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개봉되는 러시아영화 소식을 빠뜨릴 수 없어서 옮겨놓는다. 지난 2005년 러시아 최고 흥행작 <제9중대>가 문제의 영화이다. 아마도 창고에서 자고 있다가 지난번 아프간 인질사태 때문에 배급업자들의 관심을 끌게 됐는지도 모르겠다. 블록버스터이긴 하나 기본 수준 이상의 작품성을 갖춘 영화로 평가되고 있으므로 한번쯤 관람해보시는 것도 좋겠다(사실 그래야 더 많은 러시아 영화가 소개될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고려를 무시할 수 없기도 하고).

세계일보(07. 09. 15) ''명분없는 전쟁''의 허구 고발… 제9중대

13일 개봉한 ‘제9중대’는 인생의 농익은 즐거움과 성숙의 단계를 맛보지 못한 채 아프가니스탄의 바위산 중턱에서 죽어간 옛 소련의 젊은이들이 최후까지 함께했던 전장의 표정을 건조하리만치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도 전쟁으로 말미암아 파괴되는 인간들의 모습을 사실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영화는 꿈에 대한 열정과 사랑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이들이 피의 전장을 뒹굴어야 하는 이유는 국가의 명분 없는 전쟁 때문이라고 고발한다.

그동안 우리의 ‘눈맛’을 길들여온 할리우드의 전쟁영화들과는 느낌이 다르다. 익숙한 미군 병사 대신 다소 낯선 생김새의 소련군인들이 주인공이다. 총과 군복이 다르고 육중한 헬기의 모습도 영화 속에서 흔히 보아오던 것과 상이하다.

할리우드 전쟁영화 공식과는 달리 하나의 영웅 또는 특정 주인공을 내세우지 않고 훈련소에서부터 전장까지 전 부대원들이 겪는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춘다. 삶과 죽음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밟고 있는 극단의 상황, 그곳에서 꽃피운 전우애, 그리고 희생을 강요받은 작은 개인들의 비운을 영화는 씁쓸히 낭독하고 있다.

영화의 배경은 옛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9년째인 1988년. 징집에 응한 청년들이 하나둘씩 기차역에 모여든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어느 겨울밤 화가를 꿈꾸는 예술가, 선생님이 되고자 하는 교생실습생, 결혼식을 치른 지 하루 만에 소집되어 온 새신랑, 어린 딸을 둔 가장은 각각 사랑하는 가족과 이별하고 훈련소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전쟁은 이들의 꿈과 희망을 모조리 앗아간다. 지독한 훈련을 거치는 동안 순수한 교사 지망생의 몸은 어느새 살인병기로 바뀌어 간다. 예술가의 손은 이제 붓보다 총이 익숙해졌고, 현실주의자 류타예프는 생존 방법을 부지런히 체득해 나간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을 것 같았던 9중대 대원들은 마침내 서로를 이해하고, 모두가 한몸처럼 아끼는 게 살아남는 법이란 걸 깨닫게 된다. 그러나 9중대의 가장 큰 비극은 주둔지가 본 부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 그래서 전쟁이 끝나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하고, 고지를 사수하다 무자헤딘의 12차례에 걸친 전면 공격에 전멸해간다.

온통 붉은 빛이 감도는 아프가니스탄의 바위산이 이국적이며 바위에 뚫린 구멍 등 지형지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무자헤딘의 전술이 인상적이다. 영화엔 잔인하고 치열한 전투 장면은 없지만, 명분 없는 전쟁의 허구와 반전의 당위성이 잘 녹아들어 있다. 감독은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을 한층 고조시키며 극을 끌어가는 재주를 부린다. 제작비 83억원이 들어간 러시아 블록버스터. ‘전쟁과 평화’의 감독 세르게이 본다르추크의 아들인 표도르 감독의 데뷔작이다.(김신성 기자)

07. 09. 17.

P.S. 감독 표도르 본다르추크는 말미에 언급된 대로 세르게이 본다르추크(1920-1994)의 아들인데, 1967년생이니까 러시아판 대작 <전쟁과 평화>를 한창 찍을 때 태어난 셈이다(세르게이는 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 역을 맡기도 했다). 표도르는 이제 보니 러시아 TV에서 자주 보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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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9-17 1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시아에서는 사실 반전영화라기보다는 '애국주의' 영화로 수용된 감이 있는데 여하튼 편식은 좋은 게 아닌지라 러시아 영화들도 많이 보셨으면 좋겠네요...
 

테리 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생각의나무, 2007)의 한 대목 읽기이다. 내가 유익하게 읽은 책들은 모두 한 다스 이상의 이런 '읽기'를 허용하지만 모두 다룰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간혹 이런 식의 '견본'으로 입막음을 하는 수밖에 없다(매번 그냥 지나치게 되면 또 우울증에 발목이 잡히게 된다). 그것도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겠다. 제3장 '공포와 자유'의 한 대목인데, 당통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해보자.

