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유토피아의 꿈'(http://blog.aladin.co.kr/mramor/2160004)에 이어지는 페이퍼로서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학교출판부, 2008)의 한 문단을 읽는 것이 목적이다. 따로 자리를 마련한 것은 국역본의 번역이 어이없어서이다(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인문 번역서는 그토록 드문 것인지?). 최근의 '촛불문화제'와도 관련되는 내용이어서 교정해놓는다. 번역본의 22쪽, 원서로는 6-7쪽이다.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폭력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폭력성이 아니라 정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거부한다면,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 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민주적인 주권은 인민에 대해 정당한 구체화로 독점하는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 그것은 인민의 비정체성을 사실상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의 개념에 대한 의지로 민중 주권과 국가 폭력 사이의 모순을 풀기 위한 시도는 불합리한 순환논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효과는 전적으로 합법적/비합법적 구별의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알아먹기 힘들다(특히 강조 표시한 대목). 자신이 이해한 것을 번역하는 게 아니라 억지로 단어들만을 (그것도 문법에 맞지 않게 엉터리로) 직역해놓을 경우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잘게 쪼개서 원문과 대조해가며 읽어보기로 한다.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폭력성을 설명할 수 있지만,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폭력성이 아니라 정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The class nature of the state may explain its violence, but not its legitimacy; the democratic nature of the state may explain its legitimacy but not its violence.)
오역할 만한 대목이 없는 문장인데, 대구법으로 이루어진 원문을 번역본은 굳이 비틀었다. 다시 옮기면,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국가의 폭력성을 설명해주지만 그 정통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 반면에 국가의 민주주의적 특징은 국가의 정통성은 설명해주지만 그 폭력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정통성'이라고 옮긴 'legitimacy'는 보통 '정통성' '합법성' '정당성' 등의 뜻을 갖는다.)

이어서 두번째 문장: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거부한다면,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 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If one rejects the Marxist critique and attempts to redeem the viloent state through liberal-democratic theory, appealing to the legality of popular sovereignty, one faces the problem that, in the case of the use of violence by popular sovereignty against a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 it becomes questionable whether the law that the sovereign is upholding is itself legitimate.)
일단 "만약 누군가 맑스주의적인 비판과 민중 주권의 합법성에 대해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적인 이론을 통해 폭력적인 국가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를 거부한다면"에서 '시도'는 "If one rejects the Marxist critique and attempts to redeem the viloent state..."에서의 동사 'attempts'를 명사로 잘못 읽은 것이고, '거부한다면'이란 동사가 받는 건 '맑스주의적 비판'(the Marxist critique)까지만이다. 다시 옮기면, "만약에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거부하고 국민지배의 합법성에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국가 폭력을 구제(해명)하고자 시도한다면"쯤이 된다.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란 국가를 계급론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이 경우 '국민의 지배'는 '부르주아의 지배'에 대한 허울이 된다). 그럴 경우 지배계급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국가의 폭력은 자연스레 이해된다. 이미 "국가의 계급적 특징은 국가의 폭력성을 설명해주지만 그 정통성은 설명해주지 못한다."고 해놓지 않았나. 문제는 그 국가의 폭력성을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해명하고자 하는 경우이다. 자유-민주주의 이론이란 국가를 국민지배의 구현체로 보는 관점이다('국민지배'란 '국민의, 국민에 의한 지배'를 가리킨다).
그럴 경우 어떤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가?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에 저항한 민중주권에 의해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에, 주권이 지지하는 법이 그 자체로 정당한지를 의심하게 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people'은 '민중' '인민' 등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국민'이라고 옮기겠다(국역본에서는 '민중'과 '인민'이 두서없이 혼용되고 있다). '국민'이 갖는 부정적인 뉘앙스 때문에 보통은 기피되지만, 일상적인 용어로 가장 친숙하기 때문이다.
역자는 "one faces the problem that, in the case of the use of violence by popular sovereignty against a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에서 'mass demonstration of popular will'을 '대중 민주주의인 민중의 의지'라고 옮겼는데, 'demonstration'을 '민주주의'로 옮기는 것은 '시위성' 번역이다. 이 대목만 다시 옮기면, "국민주권에 의한 국가폭력을 국민의지의 대중적 표현(시위)에 대항하여 사용할 경우에" 정도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it becomes questionable whether the law that the sovereign is upholding is itself legitimate", 곧 "그 주권이 지탱하고 있는 법 자체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시된다."
전체를 다시 옮기면, "만약에 국가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을 거부하고 국민 지배의 합법성에 호소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론을 통해서 국가 폭력을 구제(해명)하고자 시도한다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국민주권에 의한 국가 폭력을 국민의지의 대중적 표현(시위)에 대항하여 사용할 경우에 그 주권이 지탱하고 있는 법의 정당성 자체가 의문시된다는 점이다." 요컨대, '국민주권'(국가폭력)을 '국민의 의지'에 대항하여 사용해도 되는가 하는 것이다. 헌법에 명기된 대로, 국민주권이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말이다.

