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서 연재되고 있는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 기사에 러시아에 관한 내용이 다루어졌기에 옮겨놓는다. 필자는 러시아사 전공자인 한정숙 교수이다.

경향신문(07. 12. 08) [동아시아의 오늘과 내일](41)멀고도 가까운 러시아

글쓴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지난 11월 하순에 주한 러시아 부대사인 티모닌 박사의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 교수로 재직했던 역사학자이자,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러시아 대표단 부단장으로도 활약하는 외교관이다. 강연에서 그는 주로 한국과 러시아 학자들의 역사인식 문제를 다루었고, 역사인식에서 상호이해의 필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질의응답 시간에 청중 가운데 한 사람이 질문을 했다. 그는 일반적 한국인들은 러시아와 중국은 한국의 통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6자 회담의 성공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라며 이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티모닌 박사는 러시아는 남북한 대화를 통한 한반도 평화 확립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바라며, 따라서 6자회담도 성공하기를 원한다고 답했고, 그 사례로 마카오의 BDA은행에 동결되어 있던 북한 자금을 러시아가 자국 중앙은행을 통해 북한으로 송금할 수 있게 한 것을 거론했다.

그 자리에 모인 청중은 박사의 열띤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질문을 들은 순간부터 강연이 끝난 후까지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반적 한국인들은 과연 그 질문자가 말한 것처럼 러시아는 한국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적대 세력이라고만 여기는 것일까, 아니면 그가 단지 질문을 좀 미숙하게 한 것일 뿐일까.

해방 후 소련이 북한 정권을 지원하였다는 사실 때문에 소련에 대한 남쪽 사람들의 두려움은 컸다. 세계적 차원에서 냉전이 종식되고 러시아가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한 후에도 그 여파는 남아 있다. 제정 러시아의 제국주의 정책과 러·일전쟁의 기억까지 덧붙여져 러시아에 더 심한 두려움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그런데다 체제전환 과정에서 보인 러시아의 사회경제적 혼란상을 보면서 한국인들은 러시아를 중시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일부 인사들은 아예 한반도 평화 논의에서도 러시아를 배제하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동아시아 깊숙이 들어와 있는 나라인 데다,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대국 중에서 우리와 과거사 문제, 고대사분쟁, 영토분쟁, 군대주둔 등의 복잡한 문제가 걸려 있지 않은 나라다. 동아시아 자체에서 다른 요인들로 인해 대립과 갈등이 펼쳐지지 않는다면 러시아가 이를 조장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냉전시대적 편견과 불안감을 벗고 이 나라를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좋은 동반자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와 동아시아의 만남-
동아시아와 러시아는 오래 전부터 만났다. 동아시아도 러시아도 비슷한 시기에 몽골제국의 지배와 간섭을 겪었으며, 사람과 물자의 교류 속에서 살았다. 원제국의 수도에는 러시아인 수공업자, 병사들이 끌려왔기 때문에 이미 13~14세기에 적지 않은 러시아인들과 동아시아인들은 얼굴을 맞대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몽골인이나 타타르인들 가운데 러시아에 귀화하여 러시아인과 결혼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접촉의 첫 단계에서 동아시아가 러시아로 갔던 데 비해, 다음 단계에서는 러시아가 동아시아로 왔다. 1480년에 몽골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러시아는 차츰 몽골제국의 옛 영토를 차지했고, 몽골제국의 잔여세력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동쪽으로 나아갔다. 몽골제국의 수중에 들어온 적이 없는 광대한 시베리아 지역까지 모두 러시아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게 되었다. 러시아와 국경분쟁이 일어나면서 청나라가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자 조선이 지원군을 파견했으며, 그리하여 이른바 나선정벌을 통해 조선과 청의 연합군이 러시아 군대와 맞붙기도 했다.

러시아에 동아시아는 주된 관심지역은 아니었다. 유럽 지역에 사는 러시아 지배층에 동아시아는 너무 멀었고 시베리아는 경제성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제국주의 열강의 영토쟁탈전이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면서 러시아는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동아시아에서도 이해관계의 충돌을 겪게 되었고 제국주의 열강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려면 이 지역에서도 입지를 굳혀야 했다. 19세기 중반, 서아시아 및 서남 아시아에서 서유럽 열강과의 경쟁에서 밀리고 특히 크림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 패배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앙아시아를 거의 장악한 이후에는 세력의 공백지대처럼 되어 있던 만주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산업 부르주아지는 시베리아를 통해 중국에 러시아의 물품을 판매하고 태평양 함대를 지원하며, 태평양을 통해 미국과 관계를 강화하기를 원했다.

