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참을 먹으며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들을 뒤늦게 훑어보았다. '신춘문예'에 가슴을 뛰던 때는 진작에 지난 터이라 심상하게 둘러보다가 시 부문 당선작이 좀 특이해서 옮겨놓는다(당선소감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311639581&code=960205 참조). 제목이 '페루'다. 그리고 산문투로 돼 있다. 신춘문예 시의 전형성에서 탈피하고 있는 게 일단 호감을 갖게 한다. 게다가 페루, 하면 떠올릴 수 있는 게 라마, 마추픽추, 그리고 로맹 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등이던 차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를 하나 더 추가할 수 있어서 반갑다.

페루

이제니

빨강 초록 보라 분홍 파랑 검정 한 줄 띄우고 다홍 청록 주황 보라. 모두가 양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양은 없을 때만 있다. 양은 어떻게 웁니까. 메에 메에. 울음소리는 언제나 어리둥절하다. 머리를 두 줄로 가지런히 땋을 때마다 고산지대의 좁고 긴 들판이 떠오른다. 고산증. 희박한 공기. 깨어진 거울처럼 빛나는 라마의 두 눈. 나는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한다.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페루 페루. 라마의 울음소리. 페루라고 입술을 달싹이면 내게 있었을지도 모를 고향이 생각난다. 고향이 생각날 때마다 페루가 떠오르지 않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아침마다 언니는 내 머리를 땋아주었지. 머리카락은 땋아도 땋아도 끝이 없었지. 저주는 반복되는 실패에서 피어난다. 적어도 꽃은 아름답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간신히 생각하고 간신히 말한다. 하지만 나는 영영 스스로 머리를 땋지는 못할 거야. 당신은 페루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미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당신은 한국 사람입니까. 아니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한국 사람입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만 역시 이상한 말이다. 히잉 히잉. 말이란 원래 그런 거지. 태초 이전부터 뜨거운 콧김을 내뿜으며 무의미하게 엉겨 붙어 버린 거지. 자신의 목을 끌어안고 미쳐버린 채로 죽는 거지. 그렇게 이미 죽은 채로 하염없이 미끄러지는 거지. 단 한번도 제대로 말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안심된다. 우리는 서로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고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한다. 길게 길게 심호흡을 하고 노을이 지면 불을 피우자. 고기를 굽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자. 그렇게 얼마간만 좀 널브러져 있자. 고향에 대해 생각하는 자의 비애는 잠시 접어두자. 페루는 고향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스스로 머리를 땋을 수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양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말이 없는 사람도 갈 수 있다. 비행기 없이도 갈 수 있다. 누구든 언제든 아무 의미 없이도 갈 수 있다.

07. 01. 07.

P.S. 윤성희의 소설집을 다룬 문학평론 당선작 '길위의 나무와 소설의 의무'(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2311640181&code=960205), <웰컴 투 동막골>을 다룬 대중문화평론 당선작 '먹고 배설하는 신체로 회귀하라'(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11722371&code=960205)도 링크해놓는다. 정독하지는 않았지만 유망한 평론 지망생들이 우리 주변엔 아직도 많다는 걸 확인시켜준다. 특히 대중문화(영화) 평론 분야는 강세라고 하는데, 이번 당선작 역시 수작이다(수상소감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1011703001&code=960205). '슬로베니아의 비평가 미란 보조비치'가 언급되기에 곧장 문학평론가 복도훈씨를 떠올렸는데, 알고 보니 대학원 동문이다. 평단에 '동대 마피아'라도 만들어질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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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08 0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1-08 2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08-01-08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도 페루가 소재던데요.
이번 신춘문예엔 페루가 대세군요.

로쟈 2008-01-08 21:11   좋아요 0 | URL
우연의 일치겠지만 재미있네요...

수유 2008-01-0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평론입상자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것 같습니다. 특히 영화평론.

로쟈 2008-01-08 21:12   좋아요 0 | URL
역량있는 젊은 평론가들은 많지만 평론집은 점점 읽히지 않는 기이한 시대입니다...

깐따삐야 2008-01-08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인식의 페이지는 언제나 나의 경험을 앞지른다.
- 이 부분 와닿네요. 고로, 페루에 가 본 것 같아요. 저도.^^

로쟈 2008-01-08 22:54   좋아요 0 | URL
머리를 좀 땋아본 사람들은 다 고향이 페루인 것이죠.^^

2008-01-09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8-01-09 22:05   좋아요 0 | URL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