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동네에 있는 시립도서관에 가 중국고대사상을 다룬 책 몇 권에서 법가에 관한 대목들을 읽으며 같이 들춰본 책은 고명섭의 <담론의 발견>(한길사, 2006)이다. 전작인 <지식의 발견>(그린비, 2005)을 완독했었지만 <담론의 발견>에까지 손길이 미치지 않았던 건 한겨레의 출판면을 담당하고 있는 저자의 기사 대부분을 이미 지면에서 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물론 책으로 통독하는 건 별개의 독서이긴 하지만). '상상력과 마주보는 150편의 책읽기'란 부제대로 책은 150종에 묵직한 책들에 대한 독후감으로 빼곡하다. 여유만 있다면 일종의 '독서 매뉴얼'로 서가에 꽂아둠 직하다(적어도 150종의 책들에 대해서 아는 체할 수는 있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론 '노이라트의 배'를 화두로 한 머리말이 인상적이어서 복사까지 했다(그래야 이렇게 옮겨적을 게 아닌가!). 20세기 초반 논리실증주의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노이라트는 20세기 역사의 풍랑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 이런 명제를 남겼다고 한다.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배를 뜯어고쳐야 하는 뱃사람과 같은 신세다. 우리에게는 부두로 가서 배를 분해하고 좋은 부품으로 다시 조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5쪽)

한데 어디서 많이 읽어본 듯한 문장 아닌가? 내 기억은 아주 오래전 <성문종합영어> 같은 참고서의 독해 지문에서 읽은 듯하다고 말해주지만 자신할 수는 없다. 검색해보니 영어로는 이런 말이다.

"We are like sailors who on the open sea must reconstruct their ship but are never able to start afresh from the bottom. Where a beam is taken away a new one must at once be put there, and for this the rest of the ship is used as support. In this way, by using the old beams and driftwood the ship can be shaped entirely anew, but only by gradual reconstruction."

위키피디아에 인용돼 있는데, 노이라트의 이 말을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자신의 책 <말과 대상>에서 이 비유를 인용한 미국 분석철학의 거두 콰인이라고 한다(찾아보니 <논리적 관점에서>를 비롯해 국내에 소개된 콰인 관련서들을 다 소장했던 듯하다. 그의 대표작이라는 <말과 대상>은 유감스럽게도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고명섭에 따르면 "정치적 진보주의자였던 만큼이나 철학적 실증주의자였던 노이라트는 줄곧 세계를 투명하고 확실하게 해석하게 해줄 인식적 토대를 찾았지만, 끝내 그 단단한 지반을 찾을 수 없었다."

그게 노이라트에게는 불행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러한 '토대 없는 인식론'이 자연스러우며 또한 정직한 게 아닌가 싶다. 이 '노이라트의 배'에 상응하는 것이 니체의 '신은 죽었다!' 아니겠는가. 리처드 로티의 표현을 빌면, '잘 잃어버린 세계'이겠고. 때문에 '노이라트의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는 독서의 여정에 대해서 크게 유감스러워 할 일은 아닌 듯하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되, 우리가 사랑해야 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운명일 것이기 때문이다(새로운 비유로 '플로어 없는 댄스'도 덧붙여두자!).

'노이라트'와 함께 이 페이퍼의 또 다른 빌미가 된 건 '들뢰즈'이다. <담론의 발견>에는 들뢰즈와 관련한 책들만 하더라도 꽤 여러 종이 포함돼 있다(다수 포함돼 있는 철학서들 가운데서도 단연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어제가 들뢰즈의 생일이었다고도 해서 무슨 페이퍼라도 하나 적어야 하나 싶었는데, 책에서 사소한 '수다' 거리를 발견한 것이다. 

 

 

 

 

책에 실린 많은 사진 자료들은 대부분 편집자들이 찾아서 넣었을 법한데, 가령 마이클 하트의 <들뢰즈 사상의 진화>(갈무리, 2004)에는 저자인 하트의 사진과 함께 특이하게도 (영어본이 아니라) 이탈리아어본의 표지가 실렸다(두 남녀의 댄스 사진은 그 표지로 사용된 것이다). 영어본 표지는 아래와 같으니까 단연 보기에 더 좋은 건 이탈리아어본이긴 하다.  