러시아 정부는 시베리아를 통해 동아시아와 북태평양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부설하였다. 이 철도의 부설은 1891년에 시작되어 1916년에 완공되었는데, 페테르부르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게 된 철도의 노선 일부는 부설 당시 러시아 영토에서 만주로 들어와 중국 동북부지역을 길게 휘감은 후 다시 연해주를 향해 나아갔다. 이러한 노선을 만들기 위해 러시아쪽 관계자들은 청의 실력자였던 리훙장에게 300만 루블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뇌물로 약속하기도 하였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해 러시아는 동부 시베리아와 동아시아로 밀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의 결과로 조선이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은 러·일전쟁이 한반도 지배를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간의 싸움이라고 이해하고 있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러시아 제국이 조선을 직접 지배하려 계획한 증거는 별로 없다. 러시아 지배층의 주된 관심은 만주를 장악하는 것이었고 그러기에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고 만주로 넘어오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여겼으며, 여기에서 일본과의 충돌이 일어났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국인들은 일본의 경우처럼 러시아인들과 직접 전쟁을 하거나 나라 전체가 서로 적대관계에 놓인 적은 없다. 러시아와 일본의 접촉은 18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크림전쟁에서 대결 중이던 영국·프랑스와 러시아는 캄차카 반도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일본의 항구를 군함의 정박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러시아는 3개 일본 항구의 이용권을 보장받는 대신 쿠릴 열도 영토 일부를 넘겨주고 사할린을 양국통치 아래 두기로 약속하는 시모다 조약을 맺었다. 영토분쟁의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러·일전쟁의 패배 결과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 때문일까. 레닌은 그의 저서 ‘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서문에서 제국주의 지배를 받는 나라의 예로 코리아를 특별히 언급했고 러시아 혁명 후에는 한인 혁명가들이 러시아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러시아 속의 아시아, 아시아 속의 러시아-
러시아가 몽골의 지배를 받은 이래, 유럽인들은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을 비판하는 의미에서 러시아를 “아시아적 사회”라고 불러 왔다. 20세기 초, 러시아의 시인 알렉산드르 블록은 이에 반기를 들고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의 한 핵심적 요소로서의 아시아성을 자부심과 함께 확인하는 의미에서 “우리는 스키타이인이다. 우리는 아시아인이다”라고 썼다. 러시아 자체 안의 아시아적 성격을 말하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일군의 논자들은 유럽에 대비되는 유라시아 사회로서의 러시아 사회의 성격을 강조하며 유라시아주의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아시아 속에도 러시아가 깊이 들어와 있다. 몽골은 러시아 혁명 후 두번째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여 유지했고, 러시아의 키릴 문자를 받아들여 공식문자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다. 중국과 러시아는 현재 어느 때보다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에서 ‘러시아의 해’가 선포되었고 러시아는 2007년을 ‘중국의 해’로 선포하였다. 일본은 러시아와 영토갈등을 겪고 있지만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의 채굴권 때문에라도 러시아와 협력하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다. 그리고 한국의 입장에서는 어떠한가. 남북한 어느 쪽과도 적대하지 않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러시아야말로 한반도와 동아시아 평화정착을 위해 소중한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유럽-러시아-아시아를 잇는 매개체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만을 떠올린다. 그러나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철도로서 시베리아 횡단철도보다 더 긴 철도가 둘이나 있다. 하나는 모스크바와 평양을 잇는 철도이며, 다른 하나는 키예프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철도이다. 서울과 평양 사이에 철도가 연결된다면 그 다음은 자연스럽게 철도를 통해 모스크바를 거쳐 서유럽까지 갈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꿈을 꾼다. 이는 경제적으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의 정신적 풍요와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한반도 남쪽은 북쪽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은 반도가 아니라 섬의 상태에 있다. 대륙과 육로로 연결되지 않는 공간인 것이다. 공간적 협착성은 시야의 제한, 사고와 상상력의 한계를 낳는다. 대륙으로부터 강제로 배제당하지 않고, 대륙 어디든지 육로를 통해 다닐 수 있다면 굳이 국가의 영토로서 이를 소유하지 않더라도 아쉬울 것이 있겠는가. 러시아가 동아시아에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한국인들의 삶의 스케일도 얼마든지 더 넓어질 수 있다.(한정숙|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07. 1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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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지식인으로 꼽히는 미국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 그의 독자들에겐 연말 선물이 될 만한(하지만 돈주고 사야 하는 선물이다) 책이 출간됐다. 민주주의와 교육에 관한 그의 생각들을 집약하고 있는 <촘스키, 사상의 향연>(시대의창, 2007)이 그것인데, 9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어서 여지껏 나온 그의 책들 가운데는 최대 부피와 최고가를 자랑하지 않나 싶다. 물론 원서는 496쪽으로 그 절반 정도밖에 안된다. 책값도 더 저렴하고. 어느 걸 구입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다(번역본은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있기에). 'Chomsky on Democracy & Education'이란 원제가 <촘스키, 사상의 향연>으로 탈바꿈한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같이 생각하기보다는 그냥 즐겨라, 란 뉘앙스도 되기에. 일단은 리뷰나 챙겨둔다.

