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기사 하나를 옮겨온다. 북데일리의 '세계의 책' 코너에서 가져온 것인데, 희귀하게도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의 <호모 사케르>의 국역본이 근간예정인 상태에서 해를 넘기는 것 같아 유감스럽지만 대신에 영역본들이라도 뒤적거려봐야겠다(*아감벤의 <남겨진 시간>이 최근 출간됐다. -08. 11. 14).  

북데일리(05. 12. 05) 선악의 이분법 뛰어넘은 '사도 바울로'

기독교 성인 사도 바울로(서기 10~67년)는 다마스쿠스로 여행하다가 예수의 출현을 보고 사흘간 실명 상태를 겪은 끝에 소명을 받고 제자가 됐다.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전도자이자 신학자였던 바울로는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로 자신의 종교적 사상을 전해 그 가운데 14통이 신약성서에 포함돼 있다.

이중 바울로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그리스도를 박해했던 이방인이 그리스도와 만남을 통해 이방인의 사도로 떠오른 바울로 사상의 진수를 가장 분명하고도 명쾌하게 담고 있다. '신앙과 의화(義化)'와의 관계를 소개하는 이 편지는 '성경 속의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듯 다른 편지에서는 볼 수 없는 그리스도교 구원론의 진수가 들어 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미학자 이자 베네치아건축대학 교수인 조르지오 아감벤(63. Giorgio Agamben)은 바울로의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앞부분에 나오는 10개 단어를 텍스트로 하여 매우 획기적인 시각으로 서양사상의 사유적 이분법을 철저히 분석해 냈다. 그의 저서 <남은 시간 :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스탠포드대출판부. 2005)는 그 결실이다. 영어 원제는 'Time That Remains: A Commentary on the Letter to the Romans'.

아감벤은 그동안 죽은 자와 산 자, 동물과 인간, 육체와 정신, 자연과 문화 등 서구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이원적 대립의 사유구조 속에서 중간지대를 설정, 그 '무언가'의 상태가 현대사회를 지배한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여 왔다. 그 '무언가'와의 관계 속에서 아감벤은 '경계'와 '나머지'라는 말을 적시하는 조건은 이원적 대립 관계에 수용되지 않고 계속 '남는 것'이라는 데 주목한다. 그 전형이 로마시대 '성스러운 인간'이란 이름 아래 '인간 외 인간'으로 차별화된 '호모 사켈'이며 혹은 아우슈비츠에서 '회교도'로 불리며 유대인을 돌보고 그들의 최후를 목격한 사람, 죄수도 간수도 아닌 '나머지의 사람'이다.

책은 이런 발상의 사유를 하게 된 저자 특유의 메시아에 대한 이해를 바울로의 편지 속에서 그 흔적을 찾아낸다. '메시아'란 히브리어로 세계 종말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주는 구세주를 나타내며 그리스어 역시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주 예수'를 의미한다. 하지만 유태교에서는 아직도 도래하지 않는 메시아를 '지금' 항상 기다리는 반면 기독교에서는 '이미' 도래한 메시아(예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차이가 있다.

아감벤은 '지금'과 '이미'의 중간에 놓인 시간에 초점을 맞춘다. 과거 사건이 결코 '지금' 완료된 것이 아니라 본래 부정적일 미래를 구속하는 응축된 형태로서 점차 다가오는 특이한 '지금의 때'를 밝혀낸다. 이것이 '나머지 시간'이다. 그때 구원에 대한 갈구를 통해 '자유인' 바울로가 기독교의 사도가 된 시점이 바로 '나머지 시간'이다. 이런 사상적 관념은 기독교인 바울로에게 인종, 종교, 성별이라는 차이는 의미가 없고 현대인에게 '약함' 관심을 둘 때야 비로소 힘을 발휘하는 존재로서 '바울로'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노수진 기자)

06. 11. 30.

P.S. 아감벤의 책과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로는 스탠포드대학의 'Cultural Memory in the Present' 시리즈로 나란히 나온 알랭 바디우의 <성 바울: 보편주의의 정초>(영역본 2003)와 테어도어 제닝스의 <데리다 읽기/ 바울 생각하기>(2005) 등이 있다. 진작에 구해놓은 책들이지만 읽을 여가/기회를 아직 못만들고 있는 책들이다. 아직은 '나머지 시간'을 살 나이가 아닌 탓인가?..

 

 

 

 

바울에 대한 나의 관심은 '신학'과는 무관하며 지젝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다. <믿음에 대하여>나 <혁명이 다가온다> 등에서 바울에 대한 언급을 읽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기로 한다. 참고로 지젝이 추천하는 바울 관련서는 독일 철학자 야곱 타우베스(Jacob Taubes; 1923-1987)의 <바울의 정치신학>(199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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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bi 2006-11-30 16:3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서재는 늘 좋은 글,정보들이 넘쳐나는군요..^^ 요즘 게을러진 책읽기에 탄력을 주고자 아감벤의 '바울' 불어본,영어본을 함께 보고 있습니다.올 겨울 공부계획이죠. 90년대 후반 바디우의 '바울'의 출간되었을 때 상당히 흥분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종영씨가 이행총서로 계획했다가 포기한(버린?) 신학적 사고(Christian Jambet의 '알라무트에서의 위대한 부할'도 저작권만 사놓고 포기됨)가 저에겐 아직도 매력적입니다. 사실 바디우나 아감벤의 '바울'은 ' 네그리의 '욥기'보다는 더 매력적입니다.... 꼬르벵(H.Corbin)의 책들('이슬람철학사'..)와 함께 농사꾼에겐 이 겨울이 공부의 계절이 될듯합니다..

"종말의 도래가 아직 분명하지 않지만, 곧 모든 것이 밝혀질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시간 이해였고, 그는 최초의 그리스도교 저자이다.(124쪽)" 알랜 시걸, <예수 2000년>,대한기독교서회

로쟈 2006-11-30 16:39   좋아요 0 | URL
제 경우 바울에 대한 관심은 지젝에 의해 촉발된 것인데, 바디우, 아감벤 등이 모두 바울론을 쓰고 있어서 이게 거으 '트렌드' 수준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련서 몇 권에 관한 정보들을 모아두려고 합니다...

아포지 2006-11-30 18:01   좋아요 0 | URL
관려서 정보들을 모으신다니.. 참고로.... Theodore W. Jennings, Jr. 의 "Reading Derrida/Thinking Paul" 라는 책도 있더군요. 데리다에 관한 책이니 벌써 아시는지도 모르겠네요...

