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에 어제 읽은 한겨레21의 칼럼을 옮겨놓는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읽은 시집 <배꼽> 얘기다. 보다 구체적으론 '이것이 날개다'란 시 얘기다. 한 장애인의 죽음을 소재로 한 시인데, 평론가와 마찬가지로 나도 이런 소재의 시를 좋아하지 않지만 시인의 (의도하지 않은?) 반어법은 기억해둘 만하다. "좋겠다, 죽어서…"

한겨레21(08.04. 24) 좋겠다, 죽어서…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이 4월11일부터 시행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속으로 놀랐다. 이런 법이 여태 없었단 말인가. 실은 놀랄 자격도 없는 것이다. 언제 관심이나 있었던가. 나는 장애인이 아니다.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저 가끔, 내가 갑자기 장애인이 되어도 그녀는 나를 사랑할까, 하는 철없는 생각이나 해본다. 드문 일이지만, 장애인들의 일상을 TV로 엿보면서 훌쩍거리기도 한다. 알량한 눈물이다. 그들의 삶이 아파서 흘리는 동정의 눈물은 내가 ‘정상’임을 안도하는 감사의 눈물과 은밀하게 뒤섞인다. 최근에 읽은 시 한 편 때문에 이런 서론이 필요했다.

문인수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배꼽>(창비·2008)이 출간됐다. 1945년 출생, 1985년 등단. 등단도 늦었는데 무명의 시간도 길었다. 시인의 이름이 문단에 회자되기 시작한 게 불과 몇 년 안 된다. 그 몇 년 동안 이 시인은 어느 한 대목에서는 꼭 한 번 낮은 한숨을 쉬게 만드는 시들을 써냈다. 그 시들이 이번 시집에 고스란히 묶였다. 내키는 대로 아무 데나 펼쳐 읽다가 ‘이것이 날개다’라는 제목의 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시를 읽는데, 기습처럼 눈물이 고여들어, 그 눈물이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도사려야 했다. 문태준의 ‘가재미’ 이후 처음이었다.

“뇌성마비 중증 지체·언어장애인 마흔두살 라정식씨가 죽었다./ 자원봉사자 비장애인 그녀가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조문객이라곤 휠체어를 타고 온 망자의 남녀 친구들 여남은 명뿐이다./ 이들의 평균수명은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 턱없이 짧다./ 마침, 같은 처지들끼리 감사의 기도를 끝내고/ 점심식사 중이다./ 떠먹여주는 사람 없으니 밥알이며 반찬, 국물이며 건더기가 온데 흩어지고 쏟아져 아수라장, 난장판이다.” 첫째 연이다. “그 무슨 배려라도 해주는 것인 양”을 제외한다면(이 구절, 참 야속하고 절묘하다) 죄다 덤덤한 진술로만 돼 있다. 시인이 이런 식으로 시치미 떼면 읽는 쪽이 외려 조마조마해진다.

“그녀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이정은씨가 그녀를 보고 한껏 반기며 물었다./ #@%, 0%?$&*%ㅒ#@!$#*? (선생님, 저 죽을 때도 와주실 거죠?)/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보를 터뜨렸다./ $#?&@\?%, *&#… (정식이 오빤 좋겠다, 죽어서…)” 둘째 연이다. 빈소의 아수라장 앞에서 자원봉사자 그녀의 마음이 이미 위태위태한데, 장애인 이정은씨가 힘겹게 말을 밀어내자 그녀는 끝내 운다. “좋겠다, 죽어서…” 아, 뭔가를 무너뜨리는 말이다. 뭔가를 쑤셔박는 말이다. 이 구절에서 아득했다. 너무 슬프면 그냥 화가 난다.

“입관돼 누운 정식씨는 뭐랄까, 오랜 세월 그리 심하게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이제 비로소 빠져나왔다, 다왔다, 싶은 모양이다. 이 고요한 얼굴,/ 일그러뜨리며 발버둥치며 가까스로 지금 막 펼친 안심, 창공이다.” 마지막 연이다. 이제야 시인이 끼어든다. 정식씨는 뇌성마비 장애인이었다. “몸을 비틀고 구기고 흔들어” 겨우 말했다. 몸에서 빠져나와 날아오르려 몸부림쳤던 일생이었는가. 그리 되어서 라정식씨의 얼굴은 이제 이토록 고요한가… 시인은 이렇게 이해해버렸고, 읽는 나도 수긍해버렸다. 그래야 망자의 영혼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으니까.

천성이 모질어서인지 본래 이런 소재의 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의 슬픈 삶을 한없이 슬픈 눈으로만 들여다보아서 기어이 영영 슬픈 삶으로 만들어버리는 시들이 거북했다. 사회적 약자를 재현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다. 시의 의식이 동정의 눈물을 흘릴 때 시의 무의식이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사태를 힘껏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는 어떤가. “좋겠다, 죽어서…”라는 아픈 말을 모질게도 옮겨놓았고,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시를 마무리했다. 이 덤덤한 듯 원숙한 기교 아래로 사무치는 진심이 저류한다. 시인이 끝내 절제한 그 문장을 경박한 내가 대신 써야겠다. “세상의 모든 정은씨, 살아서, 꼭 살아서 행복하십시오.”

08. 0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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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8-04-25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제가 지금 막 한겨레 21에서 이 글을 읽고 왔습니다.이런 우연이...

로쟈 2008-04-25 21:55   좋아요 0 | URL
동선이 비슷하군요.^^

마노아 2008-04-25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는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친구가 장애로 인한 비뚤어진 자세로 허리신경이 손상이 됐다고, 너무 아파 입원했다고 전화가 왔어요. 뭐라... 할 말이 없더라구요. 이 시를 보니, 참 먹먹하네요...

