한 거예요. 자화자찬이 아니라 70대 중반에 이른 내 동료들을 대변해 그 가치를 얘기하는 겁니다.”

    -선생님께서 만드신 <문학사상>이나 <이상문학상>이 우리 문단의 중요한 제도로 자리매김했는데도 선생님에겐 문학 권력의 이미지가 없습니다.

    “나는 50년간 글쓰기를 해왔지만 내 패가 없어요. 이런 저런 문학파들이 많지만, 어디에도 ‘문학사상파’라는 것은 없죠. 정치, 경제, 사회 다 패를 이루어 하는 것이지만, 문학만은 외롭게 혼자 하는 것입니다. 문인은 구석기 사람이에요. 제 손으로 도끼를 만들어 저 혼자 토끼를 잡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건 문단이 아니라 ‘문당’(文黨)이죠.”

    -아직 더 파야 할 우물이 있습니까.

    “억울하게도 나는 소설을 써도 평론가가 여가로 쓴 소설이라고 폄하됐어요. 사실 시를 쓰고 싶었는데, 왜 진짜 하고 싶은 건 아까워서 못 하잖수. 서정주의 <시론>이라는 시에 ‘바다속에서 전복 따파는 제주해녀도/ 제일 좋은 건 님오시는 날 따다주려고/ 물 속 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겨둔단다’는 게 있잖아요. 내게 시는 그 숨겨진 전복이에요. 50년 글쓰기의 대단원은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포에지(시가 가지는 정취), 시가 될 겁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시집 한 권 내고 싶어요. 내가 제일 아끼는 거니까 자비 출판을 해서라도 장정부터 다 내 손으로 한 권 만들고 싶습니다. 그 시집을 읽고 나면 이어령이란 사람이 어떤 사람이구나 알 수 있는, 그 50년을 단번에 설명해 줄 그런 시집 말입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선생님처럼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경우는 흔치 않은데요. 아직도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까.

    나는 한평생 오해를 받아왔어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나는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나는 거만이 뭔지 몰라요. 끝없이 바닥에 있다고, 열등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죠. 그걸 언어로 위장하고, 때로는 폭로하고 한 겁니다. 너무 약하고 열등해서 언어라는 갑충의 껍데기를 가지려고 한 겁니다. 나를 찌르는 불행의 화살들로부터 나를 보호하려구요.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 참 재밌는 게 나와요. 모차르트에겐 모든 창조하려는 자들이 가져야 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끝없는 존재의 열등감, 어린아이 같은 나이브함, 사회성이 없는 데서 오는 외로움.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글쓰기가 안돼요. 성경 <욥기>에 보면 욥이 마지막에 하는 말이 ‘이 고통을 반석에 새길 수만 있다면’이잖아요. 이게 얼마나 감동적인지 몰라. 불행에 한 발짝 더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특권, 그게 글쓰기죠.”

    -글쓰기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습니까.

    “정치, 이념이죠. 내게는 끝없는 딜레마였습니다. 정치에 말려들어 이념의 언어에 구속되면 창조적 글쓰기는 안 된다, 신분증 언어밖에 못 쓴다, 다짐하며 그걸 안 하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문학에서는 하지 말자, 1960년대에 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마치 구석기를 살고 있는 것처럼, 시공에 얽매이지 않은 문학을 하자 했죠. 대신 현실과 관계 맺는 정치ㆍ사회적 발언은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같은 문화, 문명론으로 쓴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오해를 받아 순수ㆍ참여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참 외로운 거죠. 정략적 눈길처럼 나를 상처주는 것은 없어요. 나는 고독한 창조자로 있고 싶었는데, 인위적으로 패거리 속에 나를 넣어서 보니까 그때처럼 외로운 게 없습디다.”

     

     

     

     

    -글쓰기 50년을 돌이켜보면 어떤 소회가 드십니까.

    끝없는 오해와 자기모순의 50년이에요. 감사하는 건 내 이름의 프리미엄으로 모든 작품이 무대에 오르고 영화화했다는 겁니다. 외적 환경은 감사하지만, 콘텐츠를 놓고 보면 이해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외로운 50년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한, 외화내빈의 50년. 그게 내 50년의 아이러니죠. 글은 쓰는 순간 내다 버리는 쓰레기입니다. 이건 겸손이 아니에요. 내 글에 만족하면 또 쓰겠소. 전집 30권을 한데 묶어놓고 찍어놓은 사진을 보면 희열보다 멋쩍음을 느껴요. 숨기고 싶고 꼭 속옷 보여주는 것 같아 창피해요. ‘이게 전부냐? 네가 50년간 쏟아부은 게 이게 다냐’ 싶어 헛헛한 기분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습니까.