2006-11-30 1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6-11-30 20:13   좋아요 0 | URL
apouge님/ 예, 갖고 있는 책입니다.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님/ 별 말씀을요, 오히려 제가 진득하게 매달려 있지 못하는 성격/처지인지라...

Nabi 2006-11-30 20:56   좋아요 0 | URL
지젝이 The Parallax view에서 네그리와 아감벤의 차이를 지적하면서 아감벤의 생각이 더 묵시적(265쪽)이라고 지적한부분에 공감이 갑니다. 제가 알고 있는 바울과 관련한 묵시적 사고에 대한 참고 자료들은... 데리다 <최근 철학에서 제기된 묵시론적 목소리에 관하여>, 지젝,바디우와 활발히 교류하는 신학저널JPS(http://www.philosophyandscripture.org)실린 바울과 관련된 글들. Ward Blanton의 Apocalyptic Materiality: Return(s) of Early Christian Motifs in Slavoj Zizek(http://www.jcrt.org/archives/06.1/index.html).. 리요타르의 책 The Hyphen : Between Judaism and Christianity (Philosophy and Literary Theory)도 볼 필요가 있을 듯 합니다.(얇은 책이 왜그리 비싼지 아직도 구입을 미루고...)

로쟈 2006-11-30 21:14   좋아요 0 | URL
Nabi님/ 거의 전문적인 서지인데요.^^ 저는 그 정도까지는 관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만 리오타르의 책 같은 건 도서관에서 주문해봐야겠습니다...
 

얼마 안되지만 모아놓은 마일리지를 가지고 장하준 교수의 <국가의 역할>을 주문하려다가 눈에 띄길래 엉뚱하게(?) 주문한 책이 수잔 와이스만의 <빅토르 세르주 평전>(실천문학사, 2006)이다. '역사인물찾기' 시리즈의 한권으로 나온 책인데, 7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으로까지 출간됐지만 사실 빅토르 세르주(1890-1947)란 인물에 대해서 사전에 입력된 정보는 거의 없다. 러시아사가 전공인 역자의 이름에 눈에 띄길래 '전공관련'인가 싶어서 유심히 읽어보니 어디선가 지나가면서 접해보았을 법한 '비운의 혁명가'이다. 소개에 따르면, "소설가이자 역사가, 한때 아나키스트였던 볼셰비키 당원, 이단아, 좌익반대파의 일원"으로서 "소련사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존재이다." 분명 마지막 멘트는 과장된 것이겠지만 아무튼 흥미를 끄는 것만은 사실이다.

 

찾아보니까 세르주 자신이 쓴 <회고록>도 유명한데, 이번에 그보다 먼저 출간된 것은 수잔 와이스만 교수의 책 'Victor Serge: The Course Is Set on Hope'(Verso, 2001)이다. "2500여 장에 이르는 원고와 1200여 개의 주석을 통해 러시아 혁명의 변질이라는 ‘20세기 변혁운동 최대의 비극’을 빅토르 세르주의 민감한 지성이 언제, 어떻게 감지했는지 그리고 그 비극을 막아보고자 그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상세히 밝혔다."

'20세기 서구 신좌파의 스승'으로 평가받는(다는) 한 인텔리겐치아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재작년에 박노자 교수가 칼럼에서 다룬 바 있어서 옮겨놓는다. 유익한 참고자료이다.

 한겨레21(04. 02. 11) 실패한 혁명가’를 읽는다

1980년대의 혁명적인 열성이 ‘아득한 옛날’로 느껴지던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의 독서계에서는 ‘혁명가 평전’이라는 장르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체 게바라나 호치민, 마오쩌둥, 그리고 박열이나 여운형에 대한 ‘편안히 살게 된 세대’의 새로운 관심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제는 경험해보지 못할 듯한 기존 틀들의 전면적인 부정과 신세계 창조의 ‘이질적인 체험’의 매력에 끌린 것인가? 아니면 ‘임금의 목을 쳐보지도 못한’ 채, 기존의 지배층의 권력들을 계속 인정해 지금도 친일파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혁명의 부재’에 대한 참회인가?

물론 혁명과 우리가 멀었고 지금은 더욱 멀어졌다는 사실이 역으로 ‘혁명가 평전’들을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원인은, 자본주의적 질서의 기본 틀에 대한 새로운 세대의 누적된 회의가 간접적으로 표출된 것이 아닌가 한다. 자본주의적 세계화라는 점점 심해지는 광풍에 대한 반항과 해결법 모색의 에너지가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혁명가 평전’의 열풍에 대해 한 가지 생각해볼 점이 있다. 우리에게 가장 유의미한 존재로 다가온 외국의 혁명가인 티토나 레닌, 체 게바라, 호치민, 마오쩌둥 등이 다 결과적으로 새 국가 건설에 ‘성공’한 ‘혁명형 건국 군주’가 아닌가? 체 게바라 같은 경우는 예외라 볼 수 있지만 그에게도 사회주의적 국가 쿠바의 건설이라는 ‘후광’이 있었다. 역사 인물의 위치나 중요성을 생각할 때 꼭 ‘성패’라는 자본주의적 기준을 적용하려는 우리의 순치된 무의식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다.

혁명가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우리를 옥죄고 있는 권력 관계와 ‘낙오자 되기’의 공포, 체제에의 안주 등의 포기, 반란의 행위 그 자체가 아닌가? 반란의 결과가 고생 끝의 죽음뿐이더라도 그 해방적인 순간, 체제의 모든 것을 내던져버리는 그 순간에 얻어지는 ‘참나’ 실존의 체험이 아닌가? 혁명의 진정한 의미는 ‘건국의 성공’보다는 체제의 부속품이 아닌 온전한 인간으로서 ‘나’를 실천해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속인이 보기에는 ‘실패’한 혁명가라 하더라도 그가 지은 ‘해방적인 체험’이 담긴 시나 소설들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카타르시스를 일으키는 것이다. 삶에서 ‘실패’해도 작품으로 보통사람이 생각하기 어려운 경지에 오른 20세기의 탁월한 ‘세계주의적 혁명가’를 꼽자면,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후 1960년대 후반 이후에 서구 신좌파들의 스승이 된 빅토르 세르주(1890~1947)라는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를 들 수 있다.

