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귀가길에 조간신문을 야간신문으로 읽었다. 아직 한편의 영화도 보지 못했지만 모스크바 영화학교를 졸업했다는 '학력' 떄문에 기억해두고 있는 영화감독 민병훈씨의 두번째 작품 <괜찮아, 울지마>(2001)가 6년만에 개봉한다는 인터뷰 기사를 읽었고 바로 페이퍼로 옮겨질 거라고 직감했다(이런 판단에는 0.1초도 걸리지 않는다). 해야 할 다른 일들을 잠시 미뤄두고 '작업'을 하는 이유이다.

전철에서 읽은 기사를 인터넷에서 찾다보니 소박한 홈피도 눈에 띈다(http://www.letsnotcry.co.kr/). 예고편을 감상했는데, 나로선 무엇보다도 첫번째 영화 <벌이 날다>와 마찬가지로 우즈베키스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든다. 옮겨놓은 스틸사진들만 보아도 영화의 소박한 진심이 느껴진다. 이 정도면 봐둘 만한 영화이다. 인터뷰기사가 정작 영화에 대해서는 별로 다루고 있지 않아 아쉽지만 더 나은 기사도 눈에 띄지 않기에 일단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8. 22) "예술영화도 '한뼘 설 땅'은 필요하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한국에서 예술영화, 혹은 독립영화를 한다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작업을 이렇게 표현한다. 영화를 오락의 수단으로만 찾는 대중 앞에 ‘예술’ 타이틀이 붙는 영화를 찍는 사람들은 늘 외롭다. 이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흥행 실패도, 평단의 혹평도, 인터넷 ‘악플’도 아니다. 영화판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관객의 무관심이다.

민병훈(37)도 그런 고독에 몸부림치는 감독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두 번째 작품 <괜찮아, 울지마>가 30일 개봉된다. 이 영화는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렬한 지지를 받은 뒤 2002년 카를로비바리 영화제 비평가상, 테살로니키 영화제 예술 공헌상 등을 휩쓸며 일찌감치 작품가치를 인정받은 수작이다. 그러나 제작완료부터 개봉까지 꼭 6년이 걸렸다. 마케팅비만 수십 억원씩 쏟아 붓는 영화계에서, 총제작비 10억원 미만의 예술영화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_오랜 만의 개봉이라 감회가 남다르겠다.
“100만 관객이 들든 단 1명이 보든,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 만든 영화인데 어떻게든 개봉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70% 정도 찍었는데, 제작사가 돈 떨어졌다고 철수하라고 그러고…. 개봉관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세 번째 영화 <포도나무를 베어라>(2004년)가 먼저 개봉되기도 했다. 원래 영화를 만들 때는 세상 사람들에게 ‘괜찮아, 울지마’라는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는데, 결국 나 자신을 위한 말이 됐다.”

_대부분 사람들이 영화를 대중문화 상품으로 ‘소비’한다. 예술영화의 대중성, 또는 상업성 확보가 가능할까.
“나도 상업영화를 하고 있다. 투자를 받아서 작품을 만들고, 극장에 걸어서 관람료로 수익을 낸다. 다만 다른 영화들과 색깔이 달라 조금 생소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대학원 이상의 고급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적 사기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이나 <향수> 같은 영화도, 정작 그 영화를 즐긴 것은 농민들이었다. ‘너 정말 이 영화 이해해?’라는 평론가들의 질문에, 농민들은 ‘시(詩)를 왜 분석해’라고 대답했다. 이른바 예술영화라는 작품들이 결코 소수를 위한 지적 자의식의 산물은 아니다.”

_그렇다면 <트랜스포머> 같은 영화와 <괜찮아, 울지마>는 어떻게 다른가.
“오락영화는 마케팅적인 계산을 먼저 하고 철저히 거기에 맞춰 기획한다. 시작부터 관객의 반응까지 정답이 있는 영화다. 하지만 난 답이 아니라 질문을 주는 영화를 만든다. 관객이 스스로 생각할 여백과, 고통을 이겨내고 답을 찾게 만드는 과정이 중요하다. <트랜스포머>는 그런 것이 생략된 영화고…. 이를테면 장르의 차이지, 영화라는 본질의 차이는 아니라고 본다.”