 

 

 

 

"게오르크 뷔히너는 자신의 극 <당통의 죽음>에서 '영원히 파악할 수 없는 미지수 X를 규명하기 위해 우리 인육(人肉)의 수학자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피 흐르는 사람들의 팔다리로 방정식을 써 나가야 할 것인가?'라고 당통의 입을 통해 묻고 있다. 이 섬뜩한 이미지 속에서 자코뱅주의자 및 국가 테러리스트들은 육신의 물질성을 경멸하는 사나운 추상성에 사로잡혀 자유, 정의, 진리, 민주주의 따위의 허상을 좇고 있는 인물들로 그려진다."(134쪽)

물론 여기서 자유(Liberty), 정의(Justice), 진리(Truth), 민주(Democracy) 등은 모두 대문자이다. 이글턴이 1장에서 이미 주장한 바에 따르면 "고대의 것으로 간주되곤 하는 많은 다른 현상들처럼 테러리즘 혹은 공포정치 역시 사실상 근대의 발명품이다. 정치사상으로서의 테러리즘은 프랑스혁명과 함께 처음 나타났는데, 그런 점에서 테러리즘과 근대 민주주의 국가는 한 배에서 태어난 일종의 쌍생아라고 할 수 있다."(11쪽) 즉 "당통과로베스피에르 시대에 테러리즘은 국가 주도의 공포정치 형태로 처음 등장한다. 그것은 얼굴 없는 적이 국가주권에 가한 위협이 아니라 국가가 자신의 적을 향해 행사하는 공적 폭력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혁명의 대수학은 어떤 것이었나?

"세계의 물질성을 분할하고 나누어 다시 재배열함으로써 고상학 대수적 공식을 만들어내는 그들은, 자신이 제시한 공식의 답이 신체 없는 추상의 형식이기를 기대한다. 인류를 구원한다는 명목 아래 그들은 언제든지 신체를 공격해 그 안에 숨어 있는 유령적 이념들 손에 넣은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물론 18세기 자코뱅주의자들에게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슷한 환상에 사로잡힌 몇몇 서구 국가들에서도 똑같은 기획을 발견한다. 그들은 축복받지 못한 나라의 국민을 구하기 위해 우선 그들을 공격해 죽인 후 그들의 심장에 새겨진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찾기 위해 시체의 배를 가르고 있기 때문이다."(134쪽) 민주주의를 위한 이라크 전쟁이 바로 그 비근한 사례 아닌가.

덧붙여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나 미국 몬태나 주의 산악지대를 배회하는 테러리즘 역시 폭력과 도덕적 이상주의 결합이 낳은 산물이며, 그런 점에서는 테러리스트들 역시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서구적 경향의 괴물적 패러디에 다름 아니다."(135쪽)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다음에 '시장(marketplaces)'이 빠졌는데, 이 지역을 배회하는 테러리즘은 하마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몬태나주의 산악지대를 배회하는 테러리즘은 1995년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사건으로 악명을 떨친 (미시간)민병대이다. 이 두 경우에도 공통적인 것은 '폭력'과 '도덕적 이상주의'의 결합이며, "그런 점에서는 테러리스트들 역시 그들이 저항하고자 하는 서구적 경향의 괴물적 패러디에 다름 아니다."

이 마지막 문장은 "In this sense, it is a monstrous parody of the form of life it opposes."(76쪽)를 옮긴 것인데, 주어 'it'을 어떤 점에서 '테러리스트들'로 볼 수 있는지 모르겠다. 'the form of life'를 '서구적 경향'으로 옮긴 것도 역자의 과도한 개입이 아닌가 싶다. 짐작에 단수 'it'으로 받을 수 있는 건 도덕적 이상주의(moral idealism)이어야 할 듯하다. 그렇게 본다면, "도덕적 이상주의는 그것이 반대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괴물스런 패러디이다." 도덕적 이상주의가 본시 반대하는 것이 바로 폭력(테러)이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건 이와 유사한 자본주의 자체의 이중성에 관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상주의와 회의주의, 천사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기이한 결합이다." 회의주의라고 옮겨진 건 'cynicism'인데, 굳이 '냉소주의'를 '회의주의(skepticism)'와 동일시할 이유는 없어 보이므로 이후의 인용에서는 모두 '냉소주의'라고 바꾸겠다. 그럼, 어째서 기인한 결합인가?

 

 

 

 

"자본주의는 이상주의와 냉소주의의, 천사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의 기이한 결합이다. 그것은 이윤을 위한 자신의 경쟁을 신성한 가치들로 그럴듯하게 포장한다. 이런 현상이 고상한 종교적 열정과 저급한 물질적 이익 모두의 성소인 미국에서보다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없다.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은 '미국에서 종교적 광기는 흔한 현상'임을 지적한 바 있다."(135쪽)

마지막 문장에 이어서 이글턴이 달아놓은 토가 재미있는데 그는 종교에 대한 서구문명의 태도를 이렇게 정리한다: "영국 역시 예외는 아닌데, 서구 문명이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대개 알코올 중독 카운슬러가 중독자에게 종교를 권하는 입장과 비슷하다는 것 역시 진실이다. 그들은 종교가 자신의 일상을 진지하게 구속하지 않는 한에서만 그것을 받아들인다. 기업 경영자들이 윤리에 대해 취하는 입장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문장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역자와 다르기에 원문도 같이 옮겨놓겠다: "It is true, however, that Western civilization, not least the British, adheres by and large to what one might call the alcohol counsellor's view of religion: 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This is also the view which corporate executives tend to adopt of morality."(76쪽)

물론 이런 정도의 대목이야 그냥 읽고 지나쳐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지만 'alcohol counsellor's view of religion'란 표현이 재미있어서 짚어보는 것이다. 역자는 이걸 '알코올 중독 카운슬러가 중독자에게 종교를 권하는 입장'이라고 풀어서 이해를 했는데, 바로 앞에 나오는 'what one might call'이란 표현을 간과한 탓인 듯하다. 내가 보기엔 '종교에 대한 알콜 중독 상담자적 관점'이라고 해야 맞다. 

