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처뉴스에서 오랜만에 기사를 옮겨온다. '외국문학 리뷰' 코너에서 찰스 부코우스키의 <팩토텀>(문학동네, 2007)을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을 나는 '10월의 읽을 만한 책' 목록에 올려놓은 바 있다(책은 오늘 손에 넣었다). 리뷰를 워밍업 삼아 읽어둔다. 리뷰의 필자는 <럭키의 죽음>(랜덤하우스, 2007)의 소설가 이재웅씨이며, 이미지는 내가 덧붙인 것이다. 한편, 책에 대한 소개는 '부코우스키와 치나스키'(http://blog.aladin.co.kr/mramor/1596181)를 참조할 수 있다.

컬처뉴스(07. 10. 19) "뭐, 그래서 뭐?" 

하나의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서울행 전철에서였다. 나는 그 때 『팩토텀』(찰스 부코우스키, 문학동네)의 한 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 부분은 아주 초반 부분으로 마사라는 여자가 팩토텀의 주인공인 치나스키를 덮치고, 그래서 섹스가 이루어지는 부분이었다. 그 때 내 옆에는 마흔이 갓 넘었을 법한 아저씨가 앉아있었는데, 그는 읽을거리가 아무것도 없었고, 그래서 어떤 무료함을 달래려는 듯한 시선으로 내가 쥐고 있던 『팩토텀』을 따라 읽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잠시 후 그것을 알아차렸고, 묘한 창피함을 느끼며 슬그머니 책을 덮었다. 그 후에도 나는 몇 번인가 더 버스 안에서, 그리고 전철에서 책을 덮었다. 특히, 여자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어쩐지 그것이 예의일 것만 같았다.

『팩토텀』은 어떤 면에서는 불편한 책이다. 그것은 그 내용이 너무 노골적이고 또 적나라하기 때문이다. 또, 그러면서도 주인공 치나스키가 무례하고 뻔뻔하기 때문이다. 치나스키는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뭐, 그래서 뭐?”

한 때, 어떤 이들은 현대인을 신(新)유목민으로 규정한 적이 있다. 현대인의 개인주의적 성향, 자유로움, 통신과 교통의 발달, 점조직의 네트워크와 국경의 붕괴 등이 이러한 양상의 원인이기도 하고 결과라고도 했다. 혹자는 더 나아가, 이러한 신(新)유목민이 기존의 농경민들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며, 또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낸다고도 했다. 이제는 그런 가치들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나는 이것을 그르다고 생각지 않으며,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인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치나스키는 어떨지 모르겠다. 어떤 면에서 누구보다도 신(新)유목민다운 그는 과연 신유목민의 출현이 좀 더 역동적이고 창조적이고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하는 삶의 조건들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할까? 치나스키는 어쩌면 이러한 담론들이 삶의 불안정성을 포장하고 있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충만 못지않게 불안도 충분히 운동적이기 때문이다. 충만에게 넘쳐흐름이 있다면 불안에게도 균열과 붕괴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치나스키는 자신도 뻔뻔하지만, 세상의 균열을 다른 형식으로 포장이나 해대는 너희들 역시도 나 못지않게 뻔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치나스키라면 그렇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어떻게 섹스를 빠구리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의 뻔뻔함, 그의 무례함, 그의 직설적이고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언어들은 어떤 면에서는 세상에 대한 빈정거림이자, 또한 그 자체로 이미 충분히 전투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그것이야말로 그의 끝없을 듯한 직업 편력이, 그의 이야기가, 마지막으로 그의 『팩토텀』이 우리에게 불편한 이유일 것이다.

누군가는 치나스키를 위악적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그저 밑바닥 인생의 직업편력기 정도로 읽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과장이라고 말할지 모른다(하지만 세상에 과장이 아닌 게 있단 말인가?). 하지만, 아주 주관적인 서술을 하자면, 나는 이 책이 우리 사회의 누군가들에게는, 더 정확히 말해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큰 공감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 역시 밑바닥은 아니지만, 밑바닥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치나스키처럼 곤욕스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누가 치나스키처럼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있고, 또 그 환멸 앞에서 떳떳하기 위해 본능적이고 습관적으로 과감함과 냉소를 익히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한 발만 삐끗해봐라, 그럼 바로 밑바닥이다!’ 이 불안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유로울까?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정말이지 우리는 이보다 덜 노골적이고 덜 적나라하단 말인가? 치나스키에 대한 공감은 아마 이 지점부터 시작될 것이다.

이 소설은 『팩토텀』(그 뜻이 잡역부, 막일꾼이라고 책 표지에 친절하게 나와 있다) 그 자체의 삶이다. 말 그대로 밑바닥의 삶이다. 밑바닥의 방황이고, 밑바닥의 고독이고, 밑바닥의 슬픔이다. 나는 ‘팩토텀’의 삶을 앞에 두고 굳이 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말하고 싶지는 않다. 또,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 개념을 빌려오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이제 너무 진부한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은 어떤 면에서 찰스 부코우스키의 의도를 거스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쩐지 찰스 부코우스키가 그려낸 치나스키는 세계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시 “뭐, 그래서 뭐 어쨌다구?”하고 말하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이 전면적 부정과 냉소적 무관심의 차이는 분명 비슷해보이면서도 다른 것이다. 그리고 찰스 부코우스키는 후자 쪽에 더 비중을 둔 듯하다.