_<디 워> 신드롬을 어떻게 보나. 그리고 그런 신드롬을 만들어낸 영화산업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디 워>든 그것보다 훨씬 못한 영화든, 관객이 거기에 열광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다. 다만 다양성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계 전체, 특히 폭력적인 배급시스템의 책임이다. (소수 상업영화의) 독과점이 분명 자본의 입장에서는 이득이 있다. 하지만 가능성이 있는 영화에 20개 관이라도 잡아 줄 수 있지 않는가? 스크린 쿼터 문제에는 거리에 나서지만, 스크린독과점 문제에는 침묵하는 영화인들도 문제다. 언론도 오락영화를 소개하는 양의 5%만이라도 독립영화를 소개해줬으면 한다.

_ 예술영화가 살아 남을 대안은 무엇일까.
“배급 상황이 나쁠수록 작품에 공을 들여야 한다. 좋은 영화는 결국 관객과 만나게 된다. 영화시장 3%의 관객이 소문을 내 1%의 관객을 더 데리고 올 수 있도록, 그래서 한국영화계의 쏠림현상을 관객 스스로가 거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외국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도 장 뤽 고다르 특별전이나 이마무라 쇼헤이의 회고전에 1만명 정도의 관객이 들지 않나. 한 나라에 1만명씩, 100개국이면 100만명이 영화를 보는 것이 된다.” 

●괜찮아, 울지마
모스크바에서 도박빚을 지고 우즈베키스탄의 고향 마을로 도망쳐 온 남자의 이야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남자의 심리를 통해, 모든 사람들의 내면 속에 감춰진 두려움의 실체를 직면하게 한다. 전작 <벌이 날다>(1998년)처럼 우화적이고 키치적인 소재로 자칫 사변적으로 흐를 수 있는 영화에 운율을 더했다. 탈무드의 한 토막 같은 전설로 현실의 번민에 빠진 주인공에게 슬며시 희망의 빛을 던져 준다. 서울 종로 미로스페이스 단관 개봉.(유상호 기자)

07. 0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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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 2007-08-2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박한 돌집을 보니까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여백이 있어 보이는 영화, 보러 가고 싶네요.

로쟈 2007-08-23 11:25   좋아요 0 | URL
보고 소감 올려주실 거죠?^^

philocinema 2007-08-23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 부여는 개봉관 자체가 없으니...
아니 있어도 이런 시골에 개봉을 하긴 하려는지...
예술영화를 개봉관에서 보려면 서울로 이사를 해야하는건지...

예술영화의 개봉이 서울에 집중되는 것은 또하나의 폭력은 아닌지...

로쟈 2007-08-23 19:17   좋아요 0 | URL
저도 보고 싶다는 것이지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philocinema 2007-08-23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렴요!

책읽기는즐거움 2007-08-24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기다린지 6년째 이제야 개봉이 되네요. 하재봉씨가 나왔던 <시네마 월드>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걸 보고 정말 보고싶은 영화가 되었는데 기다리다 정말 지쳤다는ㅋ
그때 민병훈 감독과 저 외국배우도 같이 나와서 하재봉씨하고 이야기도 하고 그랬는데...
하여튼 이제라도 개봉되어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저 영화를 보고 자꾸 예술영화 예술영화 하는게 오히려 저 영화가 난해하다든가등의 잘못된 신비감만 조성하는 듯 하는 느낌이 드네요.
어디서 민감독이 이야기하는것을 읽었는데 자신의 영화가 그렇게만 보여지는게
싫고 자신도 예술영화를 하는게 아니라고 한 것 같아요
(정확히 기억이 안나네요-_-;;)
어떻게 생각하면 저 영화도 이세상의 수많은 감동적인 영화중 한개라고 볼수도 있는게 아닐까요? 그렇다고 저 작품의 가치가 낮다는게 아니고요ㅋ
일단 보고나서 어렇다 저렇다 말하는게 우선일듯 하네요ㅋ
8월 30일 개봉이라 되어있으니 계획을 잡아야 겠어요