문화일보(07. 12. 07) “현대 교육은 자본주의의 노예” 촘스키가 본 민주주의와 교육

“대중심리의 통제와 벌이는 싸움이란 하루에 5시간을 보는 텔레비전과 영화산업과 책과 학교와 그밖의 모든 것을 상대로 벌이는 싸움이다.”(촘스키)

‘생존해 있는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꼽히는 노엄 촘스키(79)의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한 글과 대담, 강연, 인터뷰 등을 모아놓은 책이다. 책의 편집자인 오테로(UCLA대) 교수는 촘스키의 제자로, 그동안 스승의 책을 주제별로 묶는 작업을 해왔다. 번역서의 제목이 원제목(Chomsky on Democracy & Education)을 어느 정도 살리는 게 좋았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900쪽이 넘는 이 책만으로 촘스키의 사상체계 전반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향연’도 어울린다. 더구나 촘스키의 다른 책에 비해 아주 수월하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다.



민주주의와 교육은 따로 떼어놓고 말하기 어렵다. 촘스키가 계승하는 철학자 존 듀이(1859~1952)의 “정치란 대기업이 사회에 던지는 그림자”란 말이 함축적으로 촘스키의 민주주의와 교육에 대한 관점을 드러낸다. 촘스키는 언어학자로 발판을 다진 사상가다. 그는 인간의 언어능력이 선천적이며, 다른 행동 형태와 마찬가지로 반복과 훈련, 보상과 징계 등의 조건형성을 통해 개발되는 습관의 시스템이라고 본다. 이같은 언어관은 그의 심성이론과 사회를 보는 시각으로 확장된다. 즉, 인간의 심성(영혼)에 언어기관이 선천적으로 들어있듯이, 도덕적 계율을 지키려는 소질 역시 선천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으로 대표되는 국가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와 교육을 방해하고, 앞서 얘기한 인간의 선천적인 창조성을 왜곡시킨다고 그는 말한다. 즉 현대의 교육 자체가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인간을 ‘찍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이란 지금처럼 돈을 많이 벌어 소비를 잘하게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일 자체를 사랑하게 만들고 그로부터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게 촘스키의 기본적 교육관이다.

촘스키는 미국의 현재 교육이 일 자체를 즐기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가져올 보상을 강조하는 조건 형성의 교육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노동의 본질적 가치는 모른 채 교환가치만 알도록 만든다고 본다. 그러면서 촘스키는 정부, 기업, 언론, 교육 분야에 종사하는 소위 ‘가짜 지식인’들은 이같은 사회구조에 맹목적으로 편승하고 있으며 그들은 결국 권력을 잡아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겠다는 것이지,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엄주엽기자)

07. 12. 07.

P.S. 보다 자세한 한겨레의 리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5613.html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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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욕심을 부릴 만한 책은 벤야민 선집으로 나온 세 권의 책이다(사실 가을에 나올 예정이었으니까 약간 늦어진 셈). 계획대로 10권의 선집이 완간된다면 '벤야민 수용사'의 획기적인 전기가 마련될 수 있으리라. 이번 선집이 '정본'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한다. 개인적으론 그의 문학론들을 얼른 구경해보고 싶다. 관련 리뷰를 옮겨놓는다(역자 인터뷰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55627.html 참조). 아래는 영역본 선집의 표지.

 