그런 면에서 『팩토텀』을 사실적인 팝 문학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그것을 떨쳐버릴 수 없다. 치나스키에게 인터내셔널가는 어울리지 않지만 비틀즈의 노래는 제법 잘 어울리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어떤 면에서 보면 단조롭기만 한 이 이야기를 풍부하게 보이게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치나스키의 망나니같은 자유분방함을 누가 흉내낼 수 있단 말인가? 또한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어떤 면에서 팝적인 요소가 도처에 도사리기 시작한 한국문학에 있어 좋은 본보기가 될 지도 모른다. 『팩토텀』은 봐, 이것이 오리지널 팝이야! 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위선적인 담론에 속하지도 않지만, 혁명성도 없는 것. 하지만 불편한 것. 리얼리즘적이지는 않지만 구체적인 것. 사실적이면서 동시에 표현주의적인 것.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필연적으로 '그리고 나는 내 그것을 세울 수 없었다'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허무적이고 절망적인 세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치나스키는 살아 있으며, 또한 그 안에서 찰스 부코우스키의 숨결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뭐, 그래서 뭐?"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찰스 부코우스키라는 다소 생소한 작가가 한국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일 것이다. 그리고 그 방식은 너무도 거칠고, 또한 극렬하기에 나는 전철 안에서, 또 여자 앞에서 이 책을 슬그머니 덮었다는 것이고, 이 책이 정말 괜찮은 책이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치나스키가 너무도 매력적인 친구라고 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이재웅_소설가)

07. 10. 23.

P.S. <팩토텀>의 한 부분, 그러니까 "아주 초반 부분으로 마사라는 여자가 팩토텀의 주인공인 치나스키를 덮치고, 그래서 섹스가 이루어지는 부분"이 어떤 것이길래, 라는 호기심에 찾아보니까 이런 식의 묘사로 돼 있다.

"땀 때문에 마스카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그녀가 펄쩍 뛰어올라 날르 덮쳤고 나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녀의 벌어진 입이 내 입을 찍어눌렀다. 그녀의 입에서는 침 냄새, 양파 냄새, 곰팡내를 풍기는 포도주 냄새, 거기에 (상상해보면 아마도) 남자 한 사백 명분은 될 정액 냄새가 진동했다. 그녀는 혀를 내 입속으로 쑤셔넣었다. 그녀의 혀는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나는 웩웩거리며 그녀를 밀쳐냈다. 그러자 그녀는 무릎을 꿇더니 내 바지의 지퍼를 확 내리고는...(하략)"

 

 

 

 

뭐, 이 정도 묘사야 그 흔한 '야설'들에 비할 바는 아니겠다. 이보다 더 선정적인 건 사실 뒷표지에 실린 카피문구들이다. "조지 오웰 이래, 이처럼 실감나게 존재의 궁핍을 기록한 예가 없다."(뉴욕타임즈)고 해서, <동물농장>의 작가를 검색해보니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삼우반, 2003)이 번역돼 있다. 나로선 거기에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창, 1994; 범우사, 2006)을 보탤 수 있겠다. 카프카의 <단식 광대>와 함순의 <굶주림>을 다룬 에세이를 표제작으로 한 폴 오스터의 <굶기의 예술>(문학동네, 1999)도 이 방면으로 읽어볼 만하다(이 책의 열린책들 버전이 <폴 오스터의 뉴욕통신>이다). 하지만 부코우스키가 '굶기의 예술' 계열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뭐, 그래서 뭐?'란 대사가 치나스키의 입에서 나올 수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뉴올리언스 시절을 기억했다. 그 무렵 글을 쓸 수 있는 여유를 얻기 위해 일주일 내내 하루에 오 센트짜리 막대사탕 두 개만 빨며 지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굶주림은 예술을 돕지 않았다. 그저 방해할 뿐이었다. 인간의 영혼은 위장(胃腸)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어찌 됐든 인간은 한 푼짜리 막대사탕보다는 고급 비프스테이크를 먹고 반 리터들이 위스키를 마신 다음에야 훨씬 더 글을 잘 쓸 수 있다. 궁핍한 예술가라는 신화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나로선 동의할 만한 주장이다. 그러한 판단은 내가 요즘 (강의 때문에) 읽고 있는 <전쟁과 평화>(1869)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1880) 모두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전기적 삶에 있어서 가장 안정된 시기에 씌어진 작품들이기에 더욱 굳어진다. 아내와의 불화가 극에 달했을 때 톨스토이가 쓴 작품은 <크로이체르 소나타>이며, 폐병환자였던 아내의 고통과 죽음을 배경으로 씌어진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이다. 두 중편 모두 문제적인 작품들이긴 하나 <전쟁과 평화>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궁핍한 예술가'도 물론 가능하지만 그는 더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친 불운한 예술가일 따름이다(이걸로 요즘 나의 궁핍한 글쓰기에 대한 변명을 삼고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릴케 현상 2007-10-24 23:08   좋아요 0 | URL
더 잘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놓친 불운한 예술가라는 말씀이 팍 와닿네요^^ 예술가의 불운이 주어온 후광 같은 건 그래도 무시할 수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들지만요

로쟈 2007-10-24 23:16   좋아요 0 | URL
궁핍 속에서도 좋은 시는 씌어질 수 있지만 소설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일정 기간의 지속적인 작업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니까요...

2007-10-25 1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5 1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26 1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0-27 00:50   좋아요 0 | URL
저만큼이 아니라 저처럼 하시면 안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