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눈뜨다'는 발터 벤야민(1892-1940)의 <베를린의 어린시절>(새물결, 2007)의 한 꼭지이다. 예전 번역본인 <베를린의 유년시절>(솔, 1992; 1998)에도 같은 제목으로 번역돼 있는데, 유대인들의 '설날'을 배경으로 한 짤막한 글이다. 각각 새물결판 195-196쪽과 솔판 58-59쪽의 글을 읽어본다(둘다 독어본을 옮긴 것으로 돼 있다). 곁다리로 참고한 책은 영어판 <베를린의 어린시절>(하버드대출판부, 2006)이다(판본들에 대해서는 http://blog.aladin.co.kr/mramor/1469383 참조). 영어본의 제목은 'Sexual Awakening'이고 123-124쪽에 수록돼 있다.
시작은 이렇다: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중 나중에 밤에 배회하게 되는 거리들 중의 하나에서, 그럴 나이가 되기도 했지만 나는 (아주) 기묘한 상황에서 불시에 성충동에 눈뜨게 되었다."(새물결); "나중에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던 바로 그 거리에서 나는 어떤 특별한 계기에 의해서 처음으로 성적 충동을 느끼게 되었다."(솔)
이 첫대목은 두 번역본이 기묘하게 엇갈리는데,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시점과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던" 시점이 언제인 것인지? 새물결판에 따르면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건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인 어린시절이고, "배회하게 되는" 건 그보다 나중이다(그러니까 싸돌아다니던 것과 배회하던 것 사이에 시차가 있다). 그리고 솔판에 따르면 '방랑'하던 시점과 '밤길을 돌아다니던' 시점은 동일하며 둘은 같은 의미연관의 행위이다.
아주 사소하지만 이 첫대목의 차이가 흥미를 끌어서 영어본과 대조해보았다: "On one of those streets I later roamed at night, in wanderings that knew no end, I was taken unawares by the awakening of the sex drive (whose time had come), and under rather strange circumstances."
벤야민이 회고하고 있는 어린시절이 1900년경(영어로는 'around 1900')이니까 그의 나이 8-9살 때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만(그는 낯선 거리에서 헤맨다) 그가 처음 '성적 충동'을 느낀 그 거리는 그가 나중에(머리가 커서)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게 될 거리이다. 해서 영역본에 따르면 "one of those streets I later roamed at night, in wanderings that knew no end"이 문법적으로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던 중 나중에 밤에 배회하게 되는 거리들"(새물결)이란 표현을 지지할 수 있더라도 번역은 교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나중에 끝도 없이 싸돌아다니며 배회하게 되는 거리들"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라면 "나중에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던"(솔)은 "나중에 끝없이 방랑하며 밤길을 돌아다니게 되는"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고.
"그날은 유대력으로 새해 첫날로, 부모님은 내가 예배식에 참석하기 위해 필요한 채비를 다 해놓으신 상태였다."(새물결); "그때는 유대인의 설날이었다. 부모님들이 어느 예배식에 참석하여 나에게 막 자리를 찾아주려던 참이었다."(솔); "It was the Jewish New Year, and my parents had arranged for me to be present at a ceremony of public worship."
솔판의 번역은 역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의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새물결판과 영역본을 고려하면 "예배식에 참석하여 나에게 막 자리를 찾아주려던 참"이었다는 건 오버이다. 왜냐하면 '꼬마' 벤야민이 친척 한 사람을 데리고/모시고 와야 한다는 '미션'을 수행하게 되는데, 교회에 이미 도착한 이후에 이 아이가 다시 친척을 데리러 나간다는 건 넌센스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냥 꼬마 벤야민은 이날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도 예정돼 있었고, 다만 중간에 한 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했을 따름이겠다. 그 '과제'란 무엇인가?