경향신문(07. 12. 08) 감성은 섬세, 사유는 견고한 산문가

발터 벤야민(W Benjamin)의 사유는 가공할 만한 폭발력을 지닌다. 그러나 간단치 않다. 뛰어난 사상가가 흔히 그러하듯,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은 첨예하게 현실분석적이면서도 비의적이며, 이런 형이상학적·신학적 요소는 다시 ‘현재적 인식 가능성’ 속에서 사회의 변혁 가능성을 끈질기게 추구한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쓰인 글의 주제는 무척 다양하다. 그는 근본적으로 마르크시즘적 문예이론의 자장 안에서 움직이지만, 그렇다고 그 의미가 유물론적 문예론의 재구성이나 매체미학, 지각이론이나 비평론 등으로 고갈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인식의 방법이나 현대성의 이해, 자본주의 체제 분석과 상품사회론, 문화정치론과 도시학 나아가 글쓰기의 실천성도 이것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적어도 역사를 조화로운 동질적 시간이 아닌 ‘억압과 야만의 연속사’로 보는 한, 그래서 이 재앙의 보편사가 비판적으로 재구성되어야 한다거나, 또 현대적 삶의 근본특징이 경험의 파편화에 있다거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새로움이란 ‘이미 있어 왔던 것들의 영원한 반복’일 뿐이라거나, 이런 반복성은 상품물신주의에서 온다든가, 혹은 사진이나 영화, 연극과 같은 현대예술이 어떻게 대중과 만나고 이때의 영향미학적 의미는 무엇인지, 또 좀더 일반적으로 대도시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글과 기억과 행복은 어떻게 어우러지는지 등에 대해 고민하는 한, 우리는 벤야민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벤야민의 글은 무척 까다롭다. 그것은 직설적이기보다는 비유적이고, 문장과 문장의 논리는 자주 비약하며, 그 때문에 의미는 마치 비늘처럼, 부채살처럼 응축되어 있다. 사상의 지형은 체계적이기보다는 비체계적이지만, 그렇다고 사유의 일관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보아 파편적이고 이질적이다. 이것은 그가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운동, 특히 초현실주의자와의 교류를 통해 폐허나 꿈의 가치, 몽타주 기법 등을 배웠고(영향관계), 유대인 지식인이자 재야비평가로서, 또 국적상실자로서(1933년 이후) 나날을 위기 속에 살아야 했던 실존적 경험으로 인한 것이었다(전기적 사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데, 어떻게 글이 반듯하게 발표될 수 있었겠는가. 또 체계란 파시즘적 일사불란함이기도 했다.(이른바 ‘체계강제(Systemzwang)’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은 여기에서 배운 것이다.) 이 땅에서 그의 번역이 지체되었거나 부분적으로 이루어져 온 이유는 이 점에 있을 것이다.



이번에 나온 세 권의 벤야민 번역서는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최성만 교수 등 세 명의 벤야민 전공자가 해낸 것이고, 특히 오랫동안의 준비와 기획 아래 전체 10권 선집(원전은 총 14권이다) 중 첫 성과물로 나온 까닭에 더욱 기대된다. 각 권은 그의 사상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주요 글 또는 주제를 제목으로 달고 있고, 각각의 해제 아래 관련 글이 수록되어 있다. 수없이 퇴고를 거쳐야만 정갈하게 되는 벤야민의 우리말 육성을 좀더 온전한 전도(全圖) 아래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1권 ‘일방통행로/사유 이미지’는 정치적·성찰적 비평에세이고, 2권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는 매체미학과 관련된 글 모음이다. 3권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베를린 연대기’는 문학적·자전적 에세이다.



흥미로운 사실의 하나는 번역자가 첫 권으로 ‘일방통행로/사유 이미지’를 택했다는 점이다. 기술복제나 역사철학에 관한 문제적인 글도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보들레르나 프루스트 등에 대한 글이고, 이런 문학론 이상으로 좋아하는 것은 ‘사유 이미지’와 같은 글이다. 거기엔 개인의 내밀한 사연 이외에 엄혹한 시대적 상황 또한 스며 있다. 벤야민을 제대로 읽으려면 우리는 자주 숨을 멈추어야 한다. 한 문장 문장씩 음미하듯 읽어야 하고, 읽는 도중 자주 책장을 덮어야 한다. 이 글들을 읽을 때마다 나는 벤야민이 얼마나 감성적으로 섬세하면서도 사유적으로 견고했던 사람인가를, 그는 참으로 뛰어난 산문가임을 생각하게 된다. 강령이나 테제 없이도 이 같은 울림을 주는 작가는 희귀하다.



벤야민 수용과 관련하여 우리가 갈 미래의 길은 여러 단계다. 우선 정확하게 번역해야 하고, 이런 번역서를 바탕으로 믿을 만한 안내서가 여러 권 나와야 한다. 그 사상과의 비판적 대결이 있어야 하고, 좋은 단행본도 쌓여야 한다. 학위논문이 아닌, 더 보편적인 이론지평에서 재해석한 우리말 단행본 저서는 아직 없다. 그와 같은 문예이론가는 이 후에 나올까? 한국에서의 벤야민 완성은 그때가 될지도 모른다.(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07. 12. 07.

P.S. 재작년에 작성한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가는 로드맵'(http://blog.aladin.co.kr/mramor/1177541)은 수정이 불가피하겠다. 새로운 도로가 개통됐으니 말이다. 이번 겨울에 시간을 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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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8737 2007-12-07 19:33   좋아요 0 | URL
드디어 벤야민 선집이 나왔군요. 오래전부터 나온다는 소문만 들었던터라 더 반갑네요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도서관에서 대충 봤었는데, 간만에 구매욕구가 올라오네요 ^^

로쟈 2007-12-07 21:02   좋아요 0 | URL
네, 완결판이라면 투자해볼 만합니다...

