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전시회 얘기도 적은 김에 새로 나온 미술관련서 소개도 옮겨놓는다. 특이하게도 <미술관에 간 화학자>(랜덤하우스, 2007)가 책의 제목이다. 제목대로 저자 전창림 교수는 '화학자'이고 미술에 해박해서 한편으론 미대에서 미술재료에 대한 강의도 맡고 있다고. 열렬한 미술광이 아닐까 짐작해볼 수 있는데, 짐작대로이다. "미술 책을 많이 읽었고, 루브르·오르세·퐁피두… 미술관 무료 개방일이면 하루종일 살면서 그림 구경 다녔어요. 당시 파리에 살던 백수남·김기린 화백과도 친하게 지냈어요. 생각해보니 과학자보다 화가들을 많이 만났네요.”라고 고백하고 있으니 말이다. 학문간 '크로스오버'의 좋은 사례이다 싶은데, 이러한 학제적 관심의 밑바닥은 바로 '열정'이란 건 확인하게 된다. 돈으로 장려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다시 든다. 관련기사들을 모아둔다.

세계일보(07. 11. 03) 르누아르는 어떻게 햇빛을 그렸을까

렘브란트 그림으로 유명한 ‘야경’이 있다. 어둠 속에서 군대나 경찰이 순찰을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본래는 낮 풍경이었는데, 100년 후 사람들이 어둡고 거무칙칙한 그림을 보고 추측해 붙였다는 것이다. 밤 풍경이 된 데는 여러 원인이 있다. 이 가운데 렘브란트가 납이 들어간 황토색, 흰색, 갈색 물감을 많이 썼는데, 그게 검게 변하는 특성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흑화현상’은 밀레의 ‘만종’에서도 나타난다. 여체를 그리면 껴안고 싶게 만든다는 르누아르는 따뜻한 햇빛을 캔버스에 담아낸 화가다. 그가 색채의 오묘한 성질을 몰랐다면 ‘목욕하는 여인’ 같은 명화는 결코 나올 수 없었다.

얼마 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벽화 ‘최후의 만찬’이 16기가 픽셀의 고해상도 이미지로 재생돼 불과 몇 ㎝ 떨어진 곳에서 그림을 보는 것 같다 해서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 벽화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손상된 것은 다빈치가 물감의 성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사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미술은 화학과 지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예술이 아닐까.

‘미술관에 간 화학자’는 과학자의 눈으로 본 미술, 미술과 함께하는 과학에 대해 말하고 있다. 홍익대 화학시스템공학과 교수인 지은이는 어린 시절 화가의 꿈을 화학으로 풀어내며 미술과 화학, 또는 예술과 과학의 접점을 찾아가는 일을 해나왔다. 일반 미술평론가와 달리 화학의 소산으로서 그림을 분석하는 화학자의 미술평론이 대단히 섬세하고 흥미진진하다.

아무리 명화라도 그냥 보면 1분을 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설명을 들으면 몇 시간을 봐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가 더욱 깊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지은이는 명화의 대부분은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아르놀피니의 결혼’을 지은이 시각으로 음미해 보자. 왜 남자가 손을 들고 있을까. 왜 대낮인데 촛불이 켜져 있을까. 그것도 딱 하나만. 그림 가운데 거울에는 뭐가 비친 것일까. 신부의 배는 왜 임신한 것처럼 부르며,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녹색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남자 옷의 색이 왜 저렇게 이상하게 변했을까. 알아야 할 것도 많고, 이야기할 것도 많다.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알면 더욱 재미있어지고 생각이 풍부해질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책에는 화학자의 별난 미술 감상기가 긴박감 있게 펼쳐진다. 화가들이 돌연사한 배후에 흰색 물감이 있었을 줄이야! 밀레의 만종이 칙칙해진 것이 아황산가스 때문이었다니. 철학적 사색까지 자극했던 세잔의 유명한 회화 ‘사과와 오렌지’에 등장하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물감이 단지 앞으로 나와 보이고, 뒤로 들어가 보이게 하려고 사용했다니…. 명화 속 화학반응의 비밀이 밝혀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고 무릎을 치게 감탄하게 한다.

인상파 화가들은 스펙트럼의 과학을 예술에 끌어들인다. 빨강과 파랑을 미리 섞으면 어두운 보라색이 되는데, 밝은 파랑과 밝은 파랑을 나란히 칠하고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우리 눈의 망막에 밝은 보라색으로 보인다고 한다. 과학과 미술의 연결고리까지 밝히는 지은이의 궁구하는 미술 열정이 돋보인다.(정성수기자)




 

 

 

 

 

 

 

 

중앙일보(07. 11. 03) ‘최후의 만찬’이 손상 심한 건 다빈치가 화학에 문외한인 탓

고등어에 많이 들어 있다는 불포화지방산이 미술의 역사를 바꿨다? 거장 렘브란트의 대표작 ‘야경’은 사실 낮 풍경을 그린 것이다? 미술 서적의 봇물 속에서도『미술관에 간 화학자』(랜덤하우스)는 도드라지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미술관에 걸어들어간 화학자’는 홍익대 화학시스템공학과 전창림(53) 교수다. 화학자의 프리즘을 통해 바라본 미술은 신선하다.