"이 축제날 나를 돌보는 일은 다소 먼 친척 손에 맡겨졌는데, 내가 그를 중간에 모시러 가게 되어 있었다."(새물결); "사람들은 내가 이 예배식에 누군가 친척 한 명을 데리고 와야 한다고 권한 바 있었다."(솔); "For this holiday, I had been given into the custody of a distant relative, whom I was to fetch on the way."
두 국역본은 같은 독어본 문장을 옮긴 것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차이를 보인다(새물결판은 영역본과 일치한다). 유대 관습과 관련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날 어린 벤야민은 자신의 후견인 노릇을 할 먼 친척을 교회에 가는 길에 모시러 가야 했다. 문제는 그가 길을 헤매개 됐다는 것. 어린 나이를 감안하면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런데 주소를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주변 길을 잘 몰랐는지 - 아무튼 시간은 점점 늦어지게 되었으며, 게다가 나는 계속해서 길을 헤매고 있을 뿐 제대로 도착할 기미는 점점 더 보이지 않게 되었다."(새물결); "이 지역을 아직 잘 모르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의 주소를 잊어버렸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나는 시간이 자꾸 흐를수록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빠졌다."(솔); "But for whatever reason - whether because I had forgotten his address, or because I could not get my bearings in the neighborhood - the hour was growing later and later, and my wandering more hopeless."
이 대목은 대동소이하다. 어린 벤야민은 교회(회당)에 혼자 간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하는데, 일단은 보호자(후견인)가 입장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론 종교 의식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이어지는 것이 글의 후반부이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던 와중에 갑자기 어떤 불안감("너무 늦었어. 결코 회당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없어.")이 뜨거운 파도처럼 엄습해왔다. 하지만 그와 거의 같은 순간, 아니 아직 앞의 물결이 밀려가기도 전에 두번째 물결이, 전혀 정직하지 못한 생각이 밀려들었다("될 대로 되라지 뭐. 나하고는 상관없어.").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이 두 개의 물결이 억누르기 힘들게 처음으로 눈뜬 커다른 쾌감 속에서 하나로 합쳐졌는데, 그러한 쾌감 속에서 축제일에 대한 모독은 거리의 뚜쟁이 같은 짓거리와 뒤섞이고 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나는 막 깨어난 충동을 위해 거리가 마련해줄 수 있는 서비스가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새물결)
맨마지막 문장은 솔판과 영역본에서 이렇게 돼 있다: "이러한 내 마음속의 두 가지 물결이 처음으로 끓어오르는 성적인 거대한 욕망과 합쳐지고 있었다. 축제일에 대한 모독감은 거리의 뚜쟁이와 같은 짓거리와 뒤섞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나는 깨어난 성적인 충동에 대하여 어떻게 다스려 나가야 하는가를 처음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And the two waves converged irresistibly in a dawning sensation of pleasure, wherein the profanation of the holy day combined with the pandering of the street, which here, for the first time, gave me an inkling of the services it was prepared to render to awakened instincts."
솔판의 번역에서는 마지막 '추측'의 근거가 무엇인지 불명료하다. 새물결판과 영역본에 따를 때 그것은 '거리'이다. 그 거리에서 종교 의식에 참석해야 하는 의무를 방기하는 데 따른 어떤 불안감과 자포자기의 심정이 벤야민은 최초의 성적 충동, 혹은 커다란 쾌감과 결합돼 있었다고 기억한다. 어렴풋하게만 기술돼 있지만, 조금 더 확정적으로 말하면, 기본적으로 그의 배회는 '위반'의 체험이고 이 위반은 종교의식과 성적 욕망에 밀접하게 기대고 있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바타이유적 체험' 아닌가? 사실 '성에 눈뜨다'란 주제 자체가 바타이유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때문에 벤야민이 나중에 파리를 탈출하면서 파리 국립도서관의 사서였던 바타이유(1897-1962)에게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포함된 마지막 유고를 맡긴 것은 '기묘한' 우연의 일치로 보인다(이 유고는 조르주 아감벤에 의해 1981년에서야 발견된다). 벤야민과 바타이유에 관한 글들을 찾아봐야겠다...
07. 0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