우리가 인물을 소개할 때 그 이름 앞에 그가 출생했거나 거주했던 나라 이름을 하나씩 붙이곤 한다. 그러나 궁리를 거듭해도 그의 이름 앞에 붙일 만한 적합한 국명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의 아버지는 장교의 지위를 버리고 혁명에 몰두했다가 결국 망명을 결행해 벨기에에 정착한 러시아인이고 그의 어머니는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이었는데, 벨기에에서 태어난 세르주는 결국 벨기에 국적을 보유하게 됐고 불어와 러시아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했다.

그러나 벨기에에 정착할 생각 없이 19살의 나이에 프랑스로 옮겼다가 그 뒤 스페인을 거쳐 1919년에 새로운 혁명의 러시아에 들어간 세르주를 ‘벨기에 사람’으로 칭하기가 힘들다. 그 뒤 9년 동안 볼셰비키 러시아의 각종 요직을 거치고 초기 코민테른의 대(對)서구 선전 작업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다가 1928년에 강화돼가는 스탈린의 독재를 비판한 죄로 공산당에서 출당을 당했고 5년 뒤에는 투옥됐다. 몇년 뒤 몇명의 유명한 서구 지식인들의 끈질긴 구명운동 끝에 풀려나와 다시 벨기에로 가서 소련 체제의 ‘반동성’과 ‘혁명 정신의 말살’을 외쳤던 그는 스탈린주의의 선량한 신민이라는 의미의 ‘소련인’도 아니었다. 세르주는 히틀러의 군대가 서구를 휩쓴 뒤 기적적으로 멕시코로 탈출해 거기에서 소련에 의한 암살로 추측되기도 하는, 의문이 없지 않은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이 멕시코 시민으로서 멕시코의 자랑이라 할 만한 저명한 화가가 됐지만, 창작 작업을 불어로 했던 세르주를 ‘멕시코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세계적 방랑자’ 세르주…. 그의 만년 소설의 무대가 자연스럽게 시베리아의 오지에서 스페인의 혁명 현장으로 옮기고 그 주인공들도 온갖 나라 사람들이 뒤섞인 것은 그의 ‘방랑 경력’을 반영하기도 한다. 카를 마르크스나 당시의 혁명 거인 트로츠키(1879~1940) 등의 ‘혁명 선배’들도 국가와 민족 등의 범주로 이해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마찬가지 아니던가?

그러나 트로츠키와 세르주는 서로 다른 점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멕시코에서 암살당했을 때 임종의 순간에 “그럼에도 공산당은 궁극적으로 옳은 것이고 그 역사적 정당성을 잃지 않았다”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간 철저한 공산주의자 트로츠키와 달리, 세르주의 정치적 지향이나 세계관은 무슨 ‘주의’로 범주화할 수 없었다. 벨기에에서 사회민주당의 청년조직에서 활약하다 체제에 안주해갔던 사민주의자들의 ‘개량주의’에 염증을 느껴 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의 편집자가 된 세르주는 ‘테러활동 고무·찬양’ 등의 죄목으로 프랑스에서 옥고를 치르고 스페인에서 아나키스트 반란의 주도자가 됐지만, 그는 수많은 남유럽 아나키스트들의 목적을 결여한 ‘폭력을 위한 폭력’을 시종일관 비판해왔다.

사민당의 간부도 아나키스트도 못 된 세르주는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지만 그와 소련 정권의 관계도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러시아의 1917년 혁명의 근본 성격을 진정한 의미의 혁명으로 규정한 그였지만, 중앙집권을 거부한 아나키스트나 폭력을 규탄한 멘셰비키 등 기타 소수의 혁명 정당에 대한 새 정권의 비밀경찰(체카, KGB의 전신)의 살인적 탄압이나, 곡물의 강제 공출에 저항하는 농민들의 총살 또한 그의 자유주의적·인본주의적 신념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련 체제의 근대적 폭력성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던 세르주는 레닌의 서거(1924) 전까지 그나마 공산당의 도덕성이나 “노동자 대표자로서의 성격”에 대한 믿음으로 버텨왔다.

그러나 그 뒤 트로츠키와 함께 신생국가의 관료화와 ‘혁명성 상실’을 비판하기 시작한 그와 스탈린 체제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괴리가 생겼다. 그렇다면 그가 트로츠키파였는가?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그에게 붙인 딱지였지만 실제로 그와 트로츠키 사이의 견해 차이는 컸다. 트로츠키를 늘 깊이 존경하던 세르주가, 트로츠키 저서들을 불어로 번역하는 등 소수파로서 트로츠키파의 목소리가 유럽인들에게 들리게끔 만반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인본주의적 혁명가였던 세르주는 혁명의 과정에서 반대파에 대한 조직적인 폭력이 불가피하다는 트로츠키의 ‘과도기적 국가 폭력 긍정론’에 찬성하지 않았다.  

정치보다 글쓰기를 더 즐긴 세르주는 <러시아 혁명의 첫해>(1930)나 <혁명의 운명>(1937) 같은 역사·정치적 저작과 <혁명가의 회고록>(1945)이라는 나중에 서구 신좌파의 필독서가 된 자신의 역사적 증언의 모음을 펴냈지만, 필자가 좋아하는 것은 주로 1930년대 러시아의 암흑기를 소재로 한 그의 뛰어난 소설들이다.

<긴 황혼>(1946), <툴라예프 동지의 사건>(1948년 사후 출판)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스탈린 독재 체제의 완비라는 역사적 대사건을 안고 발버둥치는 각계각층의 역사 주인공들이다. ‘정의 상실’에 끝없는 분노를 느껴 거만한 ‘공산당 귀족’을 죽여버린 열성파의 젊은 공산주의자, 시베리아의 배고픈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스탈린과의 ‘이론 투쟁’을 쉬지 않는 트로츠키파의 ‘강철의 혁명가’, 권력과 부에 도취되면서도 숙청의 공포로 하룻밤도 편히 자지 못하는 스탈린주의의 ‘고위층 충견’들…. 역사의 마차에 깔리는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들을 세르주 이상으로 극명하게 잘 보여준 작가를 광풍의 20세기에도 찾아보기가 힘들 것이다.

“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당연히 온갖 오류들을 다 범하게 돼 있다. 그러나 자신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오류는 없으니 그래도 투쟁하는 게 더 낫다.”(<혁명가의 회고록>) 한 세기의 비극을 함께 안고 살았던 그의 인생의 값진 결론인 셈이다.(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

06. 11. 29.