다빈치는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유채와 템페라 기법을 함께 사용했다. 템페라는 안료를 갤 때 계란노른자를 넣는 방법이다. 노른자는 접착력을 높이기 위해 넣는 것으로 50% 이상이 수분이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기름’인 유채기법과 템페라는 상극인 셈이다. ‘최후의 만찬’이 다른 작품에 비해 유독 심하게 손상된 이유는 어울릴 수 없는 두 기법이 충돌한 탓이다. 수지 균형이 깨어져 상 분리가 일어난 것. 전 교수는 “미술뿐 아니라 기계공학, 천문학, 기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성을 드러냈던 다빈치도 화학에는 문외한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취학 전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고교 때까지 미대 진학을 꿈꾸었던 그는 돌연 화공과에 진학했다. “아버지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어요. 제가 화학을 공부해 가업을 이어주길 바라셨거든요.” 그의 부친은 포스터컬러로 유명한 ‘알파색채’의 창업주 전영탁 회장이다.

화학도가 된 뒤에도 미술에 대한 관심을 거두지 않던 그는, 1981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에 빠져들었다. 빡빡한 학사일정 속에서도 어떻게든 시간을 냈다. “미술 책을 많이 읽었고, 루브르·오르세·퐁피두… 미술관 무료 개방일이면 하루종일 살면서 그림 구경 다녔어요. 당시 파리에 살던 백수남·김기린 화백과도 친하게 지냈어요. 생각해보니 과학자보다 화가들을 많이 만났네요.”

가욋일에 눈을 돌린 전 교수를 곱지 않게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과학자가 웬 미술이냐고, 외도라는 비난도 받았어요. 하지만 저는 ‘인류에 유익을 준다’ 는 과학의 본령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최후의 만찬’ 같은 불후의 명작이 비운의 명작이 되지 않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는 현재 홍익대 미술대학에서 미술재료 강의를 하고 있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 창조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미술이나 과학이나 똑같지 않나요?” 그는 어린 시절 품었던 화가의 꿈을 화학이라는 붓으로 그려내고 있다.(이에스더기자)

07. 11.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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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7-11-04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밌겠네요 :-)

Kitty 2007-11-05 0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은 당장 사야겠네요. 좋은 책 소개 감사합니다! ^^

심술 2007-11-05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소개 고맙습니다.

로쟈 2007-11-05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제가 책을 사드리는 것도 아니고.^^;
 

아주 오랜만에 미술 전시회에 관한 기사를 옮겨온다. 북리뷰들만 읽다가 진절머리도 나서(왜 아니겠는가!) 잠시 미술쪽으로 눈을 돌렸다가 의외로 '횡재'한 기분이 들게 한 기사이다. 시간이 난다면 이 가을이 가기 전에 미술관으로 걸음을 돌려보는 것도 괜찮을 듯싶다. 최근에 국내외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는 안성하, 배준성, 두 젊은 작가의 전시회인데, 이런 경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이미지만으로도 활자로 인한 멀미를 잠시 덜어준다(기사에 딸린 이미지들은 각각 미술관전시정보 http://link.allblog.net/6322314/http://www.galleryinfo.co.kr/170 와 갤러리현대 http://www.galleryhyundai.com/new/kr/exhibitions/past84_1.htm 에서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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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07. 11. 05) 클로즈업·각도비틀기… 확 달라진 이미지들

미술시장의 젊은 스타작가 두 명의 개인전이 나란히 열리고 있다. 담배와 사탕을 클로즈업해 그리는 젊은 여성작가 안성하(30)와 서양 명화에 한국여인의 누드사진을 합성해 고전을 비틀어온 배준성(39)이 그들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선보이고 있는 안성하의 신작들은 100~200호의 대작들이 대부분. 전시장에 들어서면 매크로 렌즈로 접사한 듯한 사실적이고도 거대한 화면이 시각을 압도한다. 수십 배로 클로즈업된 이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오브제들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어쩐지 쓸쓸해지는데, 투명하고도 촉촉한 화면이 도회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탓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언뜻 보면 사진처럼 보일 정도로 담배와 사탕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그의 그림들은 유리를 통해 굴절되는 오브제로 인해 몽환적이면서도 추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극사실적인 구상 밑에 아스라이 배채(背彩)된 추상의 흔적이 묘한 아우라를 느끼게 하는 게 그의 매력. 국내 미술시장은 물론 스페인 아르코 아트페어와 소더비, 크리스티 등 해외경매에서도 각광받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작가는 “담배는 독이며 아름답지 않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정신적 위안이 아름답고, 사탕은 달콤하고 유혹적이지만 결국 독이 되고 만다”고 말한다. 줄곧 사탕과 담배만을 그려온 이유다. 13일까지. Close Window

배준성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7~25일 열리는 ‘더 뮤지엄’전에서 벨라스케스, 다비드, 앵그르, 베르메르 등 거장들의 명화에 동양 여성의 누드를 슬쩍 끼워넣는 기존 방식에 렌티큘러라는 새로운 매체를 가미한 신작 40여점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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렌티큘러는 층층이 쌓인 레이어로 인해 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달라보이는 입체 영상 매체. 시각적 교란을 통해 이미지가 움직이는 듯 보이는 렌티큘러를 통해 왼편에서 보면 우아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명화 속 한국 여인이 오른쪽에서 보면 나체의 모습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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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이는 정물을 그리고 싶었다”는 작가는 프라도 미술관, 루브르 박물관, 에르미타주 박물관 등 12개 유명 박물관들의 내부 전경을 유화로 그린 후 명화가 걸려있던 자리에 자신의 렌티큘러 작품을 덮어씌웠다. 관음의 욕구를 부추기며 훔쳐보기를 위한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작품들이다.(박선영기자)

07. 11. 04.

