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에서 연재되고 있는 정재승의 '사랑학 실험실'에서 지난주 분을 옮겨놓는다(http://h21.hani.co.kr/section-021160000/2007/12/021160000200712060688018.html). 한 포털사이트에 게시되기도 했던 것인데 혼외정사의 생리학을 다루고 있다. 푸슈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에 대한 강의를 하다가 '연애의 기술'이란 말이 나와서 참고삼아 인용하기도 했다(그래서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칼럼의 요점은 '일부일처 본능'과 '불륜 본능'이 따로 있는 것인가인데, 적어도 들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그렇다고 한다(호르몬이 결정한단다). 그럼 인간은? 적당히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겠지... 

한겨레21(07. 12. 06) 일부일처 본능, 불륜 본능

만프레트 타이젠의 저서 <러브 사이언스>에 따르면, 포유류의 97%는 정조관념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5천 종이 넘는 포유류 가운데 평생 같은 짝과 함께 지내는 동물은 비버와 수달 등 약 3%에 불과하다. 이미지와는 달리 늑대와 여우도 일부일처를 하는 동물에 속한다. 하지만 포유류의 대부분은 섹스를 위해서, 혹은 자식 양육을 위해서 한동안 함께 지내긴 하지만, 어느 정도 목적이 달성된 뒤에는 각자 새로운 파트너를 찾아 떠난다.



인간은 ‘사회적 일부일처제’

게다가 짝에게 정절을 지키는 것처럼 보이는 동물들도 사실은 몰래 바람을 피우거나 상대를 떠나기도 한다. 사람처럼 이혼을 한다고나 할까? 진화생태학적 가설이 맞다면, 동물 세계에서 대부분의 수컷들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는 것이 목표이고 암컷은 건강한 새끼를 낳기 위해 최상의 상대를 고르는 데 전념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일부일처제는 한 상대에게 생식에 관해 전폭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사실 부담이 따르는 제도다.

진화생태학자들은 동물 세계의 ‘일부일처 습관’을 일정 시간대에 한 짝과만 짝짓기하는 ‘성적’ 일부일처제와 암수가 짝짓기를 한 뒤 새끼를 함께 키우지만 바람도 피우는 ‘사회적’ 일부일처제, 그리고 한 암컷이 평생 한 수컷의 알만 낳는 ‘유전적’ 일부일처제로 분류한다. 예를 들어 새들의 90%는 암수가 새끼를 함께 키우지만 다른 상대와도 성적 관계를 갖는 사회적 일부일처제를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1세기 많은 국가에서 인간은 일부일처제를 유지하지만, 혼외정사 빈도와 혼전 성관계를 고려하면 사회적 일부일처제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의 60% 이상이 결혼 뒤에 이따금 파트너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성행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만의 애정 행각’을 나눈다. 이른바 ‘감정적 부정’이란 걸 한다. 또 남녀의 35%가 결혼 뒤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고 고백했다. 킨제이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남편의 50%, 미국 아내의 26%가 혼외정사를 경험한 적이 있다.

킨제이 보고서 이후 조사된 몇몇 연구들에서는 그 수치가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전체적인 경향은 별반 차이가 없다. 8천명의 기혼 남녀를 조사한 한 연구는 남편의 40%와 아내의 36%가 적어도 한 번 이상 혼외정사를 했다고 보고했으며, 어떤 보고서는 최대 70%에 이른다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심지어 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외도 상대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한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최근 결과일수록 남녀 간의 혼외정사 수치 차이가 조금씩 줄어들긴 하지만, 모든 연구에서 일관적으로 혼외정사의 발생률과 빈도에서 남성이 여성을 앞서고 있음이 나타난다. 다시 말해 아내보다 남편이 더 자주 더 많은 상대와 혼외정사를 한다. 킨제이는 자신의 보고서에 이런 코멘트를 남겼다. “사회적 규제만 없다면, 남성들은 평생 아무 여자나 섹스 상대로 삼으며 문란한 성생활을 즐길 것이라는 명제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반면 여성들은 다양한 상대를 접하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인간이 일부일처제라는 결혼제도를 발전시키게 된 것은 다양한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자식을 양육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길면서 안정적인 가정이 필요했고, 사유재산을 내 유전자를 가진 세대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면서 일부일처제는 제 꼴을 갖추게 됐다. 하지만 최근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는 일부일처제라는 특징이 우리의 두뇌 작용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순애보와 불륜은 호르몬 차이?
북아메리카 중서부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들쥐 ‘불스’와 산에서 서식하는 들쥐는 생김새는 거의 비슷하지만, 애정생활에 관한 한 완전히 상반된 특징을 보인다.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들쥐는 냄새를 통해 적합한 파트너를 찾으며 끔찍이 서로를 아끼는 낭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평생 한 파트너하고만 짝짓기를 하며, 나중에 직접 만든 둥지에서 새끼를 함께 돌본다. 반면 산에 사는 그들의 동족은 정반대의 애정생활을 보인다. 수컷은 새끼를 낳아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으며, 곧장 다른 암컷의 치마 속을 호시탐탐 노린다.