P.S. 페이퍼의 제목으로 단 '반체제 맑스주의'란 표현은 그에 관한 한 영어문건에서 따온 것이다. 빅토르 세르주 아카이브(http://www.marxists.org/archive/serge/index.htm)에서 그의 저작목록과 이런저런 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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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처럼 2006-11-30 08:44   좋아요 0 | URL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퍼 갈게요.

로쟈 2006-11-30 09:00   좋아요 0 | URL
첫문장이 비문이어서 다시 수정했습니다. 오타는 또 없는지 모르겠지만...
 

숀 호머의 <라캉 읽기>(은행나무, 2006)을 얼마전에 신간으로 소개한 바 있는데, 저널리뷰로서는 가장 '본격적인' 기사가 눈에 띄어옮겨놓는다. 나는 서론에 해당하는 '왜 라캉인가?'를 지난주에 읽었는데, 바쁜 일들도 있었지만 마저 읽지 않은 것은 복사해놓은 원서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방구석에 쌓여있는 복사물과 책더미 어딘가에 있을 텐데 꼭 찾으려고 하면 쉽게 눈에 안 띈다.

 

 

 

 

 

내가 계획한 '라캉 읽기'는 숀 호머의 <라캉 읽기>와에 오질비의 <라캉, 주체 개념의 형성>(동문선, 2002)과  맬컴 보위의 <라캉>(시공사, 1999), 박찬부의 <라캉: 재현과 그 불만>(문학과지성사, 2006) 등을 같이 읽는 것이다. 모두 이전에 완독하지 않았거나 이번에 새로 나온 책들이다. 거기에 러시아에서 나온 빅토르 마진의 <라캉 입문>(2004)을 겹쳐 읽으려는 것이 곧 시작될 겨울의 초입에 잡은 간단한 '라캉 읽기'이다. 혹 동행하시려는 분은 아래의 기사를 읽는 걸로 워밍업을 하시고 뛸 만하다 싶으면  몇 권의 책을 주문해 보시길(물론 읽는/뛰는 건 각자가 하시는 거다).

북데일리(06. 11. 28) 라캉이 해석하면 애드가 앨런 포우도 달라!

철학자이자 정신분석가인 자크 라캉(1901-1981). 그는 언어를 이용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했다. ‘프로이트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사상은 문학, 영화학, 여성학을 넘어 법률학, 국제관계까지 적용되고 있다.

라캉이 너무 어렵게 느껴져 다가서지 못했던 독자라면 숀 호머의 <라캉읽기>(은행나무. 2006)의 일독을 권한다. “그렇게 어렵다던 라캉이 이렇게 재미있었나?”라는 반문이 든다면 이 책의 묘미를 제대로 느낀 것이 맞다. 책은 완곡한 문투로 라캉을 프로이트와의 관계 속에서 재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완곡한 문투'라고 했는데, 교과서적인 문투이기도 해서 읽기에 특별한 즐거움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저자 숀 호머는 이 책을 쓴 두 가지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첫째는 라캉의 정신분석에 충실하면서 초보자들이 이해하기 쉬운 라캉 입문서를 쓰고 싶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입문서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 한 점은 숀 호머가 철학자나 사상가가 아닌 ‘문화이론가’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라캉의 개념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이 지난 수년 간 라캉에 대한 글을 너무나 많이 써왔기 때문에 그들과는 차별적인 개론서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이 책을 썼다. 그만큼 <라캉읽기>는 여타의 라캉입문서와 다르다. 라캉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나 임상적 지침이 아닌 인문과학 분야의 학생들이 라캉을 처음 대면할 때 필요한 개론서에 가깝다.

책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거울단계 등 현대정신분석까지 이어지는 주요 개념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각 부분의 결론에서는 이 개념들이 어떻게 문학, 영화, 사회이론에 적용되어 왔는가를 보여주는 예가 제시된다. 듀팽에 관한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에드가 앨런 포우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가 라캉의 이론에 의해 복개되는 과정은 문학과 정신분석학이 만나는 그야말로 ‘새로운’ 텍스트다. 간단히 그 과정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라캉을 어렵게만 느꼈던 독자라면 포우의 소설과 라캉이 어떤 접점을 찾아 나가는지 흥미롭게 들여다 볼 만 한 대목이다(*이 주제에 관한 글들을 집약해놓은 책은 J.P. 멀러 등이 편집한 <도둑맞은 포우(The Purloined Poe)>(1998)이다).

단편소설 <도둑맞은 편지>는 한 장관이 여왕의 편지를 훔치고 처음에 편지를 찾아 수색 한 경찰들은 실패하지만 후에 듀팽은 성공적으로 편지를 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포우의 반전은 편지가 사실은 숨겨진 적조차 없었으며, 늘 완전히 드러난 상태로 놓여있었다는 것이다. 저자 숀 호머는 이를 라캉 식으로 재해석한다. ‘라캉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 두 장면으로 나뉠 수 있다.

첫 장면에서는 왕과 장관이 자리한 상태에서 편지가 여왕에게 전달되고 여왕은 개봉되지 않은 편지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탁자 위에 놓아둔다. 장관은 즉시 그것이 공개되어서는 안 되는 성질의 편지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탁자에 놓인 편지를 집어 드는데 여왕은 그 중요성을 왕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편지의 반환을 요구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에 처한다. 경찰은 비밀리에 편지를 찾아 수색하지만 실패한다. 그들은 장관이 편지를 숨겼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반면 장관 역시 편지를 벽로 선반에 달려있는 편지꽂이에 드러나도록 놓아두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장면에서 우리는 첫 번째 장면의 반복을 보게 된다. 이번에는 장관이 편지를 갖고 있고 경찰이 바로 코앞에 있는 편지를 보지 못하는 위치를 점유한다. 듀팽은 공개적으로 벽로 선반 아래에 달려 있는 위장된 편지의 가치를 알아본다.