P.S. 배준성의 예전 작품들은 'The Costume of Painter'(터치아트, 2006)로 출간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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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7-11-05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절머리난 북리뷰 읽기...ㅎ

로쟈 2007-11-05 17:28   좋아요 0 | URL
^^;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할 것 없이 스캔들로 얼룩져가는 게 요즘 '조용한 아침의 나라'이다. 대선이 껴있는 연말까지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되고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모처럼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마음이 맑지 않은 이유이다. 개인사는 접어두고서라도 말이다. 책을 읽는 마음 또한 그러하다.

책소개 글들을 정기적으로 쓰고 있기에 매주 나오는 북리뷰들을 일견해보는 것이 '습관'처럼 돼 버렸다(하긴 이건 오랜 습관이다). 가을날 배낭 하나 짊어지고 길 떠나는 팔자는 아닌 것이다. 이번주에는 별로 눈에 띄는/드는 책들이 없는데(내 경우엔 '의외성'이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다. '뜻밖의 책'과의 만남이야말로 가슴 뛰는 일이니까), 그냥 담담하게 <중세의 사람들>(이산, 2007)이나 만나보기로 했다. 

중세와 중세사에 관한 책들이 비교적 드물지 않은 상태에서 이 밋밋한 제목의 책이 눈길을 끄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먼저, 저자인 아일린 파워(1889-1940)가 영국의 여성 사학자로서 중세관련으로는 국내에 많이 소개된 프랑스쪽 역사학자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또 한가지는 책이 먼지 흠뻑 뒤집어쓰고 있을 만한 1924년작이라는 것. 80년도 더 된 책이 여전히 출간될 만하다면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심을 갖고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과문하지만 책은 '사회경제사의 고전'이라고 한다. 출판사 소개는 이렇다.  

이 책 <중세의 사람들>은 바로 그 새로운 시각으로 쓰인 사회경제사의 한 전형 같은 역사서로서, 지금은 사회경제사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외국에서는 서양중세사의 기본텍스트로 읽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비록 초판이 출판된 지 8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완역되었지만, 의외로 비전문가인 학생과 일반인도 적지 않게 이 책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중학교 사회교과서에 이 책 1장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이 책을 읽어보고 싶은데 책을 찾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쉽게 눈에 띈다.

이 책을 이미 알고 있는 "의외로 비전문가인 학생과 일반인" 축에도 못 끼는 형편이라 쑥쓰럽지만 여러 기대와는 달리 로쟈는 책을 그리 많이 읽는 편이 아니다(독서가 취미는 넘어서지만 직업은 아니기에). 더구나 중세사에 관해서라면 기본서들이나 장서용으로 모아두었다가 지금은 박스에 보관중이니 전문가는커녕 '비전문가'도 못되는 것이다. 아래 리뷰를 보면 "서양의 중세를 이해하는 데 최적의 입문서"라고 강추하고 있다. 나 같이 '무지한' 독자에게 딱 맞는 책이겠다.   

경향신문(07. 11. 03) 중세, 민초의 삶을 더듬다

서양 중세의 일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케임브리지 대학의 경제사 교수인 아일린 파워(1889~1940)가 쓴 ‘중세의 사람들(Medieval People)’은 평범한 6명의 인물을 등장시켜 중세 사람의 다채로운 삶을 손에 잡힐 듯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이 책에서 무겁고 어두운 중세의 종교적 분위기 대신 민초들의 땀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6명은 샤를 마뉴 치세 하의 프랑크 왕국의 농부 보도, 베네치아 상인 겸 여행가인 마르코 폴로,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나오는 수녀원장 마담 에글렌타인, 파리의 중간 계급 가정 주부인 메나지에의 아내, 15세기 지정 거래소의 양모무역 상인인 토머스 벳슨, 헨리 7세 시대 에식스의 모직물 업자인 토머스 페이콕 등이다. 등장 인물들 가운데에는 마르코 폴로처럼 매우 유명한 사람도 있고, 마담 에글렌타인처럼 수녀원장도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중세시대에 살던 중간 계급 이하의 사람들이다.

저자는 “이런 평범한 사람들이 중세 사회를 떠받치고 변화를 주도해 결국 자본주의 사회가 열렸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면서도 “중세는 결코 ‘암흑시대’라는 말로 단순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기층의 사람들을 다루고 있지만 굳이 이 책이 ‘민중사’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등장 인물들의 사회적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이다.

아일린 파워는 자신이 여성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주인공 6명을 남자 3명, 여자 3명으로 설정했다. 저자는 주인공이 남자든 여자든 반드시 그들의 남녀 관계를 다루고 있다. 최근 역사 연구에서 여성사를 제외하면 여성을 남성과 같은 비중으로 다룬 역사서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도 이 책은 20세기 초반에, 그것도 중세사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여성의 삶과 일상을 소개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업으로 평가될 만하다.