'알콜 중독 상담자'가 종교를 권하거나 하는 건 주제넘는 일일 테고,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술이 나쁜 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실상 '알콜 중독'의 문제는 술이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으므로 상담의 초점은 당연히 거기에 맞춰지는 것이다. 그럼, '종교에 대한 알콜 중독 상담자적 관점'이란 무엇인가? 알콜 대신에 종교를 집어넣은 것이겠다. "종교생활, 좋습니다. 일생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 기업가 도덕? "도덕, 아주 좋지요. 기업가는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단, 기업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요."

"냉소주의와 이상주의의 이런 결합은 테러리즘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그것은 허무주의를 탐닉하는 악마적 얼굴을 들이밀며, 보라, 모든 가치를 박탈당한 채 불에 탄 신체들의 폐허, 절단된 팔다리들처럼 의미 없이 흩날리는 날것의 물질들, 이것이 바로 너희들의 귀중한 서구 문명이 다다른 귀결점이다, 라고 외쳐댄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정의로운 이념을 내세우며 무너지는 건물을 서구의 눈앞에 들이밀기도 한다. 쓰레기라도 처리하듯 그들의 적대자를 화염으로 몰아넣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거창한 이상들이다."(135-6쪽)

대체로 역자는 가독성을 고려하여 재량권을 한껏 발휘하는 편인데, 원문에 따르면 이 대목에서도 핵심은 두 번 반복되는 '보라'(Look.... Yet look also...)에 있다(번역문에는 '들이밀며... 들이밀기도 한다'로 옮겨져 있다). 즉, 이걸 봐라, 그리고 또 이것도 봐라, 구문이다. 무얼 보란 말인가? 하나는 너희 서구 문명이 꽤나 자랑하던 게(9.11의 경우엔 쌍둥이 빌딩) 어떻게 폐허가 됐는지를 보라(=냉소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너희 앞에서 그렇게 건물을 무너뜨리게 만든 '고결한/천사적 이상들(the angelic ideals)'을 보라(=이상주의)이다. 이러한 이중성의 결합은 하지만, 테러리즘만의 것이 아니다. 이미 적은 대로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의 이중성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발흥기에 그것의 천사적인 면과 악마적인 면은 프로테스탄티즘이라는 해결책을 통해 좀더 쉽게 공존할 수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언어는 세속적인 동시에 비세속적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는 이윤 창출 자체가 영적 소명이 될 수 있었다."(136쪽)  

이런 지적은 한국 개신교의 성장사를 통해서 그대로 입증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세속적인 동시에 비세속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결합할 수' 있도록 해준 게 프로테스탄티즘(개신교)이라면 한국 개신교는 미국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티즘의 별종이 아니라 모범이고 정통이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이런 프로테스탄티즘 전통은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의 이동, 다시 말해 생산 기반의 자본주의에서 소비 기반의 자본주의로의 이동, 다시 말해 생산 기반의 자본주의에서 소비기반의 자본주의로의 이행 때문에 사라지게 된다."

이글턴의 흥미로운 지적인데, 다만 원문이 'not only... but (also)'구문이므로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가 아니라 "종교 일반의 쇠퇴 때문이 아니라"로 교정되어야겠다. 그렇다면, 생산기반 자본주의(=산업사회)에서 소비기반 자본주의(=탈산업사회)로의 이행이 무엇이길래 형이상학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사이의 연계/결합이 약화되게 되는가?

"우리에게 근검절약과 신중함, 욕망의 통제와 권위에의 순종을 요구하는 신의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지만, 하도코어 포르노를 보고 개인용 비행기를 구입하며 어머어마한 양의 정크푸드를 먹어치우라고 명령하는 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 간의 연결고리는 소비주의에 의해 결국 단절된다."

가령, 똑같이 '축적'이란 차원에서 'After Doritos'를 신의 은총으로 정당화하기는 이제 어렵다는 얘기이다(그것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저주로 간주된다). “이 세상, 날씬한 것들은 가라. 곧 뚱뚱한 자들의 시대가 오리니. 먹어라, 네 시작은 비쩍 곯았으나 끝은 비대하리라!”는 알다시피 개그콘서트의 구호이지 현실의 구호가 아니다...

"그러나 이 단절의 지점에서 사람들은 자유라는 개념을 건져 올렸다."라고 하여 이글턴은 '절대 자유'로서의 신 개념이 갖는 의미장을 계속해서 조망해나간다. 하지만 나의 '한 대목 읽기'는 여기까지다...

07.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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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근본주의
    from 내가 사귀는 이들, 翰林山房에서 2008-07-31 18:12 
    '알콜 중독 상담자'가 종교를 권하거나 하는 건 주제넘는 일일 테고, 그는 보통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술이 나쁜 건 아닙니다.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만 아니라면 얼마든지요."(It is all very well as long as it does not begin to interfere with your everyday life.) 실상 '알콜 중독'의 문제는 술이 일상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데 있으므로 상담의 초점은 당연히 거기
 
 
심술 2007-09-1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도 사진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네요.