람혼 2007-12-07 20:26   좋아요 0 | URL
그야말로 '때아닌'ㅡ니체적 의미에서의 'unzeitgemäß'ㅡ벤야민 르네상스가 아닌가 합니다. 개인적으로 너무나 반갑고도 설렙니다. 이러한 흐름들이 잘 모아져서 좋은 성과들이 있어야 할 텐데요, 이 역시 고대하는 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안 그래도 선집 출간 소식을 접하고 로쟈님께서 한 말씀 남겨주실 거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감사드려요.^^

로쟈 2007-12-07 21:03   좋아요 0 | URL
'때아닌' 건 아니고 몇년 전부터 예고되긴 했었죠. 감사야 제가 받을 일은 아니고요.^^;

람혼 2007-12-08 03:31   좋아요 0 | URL
아, 물론 그래서 '때아닌'이라고 썼던 것임은, 물론 아시겠지만...^^;

딸기 2007-12-07 21:48   좋아요 0 | URL
너무 어렵다... 이름만 들어도 지겨워... 나랑 인연없어... 라고 말해버리고 싶지만...
왜 이런 소식을 자꾸 전해주시는 겁니까! 왜! 왜! 왜!

결국 또 질러야만 하는 것인가요... ㅠ.ㅠ

암튼 지르게 되면, 로쟈님께 당근 땡스투를 날려드려야겠지요. ^^

로쟈 2007-12-07 22:39   좋아요 0 | URL
제가 링크된 페이퍼나 리뷰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땡스투가 불가능할 텐데요.^^

kontree 2007-12-08 11:47   좋아요 0 | URL
<...비애극> 역시, 최성만-김유동(아도르노 김유동이 아닙니다.^^;) 선생이 공역중이고,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이번 선집 기획에서는 빠졌으나 한길사에서 따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더불어 벤야민의 박사학위 논문인 <독일낭만주의의 예술비평개념> 도 번역중이라고 하네요. ^^

책사랑 2007-12-12 07:29   좋아요 0 | URL
이번 "발터 벤야민 선집"(제1차분, 전3권)을 낸 도서출판 길입니다. 9월이나 10월중에 출간하려고 했으나, 편집과정에 시간이 많이 걸려 늦었습니다. 아울러 "독일 비극의 원천"의 경우에는 이미 제가 한길사에 있을 때 최성만 선생님과 번역하기로 했었기 때문에, 이번 선집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도 아쉽게 생각합니다만... 좋은 역자에 의해 출간예정이니 기대하셔도 될 것입니다.
제2차분 "보들레르와 현대"(제4권), "역사철학테제 외"(제5권), "번역~"(제6권)은 이번 달 말까지 전체 원고가 들어올 예정이며, 2008년 4~5월경에 한꺼번에 출간할 예정입니다.
아울러 제3차분(전4권)도 2008년 중하반기에는 완간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발터 벤야민 전공자인 김영옥, 최성만 교수의 본격적인 연구서 2권도 준비중에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올해초에 출간한 게오르그 짐멜 선집(제1차분, 전3권), 그리고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와 함께 발터 벤야민은 모더니티와 관련 20세기 최고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흔히(짐멜 연구의 대가인 데이비드 프리스비에 의하면) 모더니티의 3대 거장을 "발터 벤야민, 게오르그 짐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를 꼽더군요.
도움이 되실런지요...

로쟈 2007-12-12 22:43   좋아요 0 | URL
짐멜과 벤야민에 대해서는 꽉 잡고 계시군요.^^ 크라카우어도 소개가 되는 건가요?..

책사랑 2007-12-13 08:26   좋아요 0 | URL
크라카우어 건이 좀 걱정입니다. 저작권에 문제가 있어서...

로쟈 2007-12-13 08:37   좋아요 0 | URL
잘 해결되면 좋겠네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 전시회 소식은 지난주에 전한 바 있는데, 한겨레 관련기사가 올라왔기에 옮겨놓는다(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255305.html). 모처럼 대규모의 러시아 미술전이 개최된 참인지라 주요 화가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간혹 페이퍼로 올려놓을 계획이다.

한겨레(07. 12. 07) '인민’과 함께 한 혁명전야

아이바조프스키, 보그다노프-벨스키, 바스네초프, 먀소예도프, 페로프, 수리코프, 크람스코이, 레핀…. 금시초문이라고 부끄러워 말라. 아직 우리가 만날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스키’ ‘프’자 돌림이니 물론 러시아인.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러시아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들이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고골, 체호프,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문인들과 비슷하게 러시아 제정 말기 혁명전야를 살았다.