‘중세의 사람들’은 여느 중세 관련 서적처럼 성직자, 영주, 기사의 신앙이나 무용담을 다루는 게 아니다. 생산과 유통을 담당했던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그 때문에 이 책은 ‘사회경제사의 고전’으로 평가 받는다. 저자는 “사회사는 정치사에 비해 저명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아 독자의 관심을 끌기도 어렵고 간혹 모호하고 막연하다는 비판을 받는다”면서도 “개인 위주의 서술 방식이 화려하지는 않아도 결코 재미가 작은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중세의 사람들’은 서양의 중세를 이해하는 데 최적의 입문서라 할 만하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개론적 지식 이상의 것을 얻으면서 역사의 의미를 곱씹어 볼 수 있다. 원저의 초판은 1924년 나왔으나 이번에 국내에서 처음 완역됐다.(설원태 선임기자)

07. 11. 04.

 

 

 

 

P.S. 중세에 관한 너무도 많은 책들 가운데 <중세의 사람들>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건 자크 르 고프 등의 <중세에 살기>(동문선, 2000)와 노만 켄터의 <중세 이야기>(새물결, 2001)이다. 특히 '위대한 8인의 꿈'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중세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아일린 파워의 책을 염두에 두고 씌어진 것이다.

저자 켄터에 따르면, "이 책은 4세기에서 15세기에 살았던 여덟 명의 중세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파워의 책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일반 독자와 대학생을 대상으로 씌여졌으며, 중세인 여덟 명의 간략한 전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책은 파워의 고전적인 작품과 몇 가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파워는 사회경제사가인 반면 나는 문화사와 지성사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다." 따라서 파워의 책과 나란히 읽어볼 만하다. 특별히 중세의 여성들에 대해서는 르 고프와 함께 중세사의 거장으로 꼽히는 조르주 뒤비의 <12세기의 여인들>(새물결, 2005) 등이 번역돼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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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블로그도 인기 블로그가 될 수 있다?
    from 내 안에 아직 2007-11-04 18:17 
    제가 애용..까지는 아니지만 책을 살 때 주로 이용하는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는 블로그 서비스도 제공합니다.마이리스트, 마이리뷰 등 내가 알라딘에 올린 글들을 모아주고다른 사람이 쓴 글들을 쉽게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알라딘을 많이 이용하신다면 이용해 볼만하다고 하고 싶지만블로그 자체의 기능은 자유도가 많이 떨어지고 제한된 점이 많습니다.말 그대로 '서재'로만 이용하기엔 좋을 듯 합니다.제한되고 협소한 공간임에도 불고하고그 중에서 유명한 블로그가 하나...
 
 
람혼 2007-11-04 13:13   좋아요 0 | URL
<중세의 사람들> 책 소개를 보니, 일전에 새물결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되었던 Norman F. Cantor의 <중세 이야기-위대한 8인의 꿈(Medieval Lives)>이 생각납니다. 비슷한 형식으로 또한 흥미롭게 읽은 책은ㅡ비록 중세사에 관한 책은 아니지만ㅡSusan Whitfield의 <실크로드 이야기(Life along the Silk Road)>(이산)가 떠오르는데, 이런 식의 "인물의 '생생한' 생을 통해 본 당대의 역사 이야기"를 저는 상당히 좋아하는 편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마르크 블로크의 thaumaturgie에 대한 연구나 뤼시엥 페브르의 라블레론, 루터론, 또한 거시와 미시의 씨실과 날실을 직조하는 조르주 뒤비의 여러 책들을 또한 첨가할 수 있을 텐데요, 또 다른 '비전문가' 내지는 '순수'애호가의 입장에서(^^;) 상당히 반가운 책 소식입니다. 감사드립니다.
덧붙여, 어떤 책과의 만남에 있어서 '의외성'과 '뜻밖의 만남'을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하시는 로쟈님이, 왠지 더욱 저와 '가깝게' 느껴지는군요.^^

로쟈 2007-11-04 13:12   좋아요 0 | URL
켄터의 책은 빙고입니다. 제가 글을 쓰는 중에 댓글을 달아주셨네요.^^

람혼 2007-11-04 13:17   좋아요 0 | URL
앗, 거의 실시간 댓글이군요. 이미지 올려주신 르 고프의 <중세에 살기>도 재미있는 책이죠.^^ 르 고프가 쓰거나 편집한 책은 국내에도 다종다양하게 나와 있지만, 특히 르 고프 편집의 <고통 받는 몸의 역사>(지호)도 이른바 '병리학의 고고학'이라는 입장에서 가볍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로쟈 2007-11-04 13:30   좋아요 0 | URL
뒤비나 르 고프의 책들은 이미 서가 하나 정도는 차지할 만큼 소개돼 있어서 제가 중세에 큰 관심이 없다는 게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람혼 2007-11-04 13:42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런 심정은 정말 이해가 가는 바입니다.^^ 글이 진행중일 때 단 제 댓글과 로쟈님의 완성된 글이 이루는 고리를 보니, 역시나 책이 책의 꼬리를 무는 '하이퍼텍스트'의 여러 갈래 길이란 것이 어느 정도는 '공통감각'을 포함하는 '포장도로'라는 생각도 한 자락.^^;

wnsgml 2007-11-04 18:06   좋아요 0 | URL
글 약간 인용할려고 하는데요, 양해부탁드립니다.
트랙백으로 주소 달아드릴게요 ^^