로쟈 2008-04-25 21:55   좋아요 0 | URL
그게 그렇습니다.--;

Joule 2008-04-25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해서 장애인에 대해 저는 차별해요. 인간극장을 즐겨 보지만 그마저도 장애인이 나올 때는 아예 보지 않아요. 그래서 잘 써진 저 시와 기사를 읽으며 저는 또 안절부절해요. 내가 장애를 갖게 되어도 장애자를 가진 사람으로서의 나를 저는 잘 용납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해요.

로쟈 2008-04-25 21:56   좋아요 0 | URL
여하튼 직시하기도 회피하기도 어려운 노릇입니다...
 

오랜만에 한국문학 신간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그동안 별로 읽을 시간도 없었지만 눈에 띄는 작품들도 드물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번에 나온 책들은 젊은 작가들(이젠 30대까지는 모두 '젊은 작가'로 통칭된다)의 두번째 소설집이다. 동시대 젊은 작가들이 어디쯤 걸어가고 있는지 확인볼 수 있을 듯하다...

한국일보(08. 04. 25) 두 번째 소설집 낸 김중혁·손홍규

2000년대 초 등단해 개성적인 작품 세계로 호평받고 있는 소설가 김중혁(37), 손홍규(33)씨가 나란히 두 번째 소설집을 냈다.

■ '악기들의 도서관'
김중혁씨의 <악기들의 도서관>(문학동네 발행)엔 올해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엇박자D'를 비롯한 8편의 단편이 실렸다. "습관적ㆍ기계적으로 존재하는 작은 사물들에 훈김을 불어넣어"(소설가 이기호) 관습을 유쾌하게 깨뜨리는 작품들로 주목 받은 첫 소설집 <펭귄뉴스>(2006) 이후 꼭 2년 만이다.

전부 1인칭 시점으로 쓰여진 이번 수록작엔 피아니스트('자동피아노'), 기타리스트('나와 B'), 디제이('비닐광 시대'), 악기 가게 점원('악기들의 도서관') 등 음악과 관계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김씨는 "시기상 가장 앞선 수록작 '자동피아노'를 발표하고 나서 음악 자체와 음악을 소설적으로 다루는 방식에 대한 호기심이 동했다"고 말했다.

'비닐광 시대'의 디제이는 어마한 음반을 수집한 한 남자의 레코드 창고에 감금된다. "음악을 알면 뭐 해? 음악을 느끼지는 않고, 그걸 잘라서 써먹을 생각만 하는데…"라고 악담을 퍼붓는 남자의 정체는 불법 음반을 제작ㆍ유통시키는 범법자다.

'악기들의 도서관'의 '나'는 자신이 맡아보는 악기점을 온갖 악기 소리의 샘플을 제공하는 도서관으로 만들고, '엇박자D'로 불리는 박자 감각 없는 친구는 음치들의 목소리를 조합해 감동적인 하모니를 만들어낸다.

스스로를 '레고 블록'이요, '문장과 생각과 철학을 리믹스하는 디제이'로 칭하는 김씨의 문학관에 비춰볼 때 의미심장하게 읽히는 작품들이다. 하지만 김씨는 자기 작품을 '메타 소설'로 읽는 시각에 대해 "흥미로운 독법이지만 그런 걸 의도하고 쓴 건 전혀 아니다"라고 손사래 친다.

'매뉴얼 제너레이션'의 주인공은 매뉴얼(기기 사용설명서) 작가이자 양질의 매뉴얼을 모은 잡지를 만드는 편집장. 잡동사니에 기발한 상상력을 보태 잘빠진 소설을 빚어내는 김씨의 장기가 십분 발휘된 작품이다. 세상의 모든 매뉴얼은 "머리 속에다 거대한 밑그림을 그려주"는가 여부에 따라 좋은 매뉴얼과 나쁜 매뉴얼로 나뉘며, 매뉴얼의 문장들은 "창작하는 것이 아니라 발굴하는" 것이라는 게 '나'의 신념이다.

김씨는 "머릿속에 새로운 공간과 동선을 완벽하게 그린 후에 비로소 쓰기 시작한다"며 "이 삼차원 공간을 이차원 텍스트로 정확히 묘사하는 걸 중시한다는 점에서 내 소설 쓰기는 좋은 매뉴얼 쓰기인 셈"이라 말했다. 정교하게 배치된 가상 공간, 간결하고 투명한 문장의 묘미가 여전한 김씨의 이번 작품집엔 첫 책에 없던 사람 냄새가 풍긴다. '사람-사물'의 관계를 천착하던 작가의 관심이 '사람-사람'의 관계에도 옮아간 까닭이다.

'엇박자D' '유리방패' '무방향 버스' '나와 B' 등의 작품엔 주목받지 못하는 존재들에 대한 작가의 온기어린 시선이 묻어난다. 일러스트 솜씨로도 정평을 얻고 있는 김씨가 직접 꾸민 '작가의 말' 코너가 독특하다.

■ '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씨는 첫 소설집 <사람의 신화>(2005) 출간 이후 발표한 단편 10편을 <봉섭이 가라사대>(창비 발행)에 묶었다. 그가 장편 <귀신의 시대>를 발표한 시점(2006년)을 기준으로 이 소설집은 뚜렷한 결절을 맺는다.