러시아 문학은 1920년대 이후 일본 유학파에 의해 국내에 소개된 반면 러시아 화가들은 그렇지 않았다("러시아문학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 건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최소한 1908년 최남선이 <소년>지에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미술인들이 배운 것이라야 유럽 야수파, 인상파에 국한됐다. 1990년 러시아와의 수교 이후도 마찬가지. 냉전시대를 건너 한국을 찾아온 한-러 수교 5돌 기념전은 칸딘스키, 말레비치처럼 서유럽 미술사에 편입된 아방가르드 유파가 주인공이었다.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02-525-3321)에서 내년 2월27일까지 열리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은 딱하게도 칸딘스키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미술사를 훑는 91점의 끄트머리에 달랑(?) 넉 점만을 소개하고 있는데도…. 이해할 만하다. 한국인에게 러시아 미술은 칸딘스키 외에는 전인미답이기 때문.

이 전시회는 사회변혁을 꿈꾸며 치열하게 살아간 화가들의 세계를 들춰봄으로써 러시아 혁명전야를 통째 복원해 볼 수 있으며, 한때 ‘브나로드’(인민 속으로)를 외치며 농촌으로 스며들었던 식민지 조선 문인들의 마음 풍경을 엿볼 기회다.

전시의 중심은 1870년 먀소예도프, 페로프, 사브라소프, 크람스코이 등이 세운 ‘이동예술전협회’ 회원들. 졸업작품의 주제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당시로는 반역적인 주장과 함께 왕립 페테르부르크미술아카데미를 자퇴한 이들은 ‘미술이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취지로 이동예술전협회를 결성해 전국을 누비며 전시회를 열었다. 이 단체는 정부 후원 없이 오랫동안 큰 큐모로 존속하며 인민들과 교감했다. 1880년 레핀, 수리코프 등 2세대 작가들이 가세하면서 인상파의 빛과 색, 외광의 눈부심을 수용하면서 미술계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이들의 구호는 미술판 브나로드인 “미술을 인민에게”.

이들이 즐겨 그린 소재는 혁명전야의 실상.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는 유형지에서 갓 돌아온 언니와 겁을 먹고 경계하는 동생들의 눈초리를 통해 시대상을 드러낸다(*'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먀소예도프의 ‘지방자치회의 점심식사’는 허름한 농민들이 의회 담벼락에 기대 허기를 끄는 반면 실내에서는 지주들이 포도주를 곁들인 성찬을 즐기는 순간을 잡아 지방자치회가 허울임을 폭로한다. ‘유형수들의 휴식’(야코비), ‘익사한 여인’(페로프),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레핀), ‘임시숙소’(마코프스키), ‘노부모의 상경’(레베데프), ‘농가의 깃털 작업장’(키브셴코), ‘암산’(보그다노프-벨스키), ‘방앗간 주인’(크람스코이) 등도 가슴을 울린다.

또 다른 중심은 기업인 후원자. 91점 가운데 41점은 국립트레티야코프미술관에서 온 것으로, 트레티야코프미술관을 세운 부유한 상공인이자 미술애호가인 미하일로비치 트레티야코프(1832~1898)의 콜렉션이다. 크레티야코프는 “돈을 벌게 해준 사회에 유용한 시설을 남겨 환원하고 싶다”며 미술품을 사들였다. 그는 구두쇠였지만 마음에 드는 그림이면 아무리 비싸도 돈주머니를 털었다. 평소 누구한테나 콜렉션을 무료로 개방했던 그는 죽기 6년 전 40년동안 수집한 3천여점의 작품을 모스크바시에 기증하고 큐레이터를 겸직했다.

또다른 후원자는 철도왕 마몬토프(1841-1918). 예술가이기도 한 그는 1870년 모스크바 근교 자작나무 숲에 자리한 아브람체보 영지를 구입해 예술가 마을을 만들었다. 이 공동체에서 레핀, 바스네초프, 수리코프, 세로프 등 다양한 작가들의 작품 활동을 뒷바라지했다. 마몬토프의 조카 ‘타티야나 마몬토바의 초상’(레핀)이 그 증거. 아내를 관장으로 앉히고 생색을 내는 우리나라 기업인들과 대비된다.

이밖에 작가 마이코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고골,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등의 초상은 당대 지식인들의 네트워크를 잘 보여주며, 풍속화, 풍경화에서는 작가들의 조국애가 흠씬 묻어난다. 리얼리즘 회화가 너무 강렬한 탓인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작품은 오히려 덤처럼 느껴진다. 부나비처럼 유행을 따라다니는 한국 미술판에 ‘러시아 거장전’은 신선한 충격이다. 관객이 얼마나 들지 주목거리(*듣자 하니 아직까지는 별다른 호응을 얻고 있지 못하는 듯하다. 자주 오는 기회는 아닌 터인데).(임종업 기자)

07. 1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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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2-07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 근처에서 하니 한 번 가봐야겠네요

로쟈 2007-12-07 10:51   좋아요 0 | URL
좋은 동네에 사시는군요...
 