로쟈님 좋은 정보 정말 감사합니다ㅋ
잘못하면 까먹고 가지 못할 번 했네요

로쟈 2007-08-25 01:57   좋아요 0 | URL
정보야 널려 있는 걸요. 다만 보는 눈들이 다를 뿐이지요.^^
 

<킹콩걸>이 출간된 김에 페미니즘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밀린) 읽을 책들을 몇 권 꼽아둔다. 페미니즘 관련서의 문제점은 너무 많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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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걸- '못난' 여자들을 위한 페미니즘 이야기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민병숙 옮김 / 마고북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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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베즈 무아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최경란 옮김 / 책세상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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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8-21 12:02   좋아요 0 | URL
참고하겠습니다 로쟈님 감사합니다 :)

로쟈 2007-08-21 12:22   좋아요 0 | URL
빙산의 일각일 뿐인데요 뭐...

로즈마리 2007-08-21 18:41   좋아요 0 | URL
저도^^
 

입추가 지난 지 여러 날이 되었지만 늦더위가 만만찮다. 어디 휴양지에나 가 있어야 딱 좋을 날씨이긴 한데, 그럴 여유는 없고 무거운 머리와 씨름만 하고 있다. 잠시 커피 브레이크에 예전에 쓴 시집의 글들을 뒤적이다가 한 대목을 창고로 옮겨온다(돌아보니 12년 전에 쓴 글이다). 내가 중학교 때부터 좋아한 시 이상의 '꽃나무'에 대해 몇 자 적어놓은 것이다. 하긴 여름날의 꽃나무들도 휴가는커녕 꼼작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 터이다. 그이들을 사랑한다.

나는 이상적인 시의 번역이란 시적 ‘삶’의 번역이라고 생각한다(그래서 시는 원칙적으로 번역되지 않는다). 불어의 ‘번역하다(traduire)’란 말은 ‘가로질러가는 행위․운동’을 뜻한다. 시를 번역하는 것은 시 속의 ‘삶’을 가로질러가는 행위․운동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 행위․운동이란 것은 주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시를 읽어내는 사람마다에게 고유한 것이다. 따라서 시 번역에는 방법론이 있을 수가 없다(몇 가지 요령은 있을까?). 자신의 전 존재를 투여하는 수밖에. 여기서는 다만 이상의 시 '꽃나무'의 말뜻만 따라가 보기로 하겠다. 편의상, 띄어쓰기를 하겠다.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으로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에게 갈 수 없소 나는 막 달아났소 한 꽃나무를 위하여 그러는 것처럼 나는 참 그런 이상스러운 흉내를 내었소.

 

이 시의 핵심은 나와 꽃나무의 대비적인 관계이다. 이들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흉내’이다. 나는 꽃나무를 흉내낸다(꽃나무는 나의 은유이다). 나는 꽃나무‘처럼’ (서)있다. 이 ‘처럼’이 직접적으로 겹쳐지는 부분이 “나는 막 달아났소”이다. 앞에서 문장의 주어였던 ‘꽃나무’가 여기서 ‘나’로 교체된다. ‘꽃나무’에만 국한된 시라면 이 시는 “꽃나무는 막 달아났소”라고 끝나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가 개입한다. 내가 ‘꽃나무’의 바톤을 이어받는 것이다. ‘나’는 ‘꽃나무’인 것.

 

그렇다면 이 시의 처음부터 ‘꽃나무’는 ‘나’이다. 그럼 아예 이렇게 다시 읽을 수 있다: “벌판 한복판에 나 혼자 있소. 근처에는 아무도 없소. 나는 나 혼자 열심으로 나만을 생각하며 서 있소. (그러나?) 나는 내가 바라는 나는 될 수 없소. 나는 (슬퍼서? 절망해서?) 막 달아났소.”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꽃나무’와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같은 존재로 볼 것인가, 서로 다른 존재로 볼 것인가, 이다.