2005-2006년 작품엔 반인반수적 존재들이 포진한다. '뱀이 눈을 뜬다'의 주인공은 다리에 뱀-뱀 머리가 그의 성기다-을 품고 살고, 표제작 속 소싸움꾼 '응삼'은 평생 소와 더불다가 얼굴마저 소를 닮게 된 인물이다. 비인간ㆍ비현실의 설정을 통해 손씨는 근대사회의 억압성을 들추거나, 거기에 균열을 낸다. '뱀-인간'의 다리에 뱀이 들어앉은 것은 아버지에 이어 도시 노동자가 된 그가 첫 해고를 당한 날 새끼발가락을 철문에 찧게 됐을 때다.

한 도시에 회자하는 '걸레 신화'는 동네 남학생들에게 윤간 당하고도 '요부' '걸레'라는 낙인을 얻은 '아영'이 일으킨 엉터리 기사이적의 결과다('상식적인 시절'). 이로써 가부장제ㆍ종교의 두 다리로 버티고 선 근대사회는 저를 농락한 여성을 전설처럼 기리는 맹한 체제임이 폭로된다.

2007년 이후 쓰여진 수록작 6편엔 이런 환상적 요소가 걷혔다. 물론 분신을 모티프 삼은 작품('도플갱어')이 있지만, 그조차도 인물과 배경에서 현실적 질감이 느껴진다. 손씨는 "우회하지 말고 좀더 직접적으로 현실과 대면하자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고 말했다.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제목으로 공유하는 세 편의 연작은 복수를 테마로 한, 개인적 정체성에 관한 소사(小史)로 읽힌다. 80년 광주에서 죽은 아들에 대한 복수를 평생 도모하는 '박', 이혼한 부인에게 총을 쏘다 총기사고로 되레 제 팔만 잃은 박의 또다른 아들 '정수', 불알친구들과 '강간'을 계획하다가 흐지부지하는 '승준'-정수의 아들 여자친구의 동생-을 각각 중심인물 삼은 세 단편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하찮고 사소해지는 생의 감각을 묘파한다.

습작 시절의 열정과 고뇌를 엿보게 하는 자전적 소설 '매혹적인 결말'의 결구, "그래, 악마는 되지 말아야지. 매혹적인 결말을 찾다보면, 모든 결말은 매혹적이라는 걸 잊을 수도 있으니까."(70쪽)란 문장도 한결 담백해진 작풍 변화와 맞닿아있다. 하지만 독자를 힘껏 끌어당기는, 자유자재의 유머까지 가미된 서사의 힘만큼은 여전히 우뚝하다. 손씨가 취재에 들이는 공도 오롯이 느껴진다.

남북한 문체를 번갈아 구사하는 '도플갱어'를 쓸 땐 서울 광화문 북한자료센터에서 북한 주요 문예잡지 2년치를 한 글자도 안 빼고 읽었다고 한다. 그렇게 구성한 쫀쫀한 디테일 덕에 그의 소설은 환상조차 근육질이다.(이훈성기자)

08. 04.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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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를 쓰기 전에 간식을 먹다가, 문득 며칠전 옮겨놓으려고 했던 기사가 생각났다. 올 하반기에 개통된다는 아시아횡단철도에 관한 것이다.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제치고 세계최장의 노선이 된다고 한다. 겸사겸사 시베리아횡단철도와 관련된 최근기사도 찾아서 옮겨놓는다. 주한 러시아대사와의 인터뷰기사다(뒤늦게 안 것이지만 시베리아횡단철도는 이달 7-10일에 EBS의 '세계테마기행'에서 특집으로 다루어졌다). 너무 늙기 전에 한번은 타보고 싶군...

세계일보(08. 04. 21) 런던∼다카 ‘鐵의 실크로드’ 열린다

영국의 런던과 방글라데시의 다카까지 약 1만1300㎞를 잇는 아시아횡단철도(TAR)가 올해 하반기에 개통된다. 20일 영국 일간 타임스에 따르면 아시아횡단철도는 런던에서 출발해 벨기에의 브뤼셀, 터키의 이스탄불, 이란의 테헤란, 인도의 라호르 및 델리를 거쳐 다카까지 23일 동안 달리게 된다. 이는 약 9300㎞에 달하는 시베리아횡단철도(TSR)보다 2000㎞가량 더 길다.

유엔의 후원 아래 진행되는 아시아횡단철도 연결 사업은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발발 이후 끊어졌던 인도 콜카타∼다카 구간이 이달 초 40여년 만에 재개통되면서 노선이 크게 연장됐다. 다음달에는 파키스탄과 이란이 처음으로 자국 철도 노선과 유럽 철도의 연결에 합의할 예정이어서 명실상부한 세계 최장의 철도 노선을 구축하게 됐다. 유엔 관계자는 “아시아횡단철도는 남아시아·중동 지역 국가는 물론, 중앙아시아의 옛 소련 국가들에까지 유럽으로 연결되는 새로운 무역·여행 노선을 열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횡단철도 사업이 최종 완성되면 런던에서 출발해 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남부 윈난성과 싱가포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구간을 철도를 이용해 여행할 수 있게 된다. 현재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놓인 터키의 보스포루스 해협은 배를 타고 건너야 하지만, 이 구간도 해저터널을 이용해 통과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를 가르는 도버해협은 이미 해저터널로 연결돼 있다. 다카에서 최종 목적지인 윈난성이나 싱가포르까지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미얀마 횡단 구간이 마지막 장벽으로 남아 있다.(안석호 기자)

동아일보(08. 04. 04) [4강 대사에게 듣는다]이바센초프 주한 러 대사

《“우리는 육지와 바다에 이어 우주에서도 협력하게 됐다. 한국이 러시아를 파트너로 선택한 데 대해서도 만족한다.” 글레프 이바셴초프 주한 러시아대사는 며칠 후면 한국인 최초의 우주인이 될 이소연 씨가 러시아에서 훈련을 받은 데 대해 이렇게 대답했다. 이바셴초프 대사는 지난달 25일 서울 중구 정동 러시아대사관에서 가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양국이 같이할 수 있는 공동사업의 아주 긴 목록을 갖고 있다”며 한국 정부와 기업이 러시아에 적극 투자해 줄 것을 기대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 정부가 출범한 데 이어 5월에는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신임 러시아 대통령이 취임한다. 한-러 관계는 어떻게 변할 것 같은가.