유전자 측면에서만 보면, 두 들쥐는 거의 동일하다. 그러니 산에서 서식하는 들쥐를 그토록 불성실한 수컷으로 만드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지난 15년간 들쥐들을 연구해온 미국 에모리대학 래리 영 박사팀은 대초원에서 서식하는 성실한 수컷 들쥐에게 ‘바소프레신’이란 호르몬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고, 암컷에게는 옥시토신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했다.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은 자식과 배우자에 대한 애착을 유발하는 호르몬인데, 이들을 차단하는 약물을 투여하자, 순식간에 그들의 태도는 돌변했다. 평소에 그렇게 자상하던 수컷이 교미가 끝나기가 무섭게 자취를 감췄고, 암컷 또한 파트너에 대한 흥미를 곧바로 잃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다음 연구 결과였다. 이번에는 산에 서식하는 들쥐를 유전적으로 변형해 바소프레신 수용체와 옥시토신 수용체의 양을 늘렸더니, 바람둥이 수컷 들쥐들이 갑자기 ‘자상한 아버지’로 돌변했다. 예전의 불성실함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대초원에 서식하는 들쥐처럼 그들도 이제 한 파트너에게 전념하고 새끼를 키우는 데 전념하더라는 것이다.

비록 들쥐를 통한 연구 결과이긴 하지만, 이 연구 결과는 우리에게 왜 사람들이 결혼생활이 깨질 수 있음에도 혼외정사를 꿈꾸는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애보적인 사랑’이나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불륜적인 사랑’ 안에는 생물학적인 요소도 어느 정도 포함돼 있음을 시사한다. 뇌 속에 어떤 호르몬이 좀더 지배적인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사랑관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모든 성전략이 그렇듯, ‘원나이트 스탠드’도 그에 다른 손실이 있기 마련이다. 도덕적인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고, 남성들은 성매매를 통해 매독이나 에이즈 같은 성질환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 사회적으로는 ‘바람둥이’라는 나쁜 평판을 얻을 수도 있으며, 여성들은 더욱 가혹한 사회적 지탄을 받는다. 또 혼외정사나 하룻밤의 정사를 추구하는 미혼 여성은 때론 자신과 자식에게 장기적으로 투자해줄 남성이 없는 상태에서 임신해 자식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안정된 결혼생활이 한순간 파국으로 치달을 수도 있고, 질투심으로 가득 찬 ‘여성의 남편’으로부터 폭행을 당할 수도 있다. 여러 문화권에 걸쳐 살인 사건의 상당수가 (특히나 배우자 살인의 대부분이) 아내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의심한, 그래서 질투심에 휩싸인 남편이 저지른 사건이었다.



‘원나이트 스탠드’에 따르는 손실
그럼에도 원나이트 스탠드가 오래도록 유지되는 데에는 생물학적인 설명만으로는 부족한 요소들이 많이 관여된다. 예를 들어 일시적인 성관계가 주는 손실의 상당 부분이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전이나 달라진 생활환경 덕분에 겪지 않아도 된다. 효과적인 피임법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임신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원나이트 스탠드나 결혼과 상관없는 섹스를 늘리는 원인이 될 수 있으며, 도시생활의 상대적인 익명성은 찰나적인 성관계로 인한 평판의 하락을 어느 정도 줄여준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은 남성에게서 장기적 투자를 기대하지 않고 섹스를 할 수 있도록 해주며, 부모로부터 독립, 낯선 사람과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공간의 증대 역시 혼외정사를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다. 이처럼 찰나적인 성관계로 인한 손실이 줄어들면서 우리의 복잡한 성생활은 이전보다 훨씬 더 복잡한 형태로 현대생활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07. 12. 13.

P.S. 결틀여, '유혹의 기술' 혹은 '작업의 정석'에 대해서는 '작업의 정석과 자기계발'(http://blog.aladin.co.kr/mramor/998402)이란 페이퍼를 참조. 닐 스트라우스의 <더 게임>(디엔씨미디어, 2006)에 대한 소개이다. 하긴 그냥 노골적으로 <유혹의 기술>(이마고)이란 책도 있긴 하다. 다이제스트판까지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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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때리다 2007-12-13 20:10   좋아요 0 | URL
저 같은 외로운 솔로부대원에게는 일부일처니 일부다처니 다 배부른 소리입져...그저 다정하고 예쁜 여친 한 분만 굽신굽신...