"내가 바라는 나”가 ‘이상적인 나’인가, 아니면 ‘당신’인가 하는 것. 그건 읽는 사람의 마음이 결정할 문제일까? 어쨌든 시적 화자(나=꽃나무)는 나름대로 열심히 꽃을 피우고자 하는, 사랑하고자 하는, 진정한 자기발견에 이르고자 하는 존재이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지레짐작한, 아니면 그런 불가능성을 몸으로 확인한 존재이다. 그는 그 불가능성을 견디지 못해서 달아난다. 그는 지극히 ‘이상’적인 존재이다.

 

 

 

 

‘꽃’을 노래하는 것과 ‘꽃나무’를 노래하는 것은 시의 계열이 다르다. 꽃은 다만 피고 지는 것을 주특기로 하지만 꽃나무는 그런 꽃들을 거느리면서 한편으론 “숙명적 상승의 전략”(이성복, '등나무')을 구사해야 한다. 내가 꽃나무를 가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 꽃핀 나무들(=꽃나무들)의 열렬한 괴로움이여! 이상(1910-1937)과 이성복(1952- )의 시 몇 편은 바로 이 주제에 바쳐진다...  

 

나는 어느 새 이상보다 많은 나이를 먹었구나! 생의 막바지에 그는 레몬인가 멜론인가를 달라고 그랬다지. 나는 오렌지를 달라고 할까? “레몬 즙보다는 후두(喉頭)가 더 크게 벌어지도록 강요하는” 오렌지 즙을 말이다. 우리의 안쓰러운 오렌지.

 

스펀지처럼 오렌지에도 표현의 시련을 감내한 뒤 형태를 다시 찾으려는 열망이 있다. 그러나 스펀지는 항상 성공하지만 오렌지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 세포들은 파열되었고 조직체는 찢겨나갔기  때문이다. 단지 껍질만이 탄성 덕분으로 완만하게 자신의 형태로 되돌아가고, 그동안 방향성 액체가 흘러나온다. 언제나 감미로운 향내와 신선함을 지니고서. 그렇지만 씨앗의 너무 이른 배출에 대한 씁쓸한 의식도 번번이 동반한다.(F. 퐁주, '오렌지')  

 

 

우리는 오렌지를 닮았는가, 씁쓸하게도? 시계태엽이 감긴 오렌지(Clockwork Orange)? 내 방 책상머리에는 언제부터인가 S. 큐브릭의 이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대학 1학년 때 H대학 영화제에서 본 듯한데, 별로 유쾌한 영화가 아니었다(反유토피아 영화던가?). 그러니 좋아하지도 않고 내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몇 장면만이 머릿속에 들어있다 이 포스터의 문구 그대로이다(http://www.thefoolsparadise.com/clockwork-orange/ 참조).



“여기 한 젊은이의 모험이 있다. 오로지 그의 관심은 강간과 무지막지한 폭력, 그리고 베토벤!(Being the adventures of a young man whose principal interests are rape, ultra-violence and Beethoven.)” 이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착한 오렌지인가!.. 

 

 

07.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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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제국에 대한 아주 간단한 입문서' 스티븐 하우의 <제국>(뿌리와이파리, 2007)에 대한 서평기사를 옮겨오면서((http://blog.aladin.co.kr/mramor/1504292) '제국'을 화두로 한 몇 권의 이미지들을 같이 나열했는데, 그 중 또다른 신간인 <제국의 최전선>(갈라파고스, 2007)의 저자가 <타타르 가는 길>의 저자 로버트 카플란(1952- )이란 건 오늘 다른 인터뷰-소개기사를 읽고 알았다. 기사는 얼마전 리처드 도킨스와의 인터뷰로 눈길을 끈 김수혜 기자의 '솜씨'이다. 책상머리에서 몇 페이지 뒤적이고 머리로 조합해내는 기사가 아니라 '몸으로 부때끼며 얻어낸' 기사의 장점이 살아있다. '인문학적 먹물들' 치고 카플란의 책들을 거부감 없이 읽을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그의 책들이 더 많이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짐작컨대, <남한산성>의 저자 또한 그러할 것이다). 사자들이라면 토끼에 대해 공부할 건덕지도 없겠지만 같은 우리안의 토끼들은 사자에 대해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제국'은 그런 사자이다. 