로쟈 2007-11-04 18:27   좋아요 0 | URL
먼댓글 말씀이신가 보네요. 책에 관한 정보라면 저는 '카피레프트'의 입장이기 때문에 북리뷰들을 많이 옮겨오고 있습니다. 블로그란 게 절반은 공적인 공간이니까요(대신 절반은 사적인 공간이기에 제 얘기들을 끼워넣고 있습니다)...
 

개봉대기중인 영화들 가운데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은 단연 리안의 신작 <색, 계>이다. 이미 여러 저널들의 호평을 접하면서 오랜만에 영화관 외출을 꿈꾸게 하는 작품인데, 눈에 띄는 대로 한겨레21의 리뷰(http://h21.hani.co.kr/section-021015000/2007/11/021015000200711010683007.html)를 옮겨놓고 슬쩍 읽어본다. 감독과 주연 여배우(탕웨이)가 내한하여 기자회견 등도 가졌지만 따로 보태지는 않는다. 대신에 장학우가 부른 주제가는 한번 들어보시길(http://www.youtube.com/watch?v=QDWrZuJKGrk).

한겨레21(07. 11. 01) 색에 빠진 자, 계를 잃을지니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그의 진심은 과연 무엇인가. 사랑에 대한 오래된 혹은 해묵은 주제다. 이렇게 해묵은 주제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는 데, 리안 감독만큼 적임자도 드물다. 고급스런 대중영화의 장인이자 사랑의 감정을 다루는 기술자인 리안 감독은 오래된 이야기 혹은 통속적 사랑을 사랑이 불가능한 상황에 던져둔다. 그리고 희열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물의 표정을 날카롭게 잡아내 관객의 마음을 후벼판다. 불가능한 사랑만큼 사랑의 애절함을 절절하게 드러내는 사랑도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카우보이들의 동성애는 처연했다. 리안이 이번엔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40년대 일본에 점령된 상하이, 친일파 정보부 대장과 그를 암살하려는 여성 사이에 불가능한 사랑이 시작된다. 리안의 <색, 계>(色, 戒)는 서로를 경계(戒)하지만, 서로의 색(色)에 빠져드는 사람들의 이야기다.(*예고편은 http://www.youtube.com/watch?v=uqnBNz5xppQ)

일본의 침략을 피해서 홍콩으로 피난온 왕치아즈(탕웨이)는 외롭다. 그의 친구들은 항일운동에 뛰어들고 그도 자신의 운명을 저항운동에 맡긴다. 밀수업자의 아내인 막 부인으로 위장해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량차오웨이)의 부인(조안첸)에게 접근한다. 그들의 목표는 이의 암살. 어렵게 이 부부에게 접근하지만 갑작스레 부부는 상하이로 돌아가버린다. 사실 왕치아즈는 암살의 주모자인 광위민(왕리훙)을 연모해 암살에 가담했다. 하지만 그들은 목표를 이루지도 못하고 왕치아즈는 상처만 받는다. 그리고 3년의 세월이 흐른다. 광위민이 다시 왕치아즈를 찾아온다. 그리고 왕치아즈는 또다시 막 부인이 돼 이에게 접근한다.

적을 유인하며 연인을 유혹하는 마음

이제 모든 행위는 하나의 의미가 아니다. 막 부인의 행위는 이에 대한 유인이자 유혹이다. 적을 유인하는 일이자 연인을 유혹하는 행위다. 막 부인은 어느새 자신이 죽여야 하는 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색(色)은 계(戒)를 무장해제시켜버렸다. 이의 거친 숨결은 막 부인의 가슴을 파고들었을 뿐 아니라 마음까지 달구었다. 이제 상황은 바뀌고 진실마저 모호하다. 나의 편인 저항군은 나를 이용하려고만 하고, 적인 그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를 이용하는 자와 나를 사랑하는 자의 자리가 모호하다. 영화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영화관이 어두워서 영화를 보러가지 않는다는 이도 외롭다. 너무나 오랫동안 아무도 믿지 못했던 이는 의심에 지쳤다. 그래서 이는 막 부인을 “믿는다” 보다는 “믿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모든 행위는 역설이고, 모든 말은 모호하다. 막 부인은 저항군에게 당신들이 그를 죽여버리는 꿈을 꾼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인지 그조차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은 언제부터 사랑했을까. 어쩌면 처음부터. 처음으로 이를 만나고 돌아온 왕치아즈에게 친구가 묻는다. “어떻게 생겼어?” 그는 “상상하곤 다르다”고 대답한다.