컬처뉴스에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이제이북스, 2007)에 대한 리뷰를 옮겨온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6&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754). 강의들 때문에 나는 이 책의 완독을 겨울방학으로 미뤄두었는데(하지만 방학땐 '계절학기' 강의가 있다!) 곁들여 읽어야 할 책도 많다는 걸 리뷰에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컬처뉴스(07. 12. 05) 마르크스가 불러온 데리다의 유령'들'

“선생님의 저서를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난해하다’, ‘도통 종잡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어렵다고요? 파악이 불가능하다고요? 만약 정말로 제 글이 이해가 안 된다면 당신의 한국어 번역작업이 어떻게 가능하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일부 소장학자들과 작가들에게서 때때로 선생님의 글쓰기 스타일을 모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글들을 봅니다.” “납득이 잘 안 되는데요. 제 글이 지극히 난해해서 이해도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제 글을 모방하는 사람들이 있다니요?”

국내의 한 일간지(<조선일보>, 1997년 1월 20일자)에 실린 이 대담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참 웃긴 대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이 대담은 일종의 ‘징후’였다. 자크 데리다(1930~2004)가 한국에 와서 엄청나게 고생하게 될 것이라는 징후.(*참고로, 이 대담은 김성도, <하이퍼미디어 시대의 인문학>(생각의나무, 2003)에 수록돼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1996년 『그라마톨로지』(1967)와 『입장들』(1972)로 처음 국내에 소개된 이후 데리다의 국역본들은 끊임없는 오역 논란에 시달렸다. 그래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치밀한 번역과 쉬운 용어선택으로 번역의 전범을 보여줬다”(<조선일보>, 1996년 2월 9일자)던 『그라마톨로지』마저 오역의 수렁에서 허우적대다가 ‘퇴출’된 건 알 만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제 화젯거리도 아니다.

어쨌거나 이런 사정으로 데리다는 지난 10여 년간 국내에서 ‘유령’ 취급을 받아왔고, 3년 전 불귀의 객이 됨으로써 진짜 ‘유령’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국역된 데리다의 1993년작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그렇게 우리와 인연이 끊길 뻔한 데리다(의 유령‘들’)를 성공적으로 다시 불러오고 있다. 진태원이라는 소장학자의 도움으로. “자네는 학자야, 그것에게 말을 걸어보게.”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재출간(원래 이 책은 지난 1996년에도 국역된 바 있다)이 주목받아야 할 이유는 이 책이 ‘읽을 만하게’ 다시 소개됐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데리다의 유령이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함께, 혹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통해서 돌아왔다는 사실, 더 나아가 그 덕택에 우리는 이제야 데리다의 유령‘들’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는 사실이야말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반겨야 할 이유이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발표할 당시 큰 주목을 받은 이유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의 토대였던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 해체된 시기에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에 이 책이 주목받은 이유는 이 책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호출하고 있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호출을 “데리다가” 수행해서였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이 책이 주목을 받고 있다면/받아야 한다면 그건 명확히 이 책이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약 72권에 달하는 데리다의 책들 중 아무 것이나 지금, 이 시기에, 매끄럽게 국역된다고 해서 (예상컨대 1994년작 『우정의 정치학』이라면 예외겠지만) 주목받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해서 프랑스에서는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데려왔다면, 한국에서는 마르크스가 데리다의 유령‘들’을 불러온 셈이라고나 할까.

왜 마르크스인가(혹은 왜 마르크스의 유령‘들’인가)? 무엇보다도 그건 데리다로 하여금 마르크스의 어떤 정신/유산을 불러오게 했던 바로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리다가 ‘새로운 세계 질서의 열 가지 재앙들’이라고 말한 대규모 실업, 무자격 시민들(홈리스, 망명객, 무국적자, 이민자 등)의 집단적 배제, 무자비한 경제전쟁, 자유시장의 무능력, 외채 누적, 군수산업과 군수무역, 핵무기의 확산, 종족/인종간 전쟁, 마피아 같은 환영국가의 권력 증대, 국제법과 국제기구의 한계들이『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출간됐을 때보다 훨씬 더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이런 열 가지 재앙들을 사유하기 위해서 꼭 마르크스를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크스를 단지 지나쳐버릴 수는 없으며,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그 이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기나긴 보충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유보는 있다. 복수(複數)로 표기된 제목이 암시하듯이, 우리는 마르크스의 유령‘들’ 중 특정한 유령/정신(들)을 선별해야만 한다. 게다가 마르크스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유령‘들’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데리다가 이 유령‘들’을 떼어내야 한다고/낼 수 없다고 주장하는지는(옮긴이의 생각과는 달리) 좀 불분명하지만, 이 유령‘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한계와 모순을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데리다가 5장에서 다루는 『독일 이데올로기』(1845) 2부의 ‘마르크스-슈티르너 논쟁’을 이해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국역본 『독일 이데올로기』에는 1부만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선별작업을 만끽하고 싶은 분들에게는 먼저 『마르크스의 유령들』 4장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4장에서 주로 다뤄지는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1852)은 여러 종의 국역본이 존재하며 번역 상태도 양호하다.