로쟈 2007-12-13 20:41   좋아요 0 | URL
곁들여 적어놓은 책들을 한번 통독해보셔야겠네요. 물론 실습도 하면서...
 

구스타프 야누흐의 <카프카와의 대화>가 다시 번역돼 나온 김에 카프카 읽기 리스트도 만들어둔다. 워낙에 많은 책들이 나와 있기에 탐나는 책들과 읽어야 할 책들 위주로 꾸린다. 대선이 끝나면 가장 읽고 싶어질 작가가 카프카가 될는지도 모르겠다. 그로테스크한, 혹은 카프카레스크한 세상에 대해서 상담을 좀 하고 싶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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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와의 대화
구스타프 야누흐 지음, 편영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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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13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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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지음, 이진경 옮김 / 동문선 / 2001년 7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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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프란츠 카프카의 고독
마르트 로베르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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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를 읽다 1
빌헬름 엠리히 지음, 편영수 옮김 / 유로서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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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따삐야 2007-12-13 18:30   좋아요 0 | URL
음, 저도 많이 읽진 않았지만 카프카 좋아하는데. 그로테스크한 세상에 대해 상담을 하고싶다는 로쟈님 의견에 大공감이에요.

로쟈 2007-12-13 20:41   좋아요 0 | URL
즐거운 일은 아니지요.^^;

뭉실이 2007-12-31 22:50   좋아요 0 | URL
카프카의 책이라고는 민음사의 '변신,시골의사'밖에는 없는데요...
이책을 읽고 언젠가는 카프카의 책을 읽을 기회가 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압축된 카프카의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

로쟈 2007-12-31 23:33   좋아요 0 | URL
대표작들이야 다 아시는 건데요, <변신>, <소송>, <성>이 필독서이고, 개인적으론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를 추천합니다...
 

지난 여름에 출간된 니클라스 루만의 <사회체계이론>(한길사, 2007)은 '올해의 이론서' 후보작 중의 하나일 만큼 중요한 의의를 갖는 책이다(관련 페이퍼는 '루만이냐 하버마스냐' http://blog.aladin.co.kr/mramor/1342097 '체계이론과 주체철학' http://blog.aladin.co.kr/mramor/1377766 등 참조). 여름에는 서론부만 좀 훑어보다가 다른 일들에 치여 미뤄두고 말았는데 내년에는 좀더 많은 장들을 읽을 수 있었으면 싶다(나는 영역본까지 구해두었었다). 다행히 관련 입문서들도 나온다고 하니 사정도 더 좋아질 듯하고. 연세대대학원신문에 게재된 기사를 담비에서 옮겨놓는다(http://www.dambee.net/news/read.php?section=S1N5&rsec=&idxno=7654). 국역본의 문제점도 짚고 있어서 유익하다. 

담비(07. 12. 11) 루만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은 ‘체계이론’을 통해 현대사회학에 중요한 혁신을 가져온 독일 사회학자다. ‘메타는 없다’는 (언뜻 포스트모던한) 테제를 기초로 정교하면서도 거대한 메타 사회이론을 구축해냈다는 점에 루만의 지적 독특함과 거장다운 사유의 넓이가 있는 것 같다. 그는 다작으로도 유명하여 평생 50권이 넘는 저서와 350편 이상의 논문을 남겼으며 다룬 주제의 범위도 사회의 일반이론에서 정치, 경제, 교육, 법 심지어 문학과 사랑에 이르기까지 방대하다. 하버마스와 더불어 전후 독일 사회과학계의 가장 중요한 지성으로 평가하는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국제적 명성에 비한다면 국내에서 루만에 대한 관심과 이해는, 그가 매우 난해한 이론가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기이하다’고 할 만큼 낮은 수준이다. 그의 주저 중 하나인 <사회체계이론1, 2>가 지난여름 국내에 번역, 소개되면서 이런 답답한 상황이 슬슬 개선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루만과 체계이론에 관심을 가진 원우들을 위해 두 편의 좋은 소개글을 싣는다. (편집자)

루만과 사회학의 사고 전환

니클라스 루만이라는 학자를 간단히 소개하자면, 첫째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지 밝혀내었고, 둘째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이론을 마련했고, 셋째 이를 토대로 한 사회이론을 제시했으며, 넷째 여기에 더해 20세기 후반의 세계사회에 대한 몇 가지 시대 진단을 내린 거대 이론가이다. 사회학자라면 누구나 그런 일을 할 텐데, 왜 굳이 ‘거대’ 이론가라고 부르느냐는 반론이 있을 법하다. 하지만 루만이 이룬 사회학적 사고의 전환과 사회적인 것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풍부한 개념틀, 그리고 그 방대한 작업 규모에 주목한다면, 다른 이론가들이 인본주의 개념틀에 사로잡혀 얼마나 협소한 범위만 다루고 말았는지 알 수 있다.