라캉의 독해는 두 가지 중심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첫 번째는 라캉이 볼 때 이야기의 진정한 주체의 역할을 하는 ‘편지의 익명성’ 이며, 두 번째는 이야기에서 반복되는 주체들 사이의 관계들의 양상이다. 라캉에 의하면 이야기 안의 다양한 주체 위치들은 세 가지 특정 형태의 ‘시선’ 또는 ‘응시’에 의해 정의된다. 첫 번째 시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시선인데 다시 말하면 첫 번 째 장면에서 왕의 위치고, 두 번째 장면에서는 경찰이 점유하는 위치다. 포우의 복선과 반전이 새롭게 해석되는 과정을 통해 라캉의 개념에 보다 쉽게 다가설 수 있는 통로가 열린다. 문화이론가가 쓴 라캉입문서가 갖는 또 다른 차별점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이후’에서는 현대의 텍스트와 영화분석, 정치, 사회이론에서 라캉이 차용되어 온 다양한 방식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라캉의 그래프, ‘수학소들’ 그의 ‘네 가지 담론’은 문학과 문화학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차용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루지 않았다. 저자 숀 호머는 <문제는 정치경제학이란 말입니다! 지젝의 마르크스주의에 관하여>(2001)에서 지젝의 이론적 모순을 비판한 바 있으며 그리스 시티칼리지 미디어학부 학과장을 맡고 있다.(북데일리 김민영 기자)

06. 11. 28.

 

 

 

 

P.S. 마지막 문단에서 언급되고 있는 지젝 비판 문건은 책이 아니라 논문이며 우리말로 번역돼 있고 언젠가 옮겨놓은 바 있다. 이 리뷰기사에서 정리하고 있는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라캉의 세미나는 호머의 책 88-94쪽에서 다루어지고 있는데, 중요한 세미나이긴 하지만 이에 대해 다룬다고 해서 "문화이론가가 쓴 라캉입문서가 갖는 또 다른 차별점"이라고 추켜세우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이다(기자는 아마도 책을 절반 정도 읽고 리뷰를 쓴 듯하다). 

이 세미나는 저자 자신이 '라캉에 대한 개론서들' 가운데 제일 먼저 꼽고 있는 벤베뉴토/케네디의 'The Works of Jacques Lacan'(1986)에서 보다 자세하게 이미 분석/정리되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다른 입문서들에서도 어느 정도 언급된다). 이 책은 이전에 라캉 입문서들을 나열하면서 소개한 적이 있는데, 국내에는 <라깡의 정신분석 입문>(하나의학사, 1999)으로 번역돼 있는 책이다. 숀 호머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독자가 이전에 라캉에 대한 어떤 책도 읽은 적이 없다면 이 책은 다른 입문서들보다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254쪽)

숀 호머가 두번째로 추천하고 있는 책은 딜런 에반스가 편집한 <라깡 정신분석 사전>(인간사랑, 1998)이다. "이 사전은 라캉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필독서이다."(가급적 원서도 구해서 같이 읽는 게 좋겠다.) 그리고 세번째 책은 브루스 핑크의 <라캉적 주체(The Lacanian Subject)>(1995). 이 책의 한 장이 <성관계는 없다>(도서출판b, 2005)에 번역돼 있는데, 완역본은 아마도 내년쯤에 나오는 듯하다.

그리고 네번째 책은 대니 노버스가 편집한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개념들(Key Concepts of Lacanian Psychoanalysis)>(1998)인데, 기억에는 <라깡정신분석의 핵심용어>(하나의학사, 2003)가 그 번역서이다, 라고 생각했지만 'A Compendium of Lacanian terms'이란 책의 번역이다.  노버스의 책으론 <라깡과 프로이트의 임상정신분석>(하나의학사, 2002)이 소개돼 있다.

 

 

 

 

 

그리고 저자가 끝으로 추천하고 있는 책은 루디네스코의 전기이다. 이미 많이 언급된 책이라 중언부언이 될 듯한데, "오백 페이지라는 분량 때문에(*물론 국역본의 분량은 더 된다) 조금은 기가 질리지만 읽기에 수월하며, 라캉의 출판물들의 역사에 대한 풍성한 정보와 다양한 정신분석학회들의 정보를 싣고 있는 포괄적인 부록은 상당히 도움이 된다. 교조적 라캉주의자들은 이 책을 싫어한다."

한번 소개한 적이 있지만 루디네스코가 편집한 <정신분석대사전>(백의, 2005)도 번역돼 있다. 천오백 페이지가 넘는 책이라 이야말로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이지만. 그리고 루디네스코의 <자크 라캉>이 과장이 심하다는 비판은 다리안 리더의 <라캉>(김영사, 2002)에서도 읽을 수 있다(저자는 '교조적 라캉주의자'인가?). 만화책이기도 하지만 리더의 책은 올해 3판이 새로 출간되었을 정도로 입문서로서는 가장 대중적이다. 해서, 생초보 독자라면 숀 호머보다도 먼저 집어들 만하다...

그리고 2007년에 내가 제일 처음 집어들 책은 근간예정인 지젝의 <라캉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이다. 2007년의 라인업으로 예정돼 있는 지젝의 책들과 그 연구서만 하더라도 현재 예닐곱 권이 된다. 젠장, 지젝만 읽기에도 일년은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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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6-11-29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깡 공부 1주년을 기념하며 션 호머의 책을 번역하며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이 번역되었다길래 얼른 사서 비교해보니 역시 제 번역보다는 좋더군요^^;
그런데 위의 데니 노부스 편집의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개념들(Key Concepts of Lacanian Psychoanalysis)>(1998)의 번역은, 김종주가 번역한 <라깡정신분석의 핵심용어>(하나의학사, 2003)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확인해 볼 길이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제가 대학도서관에서 본 김종주 번역의 책은 호주의 정신분석학계 쪽에서 만든 정신분석용어집이었습니다. 호주에서 공부하는 자기 딸과 같이 번역을 했다고 쓸데없이 주절거려 놓은 것이 기억납니다.
도서관에 이 책의 원서는 없고 번역본만 있어서 번역상태는 확인해보진 못했습니다.
고로 사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나면 한번 확인해보시길...

로쟈 2006-11-29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긴가민가하긴 합니다(제에게 책이 있는지도 긴가민가). 제목이 'Key'고 시작했던 듯한 기억이 있어서 그렇게 적었는데, 확인해보니까 A Compendium of Lacanian terms을 옮긴 책이네요. 지적해주셔서 감사.^^

수유 2006-11-29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호머의 책을 앞부분 이제 읽고 있는데요, 소개된 책들은 오질비와 박찬부 교수외에는 다 있는것 같고 저도 함 읽어봐야겠습니다. 학생들 독서퀴즈대회때 포의 도둑맞은 편지가 대상 서적이 되었었지요. 우리 아이들 수준에 라캉까지야 설명이 못미치구요..저도 잘 모르지만서두..^^
아무튼 책들은 늘 있습니다요^^ 고요히

기인 2006-11-29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간에 '편이꽂이'라는 오타 발견했습니다. ^^ 말실수처럼 자판실수도 무언가를 지시하는 걸까요? ㅎㅎ
제가 읽은 라깡 관련 책들 중에는 브루스 핑크, <라깡과 정신의학>이 제일 그나마 쉬웠습니다.~ 시공사 총서류 같은 것은 안 읽어봐서 ^^;

기인 2006-11-29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갑니다.^^ 라깡에게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과연?;;; )

로쟈 2006-11-29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타는 제가 낸 게 아니라 김기자의 것인데요, 암튼 수정했습니다...