한데, 프랑스 현대 지성사를 다룬 카트린 클레망의 <악마의 창녀>(새물결, 2000)를 다룬 장에는 다소 엉뚱한 표지 사진이 실려 있어 흥미롭다(클레망의 책은 크리스테바와의 대담 <여성과 성스러움>외 몇 권이 더 소개돼 있다). "<앙티 오이디푸스>는 68년 5월의 가장 탁월한 철학적 이론서였다."란 클레망의 발언을 보충해주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오이디푸스>는 1968년 5월의 가장 탁월한 철학 이론서다. 이 책의 영문판 표지."란 설명과 함께 들어간 사진은 영어판 <앙티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유진 홀랜드의 '입문서'인 것. 홀랜드의 이 책은 엉뚱하게도 <프로이트의 거짓말>(접힘펼침, 2004)이란 제목으로 번역됐었다('들루즈와 과타리의 안티오이디푸스, 정신분열분석입문'란 부제가 붙어 있는 '가장 조야한 번역서'의 하나였다).

 

 

 

 

사실 '들뢰즈 읽기'를 위해 어제 잠시 뒤적인 책은 얼마전에 나온 콜브룩의 <들뢰즈 이해하기>(그린비, 2008)이다. 작년말에 나온 책의 출간년도를 '2008'로 표기하는 건 지난주에 1쇄의 몇몇 사항에 교정이 가해진 2쇄가 나왔기 때문이다(이 책을 구입하려는 독자라면 몇 쇄인가를 확인하시길). 하지만 2쇄에도 '옥에 티'는 남았는데, 그건 뒷표지의 추천사이다.

"들뢰즈와 들뢰즈/가타리의 공동 작업에 관한 최고의 입문서"라고 이 책을 추천한 이가 '엘리자베스 그로스(<불안한 신체> 저자)'라고 표기돼 있는데, 짐작엔 '엘리자베스 그로츠'이고 그녀의 책 'Volatile Bodies'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Grosz'을 '그로스'로 읽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로츠' 대신에 '그로스'라고 표기됨으로써 어쨌든 국내에 이미 소개돼 있는 그로츠의 책 <뫼비우스 띠로서 몸>(여이연, 2001)과는 아무런 상관성이 없는 '정보'가 돼 버렸다('뫼비우스 띠로서 몸'이라고 해놓으니 제목이 좀 엉뚱하긴 하지만).

'가장 명료하고 독창적인 들뢰즈 입문서!'라고 적힌 콜브룩의 책을 추천하고 있는 또 다른 전문가는 <들뢰즈와 정치>(태학사, 2005)의 저자 폴 패튼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콜브룩은 들뢰즈의 철학적 관심들(차이, 재현, 욕망, 감응)에서 다양한 영역의 구체적인 문제들로 힘들이지 않고 옮겨간다. 우리를 비판적 사유의 핵심으로 이끄는 책." 해서 말하건대, (가장 독창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명료한 입문서'로서 콜브룩의 책을 추천할 만하다. 먼저 나온 그녀의 책 <질 들뢰즈>(태학사, 2004)와 함께(벌써 읽은 지가 꽤 됐군!).

흥미로운 건 <들뢰즈와 정치>와 <질 들뢰즈>를 우리말로 옮긴 역자가 동양철학 전공자라는 것. 활발하게 전공 관련 연구서들을 출간하고 있는 백민정씨가 그인데, 오늘 도서관에서 조금 훑어본 <맹자: 유학을 위한 철학적 변론>(태학사, 2005)의 저자이기도 하다. 공부는 그렇게 '가로지르며' 하는 것이다...

08. 01. 19.

P.S. 본문에서 언급한 콰인의 책 <말과 대상(Word and Object)>의 불역본 제목은 <말과 사물>이다. 복수형으로 하면 딱 푸코의 <말과 사물>과 제목이 똑같다. 푸코의 책이 올해 새로 번역돼 나온다고 하는데 콰인의 책도 같이 소개되면 좋겠다(그리고 공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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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2008-01-21 19:28   좋아요 0 | URL
박사학위논문을 묶은 <정약용의 철학>도 낸 백민정씨의 부군이 강신주씨라고 하더군요^^. 부부가 한동안 들뢰즈를 통해 동양을 다르게 바라보려는 노력을 한 것이 결실을 맺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로지르'게 되는것도 다 속사연이 있나봅니다.

로쟈 2008-01-21 19:25   좋아요 0 | URL
최강의 커플이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