    “전에는 하기 싫은 일은 절대 안 하고 남들 부탁도 매정하게 거절하고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저 사람이 언제 또 나한테 부탁을 하랴 싶어 거절을 못해요. 그러다 보니 강연이다, 주례다, 인사말이다 스케줄이 너무 많아요. 초조한 게, 내 활동기간은 짧아지는데, 전복을 따야 하는데 잠수할 시간이 없어요. 막상 들어가면 숨이 차고.(웃음) 내년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저런 위원장, 고문 직함 다 정리하고 1년간 들어앉아 전복을 딸 겁니다. 시집 꼭 낼 겁니다. 또 대학에서 강연한 것들 묶고, 학술논문들도 정리해서 전집도 40권, 50권까지 이어가야죠. 글쓰기엔 정년도 고령화도 없으니까요.”(박선영기자)

    한국일보(06. 10. 25) 이어령 "등단 글 <우상의 파괴>는 젊은 피울음"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한 출판기념회에서 고성을 질러가며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비판한 어느 당돌한 청년에 대한 소문이 돌았다. 한 서울대 학생이 서정주, 김규동, 조연현, 백철 등을 두고 그게 시냐고, 문학이냐고 목소리를 높여 짓뭉갰다는 것이다.

    소문을 들은 당시 한국일보 문화부장 한운사씨가 그 청년에게 그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고 제안했다. 청년은 끓어오르는 비분강개를 “설마 신문에 실릴까”싶은 마음으로 썼고, 그것이 <우상의 파괴>라는 제목으로 1956년 5월6일자 한국일보의 한 면에 전재됐다. 문학평론가 이어령의 등장이었다.

    “당시엔 추천이나 신춘문예가 아니면 제도 문학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죠. 하지만 나는 기성문단의 동의나 결재를 받고 싶지 않았어요. 내 힘으로 작가가 되겠다, 신춘문예나 추천, 투고 등을 통해 너희들로부터 승인받지 않겠다, 나는 너희들처럼 글 안 쓴다 하는 선언이었죠.”

    그 글은 단지 문단의 우상들을 대상으로만 씌어진 글은 아니었다. “내가 유명해지려고 선배들을 짓뭉갰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우상엔 이승만 대통령 등 젊은이들을 짓누르는 기성의 모든 억압이 포함돼 있었죠. 한 마디로 한국전쟁 이후 정신적으로 말살되는 젊음을, 한 번밖에 없는 내 젊음을 당신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는, ‘젊은 사람 살려’ 하는 절규였어요.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맨발로 쓴 젊은이의 피울음, 젊은이들의 첫소리였죠.”

    그로부터 50년. 우상을 파괴하며 등장한 이 ‘앙팡 테리블’이 한국 지성사의 거목으로 우뚝 섰다. 그 거름이 된 50년의 글쓰기를 기념해 31일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이어령 교수의 글쓰기 50년>이라는 주제로 특별강연회가 열린다.(박선영 기자)


    중앙일보(06. 10. 27) 시대의 지성 이어령 등단 50년

    우리 시대의 지성 이어령(72.중앙일보사 고문) 선생이 등단 50주년을 맞았다. 1956년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란 글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글쓰기 인생이 어느새 반세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직업은 본래 문학평론가다. 그러나 뭇 사람은 88올림픽 개막식을 총지휘한, 그래서 굴렁쇠의 추억을 우리에게 안긴 문화기획자로 그를 떠올린다. 다른 이는 한국 헌정사 최초의 문화부 장관(90~91년)으로, 또 다른 이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등 베스트셀러의 저자로 그를 기억한다.

    그래서 오늘은, 오히려 일반인에겐 생소할 수도 있는 문학평론가로서의 이어령을 조명한다. 전후문학 시대 젊은 문학의 기수로서, 60년대 참여-순수 논쟁을 이끈 평론가로서 이어령은 한국 문학사에 또렷한 발자국을 남겼다. 그 50년의 세월을 서울대 권영민 교수가 증언한다. 선생의 육성은 30일 '월요 인터뷰'에서 전달할 예정이다.

    선생의 등단 50주년을 맞아 '이어령 라이브러리'의 30번째 권인 '나, 너 그리고 나눔'(문학사상)이 최근 발간됐고, 31일 오후 3시엔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특별 강연회가 열린다. 다음달 2일 정오엔 서울 대한상공회의소에서 한.중.일 비교문화상징사전 발간 기념 강연회도 열린다.(손민호 기자)

     

     

     



    중앙일보(06. 10. 27) 권영민 교수가 말하는 문학평론가 이어령

    이어령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는 1956년 시작된다. 선생은 반세기를 지내오는 동안 글쓰기를 멈춘 적이 없고, 문화 예술의 현장을 떠난 적이 없다. 문화 예술계를 대표하는 원로이면서도 선생은 언제나 현역 비평가를 자임한다. 칠순을 훨씬 넘긴 지금도 그 놀라운 지적 통찰력을 통해 우리 문화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공하는 데에 앞장선다. 그러므로 이어령 선생의 글쓰기 50년은 우리 문화 예술의 정신사적 궤적에 해당한다.