조선일보(07. 08. 18) 전 세계로 진군하는 ‘제국’의 첨병들

미국은 제국(帝國)인가? 로버트 카플란(Robert D. Kaplan·55)은 “제국이 맞다”고 말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州)의 한 소도시 자택에서 글을 쓰다 전화를 받았다. 뉴욕 퀸즈에서 트럭 운전사의 아들로 태어나 30년간 이스라엘·이라크·아프가니스탄 등 분쟁 지역을 취재해온 사내다. 그는 군더더기 없는 명쾌한 말투를 썼다. “나는 기자(journalist)이고, 현실주의자(realist)이며, 마키아벨리와 홉스와 처칠에 공감을 느낀다”고 했다.

“미국은 제국이다”라고 말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 책은 출발한다. 특정 국가가 세를 불려 제국을 이루고 타국을 압박하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최소한 이 책에선 카플란의 관심 밖이다. 그는 대신 이런 질문을 던진다. “제국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국의 회로를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무엇을 먹고, 믿고, 바라고, 따르나?”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카플란은 2002년 겨울부터 2004년 봄까지 예멘·콜롬비아·몽골·필리핀·아프가니스탄·지부티·이라크의 미군 병영을 돌았다. 후방의 사령부 브리핑 룸 대신 전선의 야전 막사를 찾아갔다. 세계 지도를 펼쳐놓고 갑론을박하는 엘리트 대신 군장을 지고 행군하는 부사관들과 몸으로 부대꼈다.



요컨대 로마 제국에 빗대자면, 카이사르가 아니라 백인대장을 찾아나선 여정이었다. 원제 ‘Imperial Grunts’ 자체가 ‘제국의 보병들’이라는 뜻이다. 카플란은 자신이 만난 미군 특수부대원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대의 정체성으로 승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자기 보존보다는 자신들이 수행하는 역할의 보존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옆의 병사가 자기 임무를 대신할 수 있다면 자신의 죽음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 (26~27쪽).

그는 촉촉한 낱말을 쓰지 않는다. 진지를 구축하듯 단순한 구조와 건조한 낱말을 쓴다. 그래도 행간에서 야전 군인에 대한, 숭앙에 가까운 공감이 스며 나온다. 가령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시(市) 서쪽에 있는 특수부대 포사격기지에서 젊은 하사가 전사한 일이 있다. 카플란은 군 비행장에서 간소한 장례식을 지켜봤다. 군목이 구약 성경 시편의 한 구절을 읽었다. 존 웨인이 감독·주연한 영화 ‘그린 베레’(1968년작)의 주제가가 울리는 가운데, 관이 수송기에 실렸다. 병사들은 곧바로 기지에 돌아갔다.

“대원들은 장례식을 이튿날 더 여유 있게 치르자는 상부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들은 본국에 돌아가면 폴의 가족을 따로 찾아갈 예정이었다. 그들은 전사한 동료에게 바치는 최고의 조의는 그들이 속한 포사격 기지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368쪽)

아프가니스탄에서 특전단을 지휘하는 한 미군 중령은 카플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쁜 놈들을 죽이는 게 우리가 할 일이죠. 그들의 활동을 저지하고, 죽이고, 생포하고, 파괴하는 것 말입니다. 선생 눈에는 이들이 비정하고 거친 친구들로 보일 수 있어요. 그것은 이들이 전투를 직업으로 하고, 그것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355~356쪽)



카플란은 군을 “무인(武人)의 철저한 윤리의식으로 모든 것이 철두철미하게 이뤄지는 세계”라고 묘사한다(161쪽).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의 교칙은 ‘의무, 영광, 국가’이고, 일상을 지배하는 수칙은 ‘해야 한다’(You Must) 이다. 필리핀에 주둔한 미군 특수부대원은 필리핀 군에게 전투 훈련을 시킬 때, 이렇게 외친다. “우리는 좋은 편이다. 우리는 적을 죽인다.” (272쪽)