적나라한 섹스신엔 체념과 위로가

리안의 영화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보다는 어떻게 보여주느냐가 중요하다. <색, 계>는 집요한 상반신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감정을 잡아낸다. 배우들의 완벽에 가까운 연기는 집요한 클로즈업을 끝까지 견뎌낸다. 20여 년을 연기한 량차오웨이도, 첫 번째 영화에 출연한 탕웨이도 완벽하게 리안의 인물로 변신한다. 미인대회 출신인 탕웨이는 미모보다는 연기로 관객을 놀라게 한다. 그리고 조연배우 누구나 자신의 연기를 해낸다. 이렇게 완벽한 연기에 담긴 무심한 행동이나 스쳐가는 말들은 영화의 공기를 서서히 물들인다. 어느새 쌓인 먼지처럼 어느덧 켜켜이 쌓인 감정에 빠져들게 만드는 <색, 계>는 ‘리안표’ 영화다.

<색, 계>는 스캔들의 영화다. 적나라한 섹스신이 화제를 모았고, 성기와 음모 노출 논란도 있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30분가량 삭제된 채로 상영됐고, 미국에서도 17살 이하 관람금지 등급(NC-17)을 받았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제한상영 판정을 받지 않고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심의를 통과했다. 세 번의 섹스신은 색에 굴복해 계를 포기한 자의 체념한 표정으로, 서로의 외로움을 쓰다듬는 위로로 남는다.

오늘날 리안만큼 종횡사해 동서고금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감독은 드물다. 서양과 동양, 시대극과 현대물, 이성애와 동성애, 리안은 무엇을 만들어도 대중성과 작품성의 접점을 찾아내는 능력을 보여왔다. 리안은 뉴욕에 사는 동양인 게이와 그의 아버지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그렸던 <결혼 피로연>으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받으며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아이스 스톰>에서 1970년대 미국 중산층의 해체를 그렸던 리안은 <와호장룡>으로 홀연히 옛날의 중국으로 돌아갔다. 한편으론 19세기 영국 배경의 <센스 앤 센서빌리티>도 영화로 옮겼다. <색, 계>는 리안이 <브로크백 마운틴> 이후에 다시 중화권 감독으로 돌아와 만든 영화다. <색, 계>로 그는 2005년 <브로크백 마운틴>에 이어 2년만에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장을 받는 드문 사례를 남겼다. <색, 계>는 중국의 여성소설가 장아이링의 작품을 원작으로 삼았다. 관진펑(관금붕)의 <화이트 로즈, 레드 로즈>, 허우샤오셴의 <해상화>도 장아이링의 소설이 원작이다. <색, 계>는 11월8일 개봉한다.(신윤동욱 기자)

07. 11. 03.

P.S. 그러고 보니 <헐크>를 제외하곤 리안의 영화 대부분을 본 듯하다. <결혼피로연>(1993)의 유쾌한 기억이 어느새 14년전인데, 그 사이에 한 아시아계 영화감독은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그 시간의 가치는 저마다에게 다른 것이다. 기사의 말미에 장아이링(장애령)이란 이름이 눈에 띈다(그러고 보니 <화이트 로즈, 레드 로즈>와 <색, 계>의 분위기가 비슷해도 보인다).

이 걸출한 중국(대만) 여성작가의 작품으론 몇 권이 더 번역됐었지만 현재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건 재작년에 출간된 중단편집 <첫번째 향로>(문학과지성사)와 <경성지련>(문학과지성사) 두 권뿐인 듯하다. 이 작품들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는 이렇다:

중국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장아이링(장애령.張愛玲)의 중단편소설집이다. '붉은 장미, 흰 장미', '경성지련'을 포함하여 총 일곱 편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1944년 상하이에서 장아이링의 유일한 소설집이 <전기(傳奇)>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고, 1994년 타이완의 '황관출판사'에서 <장아이링 전집>(전 15권)을 내면서 <경성지련>, <첫번째 향로> 두 권으로 나누어 재출간했다. 한국에 소개되는 두 책은 '황관'의 예를 따랐다.

중국에서는 '루쉰 이후엔 장아이링'이란 평을 듣는다고도 하니까 호기심에라도 읽어봄 직한 작가이다. 이번 늦가을은 장아이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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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11-0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래가 정말 좋네요. 장아이링은 보관함으로 ost.는 장바구니로 갑니다.

로쟈 2007-11-03 23:51   좋아요 0 | URL
저도 장학우의 목소리는 오랫만에 듣습니다.^^

수유 2007-11-04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편안하게, 따라 행복감을 느끼며 보는 영화가 될 것 같습니다. 일주일을 잘 견뎌야겠지만.

2007-11-04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5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11-05 22:34   좋아요 0 | URL
그런 면역력이라면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되겠네요.^^

섬나무 2007-11-0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안 감독 스스로가 자신이 투영된 작품은 1995년작 '센스 앤 센서빌리티'까지만이고 이후로는 자신의 모습을 양파껍질 벗듯 벗기 시작했다고 하데요. 영화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직할 수 있는 용기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보는데 지금은 미치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이 영화를 미치기 직전까지 밀어붙였단 말인듯...
양조위에게 그의 눈빛 연기-여자들을 뇌살시키는-는 영화 마지막에만 주문했다던데... 전혀 그렇지 않군요...ㅎㅎ

로쟈 2007-11-05 17:30   좋아요 0 | URL
오늘 필름2.0에서 리안과 탕웨의 인터뷰를 읽었는데, 말들도 잘하더군요...