    이어령 선생의 첫 번째 비평집 '저항의 문학'(59년)은 우리 문학사에서 유별난 자리를 차지한다. 선생의 수많은 저서 중엔 이 책보다 훨씬 화제를 모으고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지성의 오설길''축소 지향의 일본인' 등이 있고,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추적하고 있는 '문화코드''디지로그'와 같은 최근의 화제작도 있다.

    그러나 '저항의 문학'이 유별난 이유는, 이 책에서부터 비로소 우리의 문학 비평이 문학 자체의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문학 비평도 문학의 한 장르라는 논리와 인식의 지평이 열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항의 문학'은 그 유명한 '우상의 파괴'라는 비평적 명제를 처음으로 내세운 저작이다. 이 명제는 '작품 자체로 돌아가기'란 비평의 본질에 관한 문제를 제기한다. '우상의 파괴'란 명제는 50년대 문단에서 기성 작가들의 권위에 대한 신세대의 당돌한 도전으로 오해까지 받았던 테마이다.

    이어령 선생은 당시 평단의 거목이었던 백철을 공박하고 조연현을 비판하고, 시단의 주역이었던 미당 서정주를 몰아치고 소설 문단의 김동리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전후 문단의 숱한 시인과 소설가들이 아무도 선생의 비평을 감당하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의 비평이 논쟁적이긴 했기만,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아주 단순하고도 간명했다. 문학 비평이 더 이상 작가의 주변을 맴돌아선 안 된다는 것, 오직 작품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어령 선생은 문학의 사회 참여 문제를 저항의 문학이라는 테마로부터 새롭게 제기한 적이 있다. '작가의 현실 참여'(59년)라는 선생의 평문이 던진 이 새로운 과제는 4.19를 거치면서 문단 전체의 쟁점으로 부각된다. 이 과정에서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비판하는 문학의 정신을 리얼리즘과 연결하며, 작가의 역사적.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참여문학론이 등장한다. 이에 대해 문학의 본질적 순수성을 옹호하는 문인들이 반발하면서 쟁점은'순수-참여 논쟁'으로 확대된다.

    이 논쟁의 정점에 등장한 것이 바로 이어령 선생이며, 그 상대역이 시인 김수영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인 김수영은 군사 독재의 사회 문화적 통제를 우려하면서 언론의 무기력과 지식인의 퇴영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참여론을 논리화한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은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문화 예술 자체의 응전력과 창조력의 고양을 주장했고, 시대의 상황 변화를 무조건 추종하는 문학인의 자세를 비판한다. 이 과정에서 문화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신념을 내세운 이어령 선생이 순수론의 옹호자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어령 선생이 문학평론가로서 가장 힘을 기울인 연구 중 하나가 '이상 연구'이다. 이상의 문학은 언어의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으며, 이들 사이의 갈등과 화해 속에서 비롯되는 긴장을 통해 전체적인 통일성이 유지된다는 것이 선생의 관점이다. 이상의 작품을 신비화된 그의 삶으로부터 분리한 선생의 비평적 작업은 이상 문학의 독자적인 의미와 구조를 미적 차원에서 해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은 좁은 의미의 텍스트주의자는 아니다. 선생의 문학 비평은 문학의 개념과 그 범위를 규정하는 방법과 관점에 따라 문학과 문화의 관계를 좁히기도 하고 넓히기도 한다.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는 미시적인 언어 기호론에서부터 거시적인 비교문화론으로 확대된다. 이어령 선생의 비평적 글쓰기 50년을 정리하고 있는 130여 종의 저작을 살펴보면, 선생은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회 문화적 현상 속에서 하나의 문화적 실천으로써 자신의 글쓰기를 폭넓게 지속하여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충동을 함께 아우르는 이 끊임없는 글쓰기를 통해 한 시대의 지성이 펼쳐놓는 새로운 '문화적 시학'을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모든 독자의 자랑이다.(권영민 서울대 국문과 교수, '문학사상' 주간)

    06. 10.20-21.