카플란의 눈에 비친, 미군 기지 바깥 세상은 지저분하고 혼란스런 제3세계다. 미군은 그 흐물흐물한 세계에 ‘등뼈를 기증하는 자’이다. “미군이 온 뒤 살기가 쉬워졌다”고 칭송하는 현지인의 얼굴에서 그는 “식민주의를 갈구하는 눈빛”을 읽는다(255쪽).

몽골에서 카플란은 톰 윌헴 중령과 함께 서리 내린 메마른 고원을 지나 중국-몽골 국경지대를 돌았다. 윌헴 중령은 알류산 열도, 베를린, 모스크바, 보스니아 등지를 돌며 뼈가 굵었다. 윌헴 같은 야전 군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미 육군이 펴낸 매뉴얼 ‘유격대 지침서’다.

카플란은 ‘제국’을 “자국이 완전무결하게 안전해야 한다는 요구가 세계 정복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에서 모든 나라에 불안감을 유발하는 고립주의의 한 형태”라고 정의한다. 따라서 제국은 “영광보다는 필요에 의해” 건설된다.

가령 미국은 2차 대전 때 독일과 일본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세계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소련과 손을 잡아야 했고, 냉전이 시작됐다. 소련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전사들을 무장시켰다. 소련이 무너진 뒤, 이들이 미국을 위협하는 테러리스트로 떠올랐다(17~18쪽).

미국이 제국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은 그가 보기에 우문(愚問)이다. 전세계 59개 국가와 영토에 기지를 두고, 170개 국가에서 매년 비밀 군사 작전을 시행하는 나라가 제국이 아니라면 뭔가? “당신이 북극에 서면, 자동적으로 한 발은 미군 북부사령부 권역에, 다른 한발은 태평양 사령부 권역에 딛고 선 셈이 된다. 발의 위치를 한 번 바꾸면 이번엔 유럽 사령부다.” (17쪽)

그가 보기에 세계는 ‘모던’하지도, ‘포스트 모던’하지도 않으며 그저 고대(古代)의 연장일 뿐이다. 그는 책에서 끊임없이 미국을 로마 제국과 병치시킨다. 카플란은 전화 너머로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취재한 많은 기자들이 ‘뭐가 잘못됐나’ 눈에 불을 켜고 찾아 다녔는데, 나는 애초에 그들과 다른 방향으로 갔다”고 말했다. “미군 바깥에 서서 미군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대신, 미군 한 복판에 들어가서 미군의 눈으로 세계를 본 다음, 이 세상 사람들에게 ‘미군의 시각’을 알려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카플란이 본 미국 제국의 미래는 그러나 꼭 밝지 않다. 카플란은 “미국의 영향력은 약화될 것이며, 세계는 다극화될 것”이라고 했다. 카플란 개인에게 그것은 “미국에 바람직한 현상”도, 그 반대도 아니다. 기자 카플란에게 그것은 다만 ‘사실’(fact)일 뿐이다. 



◆ 더 읽을 만한 책

로버트 카플란은 1973년 코네티컷 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버몬트주(州)의 시골 신문에 잠깐 근무하다 아프리카로 훌쩍 떠났고, 이어 이스라엘에 가서 미군 이등병으로 1년간 복무한 다음, 동유럽·발칸 반도·아프가니스탄 등지를 돌며 여러 미국 신문에 글을 썼다. 90년대 초 소련이 무너진 뒤, 세계 질서의 지각 변동을 예고하는 글을 차례차례 발표하면서 대표적인 네오콘 지식인으로 떠올랐다. 카플란은 지금까지 11권을 썼다. 그 중 국내에 소개된 책에는 ‘무정부 시대가 오는가’(원제 The Coming Anarchy·코기토), ‘승자학’(The Warrior Politics·생각의 나무), ‘타타르로 가는 길’(원제 Eastward to Tartary·르네상스)이 있다.(김수혜 기자)

