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읽을 만한 책'(http://blog.aladin.co.kr/mramor/2117762)에서 수잔 벅 모스의 <꿈의 세계와 파국>(경성대출판부, 2008)을 언급한 바 있다. 독서 계획을 계속 미뤄둘 수만은 없어서 손에 들었는데, 책은 생각만큼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물론 책에 실린 이미지들만 훑어보아도 공부가 되긴 한다). 찾아보니 부산일보에만 리뷰기사가 실린 듯하데, 참고삼아 미리 읽어보는 게 좋겠다(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517/060020080517.1016090128.html). 지나가는 김에 지적하자면 국역본의 표지는 제목과 달리 너무 밋밋하다.

부산일보(08. 05. 17)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책 머리에 쥘 미슐레의 금언이 새겨져 있다. "모든 시대는 다음 시대를 꿈꾼다." 책을 다 훑고 나면 이 금언이 다시 떠오른다. 꿈은 으레 희망의 다른 표현일테다. '꿈의 세계와 파국'(수잔 벅-모스/윤일성·김주영 옮김/경성대출판부/3만원)은 냉전 이후를 어떻게 바라볼까에 대한 대중 통찰서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패배와 자본주의의 승리'로 쉽게 단정짓고 싶어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철저히 거부한다. "20세기에 대한 평가는 승자의 손에 남겨져서는 안된다는 경고에 주목하라.(16쪽 '서문' 중에서)"
그 이유가 이렇다. "대중을 회유하는 '꿈의 세계'에 의해 초래된 위험들이 아니라, 지구적 권력의 현재 시스템에서 대중을 회유할 필요가 있다는 이념조차 유행에 뒤쳐진 것으로 던져버리는 사실에 의해 야기되는 '새로운' 위험들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320쪽 '삶의 시간, 역사적 시간' 중에서)"

책은 제목처럼 꿈을 다룬다. 하지만 일상의 꿈이 아니라 '대중'이라는 집단이 환각적으로 빠져든 공상에 대한 논의다. 물론 대중은 정치적 성향이 결여된 과거의 군중(mob)과 구분된다. 새로운 세상을 거침없이 지향하는 '강력한(?)' 집단이다. 그리고 그 대중의 꿈과 함께 20세기가 시작됐다고 책은 전제한다. 그 꿈의 실현이 대중 유토피아다.
하지만 정치 지형에 따라 선택된 도구는 달랐다. 대중 유토피아의 실천 도구로써 동구는 사회주의를, 서구는 자본주의를 채택했다. 100년의 실험(냉전)이 이뤄졌고, 그 실험이 끝날 무렵 사람들은 "사회주의의 실패,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성급히 결정했다.

그렇다면 '승자'로 분류된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 유토피아를 실현시켰을까. 책은 이에대해 자본주의 사회에 유령처럼 떠도는 몇 개의 단어를 불쑥 들이댄다. '세계 전쟁… 대량 테러… 노동 착취…등…'. 누가 이런 단어에서 유토피아를 떠올릴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도 결국 예정된 목표 지점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반증일테다.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제2세계(사회주의)에서 실패한 것으로 선언됐고, 제1세계(자본주의)에서도 의도적으로 포기됐다.(321쪽)"
책은 이 같은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상징처럼 굳어진 모스크바와 뉴욕을 부지런히 오가며 교차 분석한다. 그런 분석 틀의 상당수가 이미지다. 저자는 "그림과 사진, 영화 포스트 등이 20세기를 통찰하는 도구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사물이 실제로 어떠했는가보다 그 사물들이 과거와 현재 시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유효하다는 것이다.

저자는 또 이 같은 이미지 분석을 통해 소비에트 모더니즘이 서구 모더니즘과 꾸준히 연결돼 있었다는 '예견된' 사실을 증명한다. 소련 중앙노동연구소의 핵심 연구 주제가 자본주의 상징이자 노동을 철저히 기계화한 미국 테일러 작업방식이었다(138쪽)는 것. 할리우드의 상징인 '영화 킹콩' 포스트와 거대한 레닌 동상이 올려진 모스크바 소비에트 궁전 설계안이 경악스러울만큼 닮았다(213쪽)는 것.