Ritournelle 2006-11-29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행이 끝난 다음에 제목이 확~ 바껴 버렸네요. ㅋ. 담아갈께요.

깽돌이 2006-11-3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캉 읽기' 오늘 샀는데 쉽게 쓴거 같습니다.전 그보다 책이 싸고,크기도 아담하고....들고다니기 편하고 좋네요.내용보다 이런 문고판스러운 책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로쟈 2006-12-01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가격도 문고판스러우면 더욱 좋겠죠.^^
 

오랜만에 창비주간논평 한 꼭지를 옮겨온다. 문인들의 '연봉' 얘기를 다룬 보기 드문 논평인데, 필자는 소설가 백가흠씨이다. 이 글이 눈길은 끈 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데, 엊저녁에 <현대문학>(12월호)에 실린 특집 '문학과 돈'의 글들을 읽었던 것. 연말정산의 시즌이 곧 돌아오기도 하지만 세밑이 되면 한해동안의 궁상스런 살림살이에 대해서 되돌아보게도 되는데, 궁상으로 치면 여느 직업 부럽지 않은 시인/소설가들의 경우엔 감회가 더할지 모르겠다(비정규직 대학강사들의 처지가 그럭저럭 동병상련이 될 만하다). 손으로 꼽을 만한 극히 일부 소설가를 제외하면 전업시인/작가로서 중산층의 생계를 꾸려나갈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전무하다. 부업이 불가피한 이유이고 상금이 걸린 문학상들에 목매달기도 하는 이유이다. 당장에 대안을 떠올리기 어려우므로 대략 그런 속사정만을 챙겨두고자 한다.

 

창비주간논평(06. 11. 28) 내 연봉은 포도나무 한그루

가을이 이렇게 가버리다니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개나리가 마음을 들볶은 게 꼭 일주일 전만 같은데, 목련은 피었는지 모르게 빗방울에 후드득 떨어진 지 사흘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낙엽 다 지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쓸쓸하게 매달려 있는 감 때문에 저는 어찌할 바 몰라 방안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지요.


그래서 선배 시인 한분을 꼬여내 북한산에 올랐습니다. 늦은 단풍이나 볼까 하고 말입니다. 비온 뒤라 날씨도 좋고 공기도 맑아서 아침부터 마음을 가만히 둘 길 없었는데요. 막상 산에 오르니 기대했던 거와는 달리 낙엽도 거의 진 뒤라 풍경은 시시하기만 했습니다. 대신 멋진 집들을 구경했습니다. 빨간 벽돌, 십 미터도 넘어 보이는 담으로 둘러싸인 예쁜 집들을 말입니다. 사실 예쁜지 어떤지는 잘 몰라요, 집이 보여야 집 구경을 하지요. 실은 멋지고 높은 담 구경을 했다고 해야 맞겠네요.

 

서둘러 내려와선 두부와 막걸리를 먹었어요. 고추전도 먹었구요. 산에 갔다 왔는데도 집에 돌아오는 길은 하나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산이 제 것 같지 않아서였던 것도 같아요. 취해서 속으로 중얼거렸지요. 여기다 집을 사야겠는데, 그래야 저 산을 가질 수 있을 텐데. 집으로 돌아와 보니 책상 위에 쓰다 만 소설들이 저를 애처롭게 쳐다보는데요. 술 취한 눈으로 저는 소설에게 말했지요. 니가 잘 씌어져야 거기에 집을 짓지. 소설아, 소설아 집 좀 지어줘라. 분명 거기까진 기억이 났었는데, 깨어보니 한낮이었습니다. 집을 짓고 북한산을 갖기엔 역부족이었던 것이지요.


누구나 연말이 되면 새해에 바라는 것,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서둘러 정하곤 하는데요. 몇년 전 망년회가 생각납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여자친구도 없는 떨거지 친구들과의 망년회 자리였는데요. 케이크에 소원을 빌고, 촛불을 끄는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아이들이 진지해서 저도 그에 버금가는 무엇인가를 정해야만 했었는데요. 새해에 바라는 소원, 생각하자마자 금방 떠올랐어요. 제 차례가 되자 진지하게 말했습니다. 새해에는 연봉이 육백만 넘었으면 좋겠다구요. 전혀 웃기지 않는 얘기였음에도 사람들이 웃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웃었지요. 말하고 나니 조금 웃기는 것도 같았습니다.


며칠 후 선생님 댁에 신년인사하러 갔는데 술이 두잔 세잔 돌자 누군가 또 묻는 거예요. 새해에 바라는 소원이 뭐냐구요. 저는 똑같이 연봉이 육백만원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요. 그 시절 진짜 소원이었으니까요. 한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이 다 웃었습니다. 옆에 앉아 있던 소설가 이기호가 가흠아, 연봉 육백이면 한달에 오십만원 벌어야 하는데 그거 힘들다, 했어요. 정말 힘든 표정을 지었어요, 이기호 형이요. 그래서 제가 그니까 소원이지 형, 했습니다. 실은 속으로 그때 부러웠거든요. 연봉 육백만원을 이미 이룩했던 기호 형이 부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때문에 온나라가 떠들썩하지요. 정치권, 매스컴 할 거 없이 무슨 호재라도 만난 것처럼 떠드는 것이 정말 큰일이 난 것은 분명해 보이기도 한데요. 집값이 오르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저는 웬 호들갑들인가 싶더라구요. 평균임금을 받는 사람이 서울에 아파트를 장만하려면 44년이 걸린다는 얘기를 들었는데요, 그때도 저는 그러건 말건 했었는데요, 평균임금을 벌게 되니 이젠 집을 갖고 싶은 거예요. 몇년 전만 해도 연봉 육백만원을 간절히 원했던 제가 말입니다. 왠지 집이 있으면 장가도 잘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들구요. 그런 생각이 드니 느닷없이 가로수들이 부러워지는 거예요. 니들은 무슨 복이 있어 이렇게 비싼 도로가에 한평씩 집을 지었냐 싶은 거예요. 가로수들이 부러워지니까 신경질이 나더라구요. 그래서 어느날은 집앞에 늘어선 가로수들마다 한대씩 발길질을 한 적도 있어요.