07. 0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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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09-29 00:13   좋아요 0 | URL
앗, 앞서 '카플란 어떻게 생각하세요' 로쟈님께 질문 던졌는데 여기 답이 나와있군요.
책상머리에서 몇 페이지 뒤적이고 머리로 조합해내는 기사가 아니라 '몸으로 부때끼며 얻어낸' 기사의 장점이 살아있다. '인문학적 먹물들' 치고 카플란의 책들을 거부감 없이 읽을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그의 책들이 더 많이 읽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짐작컨대, <남한산성>의 저자 또한 그러할 것이다). 사자들이라면 토끼에 대해 공부할 건덕지도 없겠지만 같은 우리안의 토끼들은 사자에 대해 열심히 공부할 필요가 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

로쟈 2007-09-29 00:26   좋아요 0 | URL
^^
 

이번 주말 북리뷰의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책은 아마도 강신주의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그린비, 2007)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론 책의 절반 정도를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활달하고 막힘없는 글솜씨가 인상적이었다. 덕분에 저자의 다른 책들에도 눈길이 갔고 사실 노자와 장자철학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들은 이전에 낸 <장자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태학사, 2003), <노자: 국가의 발견과 제국의 형이상학>(태학사, 2004), <장자의 철학>(태학사, 2004), <장자 & 노자>(김영사, 2006)에서 이미 펼쳐놓은 바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번에 나온 '리라이팅'은 보다 대중적인 화법으로 이를 풀어낸 것이다. 최소한 작년에 나온 <장자 & 노자>와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되겠다. 저자의 문제의식을 살리자면 <장자 vs 노자>여야 할 테지만. 미리 읽어둘 만한 리뷰기사 두 편을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8. 18) 노자와 장자, 섞일 수 없는 철학

장자는 노자의 사상을 집대성한 철학자로 알려져 왔다. ‘노장사상’이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인식은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노자가 무위(無爲)를 주장했던 것은 통치자가 무위에 이르면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노자의 도(道)는 “통치자들이 만약 이것을 지킬 수만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와서 복종할 것”이라는 노자 자신의 말처럼 통치자의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노자는 국가와 군주의 지배를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한 국가주의 정치철학자였다는 말이다.

반면 장자는 아나키스트였다.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진행되는 권력의 집중에 반대했다. 그는 국가의 힘을 강화하는 것은 전란을 부추길 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서로 대립하고 맞서기보다는 타자와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후대에서는 노장사상이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런 ‘잘못된’ 인식의 차이에 대해 ‘소백산의 겨울바람’을 예로 들었다. 소백산을 겨울과 이른 봄을 피해 오르는 등산객은 이 산의 따뜻함과 부드러움만 기억한다. 그러나 소백산의 겨울은 거칠고 날카롭다. 장자를 ‘따뜻하게’ 읽는 것은 자유지만 그 이면에는 겨울바람과 마주치는 것처럼 차갑고 냉철하고 날카로운 면이 핵심이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노자의 세계관은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고 장자는 소통(疏通)이다. 커뮤니케이션은 어원 그대로 어떤 공적인(communis) 영역의 권위를 전제한다. 사람들이 공적인 사고나 인지의 틀에 따르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자유로운 개인이 공동체의 규칙에 동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통은 다른 의미다. 소(疏)는 ‘막힌 것을 터 버린다’는 뜻이고 통(通)은 ‘새로운 연결’을 말한다. 기존의 고정된 삶의 형식을 극복해 새로운 연결과 연대를 모색하려는 의지라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노자는 주어진 삶 속에서 지도자의 역할과 그에 따른 순응에 대해 설파했다면 장자는 이를 거부하고 개인으로서 타자(또는 세상)와의 소통 문제를 다뤘다는 말이다.(김주현 기자)

한국일보(07. 08. 18)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열림과 연대를 찾아내다

장자는 “도는 걸어가야 이뤄진다(道行之而成)”이라 했다. 사람의 불행과 우울을 양분으로 증식되는 종교, 국가, 자본 등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진리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장자는 비움과 망각을 강조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군주와 국가를 위해 전개된 사유인 노자 사상과 결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삶을 부정하려는 일체의 권력을 단호히 거부하려는 정신이었다. 그래서 장자의 ‘비움’이란 열림 또는 연대와 이어지는 사유의 결정체다.