루만에 의하면, 사회적인 것은 의식적 내지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되지도, 그렇다고 사물적 내지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어질 수도 없는 창발적(emergent) 질서 차원을 이루고 있다. 이는 이른바 주관적 사회학과 객관적 사회학을 단순히 절충하는 것이 아니며, 더구나 하버마스처럼 주체 개념을 생활세계의 상호주관성으로 확장함을 통해 사회적인 것을 해명하는 것도 아니다. 루만은 서로를 꿰뚫어볼 수 없는 의식체계들은 어떤 공동의 실재 차원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본다. 오직 가능한 것은 ‘기대에 대한 기대’로 이루어지는 이중의 우연성, 즉 타자의 우연적 기대에 대한 자아의 우연적 기대이다. 이러한 이중의 우연성은 근본적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의식체계들이 각각의 의도를 억제하여 기대 구조를 형성시킴을 통해 구조화된 우연성으로 변형될 뿐이다.

구조화된 이중의 우연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통지, 이해라는 3중의 선택 과정인 소통(Kommunikation)의 과정은 의식체계들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실재의 차원, 즉 사회적 체계를 이루게 된다. 그래서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이루는 구성요소가 인간이 아니라 소통이라고 보며, 인간은 사회적 체계와 상호침투할 수는 있지만 환경에 머물게 된다. 이것이 전통적으로 사회적인 것을 다루어온 사고방식과 완전히 달라지는 루만의 전환 지점, 즉 사회적 체계를 창발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인 사회는 그 진화의 초기 단계에 있어서는 그 환경에 있는 인간을 닮은 모습(부족, 혈통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래서 현대 이전에는 ‘인간적 사회’라는 관념을 갖고서도, 즉 인간 주체나 사물 객체와 다른 사회적 차원을 고민하지 않고도 사회를 묘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경제, 정치, 법, 학문 등 여러 기능체계로 분화된 현대에 이르게 되면 사회는 더 이상 그 환경에 있는 인간들을 구획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분화 형식을 갖게 된다. 오직 경제인이기만 한 사람도 오직 학자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경제나 학문과 같은 기능체계의 작동을 설명함에 있어 우리는 더 이상 사회계약론이나 실천이성과 같은 주체철학에 의지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고정된 사회구조 모델을 전제하는 것은 비개연적으로 진행되는 사건의 연속인 소통 과정과 사회의 진화를 설명할 수 없다.

Soziale Systeme. Grundriß einer allgemeinen Theorie

지금까지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루만의 중기 주저작인 『사회적 체계들 Soziale Systeme』의 초반, 특히 이중의 우연성을 다룬 3장에서 이루어지는 사고 전환의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전환을 토대로 루만은 기존 사회학과 철학의 개념들인 의미, 소통, 행위, 관찰, 구조, 과정, 인격 등에 모두 새로운 위치값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적 접촉 일반을 파악할 수 있는 개념틀을 이 책에서 마련한다. 사회학 역사에 있어서나 체계이론 역사에 있어서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더 소개하기 전에 왜 내가 한글판의 제목인 ‘사회체계이론’이 아니라 ‘사회적 체계들’이라고 칭하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루만 번역서의 문제들

한국에 루만에 대한 소개는 그리 잘 이루어져 있지 않다. 이전에 번역된 저작은 협소한 주제를 다룬 것이었다. 포괄적으로 루만을 다룬 입문서 하나가 번역되긴 했으나, 그조차도 루만의 제자들이 그리 신뢰하지 않는 개론서 전문 저자가 겉핥기식으로 쓴 책이었다. 아직 하버마스의 저작들을 통해 이루어진 루만에 대한 왜곡된 소개, 즉 파슨스의 아류 혹은 기성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는 보수적 체계이론 정도로 여겨버리는 인식을 교정할 만한 한글책은 부족하다. 그래서 자기생성(Autopoiesis)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이후 1984년에 나온 Soziale Systeme의 번역은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은 루만의 이론사에 있어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는 기초 개념들을 완성한 저작이자, 1997년에 나온 또 다른 주저작인 『사회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사회이론 생산의 출발점이었다.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이 연구는 사회를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이자 다른 여러 사회적 체계들 중 하나로 이해하는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독18, 한1:63)고 말한다. 사회적 체계를 다루는데 사회이론을 제공하지 않는다니? 루만은 사회적 체계를 상호작용, 조직, 사회(Gesellschaft)로 분류한다. 이들 사회적 체계는 각각 고유한 작동(Operation) 원리를 갖고 있으며, 그중 사회는 ‘모든 소통을 포괄적인 사회적 체계’로 정의된다. 그래서 기업, 정당, 학교 등에 대한 연구가 조직사회학의 과제라면, 경제, 정치, 교육 등 지역 경계를 넘어 범사회적 소통이 이루어지는 현대 사회의 기능체계들에 대한 연구는 사회이론의 과제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체계들』은 아직 본격적인 사회이론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상호작용, 조직, 사회 등 사회적 체계 일반을 다룰 수 있게 하는 기초를 놓는 책이다. 그래서 soziales Sytem은 social system과 ‘사회적 체계’로, Gesellschaftssystem은 societal system과 ‘사회체계’로 구별해 옮겨야 할 필요가 생긴다.