“현재 ‘상호 신뢰하는 포괄적인 동반자 관계’로까지 높아져 있는 양국 관계가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러시아에서 이 대통령은 1990년 한―러 수교 이전부터 러시아를 방문해 양국 간 경제 관계를 처음 시작한 기업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메드베데프 차기 대통령의 동북아 정책에 대한 예상은….

러시아는 동북아 지역에서 더 적극적인 정책을 펴 나갈 것이다. 대내외 관심사가 이 지역처럼 긴밀하게 연결된 곳도 없다. 방대한 천연자원을 갖고 있는 극동과 동시베리아 지역의 성공적인 개발 여부에 러시아의 미래가 달려 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이 지역을 개발할 기회가 없었지만 이제는 가능성이 생겼다. 지역 개발을 위해선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된 정세가 필수적이다.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 지역의 대규모 자원개발 프로젝트에 이웃나라를 동참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국경지역에서 핵이나 미사일 실험, 군사 위협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방침이고 메드베데프 정부에서도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러시아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어떻게 보고 있나.

“러시아는 지금까지 남북한 모두를 이해하는 관계를 유지하면서 통일로 가는 것을 지지해 왔다. 남북한이 서로에 대해 어떤 정책을 펼칠지는 독자적으로 결정할 일이고, 우리는 그 과정에까지 ‘충고’할 의사가 없다. 다만 한국의 대북정책이 남북한 간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기 위한 방향으로 추진되기를 기대한다.”

―러시아는 6자회담의 역할에 만족하는가.

“러시아는 앞으로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한반도의 비핵화는 러시아로서는 아주 중요하다. 6자회담은 공동 작업이고 과정이기 때문에 특정 국가가 자기 역할을 부각시키는 것은 건설적이지 않다. 6개국이 모두 한 팀이고, 결정은 참가국들의 컨센서스에 의해 내려져야 한다.”

―러시아는 남북한과의 삼각 경제 협력에 관심이 많은 걸로 알고 있다.

“3자의 장기적인 공동협력 사업은 남북한의 상호 신뢰를 강화해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기여할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논의 중인 세 가지 사업이 있다. 먼저,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의 연결이다. 이 사업이 실현되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유럽으로 가는 새로운 수송로가 생긴다. 두 번째는 동시베리아에서 북한을 통해 한국으로 가는 가스관을 건설하는 사업이다. 마지막으로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한반도로 전력을 공급하는 사업이 있다. 현재 러시아는 중국에 전기를 수출하고 있다.”

―아직도 한국과 러시아 간에 사람과 물자, 자본의 교류가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해마다 각각 6만여 명의 러시아인과 한국인이 상대국을 방문하고, 양국 간 교역 규모는 100억 달러에서 지난해 150억 달러로 늘어났다. 물론 인적 교류와 물류 분야에서 더 개선할 여지가 있다. 앞으로 교류가 더 활성화되기를 원하지만 1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진 것도 사실이다.”

―양국 간 교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양국 국민이 더 접촉해 언어와 문화, 생활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수십 년 동안 한국과 러시아는 관계가 단절된 상태였다. 양국 수교 후 지난 17년은 이런 단절에서 오는 긴장감과 감정을 극복하는 시기였다. 이런 ‘공백’을 1, 2년 만에 메우기는 힘들다.”

―이 대통령이 곧 미국과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데 러시아 방문 시기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 대통령에게 취임 축하 메시지를 전하면서 러시아로 초청했다. 올해 이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이 이뤄지길 기대하지만 현재로서는 정확한 방문 일정을 얘기하기 어렵다. 러시아에서는 5월 7일 새 대통령이 취임한다. 그 후에야 이 대통령의 구체적인 방러 일정이 확정될 것이다.”

―한-러 정상회담을 하게 되면 주요 의제는 무엇이 될 것으로 예상하나.

“우리는 양국이 같이할 수 있는 공동사업의 아주 긴 목록을 갖고 있다. 가스 석유 우라늄 석탄 등의 자원 개발에 대한 한국의 참여와 한국 기업의 투자를 기대한다. 또 우리는 자원뿐 아니라 첨단기술을 이용해 만든 완제품을 한국에 수출하기를 원한다. 물론 러시아는 지금도 한국에 천연자원만 수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 운항 중인 민간 헬기의 40%가 러시아제다. 한국의 원자력발전소에서 사용하는 핵연료의 3분의 1 이상이 역시 러시아산이다. 우리는 우주기술과 핵의 평화적인 이용을 위한 협력 사업에도 관심이 많다. 상호 신뢰 관계의 수준을 보여 줄 군사협력도 희망한다.”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 며칠 후 러시아의 도움으로 우주선에 탑승할 예정이다.