로쟈 2007-09-17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이들 읽어보시라고 열심히 '홍보'하고 있지만 효과는 미지수네요.^^;
 

대학신문에서 옮겨오고 있는 '21세기의 사유들'이 세번째로 다루고 있는 철학자는 이탈리아의 조르지오 아감벤(1942- )이다. 주저인 <호모 사케르>가 근간 예정이라는 건 연초부터 들어온 소식인데(이번 가을에는 나오는 건가?) 이후에도 여러 권의 저서가 번역/소개될 예정인 것으로 안다. 지젝이 방한시 가진 한 대담에서 동시대 가장 중요한 철학자로 알랭 바디우와 함께 아감벤을 지목한 바 있어서 개인적으로 더욱 관심을 갖게 된 철학자다(영역된 책 대부분을 챙겨두고 있다). 여하튼 '한국어 아감벤'의 도래를 고대하면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대학신문(07. 09. 17) [연재] 21세기의 사유들 ③ 조르지오 아감벤

정치철학, 미학, 언어학, 문헌학 등 여러 주제에 대해 정치한 분석을 내놓고 있는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2000년대 들어 가장 많이 논의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주저 『호모 사케르』(1995)는 칼 슈미트, 벤야민, 아렌트, 푸코 등을 거쳐 주권권력과 삶/생명의 관계, 법과 폭력의 문제, 인권 개념 비판 등을 다루고 있으며, 9ㆍ11 이후 시행된 각종 예외조치들의 정치 패러다임을 예견한 것으로 평가된다.

『호모 사케르』에서 아감벤은 주권권력을 언제나 벌거벗은 생명을 생산하며 예외적으로 작동하는, 다시 말해 그 벌거벗은 생명을 배제하면서 포함하는 생명정치적 주권권력이라고 본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 신성한 인간=벌거벗은 생명)란 무엇인가? 로마법에서 정의된 신성한 인간이란, 희생양(제물)으로 삼을 수 없지만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그는 이미 신의 소유이므로 희생양(제물)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신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있고, 인간 공동체의 법/권리의 보호 바깥에 위치하기에 그를 죽여도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의 영역에서도 배제된다. 혹은 이렇게 배제되는 조건 하에서만 공동체 안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9ㆍ11 이후 애국자법이 시행되면서 미국정부는 테러리스트 활동을 했다고 추정되는 비-시민들을 무한정하게 구금하고, 그들을 군사재판을 포함한 특별한 법절차에 종속시켰다. 더구나 이렇게 구금된 이들이 추방되거나 기소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 지위 자체를 상실한 채 수용소에 유폐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땅히 ‘신성한 인간’의 예라 하겠다.

아감벤의 주장이 급진적인 까닭은 극단적으로 보이는 이 예외가 오늘날 정상적으로 되었다고 말한다는 데 있다. 이제 모든 시민은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간주되고, 수용소는 전 시민을 대상으로, 전 영토로 확장된다. 수용소를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 정치 공간의 패러다임으로 간주하면서, 도처가 정상적으로 되어버린 예외 상태이고, 도처에 신성한 인간들이 있다면 어떻게 저항을 사유할 수 있는가? 우리는 정말 모두 수용소 안에 살고 있는가?



주권권력은 항상 ‘희생’을 통해 신성한 인간을 만들어낸다. 아감벤은 이 희생을 『장치란 무엇인가?』(2006)에서 ‘장치’라는 말로 바꿔 부른다. 주권권력은 항상 ‘장치’를 통해 주체를 생산함으로써만 작동한다. 장치란 생명체들의 몸짓, 행동, 의견, 담론을 포획, 유도, 결정, 차단, 생산, 통제, 보장하는 능력을 가진 모든 것을 가리킨다. 비단 감옥, 수용소, 판옵티콘, 학교, 고백, 공장, 규율, 법적 조치들뿐 아니라, 펜, 글쓰기, 문학, 철학, 농업, 담배, 항해, 컴퓨터, 핸드폰, 언어도 장치다. 이 장치들을 통해 한 개체 내에서도 핸드폰 사용자, 인터넷 사용자, 시나리오 작가, 탱고 애호가 등의 무수한 주체화 과정이 공존한다. 질문은 반복된다. 과연 위 장치들로부터 벗어날 수나 있단 말인가?

푸코가 도처에 권력이 있다고 말할 때 반드시 도처에 저항이 있음을 덧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아감벤이 보기에 도처에 각종 장치들을 통해 주체가 자신의 잠재성을 포획당하는 주체화 과정이 존재하지만, 그만큼 도처에 그것에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시민과 테러리스트를 구분 불가능하게 만드는 주권권력은 사실상 어느 곳에서 돌출할지 모르는 이 테러리스트를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아감벤은 저항 혹은 대항-장치를 ‘세속화(profanare)’라고 부른다. 그것은 희생(sacrare)에 의해 신적인 영역으로 빠져나갔던 제물에 손을 대어 더럽힘으로써 인간들이 공통으로 사용할 수 있게 복원하는 것이다. 희생된 사물이 달리 사용될 수 있는 잠재성을 박탈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속화는 희생이라는 장치를 비활성화시키고 헛돌게 만듦으로써 이 박탈당한 잠재성을 복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치가 없으면 생명체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각종 장치들을 버리고 자연상태로 돌아가자거나 장치를 좋은 목적을 위해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장치를 단순히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자신을 주체화하되, 더 이상 장치에 배정되어 있는 목적-수단 관계를 따르지 않고 목적 없는 수단이라는 새로운 사용법을 고안해내는 것이 열쇠다.