하나 또 예전에 정말 몰랐던 일 하나가 있는데요. 바로 마당이에요. 시골에서 자란 저는 당연히 마당이 있어야 집인 줄 알았거든요. 근데 서울에서는 마당을 갖는 일이 큰 호사임을 깨닫게 된 거예요. 원래 간사하잖아요, 사람마음. 제가 세들어 사는 집에 감나무, 자두나무가 서 있는 꽤 넓은 마당이 있는데, 언젠가부터 제가 감나무, 자두나무만도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바꿔 말하면 제 욕심이 얼마나 물질적으로 비대해졌나를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잖아요. 땅을 딛고 서 있는 모든 것과 경쟁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 경쟁심이 집값을 올리는 것이더라구요. 제가 집값 상승의 주범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감나무보다 잘살아보려고 정말이지 애썼거든요.

 


예전에 시인 박형준 형과 치악산에 오른 적이 있는데요. 제가 등단한 지 얼마 안됐을 무렵이었는데요. 작가가 되고 일년을 살았는데, 도저히 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등단한 지 십년쯤 지난 형에게 치악산을 오르며 물었어요. 정말 궁금하더라구요. 어떻게 먹고 사는지 말이에요. 형 연봉은 얼마나 돼요? 박형준 시인이 껄껄 웃더니 내 연봉은 포도나무 한그루쯤 될까 몰라 했습니다. 문학하는 사람에게 연봉은 마음속에 포도나무 한그루 정도 있으면 된다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아직도 저는 가로수가 부러우니 제가 시인이 되지 못한 이유가 분명 있기는 있는 것이겠지요?

 

06. 11. 28.

 

 

P.S. '연봉 육백만원' 달성에 보탬이 돼보려고 해도 백가흠의 책으로 나와있는 건 달랑 <귀뚜라미가 온다>(문학동네, 2005)란 소설집 한권이 전부이다. 어느 자리에선가 이 제목의 흠을 꼬집기도 했는데, 사실 '귀뚜라미가 온다' 같은 건 시집의 제목으로나 어울리는 것 아닌가?('귀뚜라미'로 어떻게 먹고 살겠는가?) 차라리 데뷔작의 제목을 따서 <광어>라고 했다면 훨씬 더 묵직해보였을 것이다('광어'는 빼어난 단편이다). 어쨌거나 연말 분위기이기도 하니까 우리의 불우한 작가들을 돕는 의미에서라도 소설집 한두 권씩은 사두시길 바란다. 뭐, 샛노란 게 빛깔도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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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6-11-28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나무 한 그루정도면 현실은 궁상맞은 삶이군요.
하지만 그의 영혼도 가난할거라는 상상은 하지 않으렵니다.
여우는 포도를 무지 좋아하지만 여우의 연봉은 염소 한 마리나 될까 싶다는
말씀을 드리고 저 노란 표지를 보관함에 풍덩 빠뜨리고 갑니다.
별총총, 로쟈님도 총총, 여우도 총총, 우리 모두 반짝 총총

로쟈 2006-11-28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왕이면 감나무, 자두나무도 되고 싶은 거지요. (영혼이 부유한) 작가들이라도 딸린 식구들은 어쩔 수 없으니...

기인 2006-11-2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현'공식'연봉은 200만원 정도 되고, 장래 희망은 시인/소설가 이며, 아마 비정규 대학강사를 하게 될 저, 퍼 갑니다. ^^;

비로그인 2006-11-2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고 나서는 다음달 책 살때 백가흠 소설가의 책을 꼭 구입해야 될 것 같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krinein 2006-11-28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재미있게 읽고, 네이버 블로그로 퍼갔습니다.

biosculp 2006-11-28 2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나무 한구루라는 제목에 감나무가 떠오르더군요.
감 주산지 중의 하나인 상주에 오래된 감나무 같은경우 나무 하나에서 4000개 이상의 감이 열리더군요. 트럭으로 하나.
감나무 하나면 연봉600은 족히 넘어갈것 같군요.
하여간 요즘 집값과 연결해보면 씁쓸해지고요.

다크아이즈 2006-11-29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습니다. 제 연봉은 마이너스 통장입니다. '포도나무 한 그루'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시인이기 때문에 가능한거지요?

로쟈 2006-11-29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르신 분들도 계신데, 다들 내년에는 '부자되세요!'란 말씀은 못드리겠고, 포도나무라도 한 600그루 정도 키우시킬 기원합니다...

라주미힌 2006-12-01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금이 피어나는 나무 한그루만 가졌어도.. 쩝.
 

경향신문(06. 11. 27) 마광수교수 “내 주제는 영원히 性이다”

마광수 연세대 교수(55·국문학)가 다시 성 논쟁의 무대에 올랐다. 개인 홈페이지에 음란물을 올린 혐의로 지난 24일 경찰에 불구속 입건된 것. 대법원에서 음란물 확정 판결을 받은 소설 ‘즐거운 사라’의 본문과 남녀 성기가 노출된 사진 등을 올린 데 대한 조치다.

마교수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요즘 인터넷 사이트에 별 게 다 있는데…날 표적 삼아 ‘본때’를 보여주자는 거죠”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즐거운 사라’ 사건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진전된 게 없다. 문화 민주화가 되려면 멀었다”고 지적했다. 인터뷰는 25, 26일 이틀간 전화로 이뤄졌다. 대면 인터뷰는 “그럴 형편이 안 된다”는 그의 거부로 성사되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에서 “음란이란 법조항이 분명한 것도 아니고 해석도 검열기관마다 제각각”이라며 “마광수를 잡는 것이 음란을 잡는 것인 줄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시정명령 통보도 없이 곧바로 경찰이 수사한 것에 대해서도 불만을 토로했다.

경찰은 마교수의 홈페이지가 별도의 성인인증 절차가 없어 청소년들이 무방비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유해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마교수는 이에 대해 실제로 드나드는 이용자들은 대부분 20대 이상 성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다른 작가처럼 독자와의 대화 공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팬들의 요청에 따라 홈페이지를 개설했다고 설명했다. 이후 정성들여 홈페이지를 관리해왔다. 자신의 시나 소설, 수필 작품은 물론 평론, 그림들까지 올렸다.