우리는 이제 육지와 바다뿐 아니라 우주에서도 한국과 협력하게 됐다. 러시아가 한국의 첫 우주인을 육성해 우주에 보내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한국이 이번 사업의 파트너로 러시아를 선택한 것에도 만족한다. 이런 사업은 아주 민감한 문제인데, 협력을 하게 된 것은 양국 간의 높은 신뢰 수준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올해에는 양국이 공동으로 개발한 발사체(로켓)인 KSLV-1의 발사도 예정돼 있다. 우리는 이 분야에서 또 다른 협력사업을 기대한다.” (대담=심규선 편집국 부국장, 정리=김기현 기자)



▼틈만 나면 박물관 순례, 부인이 직접 김치 담가▼ 

글레프 이바셴초프 대사는 본국에서나 서울 외교가에서 ‘전형적인 외교관’ ‘모범생’으로 통한다. 한국의 각계 인사들과 폭넓게 교유하면서도 매사에 빈틈이 없기 때문이다. 러시아 외교부 내의 대표적 인도 전문가인 그는 1997∼2001년 미얀마 대사로 있을 때 한국 대사와 친하게 지내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항공 엔지니어 출신인 부인 이리나 여사가 한국 대사 부인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배워와 집안에서 선보인 후 이바셴초프 대사는 열렬한 김치 애호가가 됐다.

대사로 내정된 후 한국 영화를 여러 편 구해 볼 정도로 문화에 관심이 많다. 지금도 틈날 때마다 서울시내 구석구석과 박물관을 순례하며 한국 문화와 생활을 배우려고 애쓰고 있다. 아직은 서툴지만 한국어도 배우는 중. “세계 3대 박물관인 에르미타시 등 러시아의 대형 박물관에 비해 한국의 박물관은 너무 작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전쟁기념관처럼 짜임새 있는 한국 박물관들은 곧 규모도 커질 것”이라며 웃었다.

취미는 수영과 테니스. 그래선지 스포츠 외교에도 적극적이다. 격투기 황제 에밀리아넨코 표도르 때문에 유명해진 러시아의 고유 격투기 삼보가 최근 한국에서 널리 보급되고 있는 데도 그의 역할이 컸다. 이바셴초프 대사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및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차기 대통령과 동향(상트페테르부르크)인 데다 러시아 최대의 외교 인맥인 모스크바국제관계대 출신으로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교장관과도 가까워 ‘성골’이라는 말도 나온다.(김기현 기자)

08. 04. 24.

P.S. 시베리아횡단철도에 관한 책은 기행문 형식으로 여러 권이 출간돼 있지만, 가장 충실한 건 '러시아 전문가 8인의 횡단보고' <시베리아 기행>(동아일보사, 2001)으로 보인다. 이미 절판된 책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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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04-24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담아가도 될까요? 저도 철도를 좋아하는지라^^ 재미있게 읽었어요.

로쟈 2008-04-24 23:24   좋아요 0 | URL
오픈된 자료인데요 뭐...

노이에자이트 2008-04-24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아시아 횡단철도라는 게 개통되는군요.아...그러고 보니 오리엔트 특급은 이스탄불에서 시작하니까 바다를 건널 필요가 없었군요.음...보스포러스 해협에 해저터널을...
현해탄에 해저터널을 뚫으면 일본에서 남북한 거쳐 시베리아 횡단 철도로 이어지겠군요.

로쟈 2008-04-25 12:27   좋아요 0 | URL
현해탄 해저터널까지는 아니어도 그냥 서울에서 모스크바까지 철도가 개통되면 좋겠다는 생각은 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바로프스크는 변두리에 호랑이가 나온다고 하던데요.연해주에서 살고 싶어요.곰이랑 호랑이랑...

로쟈 2008-04-27 18:38   좋아요 0 | URL
^^
 

내일 아침신문의 '김우창 칼럼'을 미리 읽어본다. 지난 총선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는데, 어디에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모든 좋은 정치는 삶의 근본적 보수성을 존중하는 정치이다. 삶의 근본은 생명의 보존이다. 물론 생명의 보존은 적절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최소의 조건은 의식주의 확보이다."라는 대목이 눈에 띈다. 언젠가 나도 적은 바 있는데, "유기체의 생존은 ‘항상성(호메오스타시스)’이라는 걸 조건으로 한다. 항상성이란 건 ‘기브 앤 테이크’, 즉 주고받는 타협을 통해서 유지된다. 단칼에 자결하지 않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일은 언제나 그러한 ‘타협’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인간조건이다." '대중의 보수화'를 말하기 전에 삶의 근본적 보수성에 대한 성찰이 필요해보인다...

경향신문(08. 04. 24) 삶의 근본적 보수성

이번 총선의 선거 결과에 대한 여러 해석 가운데 가장 명백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다산연구소의 인터넷 논단 ‘다산포럼’에 실린 김민환 교수의 논평이다. 그것은 여당의 압도적 승리 또는 야당의 참담한 패배 이외의 다른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나라당과 그 주변부의 당선자들을 포함하면, 여권의 의석수는 185 석에 이른다. 지난번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었던 민주당은 소수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을 이끌 만한 사람들이 대거 낙선하여, 당의 그 조직과 향방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민심이 완전히 야당을 외면했고, 진보진영은 알아볼 만한 정체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김민환 교수는 지금까지 야당의 기반이 되었던 수도권에서 패배한 것을 이번 선거의 전형적인 사례로 든다. 이것이 여당 후보들의 뉴타운 공약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더 확실한 것은 그것을 넘어선 민심의 이반이 원인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견해이다. 그러나 이것은 뉴타운의 문제를 더 넓은 배경의 한 부분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옳다는 말이지 그것이 요인의 하나가 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것을 조금 자세히 생각해보는 것은 오늘의 정치 판도를 가늠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야당의 수도권 참패는 민심