목적 없는 수단으로 아감벤이 드는 예는 법전을 더 이상 준수할 대상이 아니라 가지고 놀고 실험하는 것, 보는 자의 어떤 정서적 변용도 이끌어내지 않는, 관객에게 완전히 무감한 표정을 짓는 포르노 스타 등이다. 그도 인정하듯 이 대항-장치는 항상 일시적이다. 소변기가 예술작품이 되는 순간은 뒤샹의 시도에서일 뿐, 그 뒤 그것의 잠재성은 박물관에 포획된다. 그가 드는 예는 여전히 묵시록적이고 손에 잡히지 않는 듯하지만, 우리는 신성한 것들을 장난감처럼 마음대로 이리저리 굴리며 새로운 사용법을 발명할 수 있는 방식들을 발명하는 일을 결코 멈추어서는 안된다.(양창렬_파리 1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07. 09. 17.

P.S. 예전에 아감벤을 다룬 페이퍼로는 '아감벤과 사도 바울'(http://blog.aladin.co.kr/mramor/1010259) 등이 있다. 지젝은 특히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국내에서는 <실재계 사막으로의 환대>라고 조야하게 번역된 책)에서 아감벤을 적극적으로 참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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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9-19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시리즈의 세 번째 순서가 조르지오 아감벤이 되었군요. 그 다음은 누구일까요, 그 선정의 기준과 순서가 사뭇 기대되는 바입니다.

로쟈 2007-09-19 19:07   좋아요 0 | URL
열명의 리스트는 이미 대학신문에 공지됐었는데, 바디우나 네그리, 랑시에르, 회슬레, 슬로터다이크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대개 국내에 소개되거나 소개될 철학자들이죠...
 

주말에 경향신문에 실린 해외칼럼을 읽고서야 주중에 러시아 총리가 교체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언론의 표현으론 푸틴의 '내각 물갈이'인데, 알다시피 내년 봄 대선을 염두에 둔 '포석'인지라 빅뉴스가 아닐 수 없다. 새로 임명된 Zubkov(주브코프, 주프코프, 줍코프, 주코프) 총리가 대선에 참여할 뜻이 있음을 내비치면서 포스트-푸틴에 대한 전망은 다시 혼전 국면으로 접어든 듯하다(인명 표기가 제각각으로 혼란스러운 것은 새로 바뀐 러시아어 표기법이 익숙한 예전의 표기법과 충돌하고 있어서이다). 국내 언론의 관련기사와 함께 니나 흐루시초바의 논평을 원문과 함께 옮겨놓는다(데일리 타임즈에 실린 원문은 http://www.dailytimes.com.pk/default.asp?page=2007%5C09%5C15%5Cstory_15-9-2007_pg3_3). 필자가 '흐르시쵸바'라고 돼 있지만 기사에서도 언급되고 있는 '흐루시초프'의 손녀이기도 하므로 '흐루시초바'가 맞는 표기이겠다.

한겨레(07. 09. 14) 주코프, ‘총리’ 이어 이참에 ‘대권’까지?

러시아의 차기 대권 후보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분석됐던 빅토르 주코프(사진) 총리 지명자가 13일(현지시각) 대권 도전 의사를 내비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에 따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후계자 구도에 주코프 지명자가 새 변수로 등장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제1부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제프 제1부총리가 가장 강력한 대선 후보로 꼽혔다.

주코프는 이날 두마(하원) 정당 지도자들과 면담 뒤 대선에 참여할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업적을 쌓는다면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러시아 언론들이 전했다. 드미프리 페스코프 크레믈(크렘린) 대변인은 “주코프 지명자가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말의 뉘앙스를 잘 살펴야 할 것”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그러나 <모스크바타임스> <러시아투데이> 등 현지 언론들은 1999~2000년 초 사이 푸틴의 크레믈 입성 과정과 비교하면서 주코프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점점 무게를 두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우선 그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전문관료’ 출신이라는 약점을 갖고 있지만, 푸틴도 엇비슷했다.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이 99년 8월 푸틴을 총리로 임명할 당시, 푸틴은 국가안보위원회(KGB) 출신의 전문관료였다.

또 주코프의 대중적 인지도가 낮지만 푸틴 대통령도 잘 알려진 얼굴이 아니었다. 정치 분석가인 오르로프는 “푸틴이 공개적으로 그를 지지하고, 아울러 깐깐한 금융감시자라는 평판을 갖고 있는 그가 반부패 운동을 펼친다면 대중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물론 주코프의 대선 출마를 점치는 전문가들은 푸틴의 ‘2012년 컴백 시나리오’를 굳게 믿고 있는 듯하다. 주코프가 65살로 고령이고 연임을 노릴만한 정치적 야망이 없는 인물인 점을 고려해 푸틴이 4년짜리 대통령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이용인 기자)

조선일보(07. 09. 14) 푸틴 후계자 누구냐

블라디미르 푸틴(Putin) 러시아 대통령으로부터 12일 새 총리로 지명된 빅토르 주브코프(Zubkov)가 차기 대권 도전을 시사해 파장이 일고 있다. 13일 아침 국가두마(하원) 의원들과의 상견례로 활동을 시작한 주브코프 지명자는 내년 대통령 선거 출마 여부와 관련, “총리로서 성공한다면 그런(대선 출마) 시나리오를 배제하지 않겠다”며 대권 욕심을 내비쳤다.