소경 2007-11-05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보XX에서 '장애령'이라 검색하니 그녀의 다른 책들도 구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로쟈 2007-11-05 22:34   좋아요 0 | URL
저도 도서관에서 검색했던 책들인데, 아쉽게도 <색, 계>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듯합니다...

소경 2007-11-06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색, 계>까지 번역 되었더라면 이거 친구 밥 한끼에도 매몰차게 거절할 수 밖에 없는 빈털털이/수전노임에도 급 선회해서 사려 했을 거에요 ^^; 장학우 노래덕에 <색 계>에 대한 관심이 이만저만 아니라서.
 

한 대학원신문의 '논문리뷰'로 실리게 될 글을 옮겨놓는다. 당초엔 인문학번역에 관한 논문들의 리뷰를 기획했었지만 내가 읽은 두 편의 논문이 모두 '함량' 미달이어서 그냥 가장 손 가까이에 있는 학술지의 논문을 리뷰의 대상으로 골랐다. 소비에트 해체 이후, 즉 포스트소비에트 시기라고 불리는 최근 십수 년간의 러시아 문학장에 관한 개관논문인데, 필자는 대중문학의 대두를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꼽고 있다.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흥미를 가질 법한 내용이어서 자리를 마련한다(아래는 이문영, “포스트소비에트 시기 러시아 문학장의 변화와 대중문학”, <슬라브학보>, 제22권 3호, 2007에 대한 나대로의 요약/정리이다). 이미지와 군말은 새로 덧붙인 것이다(*이 논문을 포함한 저자의 논문집이 <현대 러시아 사회와 대중문화>(한울, 2008)란 제목으로 출간됐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몰락 이후의 러시아를 지칭하는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에 관한 국내외 연구자들의 관심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1991년 사회주의 연방의 해체 이후 현재까지 숨 가쁘게 진행되어온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의 변모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관심대상이다. 우리의 경우에는 거기에다 러시아 연구가 갖는 지정학적 의의를 또한 빼놓을 수 없다. 한반도 주변 4강의 일원이자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한 축으로서 현 러시아의 향방에 주목이 쏠리는 것은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국내에서도 특히 최근 3-4년 동안 포스트소비에트 시기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다방면에서의 변화양상에 대한 여러 연구과제들이 수행되었고 그 성과들이 논문으로 발표되고 있다. 이 논문 또한 그러한 성과의 일부이며 체제전환 이후 러시아 문학장(文學場)의 전반적인 변화양상을 ‘대중문학의 비약적인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대중문학의 성장과 그 기능의 확대는 전지구적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필자의 지적대로 과거 소비에트 문학장에서는 나타날 수 없었던 현상이기에 소비에트와 포스트소비에트를 변별해줄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요소가 된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우리에게 소개된 러시아문학 작가와 작품들을 일별해 보아도 ‘대중문학’이란 러시아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로 대표되는 문학이 아니었던가.

 

 

 

 

 

 

 


사실 러시아 문학의 ‘진지성’은 러시아 근대문학의 전통이기도 했다. 비록 본격예술문학과 구별되는 대중문학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비판적 지식인으로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가 주도해온 러시아문학은 언제나 “도저한 정신성, 특유의 진지함과 철학적 야심”으로 특징지어졌고 따라서 대중문학은 문학사에서 배제되어왔다. 이러한 경향은 소비에트시기에 더욱 강화되어 상업적 대중문학에 반감은 아예 볼셰비키들의 적의로 대체되었다. 한마디로 대중문학이 자리할 공간이 없었던 셈이다.

   

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Владимир Набоков. С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американского периода в 5 томах. Том 3. Пнин. Рассказы. Бледное пламя

 

하지만 사회주의체제 몰락 이후 사정은 전혀 다른 것이 되었다. 이른바 러시아 문학장의 전통적인 구조를 뒤흔드는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논문의 필자는 그러한 변화를 집약해주는 키워드가 바로 대중문학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1990년대 이후 체제전환을 경험한 러시아 사회를 장악한 것은 자본의 논리와 상업화 원칙”이고 이는 문학장의 구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초기에는 솔제니친과 파스테르나크, 나보코프 등과 같은 반체제 작가, 혹은 망명작가 들이 주로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일시적인 ‘고급문학’ 붐은 시장원리에 따라 곧 ‘대중문학’ 출판붐으로 이어졌다.

과거 국가가 주도하던 출판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출판시장은 자연스레 위축/둔화되었고 이러한 가운데 소련시기 거대 국영출판사들을 대신하여 러시아 출판시장의 권력으로 등장한 것이 독과점 민영출판사들이었다. “1991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신간물 목록의 8%, 그 총발행부수의 21%를 민영출판사가 담당한 반면, 2002년 그 비율은 66%/87%로, 2004년에는 68%/91%까지 높아진다.” 한마디로 출판의 주체가 교체된 것이다.  