그리고 5장에 도전할 때에는 에티엔 발리바르의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1993) 국역본 2장을 함께 읽는 것이 도움이 될 듯싶다. 여담이지만, 발리바르는 현존 마르크스주의자들 중 그 사유방식이 가장 데리다와 비슷하다. 그러니 데리다의 마르크스 애도 작업, 혹은 데리다 식의 마르크스 읽기의 이론적 효과를 만끽하고 싶은 분들은 발리바르를 같이 읽으시면 된다(이런 점에서 추천할 만한 발리바르의 또 다른 저서는 얼마 전 국역된 『대중들의 공포』이다).

마지막으로, 왜 데리다의 유령이 아니라 유령‘들’인가? 우리가 맨 처음 알게 된 데리다는 ‘문학비평가’(특히 ‘예일 마피아’의 숨은 대부)로서의 데리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후의 데리다는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초창기의 저작들, 그도 아니면 적어도 『다른 곶』(1991)부터 데리다는 충분히 정치적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데리다가 정치에 대한 사유를 본격적으로 전면에 드러낸 것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직 찾아오지 않은 데리다(혹은 데리다의 또 다른 유령)가 있으니 그건 바로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이다. 특히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1855)의 『공포와 전율』(1843)을 꼼꼼하고 읽고 있는 『죽음을 선사하기』(1999) 전후의 데리다가 그러한데,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만큼이나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 역시 매혹적이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바로 이런 데리다의 맹아를 엿볼 수 있는 저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의 재출간과 더불어 데리다의 유령‘들’을 맞이할 준비가 됐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우리에게 도착한 책 중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를 엿볼 수 있는 텍스트는 1997년작 『환대에 대하여』인데, 아쉽게도 이 책의 국역본은 읽기가 쉽지 않다). 요컨대 마르크스의 유령이 하나가 아니듯이, 데리다의 유령 역시 하나가 아닌 것이다.

자신의 말에 따라 선왕의 유령에게 말을 건 호레이쇼에게 마셀러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존엄한 혼령인데, 우리가 너무 난폭하게 대한 것 아닐까?”(『햄릿』, 제1막 1장). 우리에게 그것은 누구/어떤 유령일까? 정치철학자로서의 데리다, 혹은 윤리학자로서의 데리다? 이에 대한 대답은 충분히 데리다를 읽지 않았던(그런데 그 누구가 데리다를 충분히 읽을 것인가) 우리가 우리 몫의 애도 작업을 충분히 수행할 때에 가능할 것이다. 데리다를 따라서, 데리다의 유령‘들’뿐만 아니라 데리다에 들러붙어 있는 유령‘들’까지 얘기할 수 있을 때에 말이다.(이재원_출판기획자) 

07. 12. 06.

P.S. '윤리학자' 데리다는 물론 레비나스를 읽는/읽은 데리다이다. 두 사람을 다룬 표준적인 책은 사이먼 크리칠리의 <해체의 윤리학: 데리다와 레비나스>(2판, 2000)이다. 물론 지금은 더 많은 관련서들이 나와 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데리다가 <죽음을 선사하기>에서 말을 건네고 있는 철학자는 체코의 얀 파토치카(1907-1977)이다. 지난 겨울 영역된 그의 책 몇 권을 구해놓고 번역을 주선해볼까 생각도 하던 참이었다. 윤리학자 데리다의 유령과 함께 파토치카의 유령도 조우할 수 있는 시간이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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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de 2007-12-07 0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르크스의 유령들 읽으려고 시도했으나 100페이지도 못가서 포기했어요... 역시 내공부족은 어쩔수 없나봐요 ㅡㅜ

로쟈 2007-12-07 08:45   좋아요 0 | URL
제가 관심을 갖는 독자 유형이시네요.^^; (아주 많지는 않으실 거라고 보지만) 인문/이론서를 보다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거나 이끌어주는 책들(?)이, 혹은 서포터들이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아르바이트'를 저도 가끔씩 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방책은 못되구요.--;

릴케 현상 2007-12-07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유형인데^^ 관심 좀 주세요. 퐁쥬 시가 좋길래 별 생각없이 '시네퐁쥬'를 읽다가 기겁을 한 적이 있네요

로쟈 2007-12-07 11:48   좋아요 0 | URL
데리다도 자신의 분류를 따르자면 '신계몽주의자'가 될 텐데, 난해하기만 한 철학자로 치부되는 건 불운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