마교수는 “홈페이지에 다른 글도 많은데 전체는 보지 않고 부분만으로 문제 삼은 것이 ‘즐거운 사라’ 때와 똑같다”고 말했다. “당시 판사도 ‘10년 후에는 무죄’라고 말했다. 그걸 보고 ‘엿장수 맘대로식 재판이구나’ 생각했다”며 “재판은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털어놓았다. 경찰의 조사 방침을 듣고 밤새워 ‘오해받을 만한 사진들’을 지운 것도 이 때문이다. 더이상 구설수에 오르기 싫다고 했다.

이번 사건과 관련, 그는 “학교(재직 문제)가 제일 걱정”이라고 했다. 당장 아주대가 27일 예정된 특강을 취소하겠다고 연락했다고 한다. 연세대측으로부터는 아직 반응이 없다. 하지만 불안하다고 했다. ‘즐거운 사라’로 해직된 후 몇년간 휴직과 복직을 되풀이한 기억 때문이다. 동료 교수들과의 관계도 껄끄러운 듯했다.

그러면서도 “이번 사건은 외설이 아니라 ‘문화 민주화’를 향한 싸움이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패지수가 가장 낮은 스웨덴, 노르웨이 등은 이미 1960년대에 성개방을 하지 않았느냐”면서 “한국이 말로만 문화강국, OECD 진입했다고 자랑하는데 검열제도가 버젓이 살아있는 게 우리 현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화 민주화가 되려면 검열제도가 철폐돼야 한다고 주장한 그는 “경찰도 음란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다고 하더라”고 전했다.

마교수는 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논란을 불러일으키며 92년 10월 검찰에 구속됐다. 그해 12월 1심 재판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교수직을 잃었다. 95년 대법원은 ‘즐거운 사라’에 대해 음란물로 확정판결했다.

그의 전공은 ‘윤동주 연구’. 음란물과 관련된 필화 사건의 주인공, 혹은 비타협적 프리섹스주의자 교수라는 일반적 인식과는 사뭇 다르다. 79년 윤동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연구와 저술 활동도 활발하다. 올해도 ‘삐딱하게 보기’ 등 윤동주 작품 이론서를 펴냈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이다 뭐다 하며 몸의 담론이 유행하는데 외국 학자들이 이야기하면 박수 쳐주면서 내가 하면 ‘죄인’ 취급이나 하는데 이게 바로 사대주의”라고 지적했다. 이어 “나도 문화적으로 기여한 사람이다. 네일아트, 페티시즘, 피어싱은 이미 20년 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것들”이라고 말했다. “일본에서 한국 소설로는 유일하게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이 ‘즐거운 사라’였다”며 “‘한류’ ‘한류’ 하면서 난리인데 잡아가지 말고 오히려 상을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자신이 몸 담론의 ‘국산품’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그는 “89년에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책을 냈을 때 학교에서 징계를 받았다”며 “하지만 요즘 ‘야하다’는 말은 칭찬이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또 “영원히 내 주제는 성”이라며 “문화 민주화를 위해 불합리를 타파하고 억압된 본능을 바로세우는 계몽자의 입장에 설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90년 합의이혼한 마교수는 현재 서울 동부이촌동의 집에서 86세의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이번에도 병든 어머니에게 심려를 끼쳤다고 전했다. ‘적당히 좀 살아라’는 야단을 들었다는 것. 마교수도 건강에 문제가 있다. 우울증과 당뇨를 앓고 있다. 올해는 위궤양으로 입원까지 했다. 하지만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다.

마교수는 글쓰기 외에 그림 그리는 것도 즐긴다. 한때 미대 진학을 꿈꿨을 정도로 실력도 탄탄한 편이다. 지난해와 올해 화가 이목일씨 등과 함께 전시회를 했다. 내년 1월 중순에 또다시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다.

마교수는 이번 사건으로 고민하는 게 또 있다. 당초 이달 말 출간할 예정이던 소설 ‘유혹’을 어떻게 할 것인가다. 이 소설 역시 음란물로 낙인찍힐까 두려운 것이다. ‘성인 등급 신청’도 검토 중이다. 지난해 모 일간지에 연재하던 소설이 네 번 경고 끝에 중단된 이후 “더욱 겁을 먹게 됐다.” ‘억압된 본능을 바로세우겠다’는 투사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김유진 기자)

경향신문(06. 11. 25) 마광수 음란물게재 혐의 입건…‘괴로운 사라’

즐거운 사라’로 유명한 연세대 국문과 마광수 교수(55)가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음란물을 게재한 혐의(정보통신망법 등 위반)로 24일 불구속 입건됐다. 경찰에 따르면 마교수는 지난해 5월부터 자신의 홈페이지를 개설해 음란소설 ‘즐거운 사라’의 본문을 비롯해 남녀의 성기가 노출된 나체사진을 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마교수는 외설 논란을 일으킨 ‘즐거운 사라’ 파동끝에 1992년 10월 검찰에 구속됐으며 그해 12월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교수직을 잃었다. ‘즐거운 사라’는 95년 6월 대법원에서 음란물 확정 판결이 나왔다.

마교수는 경찰 조사에서 “10년이 훨씬 지났기 때문에 그때와 지금의 법 기준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음란의 기준이란 것이 애매하지 않느냐. 일본 번역서들은 별 게 다 들어와서 심의를 모두 통과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그는 또 “우리 사회는 성에 대해 ‘모르는 게 약이다’는 식으로 대처하는데 이제는 성도 ‘아는 것이 힘이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찰 관계자는 “홈페이지에는 선정적인 수필 등 음란물이 담겨 있는데 미성년인증 절차없이 누구나 접속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청소년보호법 위반 혐의도 추가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마교수 홈페이지는 현재 폐쇄된 상태다.

마교수는 98년 3월 사면·복권되면서 연세대에 복직했다. 그는 최근 시집 ‘야하디 얄라숑’, 에세이집 ‘마광쉬즘’ 등을 펴내는 등 작품활동을 재개했다.(김유진·임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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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일레스 2006-11-27 17:57   좋아요 0 | URL
참... 저 분의 작품을 높게 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저런 문학가도 한 명 쯤 있어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10년이 훨씬 넘게 지나도 이 모양 이 꼴인지... 시쳇말로 '안습'입니다 진짜 -_-a

로쟈 2006-11-27 22:19   좋아요 0 | URL
저도 비슷한 생각인데, 인터뷰 기사의 말미에 붙은 멘트대로 투사라기보다는 약골 지식인일 따름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