지금까지는 주브코프가 내년 5월 푸틴 대통령 퇴임까지 성공적 정권교체를 위한 ‘관리자’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부패와의 전쟁 등 국정과제를 마무리해야 하는 푸틴 대통령에게 재정감시국장 출신 주브코프가 총리에 적임이라는 평가 때문이다. 정치분석가 예브게니 나도르신은 “조세전문가인 주브코프는 푸틴의 권력 이양을 위한 실무형 총리”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푸틴 후계자로 급부상할 수 있다는 견해도 적지 않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1999년 8월 옐친 정부 당시 연방보안국장이던 푸틴 대통령이 총리로 임명되고 12월 대통령 후보가 됐던 경험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푸틴과 주브코프 지명자의 친분이다. 1991~93년 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시 대외관계위원장이었을 때 주브코프는 부위원장이었지만 사제(師弟)지간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주브코프는 푸틴을 러시아어 존칭 ‘비(Βы·귀하)’ 대신 ‘티(Τы·너)’라고 부를 만큼, 실세라는 것이다.

러시아 정국에 주브코프 변수가 등장하면서 아직 베일에 싸인 푸틴 대통령의 후계구도는 한층 불투명해졌다는 지적이다. ‘빅(Big)2’인 세르게이 이바노프(Ivanov)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Medvedev) 등 두 명의 제1부총리가 지지율 30%대로 앞서 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Peskov) 크렘린 대변인이 8월 말 후계 가능성을 지목한 세르게이 미로노프(Mironov) 상원의장, 보리스 그리즐로프(Gryzlov) 하원의장 등 두 명의 의회 수장(首長)도 후보다. 여기에 주브코프와 야쿠닌(Yakunin) 철도공사 사장 등이 뒤를 쫓는 형국이다.(권경복 특파원)

경향신문(07. 09. 15) [해외칼럼]크렘린의 의자 빼앗기 게임

그 시기가 다시 왔다. ‘의자 빼앗기 게임’처럼 총리가 바뀌면서 러시아의 예비 선거철이 시작됐다. 가장 마지막에 총리직에 앉는 사람이 아마도 러시아의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다. 보리스 옐친은 대통령 임기가 끝나갈 때 적어도 6명의 총리를 갈아 치웠다. 러시아의 새로운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뿐 아니라, 옐친 패밀리와 재임기간 동안 그가 축적한 재산의 안전을 보장할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가장 마지막에 총리직에 앉은 사람은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이제는 푸틴의 차례다. 미하일 프랏코프 총리를 해임시키고 재임 기간 내내 자신에게 봉사했던 내각을 해산시켰다. 12월에 열리는 국회의원 선거와 내년 3월의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1999년 옐친은 FSB(옛 KGB)의 수장으로 무명이었던 푸틴을 선택했다. 푸틴도 옐친과 마찬가지로 빅토르 주프코프 연방 재정감시국장을 총리로 끌어 올렸다.

이런 유사성에도 두 사람의 선택에 숨어있는 이유는 달라 보인다. 옐친이 푸틴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전직 KGB 스파이였지만 심장은 민주주의자라는 믿음이 바탕이 됐다. 푸틴은 공산주의가 무너진 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민주 시장인 아타톨리 쇼브차크 밑에서 일했다.

KGB는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푸틴이 베레조프스키를 국제적 악인으로 만들고, 미디어 모스트 그룹 회장이었던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를 추방하고, 석유 재벌인 미하일 호도로코프스키를 감옥에 집어 넣었을 때 옐친과 베레조프스키를 빼곤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푸틴이 총리직을 놓고 벌이는 게임은 누가 대통령이 돼도 안전을 보장받고 싶다는 욕망 때문이 아니다. 그는 크렘린을 떠나면 추방되거나 무덤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스탈린이 죽은 레닌을 격하시켰고,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을 비난했다. 브레즈네프는 흐루시초프를 자신의 별장으로 추방했다. 고르바초프는 체르넨코를 매장했다. 유독 옐친만 달랐다. 옐친은 고르바초프를 싫어했지만 점잖게 대했다. 물론 푸틴도 은퇴한 옐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푸틴은 단순히 옐친을 무시했다.

주프코프의 지명 전에 언론은 푸틴의 대통령직을 승계할 차기 총리로 유력한 대선후보로 꼽히는 세르게이 이바노프 현 부총리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강력한 대통령으로 남기를 바라는 푸틴이 이바노프를 임명했다면 권력은 이미 누수가 시작될 것이다. 프랏코프는 사임 이유를 밝히며 이 문제를 제대로 짚었다. 주프코프를 임명한 것은 계속해서 러시아의 절대권력을 쥐고 싶은 푸틴의 의중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주프코프의 전직인 연방 재정감시국장직은 필요하면 제2의 베레조프스키 등을 탄생시키며 잠재적인 모든 적들과 경쟁자를 감시할 수 있는 정보라는 재산을 끌어올 수 있게 해준다. 유일한 관심은 주프코프나 다른 총리가 성공적으로 ‘차르(황제) 대통령’을 그의 경쟁자들이 행했던 것처럼 실각시키는 데 성공할지 여부다.(니나 흐르시쵸바 / 뉴욕 뉴스쿨 국제관계학)

Kremlin Musical Chairs

It’s that time again - Russia’s pre-election season when prime ministers are changed as in a game of musical chairs.The last one seated, it is supposed, will become Russia’s next president.