 

Дарья Донцова Ангел на метле

 

이렇게 등장한 민영출판사들의 경영원칙은 다품목 소량생산이었고 이러한 전략이 갖는 상업적인 차원에서의 결함을 보완해주는 것이 바로 대중문학 붐이었다. 지난 2005년을 기준으로 할 때, 출판자본에 최단기간 최대이익을 보장해주는 시리즈물 형식의 대중소설은 전체 신간종의 35%, 그 발행부수의 53%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다. 2001년 러시아 최대서점의 통계에 따르면 전체 문학판매량의 38%가 돈초바, 폴랴코바, 다쉬코바, 마리니나 등의 추리소설이었다는 사실도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장의 특징을 단적으로 말해준다(마리니나의 추리소설은 국내에도 네댓 종이 소개된 바 있지만 별다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대중소설 작가들이 전면에 부각하게 되는데, 대부분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들이긴 하나 이들 대표적인 작가들을 유형별로 거명하면, 첫 번째로 액션소설 영역의 도첸코, 코레츠키, 압둘라예프, 두 번째로 추리탐정소설 영역의 돈초바, 다쉬코바, 마리니나, 세 번째로 역사소설 장르의 아쿠닌, 네 번째로 연애소설 장르의 우스티노바야, 즈나멘스카야, 빌몬트, 그리고 SF 판타지 장르의 알렉세예프, 보즈네센스카야, 세묘노바 등이 있다. 체제전환 직후에는 남성작가가 남성독자들을 주 대상으로 쓴 폭력적인 액션, 범조소설들이 인기를 끌었다면, 2000년 이후에는 여성추리소설이 강세를 보이면서 여성작가들의 약진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Борис Акунин Азазель

 

변화된 인기작가군들 가운데 특히 주목의 대상이 되는 인물은 “포스트소비에트적인 작가 페르소나의 가장 전형적이고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러시아의 에코’ 보리스 아쿠닌이다(아쿠닌의 작품들은 국내에도 곧 소개될 예정이다).

 

 

천만부 이상을 판매할 정도의 대중적인 인기와 함께 평단의 지지까지 얻고 있는 그는 자신이 ‘전문가’로서 ‘시장’에서 일하고 있으며 작품을 가지고 “대중잡지, 무대, 영화 TV로 나아가 이익을 얻을 계획”이라고 떳떳하게 밝힌 바 있다.

 

 

이미 그의 여러 작품들이 TV 드라마나 연극, 영화로 제작되고 있으며 이러한 다매체적 ‘소통’은 또한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적된다(국내에도 루키야넨코의 판타지 <나이트워치>와 <데이워치>가 소개된 바 있다. <나이트워치>의 경우는 2004년 영화로 개봉되어 1600만불 이상의 흥행수익을 올렸다).  

 

 

 

 

 

 

 

 

 


이렇듯 대중문학에 의해 주도되는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소통구조인지라 독자의 위상이 현저하게 강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독서인구는 점차로 감소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다. 한 설문에 따르면 1994년에는 러시아 성인인구의 23%가 책을 전혀 읽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지만 이 수치는 2002년에는 40%로 늘어났다(현재 러시아 인구의 45%가 전혀 책을 사지 않는다고 한다). 대중문학의 득세와 함께 ‘문학예술의 나라, 러시아’의 간판도 곧 내려야 할 듯싶어 씁쓸한 여운을 갖게 된다.

 

07. 11. 03.

 

 

 

P.S. 포스트소비에트 문학의 국내 소개는 지극히 저조하다. 보리스 아쿠닌을 비롯하여 몇몇 작가가 곧 소개될 예정이지만 다른 언어권에 비하면 여전히 초라한 수준이다. 게다가 영화건 소설이건 러시아 대중문학/문화가 국내에서 '재미'를 본 적도 별로 없어 보인다(이런 사정이 악순환을 낳고 있는 것!). 가장 최근에 나온 러시아 대중문학작품으론 '스무살 러시아 여성작가의 발랄하고 충격적인 뉴웨이브 소설'로 소개된 이리나 제네쥐끼나의 <나에게 줘!>(문학세계사, 2007)이다.  

 

Ирина Денежкина Дай мне!

 

'대중문학'이라고 하지만 저명한 문학상 최종심에까지 올라간 작품으로 '신세대' 소설이며(이리나는 1981년생으로 우리작가 김애란보다도 한 살이 어리다), 20여 개국에서 1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고 하니까 유명세를 짐작하게 한다. 그럼에도 물론 국내에서는 전혀 '소개'되지 않은 작품이다. 제목에서 강조되고 있듯이 포인트는 '나'이다. 사실 소비에트 사회주의사회에서 포스트소비에트 자본주의사회로의 이행은 '우리'에서 '나'로의 이행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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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세곰 2008-08-29 0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제쥐끼나의 책은 역자에게 한권 턱 증정받았기 때문에 지하철에서 오가다 좀 읽었습니다. 그닥 재미는... 데네쥐끼나가 범지구적 유명세를 탄 것은, 기억하길, 2004년 에딘버러 축제에 문학의 나라, 러시아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로 소개되어 BBC를 비롯해 서방의 전파에 무진장 노출되었습니다. 그 영향인듯 싶습니다. 그건 그렇고, 저 현란한 러시아 젊은이들의 속어를 번역하느라 역자는 논문을 한 학기 심지어 미루기까지 했다는 후일담이 있습니다.

로쟈 2008-12-18 23:43   좋아요 0 | URL
댓글을 좀 뒤늦게 봤네요. 역자로부터 번역에 관한 에피소드는 저도 들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