뉴타운은 적어도 그 정책의 방향에서는 여당의 공약이라고만 할 수 없다. 선거에서 약속되고 있는 것이 개발, 재건축, 부동산 투기 이익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것을 적극적으로 추진 해온 것이 노무현 정부였다. 그런 점에서, 뉴타운을 포함한 개발 위주의 정책 방향에서는 여야에 크게 다른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지금의 시점에서 정책의 추진에 행정부와 서울시를 장악하고 있는 여당이 훨씬 능률적일 것임은 분명하다. 유권자들은 매우 논리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런데 토건 개발 계획을 추진하면서도 노무현 정부는 그 정책 전반의 향방에 대해서는 다른 말을 했다. 부동산 가격의 앙등을 억제하겠다는 의지는 분명했고 또 그에 대한 조처가 있었다. 다만 그러한 조처들이 별 실효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현실과 수사(修辭)의 모순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 자체가 여기에 대한 분명한 자기 이해를 가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노무현 정부의 토건정책이 표방한 것은 균형 발전이었다. 또 거기에 추가하여 직업 창출의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결과가 지가 상승과 부동산 투기열이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은 의도가 현실의 움직임을 떠나 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민환 교수가 언급하고 있는 ‘좋은 정책포럼’이 내놓은 진보의 자구책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념을 줄이고 생활 현실을 존중하는 데로 돌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지가상승과 부동산 투기가 없더라도 거대 토건 개발 계획은 그 자체로 국민 생활의 기반을 극도로 불안하게 하는 것이 되기 쉽다. 그것은 발붙이고 사는 땅에 계속적으로 지진이 이는 것과 비슷한 불안정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나 토건이든 다른 것이든 거대 계획은 극히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일들이다. 노무현 정부는 균형을 말하면서도 거대 계획들과 실생활의 균형을 조심스럽게 고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없다. 소비에트 시대의 여러 개발 계획과 자본주의 체제하의 부동산 사업을 다 같이 권력의 편의를 위하여 국민 생활의 재편성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한 정치학자가 있다. 정치는 대체로 이러한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이지만, 그래도 삶의 크고 작은 현실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은 정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미국의 진보주의자 폴 굿먼이 자신을 신석기 보수주의자라고 말한 것을 생각하게 된다. 모든 좋은 정치는 삶의 근본적 보수성을 존중하는 정치이다. 삶의 근본은 생명의 보존이다. 물론 생명의 보존은 적절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 조건은 사회와 정치의 발전 단계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정의된다. 위급한 상황에서 목숨만이라도 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적어도 보통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 최소의 조건은 의식주의 확보이다. 그런 다음에는 물론 더 나은 의식주와 여가를 삶의 조건으로 생각하게 된다.

삶의 최소 조건의 확보라는 문제에서-그것이 어떻게 정의되든지 간에-그것을 위한 노력과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진보적인 정치 노선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정당성을 모두 내세우는 정치 집단은, 적어도 현대 사회에서 최소한 삶의 조건의 보편적 확보를 외면하지 못한다. 생존의 근본적 필요는 당파를 초월하여 그 자체로 모든 사람을 설복하는 어떤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넘어가는 다음 단계에서는 그러한 설득을 위한 압력은 점점 약화될 수밖에 없다. 더 나은 삶을 향한 욕망은 상호 이해와 협동 대신 물질적 자원과 사회적 인정을 선취하고자하는 경쟁이 되고, 치열한 투쟁이 된다.



인간주의 바탕 둔 정치 필요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을 움직이는 근본적 동기로서의 두 개의 자아의식을 말한 일이 있다. 하나는 단순한 자기 보존의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과의 우열 경쟁에서 자기를 확인하고자 하는 자기주장의 의식이다. 루소의 생각으로는 전자는 자연 상태의 인간의 심성이고 후자는 사회관계 속에 들어간 인간의 심성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어떤 조건하에서도 인간의 자아의식의 두 층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초적인 생존의 필요를 넘어간 다음에, 지배적인 것이 되는 것이 후자이다. 자유주의 정치사상은 이 경쟁적 자기의식을 자유의 표현으로 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회 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희생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은 사회 발전을 위하여 불가피하다.

바다에서 밀물이 들어오면 모든 배가 뜨는 것과 같이 경제의 전반적 향상이 삶의 조건을 고루 향상하게 된다는 말은 이러한 자유 경쟁 또는 상호 투쟁의 이념을 조금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보라고 하여, 거기에 따르는 희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게 하여 더욱 잘 사는 사회가 된다고 해도, 경쟁과 투쟁과 질시(嫉視)를 원리로 하는 사회가 참으로 살 만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루소는 경쟁과 투쟁과 질시로 쏠리는 사회의식을 협동적인 것으로 바뀌도록 하는 것이 사회 교육의 기본 과제라고 생각했다.

물질적 진보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생활의 물질적 수준의 향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진보주의자들은 거대 사회계획을 통하여 이것의 고른 분배를 보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진보주의의 사명은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물론 그것을 넘어 삶의 전반적인 향상을 추구함에 있어서도 그 노력이 개체적인 필요와 사회적인 협동과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넓고 자상한 인간주의의 바탕에 서 있지 않은 진보의 정치는 쉽게 정치권력의 계획으로 끝난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는 노력으로 협동과 균형의 도덕적 풍토를 길러 나가는 것이다. 우리의 정치에는 여러 가지 투쟁의 외침은 있어도 인간주의적 깊이를 느끼게 하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08. 04. 23.

P.S. 참고로 칼럼에서 언급되고 있는 김민환 교수의 논평을 옮겨놓는다.