가령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다수 국민의 뜻이었다(실제적으로는 1/3의 대표성만을 갖는다 하더라도). 그런 의미에서 현 정부는 '국민주권'의 대행자이다. 그런데,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 등 현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다수 국민의 의사 역시 '국민의지'이며 촛불시위는 그 '대중적 표현'이다. 때문에 경찰(국민주권)이 시위대(국민의지)를 향해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로 진압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이론에 따를 때 '국민주권'과 '국민의지'가 충돌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민주적인 주권은 인민에 대해 정당한 구체화로 독점하는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 그것은 인민의 비정체성을 사실상 증명하는 것이다."(When democratic sovereignty confronts the people with all the violence that it monopolizes as the legitimate embodiment of the people, it is in fact attesting to its nonidentity with the people.)
내가 제일 어이없다고 생각한 대목이다(결국 이런 페이퍼까지 쓰게 만든!). 역자는 "When democratic sovereignty confronts the people with all the violence"를 "민주적인 주권은 모든 폭력을 가진 인민과 직면할 때"라는 식으로 옮긴 것인데, 여기서 with가 이끄는 전치사구는 people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동사인 confronts에 걸리는 것이다(confront A with B). 즉, '모든 폭력'은 인민/국민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그들이 '폭도'란 말인가?) '민주적인 주권'을 자임하는 국가가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수단들인가? 가령 극우논객 조갑제가 '청와대에 숨어 있는' 이명박에게 충고한 바에 따르면, "법, 경찰, 검찰, 국정원, 기무사, 국군 등 대통령이 가진 법질서 수호 수단은 엄청나다." 'all the violence'란 시민들이 들고 있는 피켓과 물병이 아니라 경찰이 갖고 있는 방패와 물대포이며 주권의 대행자로서 대통령이 갖고 있는 '법질서 수호 수단'들이다.
그리고 'of the people'은 '인민에 대해'란 뜻이 아니라 'the legitimate embodiment of the people' 전체에 걸리는 것이다. '국민의, 국민에 위한, 국민을 위한'이라고 할 때의 그 '국민의'이다. '국민의사의 합법적 구현' 정도로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에 'nonidentity with the people'를 '인민의 비정체성'으로 옮긴 것도 나는 '국민과의 비동일성'이란 뜻이라고 본다. 그래서 다시 옮기면, "민주적 주권이 국민의사의 합법적 구현으로서 독점하고 있는 모든 폭력을 동원하여 국민과 맞선다면, 그것은 사실상 주권과 국민과의 '비동일성'을 증명해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제 마지막 두 문장이다. "그래서 법의 개념에 대한 의지로 민중 주권과 국가 폭력 사이의 모순을 풀기 위한 시도는 불합리한 순환논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순환의 효과는 전적으로 합법적/비합법적 구별의 가능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다."(Thus the attempt to resolve the contradiction of the popular sovereignty and state violence by recourse to the conception of the law becomes caught in a vicious circle. And the effect of this circularity is to undermine the very possibility of the legal/illegal distinction.)
'불합리한 순환논법'이라고 옮긴 'vicious circle'은 그냥 '악순환'이라고 옮기는 것으로 충분해보인다. 다시 옮기면, "그래서 법 개념에 의지하여 국민주권과 국가폭력 사이의 모순을 해소하려는 시도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 악순환은 결과적으로 합법과 불법 사이의 구별가능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undermine'은 '침식하다'란 뜻이지만 여기서는 그냥 '의문을 제기한다' 정도로 의역한다.) 말하자면, 공권력이라고 해도 그것이 국민의 의지를 대표하고 있지 않다면 그 정당성/합법성 자체를 의문시하게 된다는 것.

이 대목의 미주에서 수잔 벅 모스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여기서의 논의는 1988-1989년 파리에서 자크 데리다가 주최한 세미나에 빚을 지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이번 논문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비록 발터 벤야민과 칼 슈미트의 텍스트에 대한 그의 독해가 나의 견해와 달랐지만, 나는 그의 의견에 도움을 받았다."(324-5쪽) 벤야민과 슈미트에 대한 데리다의 의견은 그의 책 <법의 힘>(문학과지성사, 2004)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리고 덧붙여 ''벤야민의 이름'을 읽기 위하여'(http://blog.aladin.co.kr/mramor/810363) 등의 페이퍼를 참조할 수 있다...
08. 06. 28.
P.S. 유감스럽게도 29일 새벽 촛불문화제가 열린 이후 경찰의 최대 ‘강경진압’이 펼쳐졌다 한다.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현 정부와 국민의지 사이의 모순과 비동일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