그 장자의 사유는 현대적ㆍ동시대적이다. 타자와의 마주침이 전제돼야만 촉발되는 헤겔의 변증법,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확인되는 루소의 반국가주의, 국가란 자발적 연대를 가로막는다며 군주제의 역기능을 폭로한 스피노자의 정신과 어깨를 겯는다.

이 책은 <장자>에 관한 동서고금의 정보로 엮여 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장자>는 위진 시대의 사상가 곽상의 편집물이다. 원래 모두 33편 6만4,606자로 이뤄져 있는 <장자>는 현재 3분의 1 정도는 유실된 채 전해져 온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장자>는 서양 철학자들을 분발시켰다. 미세 지각 이론의 라이프니츠, 장자의 ‘수영 이야기’를 자신의 철학의 노둣돌로 삼는 들뢰즈 등은 대표적이다. 또 유한한 존재인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들을 뭉뚱그리는 성심(成心)이란 장자 특유의 사유틀은 부르디외에게 이입돼, ‘아비투스’라는 개념으로 이어진다.

2부 ‘해체와 망각의 논리’는 장자의 사유법이 이처럼 해체 철학의 시대와 단단히 유대하고 있는 풍경을 비춰 보인다. 이 책은 장자를 21세기적으로 복원시킨다. 장자의 적극적 의미는 그가 소통을 사회의 대전제로 보았다는 점에 크게 기인한다.

장자는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 그래서 타자와 마주칠 수박에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분명히 통찰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민주적 원칙은 독자들을 돌아보게 만든다. 장자는 지배 의지를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란 유아론적 환각에 불과한 것이라며 조롱했다. 나아가 수직적 초월(超越)이 아니라 수평적 포월(匍越)을 강조, 일찍이 민주성을 통찰했다.

장자는 급진주의자였다. “잊어라!(기존 시스템의 망각) 그리고 연결하라!(새로운 연대)”고 그는 삶의 강령으로 제시했다. 정치적 위계 질서를 일종의 꿈이라고 지적한 장자는 군주와 국가를 위해 전개된 노자의 사유와 결정적으로 배치한다고 책은 지적한다. 장자를 이 시대로 불러내기 위해 지은이 강신주 씨는 지난 1~8월을 꼬박 집필 작업에 매달렸다. 그는 “비정규직이나 세계화 등 개인 말살의 상황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며 “개체성을 강조한 장자의 언어가 새삼 새로워져 간다”고 말했다.(장병욱 기자)

07. 08. 19.

 

 

 

 

P.S. 개인적으론 언제나 노자보다 장자에 끌렸기 때문에 저자의 '장자 예찬'에 쉽게 공감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더 관심을 갖게 된 건 노자이다. 특히나 '초간 노자'의 발견 덕분에 새로운 시야가 열린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세히 말할 건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노자는 (1)왕필본(=통행본), (2)백서본, (3)초간본, 세 종류이며 시기적으로 점점 거슬러올라간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느 본을 노자 이해의 핵심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갖게 되는 '노자 상'은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저자의 노자론이 초간본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그래서 다소 의아한 일이다. 초간 <노자>와 백서 <노자>의 저자가 다르다는 일반적인 주장을 수용한다면 백서본을 근거로 <사기>에 기록돼 있는 노자(노담)의 철학을 논한다는 것은 무리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공학자들의 견해가 어떤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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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연재 2011-11-27 18:54   좋아요 0 | URL
강씨는 노자를 모르는 사람이다. 그의 논리가 그럴듯 한가? 그럴듯하지도 않다. 틀렸다. 노자와 장자는 연속사상이다. 노자가 소통을 안 했다고? 한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