     

     

     

     

    P.S. 집에 돌아와 <저항의 문학>을 찾아보니까 눈에 띄지 않는다. 아무래도 박스보관 도서인 모양이다. 내가 갖고 있는 <저항의 문학>은 가장 먼저 나온 경지사판(1959)판도 아니고 가장 최근에 나온 문학사상사판(2003)도 아니다. 그밖에도 여러 판본이 있지만, 기린원에서 지난 1986년에 나온 책이 나의 소장본이다. 책은 지방의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고서 나중에 <장미밭의 전쟁>(기린원, 1986)과 함께 구했었다. 지금은 모두 '이어령 라이브러리'로 보다 번듯하게 나와 있다.

    기억에 표제가 된 평문 '저항의 문학'은 에드가 앨런 포우의 <절름발이 개구리>를 다룬 글이었다(내가 이 글을 읽은 지 15년이 더 되었다). 궁정 광대의 복수극을 다룬 포우의 단편을 '저항의 문학' 논리로 풀어나가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얼핏 '참여문학론'으로 전혀 손색이 없는 글인데, 1960년대 순수-참여 논쟁에서 순수 진영의 대표적인 논객이었다는 사실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권영민 교수의 표현을 빌면, "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먼저 문화 예술 자체의 응전력과 창조력의 고양을 주장했고, 시대의 상황 변화를 무조건 추종하는 문학인의 자세"에 비판적이었던 것이 이어령의 입장이었다면, 사실 참여문학의 본뜻과 멀지 않다. 이어령의 방점은 '문학으로서' 참여하는 데 두어졌던 것이고, 따라서 '참여'에 방점을 둔 이들과는 대립각을 세웠던 게 아닐까.

     poster #1

    요컨대, '빤스 입고 덥벼라'가 그의 문학론인 것이고, 이건 '빤스 벗고 덤벼라'와 성격이 다른 것이다(나는 후자의 경우를 '이념문학'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빤스 벗고 덤벼라'는 박광수 감독의 디지털 영화 제목이다). 그러니 전쟁을 하더라도 '장미밭의 전쟁'인 것이겠고. 그런 비유를 좀더 쓰자면, 요즘 한국문학의 '빤스'는 어디에 걸려 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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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더 2006-10-27 14:25   좋아요 0 | URL
    평소 로쟈님의 글은 저에게 어려워서 대부분 조금 읽다가 pass 하는데;;(죄송요), 오늘글은 잘 보았습니다.ㅎ 퍼갈께요.

    로쟈 2006-10-27 17:21   좋아요 0 | URL
    이건 아직 제 글이 아닌데요(--;). 자료로서 퍼왔을 뿐이고 살을 좀더 붙일 예정입니다...

    끼사스 2006-10-27 20:03   좋아요 0 | URL
    일전에 친구에게 "오에 겐자부로는 텍스트주의자"라는 말을 듣고, 그 표현이 참 멋있다 싶으면서도, 텍스트주의(자)라는 개념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걸까 했었는데요…. 권영민 교수의 글 속에 "이어령은 텍스트주의자"라는 구절을 맞닥뜨리니까 다시금 그때의 의문이 떠오르는군요. 권 교수의 개념은 작품의 외부가 아닌 내부 그 자체에 주목하는 비평(자)의 태도를 말하는 것 같군요. 그런데 당시 친구의 발언은 오에가 디킨스, 단테, 말컴 라우리 등의 텍스트에 천착해 길어올린 의미를 형상화하는 소설적 방법론을 취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것이었구요. 텍스트주의(자)는 학문적으로 보통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 건가요? 아마도 권 교수께서 부여한 의미와 가까울 거라고 생각은 듭니다만…. 혹시 제 친구가 짚은 소설적 방법론을 일반화한 개념이 있는지도 궁금하네요.

    로쟈 2006-10-27 20:25   좋아요 0 | URL
    본문에 의하면, '작품 자체로'가 텍스트주의의 구호입니다. 그게 좁은 의미의 텍스트주의가 뜻하는 바인 듯하고, 넓은 의미의 텍스트주의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고 공언한 데리다의 사례에서 찾을 수 있겠지요. 한데 이 경우는, 데리다 자신도 언급하고 있지만, 텍스트=컨텍스트이기에 좁은 의미의 '텍스트주의'와는 구별되는 것입니다. 저는 후자를 '텍스트의 바깥을 없게 하라'는 윤리적 요청으로 해석하는 편입니다. 오에의 경우는 제가 잘 모릅니다. 말씀대로라면, 오에 문학의 상호텍스트성을 가리키는 거 같은데, 그 또한 '텍스트주의'의 범주 안에는 들어갈 거 같습니다...

    끼사스 2006-10-27 22:10   좋아요 0 | URL
    '텍스트의 바깥을 없게 하라'. 제가 이해하고 있는 오에의 소설적 방법론을 적실하게 표현하는 구호인 것 같습니다. 덕분에 질문 드리면서 품었던 기대 이상의 것을 얻은 듯한 느낌입니다. 친절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