다산포럼(08. 04. 17) 끝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다

총선이 끝났다. 여당인 한나라당이 153석을 얻은데 비해 야당인 민주당은 81석, 민주노동당은 5석을 얻는데 그쳤다. 자유선진당이나 친박연대 같은 보수 여권 당선자를 합하면 여권은 185석에 이른다.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간판으로 152석을 얻은 민주당 처지에서 보면 이번 총선 성적은 한 마디로 참담하다.  

의석의 절대 열세에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것은 야당의 대표급 인사들이 줄줄이 낙선한 일이다. 당 대표인 손학규 후보가 한나라당 박진 후보에게 역부족으로 무릎을 꿇었고, 이명박 후보와 대선에서 겨룬 정동영 후보는 한나라당이 긴급 투입한 정몽준 후보에게 길을 내주고 말았다. 김근태 김덕규 이상수 유인태 등 여권 거물들도 맥없이 무너졌다. 이제 그 당을 누가 이끌어갈지 걱정할 형편이 되었으니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민심은 야당을 떠났다 
수도권을 고스란히 여당에 넘겨준 것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지역별로 극명하게 표심이 갈리는 상황에서 언제나 선거의 승패를 좌우해온 수도권 민심이 미련 없이 야당을 외면하였음을 야권 사람들은 통절한 마음으로 재확인했을 것이다. 뉴타운 공약 때문에 졌다고 느끼는 야당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수도권 민심이 야당을 떠난 것은 오래전 일이다. 

선거 결과가 이런 지경인데도 어느 신문은 총선 결과를 논평하면서 “절묘한 표심”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이명박 정부가 다수당으로서 지배적인 지위는 누리되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정치를 하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절묘하다는 것이다. 국민들에게 그런 표현이 그럴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야당의 시각에서 보자면 도저히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견제는 원칙적으로 야당이 하는 것이지 여권 주변부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야당은 81명의 국회의원을 거느리고, 작심만 하면 구 여권 당선자를 끌어들여 2백석을 채우는 것도 어렵지 않은 거대 여당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 한다. 독재시절에 야당은 의석이 적어도 민심이 뒷받침했다. 그러나 지금 민심은 결코 야당에 우호적이지 않다. 이 어려운 상황을 야당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까? 이런 지난한 물음에 ‘새로운 진보’를 지향하는 지식인 그룹이 좋은 답을 제시했다. 
 
‘좋은 정책포럼’이라는 지식인 모임이 내놓은 계명(誡命)은 열 가지다; 이념이 아닌 실생활에서 출발하자, 이상주의와 근본주의에 빠지지 말자, 국민의 평균적 정서와 동떨어진 정책을 제시하지 말자, 반시장경제 반기업 이미지를 탈각하자, 민주주의 단일차원만으로 사고하지 말자, 민족주의의 틀에 갇히지 말자, 국가안보를 중시하자, 북한 주민의 인권보장을 요구하자, 노동의 권리와 함께 윤리도 주장하자,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을 지향하자. 어느 한 가지도 놓쳐서는 안 될 덕목이다. 

세상은 변하는 자의 것이다 
세상은 변하는 자의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이 세상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변화에 게을렀다면 보수주의자들은 세상을 잃은 시점에서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라는 새로운 기치를 내걸고 변화를 지향했다. 공안세력 냄새를 털어 내고 산업세력의 면모를 갖추려 애썼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스스로 변화한 보수주의자들이 그 과실을 향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 진보주의자들이 변할 차례다. 80년대 운동권의 낡은 사고는 미련 없이 내팽개쳐야 한다. 진보주의자들은 스스로 변해 지금의 끝을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보수주의자의 변화가 진보주의자의 변화를 부르고 진보주의자의 변화가 다시 보수주의자의 변화를 부른다면 그 사회는 희망을 보장할 것이다.(김민환_고려대 언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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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그니의 생각
    from zagni's me2DAY 2008-05-05 13:41 
    모든 좋은 정치는 삶의 근본적 보수성을 존중하는 정치이다. 삶의 근본은 생명의 보존이다. 물론 생명의 보존은 적절한 현실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드팀전 2008-04-24 09:24   좋아요 0 | URL
'유기체의 항상성'이라는 것이 흔히 말하는 '자연적 보수주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그것이 '정치적 보수주의'와의 친화성이 높을 것이기에 그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 고리에 어떤 홈을 팔 수 있는가..이것이 '진보'의 과제이자 또 '진보' 스스로도 성찰해야 하는 부분 아닐까 싶군요.
생물체의 입장에서 대중의 '호메오타시스'는 존재의 일반 조건이겠지요.그 존재 조건을 환원해서 정치적 보수주의를 순리인양 이야기하는 '실용주의자'(?) 많아서 깝깝하긴 합니다.

로쟈 2008-04-24 10:30   좋아요 0 | URL
그런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대운하 같은 거 하면 안된다는 것이죠!..
 

유래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이 '세계 책의 날'이라고 한다, 고 적고서 찾아보니 그 유래는 이렇다.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은 국제출판인협회(International Publishers Association: IPA)가 스페인정부를 통해 유네스코에 제안한 '책의 날'에 러시아정부가 제안한 '저작권'의 개념이 포함되어 제정된 기념일이며, 4월 23일은 스페인 까딸루니아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책을 사는 사람에게 꽃을 선물했던 세인트 호르디(St. Jordi)의 날이자, 1616년 세계적 문호인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와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가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맨날 책 얘기들만 늘어놓는 처지에 그냥 지나가기도 뭐해서 관련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책에 미친 인간'들, 곧 '점잖은 미치광이'들을 다룬 책,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2006)를 '책의 날의 책'으로 다룬 기사다.