그런데 한글판 옮긴이는 독자들이 읽기 쉽게 ‘사회적-’를 ‘사회-’로 바꾸었고, 그래서 Gesellschaft를 “사회”, “(기능적으로 분화되지 않은) 전체사회”, “공동체” 등 “문맥에 따라 상이한 역동적 번역을 취했다”고 밝힌다. 하지만 이러한 역동적 번역은 사회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하는 루만의 노력을 허사로 만드는 일이다. 분절적으로 분화된 사회에서는 소통들이 전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사회들이 있었지만, 기능적으로 분화되어 전세계적으로 소통이 연결되는 현대 사회는 세계사회라고 말하는 루만의 설명법은 위와 같은 역동적 번역 때문에 제대로 전달될 수가 없다.

더구나 ‘공동체’라는 번역은 사회를 결코 인간 공동의 것으로 보지 않는 루만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식대로 그대로 옮기면 “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사회”(독585)라는 문장은 옮긴이에 의해 “전체사회는 오늘날 분명히 세계공동체”(한2:290)라는 무의미한 문장이 되어버린다. Gesellschaft라는 단어 자체에는 결코 ‘전체’니 ‘공동체’니 하는 함의가 들어있지 않다.

이러한 옮긴이의 몰이해는 제목뿐만 아니라 루만 소개에서도 드러난다. 옮긴이는 1997년에 나온 루만 사회이론의 집대성작인 『사회의 사회』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회의 경제』, 『사회의 학문』 등 일련의 사회이론 저작들을 『사회적 체계들』의 각론이라고 말한다. 앞선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루만은 『사회적 체계들』에서 기초 개념을 마련한 후 사회이론 작업은 각론들을 먼저 쓰고 이들의 총론을 마지막에 썼다. 옮긴이가 루만 이론의 체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사회체계이론』을 유일한 “결정판”으로 만들어 많이 팔고자 하는 출판사의 책략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의 문제는 번역의 질에 비하면 아무 문제도 아니다. 연산(Operation), 외율준거(Fremdreferenz) 같은 납득하기 어려운 번역어 선택은 그렇다 치고, 수십 번에 걸쳐 bewa..hren(입증)을 bewahren(보존)으로, Simplifikation(단순화)를 Implikation(함축)으로, Zumutung(요구)를 Vermutung(추측)으로 잘못 읽는 것은 최소한의 정성 부족을 보여준다. 문장 오역도 무수히 많으며, 2권 후반부에 이르면 거의 한 단락에 하나 이상 나온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여기서 밝혀둘 것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루만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원래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역의 탓도 크다는 점이다. 독일어를 못 읽는 사람이 지금 이 책을 읽고 싶다면 영역판을 추천한다(*역시나 국역본에 대한 기대는 접어야 하는 것일까?).



『사회적 체계들』의 내용

『사회적 체계들』은 도입과 12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도입인 ‘체계이론의 패러다임 전환’과 체계와 기능, 체계와 환경을 다룬 1장과 5장은 루만 체계이론이 파슨스와 달리 구조보다는 기능을 우위에 둔다는 점, 생물학자인 마뚜라나가 이룩한 자기생성적 전환을 받아들임으로써 체계 중심이 아닌 세계(체계/환경-차이의 통일) 중심의 이론이라는 점 등을 볼 수 있다. 이는 체계이론이 보수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켜줄 것이며, 사회의 환경 문제, 즉 인간의 고통이나 배제 문제나 생태적 위기 문제를 다루는 데서도 큰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의미를 다루는 2장은 루만 이론의 또 하나의 자원인 후설의 지향적 의미 개념을 어떻게 사회학적으로 수용해 변형시키는지를 볼 수 있다. 루만은 70년대 초부터 의미가 행위나 구조보다 앞서는 사회학의 기본개념이라고 주장해왔고, 이 책에서 의미 개념은 의미를 구성하는 두 가지 체계(의식체계, 사회적 체계)의 다른 자기생성 원리를 밝힘으로써 완성된다. 앞서 말했듯이 3장은 사회적 체계가 고유한 자기생성 체계임을 밝히고 있으며, 4장에서 소통 개념을 해명함으로써 사회적 체계의 구성요소가 소통이지 왜 행위일 수 없는지 밝힌다.