As the end of his rule approached, Boris Yeltsin went through at least a half-dozen prime ministers, looking for the one who would ensure the security not only of Russia’s new democracy and market economy, but also of his "family" and the wealth that it had accumulated during his rule.The last man seated then was, of course, Vladimir Putin.

Now it is Putin’s turn to call the tune, dismissing Mikhail Fradkov and dissolving the government that had served him throughout his second term in order to prepare for the parliamentary elections looming in December and the presidential ballot in March 2008.In 1999, Yeltsin picked Putin, who was then the little-known head of the FSB (formerly the KGB).Putin chose to elevate the equally mysterious Victor Zubkov, head of the Federal Financial Monitoring Service (also known as the "finance espionage" agency).

Despite that similarity, the reasoning behind these choices appears to be somewhat different.Yeltsin’s choice of Putin - encouraged, ironically, by Boris Berezovsky, the prominent Russian oligarch and Yeltsin advisor who is now exiled in London as Putin’s mortal enemy - was based on his belief that the quiet apparatchik, even if a former KGB spy, was a democrat at heart.After all, Putin had been a proteg? of Anatoly Sobchak, the liberal mayor of St.Petersburg as communism collapsed.

A security services insider, Putin was seen as well placed to protect Yeltsin and his oligarchic allies.Indeed, Berezovsky intended to continue ruling the country from behind the scenes, first as Yeltsin’s health failed in the final months of his presidency, and then by controlling the successor he had helped to choose.

In Russia, however, the KGB is famous for turning the tables in any struggle with the Kremlin apparat.So no one but Yeltsin and Berezovsky was surprised when Putin, their supposed marionette, began pulling the strings.And pull them he did, turning Berezovsky into an international villain, exiling former media mogul Vladimir Gusinsky, jailing the oil magnate Mikhail Khodorkovsky, and eventually imposing a new authoritarian regime behind the fa?ade of Yeltsin’s democratic institutions.

Putin’s own game of prime ministerial "musical chairs" does not reflect a desire to secure for himself a quiet position behind the scenes while someone else rules, for he knows all too well that the path from the Kremlin leads only to inner exile and the grave.Stalin replaced the dying Lenin, Khrushchev denounced Stalin, Brezhnev banished Khrushchev to his dacha, and Gorbachev buried Chernenko.

Only Yeltsin did things differently.He disliked his predecessor, Mikhail Gorbachev, as much his predecessors disliked their predecessors.But all the same he treated Gorbachev in a more decent manner because Yeltsin fundamentally believed in democracy.So he left Gorbachev a private life that could also be lived in public.Putin, of course, did not accost the retired Yeltsin, but he didn’t have to.He simply ignored him while reversing his achievements in building a free Russia.

Before Zubkov’s nomination, reports swirled that the next prime minister would become Putin’s presidential successor, with Sergei Ivanov, a current deputy prime minister, dubbed the most likely candidate.But Ivanov, who is perceived as "strong," would provide unwelcome competition to Putin, who, after all, remains a "strong" president.Had he anointed Ivanov now, Putin’s power would already begin seeping away.

The outgoing Fradkov, surprisingly, put the matter best when he explained why he had resigned: with elections approaching, Putin needed a free hand.So Zubkov’s nomination allows Putin to continue to keep his cards - and thus ultimate power in Russia - close to his chest.

Of course, Zubkov will continue Fradkov’s "Yes, whatever you say Mr.President" management style.Moreover, his former position as head of the Federal Financial Monitoring Service will allow him to draw on a wealth of information to keep tabs on all possible enemies and competitors, perhaps turning them into new model Berezovsky’s, Gusinsky’s and Khodorkovsky’s, if necessary.

The only question now is whether Zubkov, or his successor, will eventually succeed in turning Czar Vladimir into the same sort of non-person that Putin’s rivals have become.

07.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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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7-09-17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Zubkov. 실재 러시아말소리에 가장 가깝게 한국말로 표기하면 어떻게 되나요?

로쟈 2007-09-17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줍코프'일 겁니다. 뭐 이것도 더 들어가면 '줍꼬프'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올 테지만...
 

계간 <세계의문학> 가을호는 전호에 이어서 '포스트 이후의 포스트'란 기획특집을 마련하고 있다. 서점에서 훑어만 보고 읽을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담비에 리뷰 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MAIN&rsec=MAIN&idxno=6070). '패스트-리딩'만 해서는 곤란하겠지만, 워낙에 다들 바쁘잖은가. 또 리뷰라도 챙겨두면 좋지 아니한가.