이쯤되면 그의 주장을 거부할 명분 찾기가 꽤 힘들어 진다. 저자는 결국 "20세기 사회주의의 붕괴는 자본주의를 너무 충실히 모방했기 때문(16쪽 '서문' 중에서)"이라고 결론내린다. 사회주의를 망친 것은 사회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운용한 주체들의 자본주의화된 계산법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책은 사회주의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을, 자본주의에 대한 '최대한의' 경계를 전제로 했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하나! 우리의 미래는? 20세기 내내 견지해온 대중 유토피아의 꿈은 이제 포기해야 하나? "우리는 기존의 집단 정체성 대신 새로운 정체성을 창조할 필요가 있다.(322쪽)" 꿈은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저자는 20세기 유럽 지성을 대표하는 발터 벤야민(마르크스 문학평론가 겸 철학자) 연구자로 최근 명성을 얻고 있는 미국의 프랑크푸르트학파 여성학자다. 지난 2004년에는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2004년/문학동네)가 국내 소개된 바 있다.(백현충 기자)
08. 06. 28.

P.S. 책이 더디게 읽히는 건 부자연스러운데다가 약간씩 핀트가 안 맞는 번역 때문이다. 가령 1장의 첫문장은 이렇다. "20세기 말이라는 전망에서 제기되는 하나의 역설은 명백한 것처럼 보인다. 대중의 이름으로 통치하기를 요구하는 - 즉, 급진적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 정치체제는 대중의 통치를 넘어서는 권력의 행사가 이루어지는 지대를 합법적으로 구성하는데, 그곳에서 공중의 응시와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20쪽)
이것은 다음 문장을 옮긴 것이다.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nd of the twentieth century, the paradox seems irrefutable that political regimes claiming to rule in the name of the masses - claiming, that is, to be radically democratic - construct, legimately,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veiled from public scrutiny, arbitrary and absolute."(2쪽)
요점을 간추리면, 대중에 의한 지배를 명분으로 내건 급진 민주주의적 정치제체가 정작 대중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권력을 낳았다는 것이고, 돌이켜보건대 이 점이 20세기의 역설이라는 것이다. 한데,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veiled from public scrutiny, arbitrary and absolute."라는 문장 뒷부분에서 국역본은 'arbitrary and absolute'라는 보어가 모두 'veiled from'에 걸리는 것으로 잘못 보았다. 그래서 "그곳에서 공중의 응시와 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베일에 가려지게 되었다"는 어색한 번역이 나오게 된 것('독단적이고 절대적인 것'은 원문에서 찾을 수 없다). 'veiled from public scrutiny'는 삽입구이므로 "a terrain in which the exercise of power is out of control of the masses, arbitrary and absolute." 라고 보는 게 편하겠다. 무소불위의 권력지대에서의 권력 행사는 대중의 통제를 벗어나서 자의적이고 절대적이었다는 것. 이 '권럭지대'를 저자는 'wild zone of power'라고 부른다(국역본은 '권력의 야만지역'이라고 옮겼다).
저자는 그러한 경향이 자유민주주의에서건 사회주의에서건 별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결국 최고 주권의 권력 체제로서 그것들은 반드시 민주주의보다 벌써 훨씬 더 -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당히 나쁘게 된다." 이 또한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다. 원문은 "Either way, as regimes of supreme, sovereign power, they are always, already more than a democracy - and consequently a good deal less."(3쪽) 내가 이해하는 바로는 "어느 쪽이건 간에, 최고 주권의 권력체제로서 두 체제는 모두 이미, 언제나 민주주의를 뛰어넘었고, 결과적으론 민주주의에 훨씬 못 미쳤다." 정도로 옮겨질 수 있다. 둘다 민주주의 그 이상이었고 동시에 그 이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과 소련의 '대중유토피아'를 비교해서 다루고 있는 만큼 러시아의 철학자들의 이름도 책에도 곧잘 등장하여 반갑다. '마마르다쉬빌리'(국역본은 '마마다쉬빌리'라고 표기했다)나 '발레리 포도로가' 같은 이름들이 그렇다. 그리스계 프랑스철학자 '카스토리아디스'의 이름도 오랜만에 볼 수 있는데, 책에는 '카스토리아데스(Castoriades)'라고 오기돼 있다(23쪽). 찾아보니 벅 모스의 원서 자체에 그렇게 잘못 표기돼 있다. 카스토리아디스의 주저인 <사회의 상상적 제도1>(문예출판사, 1994)는 국내에 일부만 번역된 적이 있는데, 마저 다 번역될 수는 없는 것일까, 문득 유감스럽다. 아래는 러시아어본이다.