사회적 체계 이론에서 행위 개념과 구조 개념의 위상을 밝히는 4장과 8장은 사회학 논쟁에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루만은 행위란 체계가 자기생성의 동일성 지점을 마련하기 위해 소통의 세 가지 선택인 정보, 통지, 이해 중 통지행위 하나로 단순화하는 것이라고 본다. 구조는 사건들의 연쇄인 소통 과정에서 기대를 제약하는 것이지 고정된 실체라고 보지 않는다. 구조는 과도한 임의성을 제약하는 것이지 행태 자체를 규제할 수 없고, 따라서 과정은 구조상 비개연적인 것을 개연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렇듯 행위에 대해 소통을, 구조에 대해 사건과 과정을 우위에 둠으로써, 루만은 기든스의 구조화 이론이 행한 행위 중심 사회학과 구조 중심 사회학의 절충이 갖는 한계를 넘어서며, 하버마스의 소통적 행위 이론이 상호이해지향이라는 확인 불가능한 심리상태에 의지함으로써 갖는 한계를 드러낸다.

루만의 체계이론에서 인간의 자리는 어디이며, 개인은 무엇이며, 인간과 사회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밝히는 대목은 6장 상호침투와 7장 심리적 체계들의 개체성이다. 그리고 9장은 헤겔 이래 계속 논쟁이 되어 왔고 오늘날도 기능론 대 갈등론이라는 왜곡된 구도 속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모순과 갈등의 문제를 새롭게 조명하며, 10장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사회적 체계의 차이를 다루고 있다.

루만은 이 책의 1장을 “다음의 고찰들은 체계들이 있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시작한다. 그리고 이는 실재에 비추어 입증되어야 할 책임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의 체계가 단순한 분석 모델이 아니라 실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급진적 구성주의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러한 선언에 대한 해명은 이 책의 맨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진다. 루만에게 세계란 체계상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관찰하는 체계는 자신의 관찰이 가진 맹점을 볼 수는 없으나 볼 수 없다는 사실은 반성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보여주는 세계는 루만이라는 관찰자의 맹점에 묶여있는 것이고 세계는 다르게도 관찰 가능하지만, 누구도 그런 맹점을 벗어난 세계를 알 수 없다. 합리성은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점을 아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자기지시와 합리성, 그리고 인식론을 위한 귀결들을 다루는 11장과 12장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장들이지만 과감하게 ‘체계들이 있다’는 선언으로 시작해 체계/환경-구별이 세계 기술에 있어 높은 실적을 낳을 수 있다고 믿는 루만 이론의 전면모는 여기까지 읽어야만 밝혀진다. 그리고 11장의 논의는 체계이론을 통한 사회비판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흐름으로도 이어진다.

Niklas Luhmanns Theorie sozialer Systeme. Eine Einführung.

『사회적 체계들』을 다 읽는 데는 워낙 긴 시간이 걸릴 뿐만 아니라 친절한 입문서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시작하기조차 어렵다. 그래서 좋은 입문서를 추천하자면 독어는 G.Kneer와 A.Nassehi가 함께 쓴 책과 M.Berghaus가 쓴 책을, 영어는 M.King과 C.Thornhill이 함께 쓴 책을 추천한다. 첫 번째 책은 필자의 번역으로 내년 초에 한글판이 나올 것이다.(정성훈 / 서울대 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07.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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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12-13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만을 전공하는 분께 이야기 들은 바가 있기도 해서, 아직 번역본은 구입하지 않고 있었는데, 역시나 더욱 구입을 망설이게 하는 글입니다.ㅠㅠ

로쟈 2007-12-13 08:41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크게 신뢰하지는 않으면서도 책은 덜컥 구입했었는데요, 역시나 문제가 터지는군요.--;

책사랑 2007-12-13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 미비에 대해 공감하는 바입니다.