담비(07. 09. 17) 세계의문학 가을호'포스트 이후의 포스트' 

‘세계의 문학’ 2007 가을호가 ‘포스트 이후의 포스트’의 두 번째 순서에서 ‘대륙의 동쪽에서 전개된 포스트 이론’을 다루고 있다. 다섯 명의 필자가 러시아, 일본, 중국, 홍콩, 한국에서 일어나는 포스트 현상에 대해 논의를 펼쳤다. 변현태의 ‘포스트 소비에트 문예학과 바흐친의 유산’, 황호덕의 ‘무상無常의 시간과 구제救濟의 시간’, 서광덕의 ‘1990년대 이후 중국 사상계의 지형도’, 유영하의 ‘방법으로서의 홍콩’, 허윤진의 ‘헌책방의 문턱’이 그것이다.

변현태는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독립국가연합의 한 공화국으로 러시아가 등장한 이후, 이른바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 문예학의 향방을 추적한다. 그 향방은 두 가지 입장으로 대별되는데, 소련 이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러시아의 문학적 유산을 상속받아 포스트 소비에트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입장과, 서유럽 또는 서유럽과 러시아의 접점에서 포스트 소비에트적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버지-인문학자 대 그 가치를 일단 파괴하고 보자는 아들-니힐리스트의 대립, 슬라브주의 대 서구주의의 대립으로 표현될 수도 있는 둘의 긴장관계가 현금의 어떤 풍요로운 이론적 생산물을 쏟아내고 있는지 그려낸다.

황호덕의 글은 어떤 의미에서 ‘고바야시 히데오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왜 이 일본 비평가가 쟁점이 되는가? 대동아전쟁을 비롯한 역사에 대한 현대 일본인의 태도의 근본을 요약해주는 것이 고바야시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객관적 사실에서 독립시켜, 주관의 회상을 통해 주어지는 ‘마음’의 영역으로 축소시키고, 이 ‘마음’ 속에서 탈가치적인 ‘죽은 자 일반의 무상함’을 객관적 역사 대신 떠올리는 데서 야스쿠니 참배를 비롯해 역사에 면죄부를 주는 현금의 일본인의 사고방식이 가능했다. 이런 비판적 논의를 배경으로 겐겐다이시소(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일본 지성계 최대 쟁점 중 하나인 ‘21세기의 매니페스토·탈패러사이트 내셔널리즘’을 통해 표현된 국민국가에 환원되지 않는 형태의 정치론 등을 살핀다.

서광덕의 글은 중국의 개혁 정책이 성공의 배후에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사상의 전개과정을 보여준다.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그 과정에서 야기된 도시와 농촌, 지역간의 대립, 계층간의 분화, 제도의 부패 그리고 환경파괴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국 지성계의 다양한 입장을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 논자의 흥미로운 통찰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의 사상계가 매우 다양한 입장 차이를 보여주지만, ‘모두 중화전통에 대한 회귀를 논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대중매체가 고전 강독의 스타 만들기에 열중하는 것도 이런 회귀의 화두와 관련이 없지 않다. 논자가 우려하듯 이런 중화성 지향이 정치적 장체서 민족주의와 결합해 새로운 인종주의를 초래하지 않을까? 이런 중화주의에서 예외는 왕후이 정도의 지식인이라고 논자는 말한다. 이런 중국의 모습에 대해 한 일본인 중국 연구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국이 사회주의와 자유주의의 중간이 아니라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두 방향을 모두 충분히 열어놓는 길, 가장 요원하게 보일지라도 최고의 공정성을 가져올 수 있는 이 길을 걸어야 한다.” 중국도 중국을 모르는 이 시점에서, 어떻게 보면 매우 계획적인 사회통제를 통해 가능한 이런 주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유영하의 글은 올해로 반환 10주년을 맞은 홍콩의 현주소를 찾는다. 1967년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좌파 주도의 대규모 폭동이 발생한 이래 영국은 홍콩의 탈중국화를 일관되게 추구했고, 결과적으로 ‘홍콩은 조국이 없다’는 점이 홍콩인들에게 입력됐다. 이제 홍콩인은 외국인과 비교하면 중국인이고, 대륙의 중국인과 비교하면 외국인이다. 이 글은 중국 반환 이후 지난 10년간 홍콩인들이 후식민주의 시대에 어떻게 외국과 중국 사이의, 또는 ‘식민자와 식민자 사이의’ 이중 소외로부터 정체성 찾기에 골몰하는지 추적한다. 그것은 저우레이가 홍콩 후식민의 장래를 ‘이중불가능’으로 정리한 데서 나타난다. 홍콩은 영국 식민주의에 굴복하지 않았듯이 중국 국적주의의 재림에도 굴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각 분야에 있어서 중국보다 이미 선진적인 홍콩이 자기보다 뒤진 중국으로부터 온갖 정치적, 문화적 간섭을 받아야 하는 사태는 매우 심한 사회적 스트레스로 폭발하거나 아니면 사회 전체의 퇴행과 무기력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싶다.

허윤진의 글은 주로 여러 평론가들의 글을 읽어가며 한국 문학에서 1980년대와 오늘날의 거리를 가늠하고 있다. 이 글의 특이한 점은 ‘우리’라는 화자 외에 ‘나’라는 화자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나’라는 화자는 거기에 독자가 밀착할 때는 가장 강력한 보편적 언어를 쏟아내며, 그렇지 않을 때는 제한된 개인의 언어를 쏟아내는 특수성을 지닌다. 논자는 이 렌즈 속에서 독자들에게 1980년대 또는 그 유산과의 거리 가늠을 제안한다.(리뷰팀)

07.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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