 

한국일보(08. 04. 23) [오늘의 책<4월 23일>] 젠틀 매드니스

책 읽기에만 정신을 쏟고 다른 일은 돌보지 아니하는 이를 옛사람들은 ‘서치(書癡)’라 불렀다. 책만 읽지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비아냥이 담겨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며 <간서치전(看書癡傳)>이란 자서전을 쓰기도 했다. ‘서음(書淫)’이란 말도 있다. 글 읽기를 지나치게 즐겨 음란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 어리석음, 그 음란은 결코 추하지 않다. 아름답게 느껴진다.

서구에도 책 사랑을 가리키는 비슷한 표현이 있다. ‘젠틀 매드니스(geltle madness)’라는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변호사ㆍ하원의원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가 인쇄업자ㆍ도서수집가였던 자신의 할아버지 아이제이어 토머스를 가리켜 한 말이라 한다. ‘점잖은 미치광이’인 셈인데, 점잖게 풀어 쓰면 ‘가장 고귀한 질병, 즉 애서광증(愛書狂症)에 푹 젖어버린 분’ 정도가 되겠다.

<젠틀 매드니스>는 그렇게 책에 미친 인간들의 사연을 담은 책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가 고대로부터 1980년대까지, 젠틀 매드니스의 사례들을 방대한 자료수집과 취재를 통해 펼쳐놓는다.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다. 아내가 죽자 자신의 시 원고들을 같이 묻었다가 7년 후 무덤을 파헤쳐 <시집>이란 책으로 출간한 시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이 시집은 하버드대 도서관에 있다), 다빈치의 과학에 대한 원고ㆍ삽화가 든 72쪽짜리 필사본을 경매에서 3,080만달러에 낙찰받은 빌 게이츠, 미국 전역 268개 도서관에서 2만3,600여권의 희귀본을 훔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컬렉션을 만든 책도둑 스티븐 블룸버그 등등.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 책은 번역본 분량이 자그마치 1,111쪽이다. 이런 책을 쓰고 번역하고 출판하고, 또 비싼 책값 주고 쇄를 거듭할 수 있도록 사서 읽으며 ‘문자의 독배를 들이켜는’ 독자들, 책사랑에 빠진 음란한 그들이 있기에 책은 저마다의 영혼을 갖게 된다. 오늘 4월 23일은 ‘세계 책의 날’이다.(하종오기자)

08. 04. 23.

P.S. 나 또한 '책에 미쳤다'는 소리를 가끔씩 듣지만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하는 건 이 책 <젠틀 매드니스>를 소장하고 있지 않다는 점. 일차적으론 그 부피와 무게와 책값을 감당하기 어려워서이지만 한편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알리바이를 유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책에 미친 당신에게'(http://h21.hani.co.kr/section-021152000/2008/04/021152000200804170706038.html)에서 언급되는 있는 '책에 관한 책들', 혹은 '비블리오 픽션'들에 대해 관심을 덜 갖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예전에는 즐겨 읽었지만). 물론 이런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점잖은 미치광이' 아니냐고 당신이 따져묻는다면 대답은 궁색하다. 약간 에누리해서 '점잖은 반미치광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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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08-04-23 22:24   좋아요 0 | URL
저는 출판사가 대견해서 '책장'에 '감금'시켜놨어요 ㅡ..ㅡ;;;
엄두가 안나요...

로쟈 2008-04-24 00:12   좋아요 0 | URL
쪼개서 읽으면 그래도 읽을 만하지 않을까요? 아예 3권짜리로 간주해서.^^

섬나무 2008-04-24 11:32   좋아요 0 | URL
그냥 미치광이 혹은 반미치광이가 훨씬 매력있네요. 책에 미쳤다는 것도 곰팡내 나는데 꼭 그걸 강조해서 점잖은 이라고 수식하는군요.하여간 어디든 미칠 수 있다는 게 중요한 인생 이지요.

로쟈 2008-04-24 18:05   좋아요 0 | URL
'미쳐도 좀 점잖게 미쳐라'는 얘기가 있잖아요. 하도 종류가 많아서...

노이에자이트 2008-04-24 23:54   좋아요 0 | URL
제가 구입한 헌책 책갈피 속에서 찾은 귀한 것-백원짜리 지폐,70년대 우표,동독우표,임종석씨가 임수경 씨 방북선전한 유인물,김자옥 씨 20대 사진 등등...이기붕 씨가 추천사를 쓴 이승만 전기도 있는데 4,19 1년 전에 나온 것이라 인생무상을 느끼게 하더군요.

로쟈 2008-04-25 12:26   좋아요 0 | URL
헌책 '전문' 수집가신가요?^^

파란여우 2008-04-25 10:44   좋아요 0 | URL
오, 로쟈님도 안읽은 저 책을 저는 신나게 쫙쫙 읽었습니다.
반미치광이든, 온미치광이든 이 책을 읽지 않으셨다는 핑계로는 아닌걸요^^
생각보다 술술 읽혀지는 재미난 책입니다.
실제로 8백여쪽만 미치광이 얘기고 나머지는 참조자료라는~~~

로쟈 2008-04-25 12:26   좋아요 0 | URL
책은 안 읽었지만 여우님 리뷰는 읽었더랬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04-27 01:18   좋아요 0 | URL
주머니 사정 때문에 헌책방이나 고물상을 가다가 요즘은 공짜 맛에 아파트 폐지 수집일에 나오는 책들을 고릅니다.그런데 비오는 아침 일찍 우산 받치며 종이더미에서 이리저리 서성대는 모습이 보기엔 자세가 잘 안나옵니다만...가끔 좋은 책이 나오죠.

로쟈 2008-04-27 18:37   좋아요 0 | URL
웃음은 나오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