로쟈 2007-12-13 08:39   좋아요 0 | URL
출판계 자체의 검증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 같습니다. 언제나 독자들이 문제를 떠안아야 한다는 건 참...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언론리뷰들이 다소 뒤늦게 뜨고 있는데 늦게라도 많은 이들이 관람할 수 있으면 좋겠다(나는 이달 마지막주에 단체관람할 예정이다). 그래야 러시아 미술을 안방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또 생길 것이기에. 그런 계산속으로 기사를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12. 12) 칸딘스키 보러 갔다가 ‘19세기 러시아’에 빠지다

주최측에서 욕심을 많이 부린 전시다. 이는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 됐다.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19세기 리얼리즘에서 20세기 아방가르드까지’(한·러교류협회 주최)는 제목 그대로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러시아 미술을 보여주고 있다. 등장한 작가만 54명, 작품은 회화만으로 무려 91점이다. 한국 사람들이 알 만한, 추상화의 선구자 칸딘스키를 제목에 내세웠지만 그의 작품은 4점밖에 안된다. 초기 습작 소품 두 점을 빼면 실질적으론 두 작품에 불과하다. 정작 감동을 주는 작품은 19세기의 그림들이다. 제목이 전시의 진가를 제대로 강조하고 있지 못한 셈이다.



바꿔 말하면 19세기 러시아 그림들을 본 것만으로 전시의 가치는 높다. ‘광대한 국토만큼이나 폭과 깊이를 자랑하는 러시아 미술의 백미’를 볼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특징은 리얼리즘으로 요약된다. 문혜영 큐레이터는 “민중·인간에 대한 관심, 광대한 영토에 대한 사랑이 러시아 미술의 두 가지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사실주의적인 메시지는 드라마틱한 러시아적 분위기를 담아 회화로 표현됐다. 19세기 작품은 총 63점으로 초상화, 풍경화, 역사화, 풍속화 등 주제별로 구분된 방에서 전시되고 있다.

톨스토이, 차이코프스키 등 예술가들을 주로 그린 것이 특징인 19세기 러시아 초상화는 동시대의 예술적 성취를 자랑스러워하는 사회 분위기를 반영했다. 러시아의 국민화가로 꼽히는 레핀이 인물의 본질을 깊숙이 통찰해낸 작품 ‘작가 고골의 분신’을 비롯해 낭만적 분위기를 가진 대작 크람스코이의 ‘달밤’ 등이 대표작이다. 풍경화에선 러시아 특유의 자연풍경을 아름답고 서정적으로 묘사한 사브라소프, 격정적인 바다의 생명력을 탁월하게 묘사한 아이바조프스키 등 거장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 혁명, 빈부격차, 사회부조리 등을 주제로 러시아 미술의 본질적 특징인 ‘사회 참여로서의 예술의 적극적 힘’을 반영한 작품들은 역사화와 풍속화 섹션에서 확인된다.

러시아 회화사 전체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레핀의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전쟁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는 베레샤긴의 ‘불의의 습격’, 권력자와 무산자의 불평등한 현실을 단순하지만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마소예도프의 ‘지방자치회의 점심식사’ 등은 꼼꼼히 챙겨봐야 할 작품이다. 주제별로 접근하다보면 러시아 미술의 아름다움을 다각도에서 속속들이 볼 수 있게 된다.

20세기 러시아 미술은 유럽 화파와 교류하며 여러 사조를 혼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말레비치, 라리오노프, 곤차로바, 포포바 등 다양한 화풍을 보이는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작품 24점이 경향별로 전시된다. 칸딘스키 작품으로는 완숙기의 걸작 ‘블루 크레스트’와 ‘구성 #223’이 왔다.



전시장 구성은 좋은 편이다. 19세기의 드라마틱한 그림에서 받은 감상의 충격은 20세기의 현대적 그림들을 보며 한숨 돌릴 수 있다. 작품 수가 많기 때문에 작품이 빽빽하게 걸려 있어 감상하기에 다소 숨찬 느낌이다. 그러나 칸딘스키 작품 넉점을 여유있게 배치해 놓은 붉은색 방이 마지막에 있어서 감상을 인상적이면서도 여유롭게 마무리할 수 있다. 작품들은 러시아 양대 국립미술관인 러시아미술관과 트레티야코프미술관에서 왔다. 1996년 ‘일리야 레핀전’ 이후 12년 만에 들어온 러시아 미술전이다. 내년 2월27일까지.(임영주기자)

07.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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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7-12-13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봐야지 하는...전시입니다. 모네마네피카소에 넘 정열을 쏟아붓는 우리네 전시회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닙니다..다만 넘 편중..되었다는 생각이..)에서 이렇게 보기 힘든 전시회를 기획해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로쟈 2007-12-13 14:16   좋아요 0 | URL
어렵게 성사된, 드문 기회인 건 확실합니다...

소경 2007-12-14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날 가마터 발굴장에서 일하는게 초읽기로 다가 왔네요. 어렵지 않게 행사에 문제만 없다면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찬바람에 곡갱이질이나 호미나 삽질에 열정이 붙을 지도. ^^;;

로쟈 2007-12-14 22:37   좋아요 0 | URL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들고 가시길.^^

소경 2007-12-14 22:29   좋아요 0 | URL
앗.. 어제 시골에서 김장 도와서 챙긴 돈으로 책을 다량 구입해서 인터넷으로 손쉽게 구입은 무리고, 가기전에 구내 서점에 부탁해서 구해야겠네요. 연모하는 누님이 밥사준다 해서 다음 주에 직행 할 걸 미뤘는데 그게 다행인지 ^^;;, 추천 고맙습니다.

로쟈 2007-12-14 22:38   좋아요 0 | URL
겨울에 땅 파면서 읽기는 가장 좋은 소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국일보의 '오늘의 책'을 자주 둘러보는 편이다. 12월 13일자는 러시아 출신의 화가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를 다루고 있다. 칸딘스키의 기일이어서다. 현재 열리고 있는 '칸딘스키와 러시아 거장'전(http://blog.aladin.co.kr/mramor/1726386)에서도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는 터여서 기사를 챙겨두도록 한다.  

한국일보(07. 12. 13) [오늘의 책<12월 13일>]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바실리 칸딘스키가 1944년 12월 13일 78세로 사망했다. 러시아 태생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법학 정치학 경제학을 공부한 칸딘스키가 미술로 인생의 방향을 튼 것은 30세 때인 1896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프랑스 인상파 회화전에서 모네의 그림 ‘건초더미’를 보고서였다.

그 해 대학교수직 제의를 거절하고 뮌헨으로 가서 그림공부를 시작한 그가 현대예술의 방향마저 바꿔버린 최초의 추상회화 ‘첫번째 추상 수채’를 제작한 것은 44세 때인 1910년이다. 나치에 의해 퇴폐 예술가로 지목돼 작품이 몰수되기도 했던 칸딘스키는 1933년 프랑스에 귀화해 여생을 보냈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1912)는 칸딘스키의 예술론을 집약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무릇 예술가의 임무라는 것은 형식을 지배하는 데 있지 않고, 내용에 적합한 형식을 만드는 데 있다”고 선언한다. 존재하는 대상을 구체적으로 모방하고 재현하던 전통적 회화를 벗어나, 예술가의 ‘내적 필연성’에서 우러나오는 형태와 색채로 화면을 채우는 현대예술은 그의 이 선언에서 시작됐다.

이로써 현대예술은 그 자체가 하나의 미적 실체, ‘오브제’가 된다. 예술의 모든 외적인 표현수단이나 형식을 관통하는 예술가의 내적인 울림을 가리키는 말인 ‘내적 필연성’은,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닌 정신이라는 칸딘스키의 생각이 담긴 핵심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참된 예술작품은 비밀로 가득 차고 수수께끼 같은 신비스런 방식으로 예술가에 의해 생겨난다.”

칸딘스키의 글은 그 자체로 음미할 문학적 향기가 가득하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 “흰색은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다. 그것은 젊음을 가진 무(無)다.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전부터 무요, 태어나기 전부터 무인 것이다.”(하종오기자)

07. 12. 12.

P.S. 찾아보니 얼마전 칸딘스키 등이 엮은 <청기사>(열화당, 2007)이 번역돼 나왔다. 국내에서 전시회를 가졌던 것으로 기억돼는데, "청기사(靑騎士, Der Blaue Reiter)는 20세기 유럽 현대예술의 불규칙하고도 혼란스러운 태동을 포착하고 그 산고를 함께하며 새로운 탄생을 널리 선포했던 선구자들의 이름인 동시에, 그들이 1912년에 발간한 예술연감(藝術年鑑)의 제목이자, 그 연감의 주도적인 편집진이었던 바실리 칸딘스키(W. Kandinsky)와 프란츠 마르크(F. Marc)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전시회의 이름이다."

이 청기사파를 소개하는 책으로 <청기사파>(예경, 2007)도 올해 나온 책이고, 하요 뒤히팅의 <바실리 칸딘스키>(마로니에북스, 2007)은 지난 가을에 번역돼 나왔다. 김광우의 <칸딘스키와 클레의 추상미술>(미술문화, 2007)까지 더하면 나름대로 풍족한 읽을 거리다.

Василий Кандинский Точка и линия на плоскости

내가 갖고 있는 러시아어본은 <평면 위의 점과 선>. 우리말로 <점. 선. 면>(열화당)이라고 소개된 책이다. 한데 어느 구석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군,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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